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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랑대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항산장순휘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의미와 과제
Anti Japanese Armed Independence Struggle
as its Meaning and Task
장 순 휘*
JANG, Sun Hwi
목 차 | ||
I. 들어가면서 II.의병항쟁의 발생과 전개 III.국외 의병투쟁 | IV.독립군의 무장투쟁 V.광복군의 창설과 군의 정통성 계승 VI.맺으면서 |
들어가면서
우리 민족은 역사를 통하여 실로 기적과 같은 생명력으로 국가를 이어왔으며 지켜왔다. 타민족으로부터 2000여회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불굴의 민족정신으로 역사단절의 위기를 극 복하고 국권을 유지해온 것은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침략세력에 앞서서 민족자위 역량(民族自衛 力量)을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면면히 이어오는 우리 민족정신의 근본이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존 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국민이 자발적으로 궐기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섬으로써 정의군(正 義軍)이나 의용군(義勇軍) 등으로 불린 무장집단을 출현시킨 예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의 민족사에 기록된 의병처럼 대의(大義)에 목숨을 던지는 투철한 자기 희생정신을 전제로 국난을 구하려고 한 예는 흔하지 않다.
본고에서는 항일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그 의의와 가치를 분석하고, 이 를 통하여 향후 미래적 교훈을 도출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의병항쟁의 발생과 전개
의병의 정의
문헌상 의병(義兵)이란 어휘가 가장 먼저 쓰여지고 있는 것은 중국 전국시대의 병가(兵家)인 오기(吳起:B.C 440~381)의 「吳子兵法」 이라고 할 수 있다.오자(吳子)는 “포악한 것을 금(禁)하고, 세상의 어지러움을 구하는 것이 바로 의(義)이며..... 이 의(義)로써 사람을 복종시키는 군대가 의병(義兵)”이라고 규정하였다.우리 역사상 의병에 대한 정의가 내려진 것은, 임진왜란(1592~1598)중에 ‘기의(起義)’ 또는 ‘창의(倡義)’라는 기치 아래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동상황을 기록한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부터이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이란 민군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곧 의(義)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성내어 적대하는 자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의병은 “정부군이 아닌 순수한 백성들 가운데서 나라와 군주를 생각하는 충의 정신으로 자발적으로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집단을 이룬 군대”라고 별칭하기도 한다.
대한제국 의병 운동의 발생과 전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패전을 거듭하는 무능한 관군(官軍)을 대신하여 나선 것이 의병으로서, 왜적을 물리쳐서 국왕과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나라를 돕는다.’는 근왕정신(勤王精神)을 발휘하여 백성이 일어난 것이다.
구한말 의병을 1차 항일 무장투쟁 (을미의병)으로서 1895년 국모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하기 시작한 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로 일어난 2차 항일 의병 투쟁(을사의병)을 거쳐서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사건으로 3차 의병투쟁 (정미의병)이 일어나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어 일어났다.
제1차 의병투쟁 (을미의병)
1876년 한국을 강제로 개항한 일본을 1894년 동학난을 구실로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친일 내각을 세워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를 추구하고, 이를 직시하고 반대하던 명성황후를 1896년 10월 7일 시해(弑害)하는 사건을 일으켰으며, 11월 15일에는 단발령을 내려서 국민적 저항감을 자극하여 의병이 봉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고종의 해산조칙(解散詔勅)를 내렸으나, 전국적인 항일 의병투쟁을 무마하지는 못했다.
