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오래전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미국 50개 주를 줄줄 다 외우는 것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게 미국은 세계 지도에서나 본 먼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주권적인 안배아래 그 지도 속 나라에 와 산 지도 30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았지만, 캘리포니아를 벗어나 방문해 본 타주는 다섯 손가락 내이고, 여전히 다른 곳들은 지금도 미지의 세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도 이러한 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알아가는 것은 더 점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경륜(딤전 1:4)을 알게 되어 하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며,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지를 큰 틀에서 알게 된 것은 큰 긍휼입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하고 또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이 접점을 갖게 되는 사건인 거듭남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입니다
(the spirit is life because of righteousness)(롬 8:10).
저는 주일학교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나님과 성경을 말하는 단체의 일원으로 살아왔습니다. 현재 몸 담고 있는 곳 이전에는 본의 아니게 한 선교 단체를 포함한 여러 교단들을 거치면서 신앙생활 했습니다. 한때는 청년부 전도부장을 잠시 맡아 남산 팔각정에 올라가 전도지를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은 그 후인 2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 무렵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믿고, 실행한 후로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과 별도로, 거듭남이 선명하게 이해된 것은 (육체로 난 것은 육체이고) “그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씀과 사람의 영은 거듭날 때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이 되었다는 말씀을 통해서입니다(요 3:6 하, 고전 6:17).
즉 거듭남은 위 본문처럼 (부활 후 영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주하시면서, 우리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자아를 부인할 때마다 우리의 영에서 혼(마음)으로, 마침내 (영적으로) 죽은 우리 몸까지 그분의 거처를 확대해 가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엡 3:17).
그런데 제가 이번 묵상에서 특히 주목했던 것은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이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1) 여기의 ‘영’은 사람의 영인가 아니면 성령인가? 2) 왜 생명이라는 단어에 (신성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2222)를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인가 성령인가?: 이 부분은 헬라어만으로는 알 수 없고, 영어로 번역될 때 ‘스피릿’의 첫 글자 S가 대문자이면 성령, 소문자이면 사람의 영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영어 번역도 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한글 성경들은 대부분 사람의 영을 염두에 두고 번역했습니다. 여러 관련 자료들을 검토해 본 결과, 총신대 교목실장을 역임한 분이 쓴 “로마서 8장 10절의 “영”(pneu'ma)에 대한 해석”이라는 소논문이 여기서의 영은 사람의 영이고, 성령이 아님을 가장 체계적으로 잘 논증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 본문이 몸과 영을 대조하여 말하고, 2) 성령이 생명임에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은데, 본문은 그리스도의 내주 혹은 의를 조건 삼아 말했기에, 여기의 영은 사람의 영임을 쉽게 분별했습니다. 아래 회복역 각주도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은) 타락한 사람의 몸과 대조되는 거듭난 사람의 영이다. 이 영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 언급된 영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조건에서만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생명이 되시는 데는 어떤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후략)(각주 5).
사람의 영이 ‘조에’가 됨(사실): 헬라어에서 ‘생명’을 나타내는 단어에는 ‘조에‘, ’프시케‘, ‘비오스‘ 세 개가 있습니다. 각각 영의 생명, 혼의 생명, 몸의 생명을 가리킵니다(요일 5:20, 막 10:45, 딤전 2:2). 따라서 위 본문이 ‘영은 조에이다’(the spirit is life)라고 한 것은 우리가 체험한 거듭남은 1)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영이 살아난 것, 2) 우리 영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게 된 것, 3) 그러한 주님과 우리의 영이 한 영으로 연합된 것, 4) 더 나아가 사람의 영이 ‘조에’ 즉 신성한 생명이 된 것을 의미함을 말해 줍니다.
일본군 중위 히로 오노다는 일본이 패망한 사실을 믿지 않고, 1944년 말부터 1974년까지 30년간 필리핀의 작은 루방섬 정글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그는 일본 군대가 돌아올 때까지 이 기간 동안 나름의 비밀 임무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저도 솔직히 우리의 영이 ‘조에’가 되었다는 말은 약 30년 전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뭔가 안에서 거부감이 있어 믿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두고두고 거듭날 때 저의 영이 ‘조에’가 된 이 엄청난 사실을 깊이 음미하며 살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성경을 읽을것인가 깨달을 것인가? 해석이라는 것은 깨닫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의 스토리를 알아야합니다. 소설이나 영화의 스토리를 모르면 감독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를 모르는 것처럼 성경의 스토리를 아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 외에는 아무도 스토리조차 모릅니다
거듭남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바울 거듭난 사람은 스토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김바울 전도서 3 : 17~21<현대인성경>
의인도 악인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짐승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을 시험하신다. 사람에게 닥치는 운명이나
짐승에게 닥치는 운명이 같다.. 하나가 죽듯이 다른 하나도 죽는다.. 둘 다 숨쉬지 않고는 못 사니,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보다 나을것이 무엇이냐. 둘다 같은 곳으로 간다. 모두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니고데모Lee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해주신다고 했으니 거듭난 사람은 스토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Lee 거듭난 후에
영적 생명이 자랄 필요는 없을까요?
=>거듭남은 위 본문처럼 (부활 후 영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거듭남은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면 우리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
거듭은 다시 . 남은 태어남.
거듭남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 말함.
거듭 거듭 말하지만. => 다시 다시 말하지만.
거듭이라는 단어 뜻도 모르고 있으니.
육신으로 태어나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
모든 사람은 한번은 육신으로 태어나고
육신으로 태어난 사람이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
그래서 영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영적이 사람이 되는 것임.
나그네씨의 주장대로 라면 거듭남이란 그 거듭남의 대상이 같아야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중초림이 없으니 공중 재림이라고 하면 안된다고 했으니
다시 재(再)에 해당하는 거듭, 중복, 두번, 재차는
동일한 대상에 적용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죠? ㅎㅎㅎ
그러면 육체로 난 것이 육체로 다르게 다시 난 것을 거듭남이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로 난 것이 영으로 나는 것을 거듭 남이라고 할 수 없죠!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니까요!
거듭남은 육체로 나고 영으로 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었던 사람의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원래 하나님의 영이 임했는데,
사람의 범죄로 그 영을 거두어 가셨고,
그 거두어가신 영을 다시 내려주시는 것,
이를 다시 부르심이라고도 하고 다시 살리심이라고도 한다는 의미로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거듭남은 세포분열로 새로운 몸이 되는 것 밖에 없지 않겠어요?
사람의 몸의 세포는 3년이면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바뀐다고 하죠?
그러나 육신의 그러한 거듭남이야 결국은 죽음으로 향하는 것 밖에 없지 않겠어요?
거듭남은 영의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