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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 6,13-16>
사랑하는 그대여,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대에게 지시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15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복음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8,4-15>
그때에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과 삶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
대선 후보로 나서겠다는 분의 계속되는 망언이 세간의 화제입니다.
“손발 노동? 그것은 이제 인도도 안한다.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다.”
신성한 육체노동을 향한 그의 천박하고 저급한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에게는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이웃 국가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보편 인류애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낸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나자렛의 목공소에서 손과 발을 이용해 열심히 가구를 제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틈나는 대로 육체노동의 고귀함을 강조해왔습니다.
저 역시 요즘 틈만 나면 하는 일이 손과 발을 이용한 육체노동입니다.
청소, 빨래, 건물 관리, 예초, 벌목, 쓰레기 분리수거 등등...
손발 노동을 해보니 육체노동이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인지를 실감합니다.
쓰레기 수거하시는 분들 한 며칠 쉬시면 도시 전체가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농사짓는 분들의 노고는 또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분들이 풍성한 소출을 기대하며, 이른 봄부터 좋은 토양을 조성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시는 모습은 정말이지 눈물겹습니다.
좋은 토양, 백배의 열매, 말은 쉬운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날라리나 사이비 신자들이 신앙생활 안에서 드러내는 전형적인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말뿐이지 실천이나 결실이 없습니다.
반면에 성숙한 그리스도 신앙인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씀과 삶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인지라, 듣고 배우고 익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 속에서 백 퍼센트 적용하며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경고의 말씀 앞에서는 마음이 찔려 반성을 합니다.
때로 부끄러움도 느끼며 자신의 부족함을 가슴 칩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분들은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좋은 토양을 갖춘 분들이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언젠가 주님 대전에서 그간의 노력들을 백배 천배로 보상받으실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든 다시 한번 우리 영혼의 토양을 갈아엎고 보살펴 주님 마음에 드는 좋은 땅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인과 제자의 차이: 믿으려는 사람과 알려는 사람의 차이>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시는데, 군중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해석’해 주십니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단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비유는 항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일종의 ‘법칙’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밭에 보물이 묻혀 있다면 그 밭을 사기 위해 모든 재산을 판다는 것이라든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낼 비유는 어떤 효과를 줄까요?
그런 법칙을 만든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만듭니다.
집단 카드섹션 하는 것을 보면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 법칙을 만든 사람이 있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설’(說)을 믿는 사람과 ‘론’(論)을 믿는 사람, 그리고 ‘법’(法)을 믿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설을 믿는 사람은 어떤 개인의 주장을 믿는 것이고, 론을 믿는 사람은 어떤 집단의 이론을 믿는 것이며, 법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지식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나 ‘법칙’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비유’는 이런 법칙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을 유일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먼저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계심을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이치나 법칙은 더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이미 주님이 계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이치를 통해 ‘왜?’를 묻습니다.
왜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하셨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처럼 그 이치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존재를 드러내시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법칙을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카드섹션을 보며 그 그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감독한 사람의 의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를 통해 그 비유를 만든 이를 ‘알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신 이유는 당신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짧은 애니메이션 단편영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은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2008)입니다.
주인공인 여자는 도시에서 가장 싼 집을 구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집은 도시의 철거 작업으로 거대한 크레인에 의해 공중으로 들려져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철거 회사의 파업으로 철거가 중단되어 결국 그녀는 그 공중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바람만 불어도 위태위태한 공중에 들어 올려진 그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고양이로 변해버린 전 남자친구입니다.
사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도시는 온통 고양이들의 세상입니다.
여자는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사람인 전 남자친구를 위해 매번 파이를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파이를 먹으며 생선을 구워주는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떠납니다.
그러다 또 파이가 먹고 싶으면 다시 찾아옵니다.
여자는 이 관계를 지속하다가 결국 고양이 남자친구에게 잡아먹힌다는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내용일까요?
달동네로 이사 온 한 여인은 도시에 살지만 도시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도시 사람들은 고양이로 보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줄 때는 다가오지만 언제 할퀴고 달아날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입니다.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전 남자친구도 욕망에 사로잡힌 고양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에게 먹히고 맙니다.
자신도 이젠 도시의 고양이들 중 일부가 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과 벗어난 존엄성 있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돈과 성욕, 힘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살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도 그런 고양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매우 공감이 가는 애니메이션이니 한 번 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씨네몽땅’에서 이 영화를 논평했습니다.
제목이 ‘욕망의 도시에서 가장 싼 집에 사는 여자가 겪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감독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결국 이 작품은 감독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박지연 감독이 혼자 서울에 정착한 지 7년이 되었던 2008년에 제작한 애니메이션입니다.
서울에 살게 된 뒤 도시에 관한 특별한 정서를 갖게 된 감독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내면세계를 이미지화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박지연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이 작품을 박지연 감독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사람은 단순히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박지연 감독을 더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듣는 그리스도의 비유는 제가 하는 강론과 같습니다.
이 묵상들을 들으시는 분들은 비유를 먼저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 묵상들은 제가 저에게 하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 묵상이 좋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부님은 참 솔직해서 좋아요.”
저는 제가 솔직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묵상을 보시는 분들은 묵상을 통해 저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것이겠지만 결국 당신 자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것까지 가지 않는다면 아직 군중의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9)
그러나 요한복음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아는 것’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넘어서서 아는 수준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몸뚱이입니다.