당시 일본의 내정간섭을 피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국왕의 환궁과 개혁역신 처단, 개혁입법 철회와 구제도의 부활 및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를 조건으로 내세우며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제2차 의병투쟁 (을사의병)
1904년 러일 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제의 침략은 제 2단계로 추진하였으며, 10년 전의 청․일 전쟁시대와는 달리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이른바 「대한방침(大韓方針)」을 결정하고 있기도 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은 1905년 11월이었으나 제2차 의병투쟁으로 불리는 을사의병은 1905년 8월에 의거하여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항하였으며, 이는 당시 전 민족이 일제침략을 인식하고 이미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의병전쟁은 3년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제3차 의병투쟁 (정미의병)
1908년 정미년의 제3차 의병투쟁은 1,2차 의병투쟁과 성격이 다소 차이가 있는데, 정미의병 투쟁시에는 해산된 대한제국군(정규군)의 상당수가 가담하여 국가간의 전쟁으로 확전(擴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던 1907년 7월의 「헤이그 밀사사건」이 있었고, 이를 빌미로 1907년 7월 19일 고종황제 강제퇴의를 시키고, 동년 12월 순종을 겁박하여 다시 「정미 7조약」을 체결, 대한제국군을 해산시켰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1대대장 박승환 참력의 자결에 봉기를 결심한 대한제국군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봉기에 참여하거나 탈출한 병사들은 대부분 그 지방의 의병부대에 편입되거나, 의병장이 되어서 항일 무장투쟁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식 군대로 무장이 강회된 일본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08년을 고비로 의병이 세력이 약화되고, 1909년 일본이 한일합방을 국권장악을 위해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실시하여 남한의 의병을 무력화시킨 다음, 1910년 마침내 「한일합방」조치인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되면서 의병운동을 「항일 유격전」으로 성격이 바뀌었으며, 의병 주도세력도 유림에서 평민으로 교체되면서 구국항쟁의 독립 투쟁의 주체가 「민중화」되기도 하였다.
독립전쟁의 효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완전히 상실된 1905년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한일 합방이 된 1910년을 독립투쟁의 원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13년 9월에는 국내잔존의병들이 규합하여 거국적인 항쟁체제를 갖추기 위해 조직한 단체가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인데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받았다. 그러나 1914년 4월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무산되었다. 「신민회(新民會)」는 안창호 등 민족지도자가 중심이 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데 일제는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빌미로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해산시킴으로서 1914년 이후에는 국내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조직적인 항일투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의병 토벌 작전
항일 무장투쟁이 전국적으로 계속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전개한 첫 군사작전을 1909년 9월 1일부터 2개월에 걸쳐 호남의병을 대상을 「남한 대토벌작전(南韓 大討伐作戰)」이었다. 이 작전에는 보병 2개 연대와 해군함대가 동원된 정규군의 작전이었다.
작전의 방식은 부대별로 토벌구역을 분담하여 토벌구역에서 반복하여 수색을 실시함으로써 전 지역내 의병의 전열을 혼돈케하는 이른바 ‘교반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그물망 작전으로 무자비한 양민학살과 초토화를 자행하였다.
이 토벌작전은 한일합방을 추진하기 위한 정지작업(整地作業)으로 우리 민족의 저항의지를 무력으로 탄압한 군사작전이었다.
일본군 발표에 의하면 이 작전에서 의병장 103명과 4,183명의 의병을 체포 또는 사살 되었다.
그 후 1910년 11월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일대에 대한 토벌작전을 실시하였고, 동년 9월 하순에는 「황해도 대토벌작전」을 실시하엿다. 「황해도 대토벌작전」이후,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거의 종식되었으나, 일부 의병은 1914년까지 산발적으로 의병투쟁활동을 계속하였다.
국외 의병투쟁
의병투쟁은 국내에서 뿐 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개되었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비록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침략을 당했으나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상황 속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의거하여 나라를 지키기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국외 의병투쟁은 국내 의병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국내에서의 의병투쟁에 영향을 받은 국외 진출 동포사회에서 새로운 군사단체를 조직하고, 무장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하였다. 노령 연해주, 간도, 미주(美洲) 등지에 독립군 단체가 조직되었으며, 연해주의 「13도 창의군」, 간도의 「대한독립단」, 미주의 「국민군단」등의 여러 독립군 단체들이 그 대표적인 부대이다.
노령 연해주 의병
1861년경부터 노령 연해주로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터전을 잡고 살고 있었아. 10만여명 동포들은 일제침략으로 고통을 당하는 나라를 구제 위해 1908년 의병군을 조직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며, 국내의병 활동하다가 일제에 의한 체포를 피하여 노령 연해주로 망명해온 의병장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
독립투사의 상징인 안중근 의사도 당시 망명자의 한 분이었으며, 1907년 최재형의 「동의회(同義會)」와 이범윤의 「창의회(彰義會)」같은 애국단체가 중심이 되어 무장세력화 하였다.
