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과 절개를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절한 타협도 필요한다.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나는 여러분 모두가 정몽주와 이 시조에 대해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몽주는 이성계로부터 조선 건국을 지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고려의 마지막 임금에 대한 충절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이성계의 쿠데타에 가담하기를 거부했고, 그 결과 피살됐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몽주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연회를 떠날 때, 말을 거꾸로 타고 나갔다고 한다.
이는 (이성계의 무리가) 그의 등에 화살을 쏘지 못하고,
반드시 그의 얼굴을 마주해야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정몽주가 건너던 화강암 다리에는,
그가 쓰러져 죽었던 자리에 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나는 개성에 가서 그 다리와 다리 가장자리에 있는 돌들을 직접 보았는데,
실제로 오늘날까지도 혈흔이 보인다
(제발, 그 혈흔이라는 것이 사실은 화강암에 흔한 산화철 줄무늬라는 지적을
삼가해 주시길 바란다!)
그 운명적인 연회에서 그는 단지 조선을 지지해 달라는 제안을 시로써 거부한 게 아니다. 조선을 지지해달라는 (이방원의) 회유도 시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원칙과 정의를 내팽개친, 악의 무리로부터 나온 것처럼 느껴진다.
흔들림 없는 충성과 타협을 각각 대표한다고 제안한다.
더 나아가 타협의 시가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이 왕조를 세웠고,
이방원의 아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기 때문이다.
타협의 미덕은 분명했는데,
그것이 한국 역사상 이뤄진 최고의 업적(한글 창제)을
우리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이라는 논리였다.
한글을 어떤 식으로든 타협과 연결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특히 내가 충성이나 충절을 중시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타협 또한 큰 미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지 편의의 문제나 “적당히 맞춰 가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타협의 정신이 없다면, 서로를 향해 이름을 붙여 비난하고 소리치기만 하는
완고한 정당들만 남게 .
우리는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와 한국 민주주의 모두에서 이를 보고 있다.
목은 이색
고려의 신하로 고려의 기상이 회복되기를 염원하는
충절의 마음을 읊었다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 昨過永明寺 (작과영명사)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暫登浮碧樓 (잠등부벽루)
빈 성 하늘엔 달 한 조각 城空一片月 (성공일편월)
오래된 조천석 위 천년의 구름 石老雲千秋 (석노운천추)
임금 탄 기린마는 한번 떠나 돌아오지 않고 麟馬去不返 (린마거불반)
손은 지금 어느 곳에 놀고 있는가 天孫何處遊 (천손하처유)
길게 휘파람 불며 바람 부는 비탈에 서니 長嘯倚風磴 (장소의풍등)
산 푸르고 강물 절로 흐르네 山靑江自流 (산청강자류)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으니
하늘에서 온 사람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돌계단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노라니
산은 푸르고 강은 저홀로 흐르네)
심원부의 두문동(함창김씨의 외손)
4은 목은 이색(韓山 牧隱 고려말 학자 함창 김씨 외손 영해향교에서 외조부의 학문을 익힘)
포은정몽주(1338~1392 영천 영일정),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이장경의 4세손), 야은 길재(해평) 고려 학자로 고려의 신하다 되겠다는 도원 결의
길재(吉再, 1353~1419)의 「회고가」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봉래산 낙낙장송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樂樂長松)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 한제 독야청청(獨夜靑靑) 하리라”
죽음을 앞두고 꺾이지 않은 절의(節義)가 듣는 이의 마음을 절로 숙연(肅然)하게 한다.
이 시(詩)는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의 "성삼문"각비(刻碑)에도 적혀 있다.
유성원 ? ~ 1456
草堂에 일이 없어 거믄고를 베고 누어
太平聖代를 꿈에나 보려트니
門前에 數聲漁笛이 잠든 날을 깨와다
하위지 1387-1456 단종때 사육신의 한사람 자는 천장 호 단계
會見林 烏借 회견림 오차 多慙仗馬鳴 다참장마명
숲 사이에서 까마귀가 남의 집을 빌린 것을 보며
의장대의 말울음소리를 부끄러워하노라
박팽년 朴彭年 : 1417 ~ 1456 자 인수. 호 취금헌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 메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유응부 兪應孚?~ 1456
간밤에 부 던 바람에 눈서리 차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메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 하리오.