몸만큼 머리를 아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어야 그분께서 더 깊은 묵상을 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더 드러내 보이시고 제자들은 하느님을 더 이해하는 만큼 세상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깊은 묵상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여겨 먼저 매사에 그분의 몸이 되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당신에 대해 다 알려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더 가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좋은 땅을 방치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준비된 씨앗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선하신 분께서 당신의 숨, 얼을 불어 넣어주셨으니 당연히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고, 그 땅을 결코 못쓸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 (루카 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이신 그분을 만나려면 사랑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하십니까?
풍성한 열매를 기대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신 말씀입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듣는 데 익숙하다면 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내 말을 적게 하게 될 것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 절망은 없다>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
(시편 92,2-3.5)
아침 성무일도 시편이 은혜롭고 아름답습니다.
전례영성, 순교영성과 더불어 시편영성 역시 가톨릭 교회의 정통적 영성입니다.
어제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고 지난 밤 역시 달빛, 별빛 밝았던 청명한 하늘이었습니다.
새삼 코로나로 인한 마스크가 없다면 얼마나 좋은 가을이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득 예전 24년 전 써놨던 짧은 시가 생각났습니다.
“산처럼
머물러 정주하면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
흡사 지난밤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더불어 떠오른 강론 제목도 반가웠습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절망은 없다-”였습니다.
우리 모두 ‘삶의 농부’입니다.
삶의 농부들인 우리들은 ‘농부 하느님(요한 15,1)’을 닮아 삶의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탓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뿐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더불어 생각난 한자 말마디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님께 맡긴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습니다.
새벽, 멀리 독일에서 보내준 수녀님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카톡 편지에 감동했고 감사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존경하올 프란치스코 신부님! 안녕하세요.
요즈음 대피정을 하면서 신부님의 저서를 영적독서로 삼아 읽고 있지만 이번에는 더욱 동감이 갑니다.
그래서 침묵 시간을 깨고 신부님께 제 마음과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피정중에 읽어가는 글 마디마디가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고 있습니다.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늘 영육으로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 독일의 고즈넉한 수도원에서 기도의 손을 합장하고 토마 수녀 올림
아름다운 글과 말과 환경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살아갈 힘을 줍니다.
광야인생은 낙원인생으로 변모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코이노니아 자매회 카톡방의 덕담들이 마음 훈훈하고 따뜻하게 했습니다.
회원중 한 분이 평화방송에 청중으로 나왔는데 한 회원님이 재치있게 사진에 담은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흐미 부끄럽습니다. 가톨릭 청춘 어게인 추석편입니다.”
“아, 예고편이었네요. 노래를 따라하는 모습이 예뻤어요.”
“부끄럽고 감사합니다.”
“참석자들도 예쁘지만 글라라 자매가 박수치며 미소짓는 모습이 너무 예쁘네요. 글라라 자매님이 제일 멋지고 품위있어 보입니다!”
“신부님,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답니다.
진심어린 미소와 유머. 덕담과 칭찬등 긍정적 말마디가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입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래도(?)’ 라는 섬 이름이 생각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고 권리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루카 8,8ㄴ)
바로 오늘 말씀이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오늘 복음을 바탕으로 강론하기가 무려 만32년이지만 늘 대할 때마다 새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설명’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원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 친히 발설하신 말씀으로 초점은 ‘씨뿌리는 사람’에 있고, 후반부의 비유 설명은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로 초점은 씨가 뿌려지는 ‘토양’에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심중을 그대로 반영했다 싶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씨뿌리는 사람인 예수님 삶의 자세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고 온 사랑으로 최선을 다하는,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向主三德)이 하나로 어울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입니다.
토양에 관계 없이,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좌절이나 절망, 실망, 원망함이 없이 한결같이 말씀을 실행하는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대로 밭을 탓하지 않는 참된 농부의 모습니다.
얼핏보면 실패의 연속인 듯 했지만 결과는 해피엔딩, 성공입니다.
전투에는 패배한 듯 했지만 전쟁에는 승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바 결과의 업적이 아니라 과정의 충실도요, 사실 진인사대천명 삶 자체가 성공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전반부 비유의 결론 같은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탓할 것은 내 마음밭입니다.
문제는, 바꿔야 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길바닥같은 얕고 엷은 천박(淺薄)한 마음이, 돌바닥같은 완고한 마음이, 가시덤불같은 세상 걱정과 탐욕과 쾌락으로 혼란스런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 말씀의 씨앗들이 좋아도 이런 마음밭이라면 별무소득(別無所得)입니다.
타고난 나쁜 밭은 없습니다.
이래서 부단한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바, 항구한 한결같은 인내와 분투의 노력으로 시종일관 최선을 다하는 우보천리(牛步千里) 수행생활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충실하다보면 하느님께서도 도와주시어 언젠가 때가 되면 박토는 옥토로 변할 것입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한자성어로서,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말)이란 중국의 고사성어도 이를 입증합니다.
반대의 경우 역시 진리입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고 사부 베네딕도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옥토(沃土)의 마음밭도 가꾸고 돌보지 않고 방심하여 방치하면 가시덤불 우거진 박토(薄土)로 변하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니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가 적입니다.
이래서 삶은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우리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전사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티모데오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바로 이렇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수행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때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처럼 풍성한 수확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배밭의 가을 수확철이라 더욱 실감나게 와닿는 말씀입니다.
과연 잘 익어가고 있는 내 삶의 신망애(信望愛) 열매들인지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인내의 덕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루카 8,15)
이 모두를 제때에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1티모 6,15-16)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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