1909년에는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일제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저격 사살하였으며, 1910년 6월 21일에는 유인석을 도총재로 하는 「13도 창의군(倡義軍)」이 조직되어서 국내 진공작전을 결행하였다.
이러한 의병의 무장조직화는 훗날 독립군 조직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191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가 수립되었으며, 뒷날 상해 임시정부수립의 기초가 되었다.
간도의 대한독립단과 신민회(경학사)
1895년 을미의병을 주도했던 유인석은 1908년 약 60명의 문하생들을 대동하고 먼저 노령 연해주로 갔다가 1910년 「13도 창의군(倡義軍)」총재로 활약을 하였다.
노령에서의 의병활동이 탄압을 받게 되자 간도로 이주하였고, 간도지방은 유인석을 따라 이주한 의병장들의 나라를 되찾기 위한 항일 무장독립전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계기로 「대한독립단」이라는 군사단체를 조직하였고, 「대한독립단」은 1920년 12월 「광복군사령부」로 개편되어 간도지방의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또한 간도에서는 국내의 「신민회(新民會)」라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반일단체가 1910년 3월 만주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여 7월에 봉천성(현 심양)에 1911년 4월에 「경학사(經學社)」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경학사는 예하에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부설하여 애국청년을 교육하였고, 후에 1913년 「신흥학교(新興學校)」를 개명하여 무관양성기관의 역할을 했다.
이와같이 간도에서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던 의병들의 활동을 현지에서 확인한 박은식은 그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寒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으로 남겼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잡고, 땔나무를 하며 호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에 조금도 개의하지 않고 있다. 오직 생각하는 바는 조국 뿐 이며, 세속의 명예와 공리 따위는 더러운 물건처럼 여겼다.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홍의와 비분으로 해서 조국을 위한 통곡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광복을 위해 일신을 바치는 결의는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결코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니, 이들이야 말고 어찌 참된 의사(義士)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생략)“
이처럼 일제하의 선각자들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만주의 간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미주의 대한국민회와 국민군단
노령 연해주와 만주 간도에서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고 있을 때, 미주(美洲)지역에서도 교민들이 독립운동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의 수교이후, 1902년 하와이 주에서 이민요청이 있어서 1905년까지 7,226명이 이주하였고, 동시에 멕시코에도 1,300여명의 노동인력이 이주하게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미주 교포사회에서 민족계몽운동이 일어났으며, 1909년 2월에 결성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는 독립운동기관으로 발전시켜 해외 한인의 최고 독립운동기관으로 자리잡고 독립운동을 위한 모금과 외교적 선전전에 주력하였다.
박용만은 14세라는 젊은 나이에 도미 수학(네브라스카 링컨대학)하다가 망국의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의거하여 1914년 하와이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300여명 학도를 양성하고자 했으나 1916년 재정난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멕시코에서는 1910년 11월 「숭문학교(崇武學校)」를 세워 180여명 청년을 사관교육하고 있었으나 멕시코 내전(內戰)으로 1913년 폐교되었다.
이와 같이 미주지역에서도 한인이민사회를 중심으로 지도자들이 나와서 독립운동을 위한 헌신적인 인재양성 교육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군사교육 기관의 해체로 인한 사관양성을 실패했지만 한인사회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립자금의 제공처로서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헌신하였고, 일제침략의 불법성과 만행을 알리는 국제외교 선진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
독립군의 태동과 투쟁활동
우리 민족은 일제침략에 맞서서 대한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서 민족적 의지가 의병봉기(義兵蜂起)로 표출되었고, 1895년부터 1910년까지 만 15년간 거족적 저항을 하였으나 일제의 침략을 막을 수가 없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는 항일투쟁이 유격전 양상의 의병항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된 특징이 있었다.
의병항쟁을 근왕정신(勤王精神)에 투철한 유생들과 대한제국출신 의병장들에 의하여 전개되었으나 일본군에 비하여 절대적인 열세로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또한 국권몰락의 시대상황을 인식한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의병항쟁의 무모함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항일 투쟁역량을 육성해야 한다는 온건한 투쟁노선을 취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론분열과 국력분산을 초래하게 되었다.
