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신> '배제의 시'와 '포괄의 시'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우리가 무엇을 만들 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재료를 놓고 그것을 깎아내며 만드는 방법과 이와는 달리 여러 재료들을 붙여가며 만드는 방법입니다. 앞의 것을 '배제'의 방식, 뒤의 것을 '포괄'의 방식이라고 부릅시다. 큰 얼음덩이를 쪼아서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는 얼음 조각(彫刻)은 배제의 방식이고 눈덩이들을 모아 붙여가며 눈사람을 만드는 것은 포괄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메다 님, 시를 만드는 행위도 앞의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다 제거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남겨두는 배제의 방법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끌어 모아 종합하는 포괄의 방법입니다. 다음의 글을 읽으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배제(排除)의 시와 포괄(包括)의 시
리차즈(I.A.Richards)는 시의 구조적 특성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곧 배제의 시(exclusive poetry)와 포괄의 시(inclusive poetry)의 이론이다. 전자는시를 만들고 있는 이미지[체험 내용]들이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구조다. 따라서 조화와 통일에 기여할 수 없는 이미지들은 제외된다. 이지적인 고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후자는모순 충돌을 일으키는 복잡다단한 체험들을 포괄 수용하는 구조다. 용광로에 잡다한 광석들을 넣고 쇠붙이를 녹이는 행위와 유사하다. 논리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낭만주의적 성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삭제의 원리가 지배하는 조각(彫刻)에 비유된다면 후자는 종합의 원리가 지배하는 소조(塑造)에 비유될 수 있다. 전자는 구심적(求心的)인 폐쇄성을 지닌 데 반하여 후자는 원심적(遠心的)인 개방성에 기운다. 리차즈는 전자보다는 후자를 바람직한 시의 구조로 생각했다. 현대인의 잡다한 체험을 수용하기에 보다 적절한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때문이리라.
실제의 작품을 놓고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선도산(仙桃山) 수정(水晶) 그늘 어려 보라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 박목월 / 모란여정(牧丹餘情)
4연 6행으로 되어 있지만 전체가 16음보에 지나지 않는 네 마디의 짧은 시다. 이 작품의 의미 구조는 간결하다. 늦은 봄 어느 석양, 강을 건너 선도산 그늘 밑으로 사라져 가는 한 나그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선택된 이미지[대상]들이 단순 간결하다. 만일 실제의 정경을 영상에 담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물들이 화면에 담길 것인가. 강과 산 주변에 있는 논밭이며 나무며 물새며 바위며…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물들이 화면을 메울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이런 잡다한 것들이 다 지워지고 없다. 하나의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청모시 옷고름'이라는 단순한 환유로 대신한다. 성별, 신장, 연령, 얼굴 생김새 등 그 인물의 특징에 관한 기술이 다 생략되고 없다. 계절적인 배경을 제시하면서도 봄의 많은 속성 가운데서 '모란꽃 이우는' 하나만으로 암시하고 만다. 이 작품을 엮고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는 모란꽃, 해으름, 선도산, 청모시 이 네 가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요체가 되는 것은 '청모시'다.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나그네(청모시)는 고결한 선비다. 그 고결함을 시인은 무명이나 명주가 아닌 모시에 담았다. 특히 모시에 '청'의 색채를 가함으로써 그 순결도를 높이고 있다. 그 모시옷 가운데서도 가장 하찮은 부분인 옷고름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다 지웠다. 그러나 그 옷고름 속에 나그네의 품위와 유연한 동작까지를 담고 있지 않은가. 도포자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유유히 걷고 있는 한 선비의 고고한 자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선비를 상실감에 젖은 비극적인 존재로 그리고자 한다. 그래서 낙화(落花)와 낙조(落照)라는 소멸의 시간을 배경으로 설정한 것이다. 석양을 등지고 떠나가는 나그네―그는 어쩌면 시대가 거부하는 에트랑제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를 불행한 방랑자로 방치하지 않고 시련을 거쳐서 이상향에 이르도록 한다. 강[시련]을 건너 仙桃山[이상향]에 접하는 구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시인은 주인공[청모시]이 자연[수정그늘]과의 합일 속에서 화평[보라빛]에 이르는 정황을 색채로 암시해 보이고 있다. 몇 개의 단순한 이미지들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구조지만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른다.
또 다음의 작품을 보도록 하자.
서녂으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오갈피 상나무와 개가죽 방구와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
노루야 암노루야 홰냥노루야 늬발톱에 상채기가 퉁숫소리와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저녂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한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 - 서정주 / 서풍부西風賦
서풍 속에 들어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식물[오갈피, 향나무]과 북[방구]과 춤[상모] 그리고 동물[화냥 노루]과 통소, 맹인과 관음, 정신병과 징역 시간 등 서로 모순 충돌하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선과 악, 본능과 억제… 이러한 다양하고 잡다한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여 많은 의미망들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망들은 어떤 조화나 통일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의도하고 있는 구조는 단순이 아니라 혼잡이며, 균제(均齊)가 아니라 무질서다. '서풍'은 외적인 어떤 정황이라기보다는 시인의 내면에서 회오리치는 '바람'인 것처럼 보인다. 본능적인 욕망(id)과 의지(ego)의 갈등 속에 사로잡혀 있는 심리적 혼란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 작품이 율격적인 가락에 실리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난삽했겠는가.
포괄의 시는 복잡다단한 체험 내용을 보다 리얼하게 나타낼 수 있을 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의 기능은 결코 세계의 반영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반영의 기능만을 문제삼는다면 시는 언제나 영상예술이나 산문문학의 아류에 머물고 말 것이 아닌가. 시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보고문이 아니다. 꿈 곧 소망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현실이 시인의 이상향이 아닌 한, 시는 늘 현실과는 다르게 마련이다.
나는 내 꿈의 집을 짓는 데 '삭제(削除)의 보도(寶刀'를 즐겨 사용한다.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보다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리적으로도 나는 불리는 것보다는 줄이는 쪽이 편하다. 그래서 나는 내 시의 본적을 배제의 편에 둔다. ―『엄살의 시학』(태학사) pp.121-124
로메다 님, 나는 앞의 글에서 포괄의 시를 지향하는 리차즈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고 배제의 시를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체질과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삶도 그렇지 않던가요? 어떤 승려는 소유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족도 가구도 다 버리고 한 벌의 승복과 바리만으로도 평온하게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수집가는 수만 가지를 모아놓고도 만족치 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그 성취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로메다 님, 개성에 따라 한 시인의 시작(詩作) 태도가 '배제'와 '포괄' 중,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질 수는 있겠지만 어느 하나에 고정될 필요는 없습니다. 다루고자 하는 소재의 성격에 따라, 또한 쓰고자 하는 시의 성향에 따라 효율적인 방법이 한결같을 수 없을 테니까요. 로메다 님, 두 가지 방법을 익히면서 어느 쪽이 체질에 더 맞는가 판단해 보십시오. 또한 특정한 소재를 놓고 두 방법을 함께 시험해 보면서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가도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건필을 빕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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