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브루투스
출생-사망 : BC 85 ~ BC 42
국적 : 로마
활동분야 : 정치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공화정 말기 내란 때 카이사르에게 대항했으나 사면되었을 뿐만 아니라 요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왕이 되고자 하는 카이사르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를 암살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군과 싸우다 패해 자살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BC 83년 호민관(護民官)인 부친 M.U.브루투스가 죽은 후 소(小)카토의 지도를 받으며 원로원파(元老院派)에 속하여 BC 58∼BC 56년에 카토와 함께 키프로스에서 활약하였다. BC 53년에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프르케루의 부관(副官)이 되어 킬리키아로 갔다. 공화정 말기의 내란 때는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하여 G.J.카이사르에게 대항하였으나, 팔사로스의 회전(會戰) 후 카이사르는 그를 사면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간을 높이 평가하여 BC 46년 갈리아 키사르피나의 총독(總督), BC 44년에는 플라에토르(法務官)의 요직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지난 날 로마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창건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자손이라고 자처한 그는 왕이 되고자 하는 카이사르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 해 3월 15일 동지 카시우스 등과 함께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 때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여! 너마저?”라고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형세는 그가 로마에 머무를 형편이 못되어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로 갔다. 마케도니아 총독 호르텐시우스의 지지를 얻어서 군대를 징모(徵募)하고, 원로원(元老院)에 의해 발칸반도에서의 군대명령권을 부여받았다. 이윽고 동방 제주(諸州)에서의 상급 명령권까지도 카시우스와 함께 받았으나, BC 42년 안토니우스 및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와 필리피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자살하였다.
그의 도덕적인 근엄성과 자주적인 태도는 그 시대의 사람에게 감화를 주었으나, 행동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학구적인 편이었다. 변론가(辯論家)로서도 명성이 높았고 정치적·철학적인 작품의 저자로도 유명하였지만, 지금은 그와 키케로와의 사이에 오간 서한의 일부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