1909년 일본군에 의해 실시한 소위 “남한 대토벌작전(南韓 大討伐作戰)”에 의해 국내 의병세력이 거의 소멸하자,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신민회(新民會) 간부들은 소극적인 계몽주의적 대일투쟁 방법에서 탈피하고 적극적인 무력항쟁만이 구국의 일이라고 인식하여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을 감행키로 항일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변경하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실천계획이 바로 「독립군 기지 건설계획」으로서, 「첫째, 한반도와 가까운 만주지역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둘째 국내에서 이주사업(移住事業)을 전개항 만주지역에서 병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며, 셋째 국내에서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여 재정적인 뒷받침을 한다.」라는 항일 무장투쟁노선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독립전쟁론”이라는 「항일 무장투쟁이론」에 의해서 항일 전쟁준비를 전개하게 되었고, 독립전쟁이 가능하게 된 것은 정치적인 망명자의 수가 계속적으로 증가되고 또한 일제의 식민지 무단통치와 토지 및 일제곡물수탈로 인한 농민의 경제적 이민이 많아져서 재만, 재러 한인사회가 더욱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1919년 3.1운동을 통하여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된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제로 부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항일 무장독립투쟁이 시대의 지상과제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탄생
만주의 독립군은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수립」과 함께 출현한 것이었다. 1910년 국내의 의병세력이 소멸된 후,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키워오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서 양성되었다.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결성된 단체들은 1919년 후반부터 무장을 하였고,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무력으로 일제를 격멸해야 한다는 「독립전쟁론」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간도지방에서는 20만명 내외의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는 1909년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였고, 용정촌에서는 이상설, 이동력 등 애국계몽운동가들이 1906년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가장 먼저 시도된 곳이었다. 서선서숙은 1908년에 폐숙된 이후에 명동학교로 발전되었다. 「간민자치회」는 「간민교육회」로 명칭을 바꾸고 합법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한인사회를 조직화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계몽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진 단체로서 후에 「간민회」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였다.
서간도지방에서는 유인석 의병장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도피한 의병들이 모여들어서 무장독립투쟁의 역량을 양성하고자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1910년에는 신민회가 주동한 전국적인 「간도 대이주계획」의 추진과 함께 이회영, 이시영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망명하여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개소하였다.신흥강습소는 1913년 「신흥학교」로 개칭하여 무관양성학교의 역할을 하였다.
1912년에는 서간도에 망명이주민이 급증함에 따라 경학사를 바탕으로 「부민단(扶民団)」을 조직했다. 「부민단」은 표면상으로는 한인자치단체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실제로는 「신흥강습소」를 통해 독립전쟁을 구현할 문무인재의 양성과 민족자각 교육을 중시하였다.
이와같이 「부민단」이 「신흥학교」를 통해 양성한 인재들은 1914년에 「백서농장」이라는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연해주 지방에는 1910년 「성명회」를 조직했으며, 이를 계승한 「권업회」는 연해주(블라디보스톡) 지방에 있었다. 「권업회」는 연해주 지방의 여러 한인계열의 의병단체를 통합하여 하나의 결사로 만들어진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권업회」는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전쟁론」을 실천할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의 건립을 주도하였고, 「대한광복군정부」는 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한 최초의 망명정부였다.
그러나 1914년 9월에 러시아의 전시체제 전환에 따른 탄압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조기 해체되었다.
이렇듯이 재외 한인사회 구국을 위한 무장 독립투쟁 활동은 점차 가시화되고 현실화 되었으며 독립군 부대의 조직으로 항일 무장독립투쟁 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독립군 부대의 무장투쟁활동
북간도의 「간민회」와 서간도의 「부민단」도 재기하여 「대한국민회」와 「한족회」로 확대 개편되었고, 무장 독립군의 편성과 훈련을 하여 전투력을 배양하였다.
그 외 단체로서 「북로군정서」, 홍범도가 거느리던 「대한독립군」, 「대한 정의군정사」등 수십여개의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항일 무장독립투쟁에 참가하였다.
물론 전투간에는 서로 연합작전계획을 수립하고, 합동작전을 수행하여 전승을 거두기도 했으나 지휘체계를 단일화 할 수 있는 「독립군 지휘사령부」가 수립되어 각 단체들의 전투력을 극대화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명령과 지시에 따르는 독립군의 지휘체계를 확립했으나 통제 효율성은 미흡하였다.