이개 李塏 1417-1456 자는 청보淸甫 호는 백오견 白玉軒
방안에 혓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줄 모르고
저촛불 날과 같아여 속타는 줄 모르도다
방안에 켜져있는 저 촛불은 누구와 이별을 하였기에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속이 타 들어가는 줄 모르느냐 그것은 꼭 속이 타서
눈물짓는 나의신세와 같구나!
끈질김과 타협, 두 가지 모두를 통해 성공했다.
심지어 정몽주조차도,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어
“사대(四代)에 이르는 연좌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관직을 맡았고,
정몽주 자신도 사후에 공식적으로 관직이 복권되었다.
그의 충성은 인정되었으며, 비록 그가 새 왕조에 맞섰지만,
그들조차도 그가 한 일의 미덕을 보았던 것이다.
“적당히 맞춰 가며 사는” 사람들을 비판해 왔다.
어떤 차원에서는 그것이 매우 부도덕해 보인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타협을 필요로 한다.
언제나 바른 사람이 옳은 일을 한다 義在正我
참되고 진실하게
선하고 인자하게
사람답게 겸손하게
사랑으로 아름답게
사람의 길을 바르게 가라
숙종 6년(1680),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떴는데,
이 무렵부터 숙종은 장(장희빈)씨와 가까워진 것이다.
숙종 7년(1681), 계비 인현왕후 민씨를 맞았다.
숙종이 장씨를 그리워함으로 인현왕후는 다시 부러 들이자고 하나
숙종 어머니 명성왕후가 반대 한다. 어머니 사후
숙종 12년(1686) 2월. 곧 장씨는 숙의(淑儀 희빈 장씨)로 간택된다. 많은 신하가 반대한다
가슴에 묻어두었던 숙종의 분노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터졌다.
숙종은 장씨 소생의 왕자(경종1720 즉위)를 원자로 삼고,
왕비를 장씨로 교체하고 싶어 했다.
사화(士禍), 그 참혹한 현장이 된다
명신, 충신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 조정은 스산하다.
더 잘못 가면 나라가 망하겠구나, 숙종은 돌아보지 않았을까.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 15년(1689)에 왕비가 되었던
장씨는 5년 만에 다시 희빈으로 낮추어졌다.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힘겹게 집권한 후
민가(民家)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행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라”
숙종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계기로
숙종 17년(1691)숙종은 진지하게 반성했다
단종과 사육신 복권도
숙종이 정신 차리며
1692 이룬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숙종 18년(1692)은 임신년으로, 조선 건국(1392) 이후 60갑자가 다섯 번 돌았던 해이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장희빈 처리 문제)를 계기로 노론·소론이 정계에 재등장
숙종 20년(1694) 4월,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조치를 반성하고
정치를 바로 세웠다
지난해 거듭 용이 날던 해를 맞아
(去年重遇龍飛歲)
오늘 성조의 궁을 흔쾌히 보았노라
(今日欣瞻聖祖宮)
그리운 추모의 정 어찌 곱절뿐이리
(奚但羹墻追慕倍)
큰 위업 생각하니 상념 한이 없네
(緬懷洪烈意無窮)
숙종 18년(1692)은 임신년으로, 조선 건국(1392) 이후 60갑자가 다섯 번 돌았던 해이다
숙종 19년(1693) 무수리 숙원 최씨을 맞아다
숙종 20년(1694) 4월,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조치를 반성하고
인현왕후 민씨에게 미안하다는 유감의 뜻을 표한 뒤 왕비로 복위시켰다.
무수리 최씨가 영조를 낳다
숙종 27년(1701),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맞았다
덕성을 중시하여 직접 인원왕후를 간택하였다
세상은 소란한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나는 그 속에서 깊은 수심의 평온을 꿈꾼다네.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것은 격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라는 중심을 잃지 않고,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잠시 날개를 접는 새의 의연함을 닮아가는 과정이지.
어지러운 상념이 가라앉은 자리에 비로소 투명한 내면이 비치네.
소란을 잠재우고 내 안의 질서를 세울 때,
삶은 가장 정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네.
고요함은 정지가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나를 지키는 힘인 것을.
조선 역사에 충절과 절개를 지킨 선비들은
1691년 숙종 주도로 관직이 복구되어 역사를 빛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