서간도의 「한족회」에서는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항일 독립군 단체로서 중요한 사항을 상호 협정하였다.
국내의 모든 독립운동을 통제, 지도할 임시정부의 위치는 국제외교상 상해가 적합하므로 그 곳에 임시정부를 두도록 하되,
무장독립군의 국내진입 활동을 만주가 적합하므로 독립군을 지휘할 군정부는 만주에 건립하는 것을 허(許)할 것.
이 타협안은 1919연 11월 17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원칙에 의하여 서간도 「한족회」가 건립한 「군정부」는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임시정부 휘하의 무장독립군부대로서 그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범석 장군은 「서로군정서」의 신흥학교가 개편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에 사령관 김좌진장군이 교관으로 초청하여 활동한 바 있으며,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2일 3 일동안 600여명에 불과한 독립군 사관생도대를 진두지휘하여 청산리 산악형지에 매복하여 일본정규군 병력 3,000여명을 기습격멸하는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연해주에는 1917년 러시아에 「볼쉐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그 뒤를 이어 연합국의 무력간섭이 있게되자 1918년 1월 일본군은 ‘자국민의 보호’를 명분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하고,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무력침략에 대한 러시아(볼쉐비키)는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한인을 포섭하여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창립하도록 지원한 후 재노령 한인사회와 함께 항일 연합전쟁을 실시하였다. 「한인사회당」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 단체의 조직이었다.
이와 같이 연해주와 서․북간도에 있는 무장독립군이 1919년 3.1운동 이후의 “독립전쟁론”은 실질적인 항일 무장단체의 조직으로 실현되었고, 당시 러시아와 중국정부의 비공식적인 항일 무력단체로 인정을 받고 활동할 수 있었다.
독립군은 일제 정규군을 대항하여 「유격전」방식의 습격작전을 실시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제 군,경을 공격하였다. 독립군 부대들은 타국영토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한다는 것이 곧 망국의 서러움이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러한 국내진공작전의 목표는 일제를 조국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서 무장투쟁노선의 실천이었다.
1919년 8월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의 혜산진에 대한 공격점령이 알려지면서 각종 독립군 부대들이 다방면에서 감행되었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1920년 3월 1일부터 6월까지 유격전이 32회나 전개되었고, 일제 군경 주둔지 파괴한 것이 34개소 였다고 공식 확인 발표했다. (1920년 11월 12일 군무부 발표의 “북간도 재한 아독립군의 전투상보”)
이러한 독립군 부대들의 유격전에 패배한 일본군은 1920년 초부터 불법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영토인 간도에까지 들어가서 독립군을 추격하는 독립군 토벌작전을 전개하였고,이에 따라 독립군과의 무력 충돌을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알려진 유명한 항일 무장투쟁전투로는 1920년 6월7일 대한북로독군부(홍범도)에 의해 승리한 「봉오동전투」가 있으며,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김좌진 장군의 지휘하에 대한독립군(300명), 국민회군(250명) 등 10여개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2,100명을 부상시킨 「청산리전투」가 있었다.
「청산리대첩」은 1919년 3.1운동에서 분출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와 자립.자존의 역량을 무장투쟁으로 한 차원 발전시키고, 국내외에 과시함으로써 향후 민족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특히 한민족의 항일 무장독립투쟁 역량을 뿌리뽑겠다고 북간도 지역에 불업으로 침입한 일본군 대부대 포위작전을 파탄시켜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 역량을 보위하고, 추후 각종 민족운동의 고양에 크게 공헌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청산리대첩」은 무장도 보잘 것 없는 비정규군인 독립군이 최신 장비로 무장한 일본정규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전투로서 일본군은 1920년 11월 20일을 기해 간도지역에서 독립군부대를 공격하는 제1단계 작전을 끝내고, 이듬해 4월 경까지 각 지역에 잠적한 독립군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제2단계 작전을 하면서 독립군과 무관한 양민 350여 명을 학살하고, 학교와 교회 등 1,300채를 방화하는 악행을 저질러서 간도지역을 근거로한 독립운동에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소위 ‘토벌작전’ 중에 저지른 학살. 폭행. 방화. 강간 등 각종 만행은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과 현지의 구미 선교사들, 심지어 일본내에서도 문제가 되어 반일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중국 각지에서 반일운동이 일어났고, 중국정부에서도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결국 일본군은 출병의 목표로 삼았던 독립군의 완전토벌이 실패로 마치고 불명예스럽게 철수하면서 끝이 났다.
만주사변 전후의 항일 무장 투쟁
1931년 만주사변 이전인 1920년대 후반기의 무장투쟁은 초기보다 소규모로 전개되었는데, 1920년대 중반에 중국 동부지방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남만주에 「정의부」가, 압록강 대안해서는 「참의부」가, 북만주에서는 「신민부」가 항일 세력을 통합하여 3부의 정립시대(鼎立時代)를 열어갔다.
「정의부」는 1924년 11월에 자치단체로 결성되었으며, 군사위원장 이청천 휘하에 8개 중대병력이 1925년 3월 19일 평북 초산과 벽동군의 일경을 공격한 바 있었다.
「참의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로 통합되어 「육군 주만참의부」로서 군사와 민정을 통합하는 조직이었고, 5개 중대의 정예 독립군을 편제하고 있었다.
「신민부」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북만주의 「대한군정서」, 「대한 독립군단」등 10개 단체가 모여 1925년 3월에 조직을 통합하였다.
1929년 3부 조직은 다시 개편되어 2부로 재편성 되었는데,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였으며, 그 산하에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 능력을 보유하였다.
「혁신회의」는 1929년 5월 해체되었으나 1930년 「한국독립단(韓國獨立団)」의 모체가 되어 재편되었다. 「한국독립단」은 예하에 「한국독립군」을 설치하여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한국독립군」은 1931년 만주사변 발생시에 「한․중 연합군」을 편성하여 1932년 8월부터 본격적인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군」총사령관 양세붕은 한․중 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1932년 3월부터 7월까지의 「영릉가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조선혁명군」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1936년에 막을 내렸고, 일부가 1938년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1931년 만주사변 전후의 항일 무장독립투쟁은 중국과의 항일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공세적인 유격전 전술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승을 이룩하는 등 「반만 항일전쟁」에 참가하였으며, 1932년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 비정규전 투쟁도 병행하여 전개하면서 항일 무장독립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광복군의 창설과 국군의 정통성 계승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중 양국의 공동의 적을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중 연합작전을 위한 광복군의 창설문제를 긴급히 검토하며 추진하게 되었다.
1938년 중경으로 이주한 임시정부는 1940년에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을 「한국독립당」으로 합당하고, 광복군 창설을 착수하여 드디어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당시 중국의 대일외교 정책은 「완화정책(緩和政策)」으로서 일제의 대륙침략 책략을 경시하며, 부분적이며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내에서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하는 「독립군」의 정규군화(正規軍化)를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복군의 창설은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에 “제1항 한국광복군은 아(중)국의 항일작전기관인 본회에 직예하여 참모총장이 장악 운용함”으로 명시함으로써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군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라는 굴욕적인 군사협정 하에 창설되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정규군을 보유했다는 역사적인 의미와 보유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성이 있었다.
임시정부가 중국군의 요구를 협정체결에 동의함으로써 재정적, 군사적인 지원을 받아 항일투쟁에 사용한 정규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자체적으로 “한국광복군 공약”과 “한국광복군 서약”을 만들어 1941년 12월 28일 공표함으로써 주권국가의 군대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그 후 「한국광복군행동준승(韓國光復軍行動準繩 9개항」은 광복군이 독자적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으므로 독립투쟁을 위한 광복군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폐기해야 할 불평등협정으로서 1942년 폐기를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고, 1945년 4월 「관어 한국광복군 중한양방 상정판법(關於 韓國光復軍 中韓兩方 商定判法」)을 제시하여 광복군의 독립성을 중국정부로부터 보장하는 계기가 되어 국내진공작전 등 독자적인 작전이 가능토록 하였으나, 이 신협정 체결에 3년여 시간이 지체되어 광복군의 전투력을 양성하는 데는 시간적으로 부족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일 전쟁 수행중이라고 하더라도 자국내에 타국의 강력한 무장군대의 존재를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고려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초정규군으로서 역사적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군에 계승되었다고 인정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성(법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법통의 계승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이하 생략)”에 명확히 명시하여 계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창군과정에서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초대 국방장관), 최용덕(국방차관) 등 수많은 인재들이 창군 초기국군의 주요직책을 수행했다는 사실도 증명이 된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래로 우리군의 정통성은 「의병군」에서 「독립군」으로 다시 「광복군」을 거쳐 오늘날의 「국군」이 된 것이다.
맺으면서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의미
우리 민족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국권(國權)을 상실한 이후, 3차에 걸친 의병전쟁을 일으켜 피의 투쟁을 시작하였고, 3.1운동을 거치면서 비폭력 독립요구가 무의미하다는 ‘민족적 자각’을 거쳐 항일 무장독립투쟁에 의한 일제 축출만이 조국을 다시 찾고, 국권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한 민족적 자각과 신념이 수많은 독립군을 태동하게 하였고, 자국영토내도 아닌 타국의 영토와 국경을 넘나들면서 가장 열악한 생존 환경 속에서 오로지 구국의 신념으로 항일 무장독립투쟁에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후에 「독립전쟁론」이라는 항일투쟁노선에 입각하여 전 독립군부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주에서 무력을 양성한 후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 침략세력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군 기지건설계획」에 의한 만주지역이 1913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 전쟁 등 일본의 대륙침략 전쟁기도에 저항이 불가했던 점은 당시 독립군의 한계를 노출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불굴의 투쟁정신으로 항일 무장독립투쟁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1940년 이후에는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기지를 중국본토로 옮겨서 「임시정부」예하의 「광복군」이라는 정규군을 창설하여 간단없는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지속한 점을 당시 독립군들이 숭고한 조국애의 의미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비록 임시정부하의 정규군으로서 국내로 진격하여 일제침략군을 격멸하지 못한 한(恨)이 서린 채 조국 해방을 맞았으나, 본고에서 고찰한 바대로 우리의 독립은 무상(無償)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끊임없는 항일 무장독립투쟁 속에서 쟁취한 것이며, 단지 연합군의 세계 제2차대전의 승리가 「광복의 날」을 빨리 당겼을 뿐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항일 무장독립투쟁은 수많은 독립군의 희생과 동포사회의 헌신분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민족사의 가장 고귀한 대외투쟁이었다.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독립투쟁은 우리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의 상징이며, 이를 바탕으로 중국측과의 연대투쟁 등이 가능했으며, 8.15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할 수 있었던 논리적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함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항일 무장독립투쟁 조차없이 해방을 요구했다면 세계열강들은 우리의 독립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오늘의 과제
현재 학계에서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한 저항, 즉 독립운동 혹은 민족해방운동사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활발하게 진척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본과 일본인, 그들 조직의 침략배경과 그 과정, 그리고 식민지 통치나 독립운동세력의 진상에 대한 연구는 부진한 실정이다. 특히 1920년대 초 일본군의 ‘간도학살’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수준이다. 일제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와 함께 일제 지배정책 입안자나 실무자의 정책 수행목적과 그 실태, 그들의 지배논리, 식민지나 지배권 안의 민중이나 저항세력에 대한 탄압상 등의 진상규명이 시급하다.
나아가서 동학군, 의병, 3.1운동, 연해주 4월 참변 및 항일 독립군과 간도참변 희생자, 일본의 관동대지진 희생자, 강제징용과 징병, 위안부 등 일제에 의하여 강제 동원되어 희생된 우리 민족에 대한 체계적인 진상규명과 연구가 긴요하다.
최근 심각해지고 있는 북한의 핵무장으로 인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및 동북아 지역에 안정이 위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중.일 동북아시아의 3국의 우호협력분위기는 동북아 안정에 절대적인 요소로서 북한에 대한 전쟁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학작용이다.
특히 일본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아시아 중시론’과 ‘동아시아 공동체론’을 표방하면서 한국과 중국과의 실질적인 상호연대와 평화공존의 필요성을 외교정책의 우선 방향으로 추진하고있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면 일본의 외교정책은 진정성면에서 그 설득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변화가 일본의 동북아시아에서의 헤게모니를 좌우하는 관건이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미래적 교훈
항일 독립투쟁 기간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로부터 1945년 일제의 패망까지 40여년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자주 독립주권국가 회복을 위해 투쟁한 전반적인 평가는 과거사적 교훈과 더불어 미래적 교훈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첫째로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계승된 항일 무장독립투쟁은 민족적 자존의 위대한 역사 창조였다.우리민족은 국난이나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극복하며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다. 비록 19세기말 일제의 침략에 한일합방의 치욕적인 과거사를 가지게 되었으나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나라의 패망에 대하여 의분강개하고, 생명을 초개와 같이 받칠 수 있는 국민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민족적 자존의식의 발로로서 우리 민족의 오늘이 있게 한 저력이었다.
근대사에서 구한말의 역사를 단세포적으로 일본에 의한 식민지시대로만 교육되는 경향이 있으나 그 시대를 고찰해보면 조국의 패망을 막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항일 무장독립투쟁에 참여했으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끝까지 항일투쟁을 했던 유명무명의 애국선열의 헌신적 조국애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의 정신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어 낸 것이다.
둘째로 우리민족의 해방은 외세에 의한 무상획득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국내외적으로 항일 독립투쟁 역량으로 스스로 쟁취한 것이다.
단순히 생각할 때는 조국 광복이 어느날 갑자기 미국에 의해서 주어진 것 같지만 1895년 을미의병으로 시작한 의병운동과 1905년 을사의병 및 1907년 정미의병과 1910년 한일 합방이후의 간도.연해주 지방에서의 독립군 무장투쟁과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의 광복군 투쟁등의 항일무장투쟁 뿐만 아니라 1919년 임시정부의 국제 외교적 노력과 미국 교포사회에서의 미국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의 성공적 결실인 것이다.
1940년 태평양 전쟁시에도 소규모지만 연합군의 대일 전선에 참전하였고, 한․중 우호를 바탕으로 한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독립지지 획득과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에 대한 우리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국제사회에 감동을 주었고 「대한민국 독립의 당위성」을 인정하게 한 것이다.
셋째로 항일독립투쟁의 역사적 교훈과 가치를 민족교육으로 승화시켜 투철한 조국애․민족애의 근본으로 면면히 계승해야 한다.
항일 독립투쟁은 근대사에 있어서 민족생존의 최대의 위기였음을 알고 이와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는 일이 없도록 전국민을 교육시켜 조국의 소중함과 자유 민주주의의 절대적 가치를 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남북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룬 것이 아니다. 완전한 독립국가는 통일된 자유민주국가를 만들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완성은 바로 평화적 조국통일에 있음을 자각하고, 그 날을 위해 조국과 민족을 위한 헌신과 봉사를 다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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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外交史辭典」
「조선통치사료」
Abstract
In 1900's Koreans have started the bloody struggle with Japanense Empire through three major combat by righteous army after they lost their sovereignty. As they went through March 1st demonstration, they became aware that nonviolent resistance was useless and the only way to restore sovereignty and independence was dismissal of the Japanese Empire by armed struggle.
Under these consciousness and beliefs, numerous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were established and a lot of patriots have devoted their lives to anti-Japanese struggle under serious circumstances not only in Korean Peninsula but also all around the world.
After Korea was annexed to Japanese Empire in 1910. the ultimate goal of the whole army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became the restoration of nation's sovereignty by expelling Japanese troops from Korean Peninsula. It was based on anti-Japanese struggle line named 'Controversy of the War of Independence'.
Even though Manchuria territory could not perfectly be used as impediment against a series of Japanese aggressions and therefore it revealed the limitations of independence army, anti-Japanese armed struggle was continued with indomitable combative spirit.
The establishment of the regular army named 「Independence Army」 under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fter the base of anti-Japanese be independence struggle has been moved to Chinạ in 1940 can highly evaluated as the proof of patriotism.
Although the independence of Korea was gained without the regular army's substantial effort, it was not simply given at no cost but achieved by the nations' ceaseless anti-Japanese struggles. The allied forces only made the day of independence a bit earlier. Key word Japanese Empire, Sovereignty, Independence, Patriotism, Anti-Japanese Strug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