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숙 관장 열정이 만든 '타임머신'
창경궁 일부 되살려 지은 궁집 등 한옥 10채 옮겨와 15년간 복원
18·19세기 목가구 2550점 전시, 회랑채선 피아니스트 랑랑 공연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할리우드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가수 빅토리아 베컴의 감탄을 자아낸 곳. 해외 명사가 한국에 오면 한 번은 방문하고, CNN이 2011년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이며, 놀랍도록 감탄스럽다'라고 보도했던 명소.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 당시 영부인들의 오찬이 열렸고, 라가르드 IMF총재, 마사 스튜어트, 브래드 피트 같은 명사들이 다녀갔다. 이탈리아 명품 구찌는 박물관에 삼고 초려해 91주년 기념 특별전을 이곳에서 열었다. 2011년 CNN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소개했다.
서울 성북구 한국가구박물관은 정미숙(70) 관장의 50년 열정이 만들어 낸 타임머신이다. 정 관장은 8선 의원을 지낸 정일형 전 외무부장관과 한국 최초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박사의 딸이다.
서울 성북구 한국가구박물관은 6600㎡ 땅에 한옥 10채를 복원해서 짓고 고가구를 옮겨 넣었다. 상설전에 550점, 특별전에 2000점이 돌아가며 전시된다. 박물관 측은 매일 1시간마다 넓은 마당을 쓸고 주위를 정돈하는 등 정갈하게 관리한다.
래드 피트가 탐낸 책함 - 한국가구박물관에 전시된 오동나무 책함. 방 구조에 맞춰 자유롭게 조립할 수 있도록 한 모던한 디자인에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도 감탄했다고 한다. 모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가구 보는 눈썰미를 갖게 됐다는 정 관장은 나대지였던 6600㎡(약 2000평) 땅에 한옥 10채를 옮겨와 18·19세기 목 가구 2550점을 채워 넣었다. "(여기저기 버려진) 가구가 나를 향해 울부짖는 것 같았다"는 것이 고가구 수집 이유였다. 박물관이 들어선 땅은 시아버지이자 국내 원양어업의 개척자로 불리는 고 심상준 제남기업 회장에게서 기부 받았다. 정 관장은 1993년부터 15년을 투자해 언젠가 박물관을 열겠다던 꿈을 이뤘다.
가구박물관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수백 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창경궁 전각을 되살려 지은 궁집이 제일 먼저 손님을 맞는다. 정 관장의 시아버지가 1960~1970년대 정부가 궁 유원지화 사업을 하면서 민간에 매각한 기둥과 기와를 사들였다. 한옥은 못이나 접착제를 쓰지 않고 레고 블록처럼 끼워서 조립할 수 있기에 복원이 가능했다. 기와도 한 장씩 떼어 번호를 매겨 다시 올렸다.
궁집 옆으로 빙 둘러 돌아가며 행랑채, 정자, 회랑채가 이어진다. 회랑채에선 중국의 피아니스트 랑랑이 2012년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맞은편 곳간채는 명성황후의 사촌이 마포에 소유했던 것이다. 어지간한 여염집 민가보다 넓어 당시 민씨 일가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한다. 그 옆 부엌채 양쪽 옆구리엔 연기가 빠져나가는 창이 붙어 있다. 사각형 창 앞에는 사각 우물, 원형 창 앞에는 둥근 우물을 둬 마주 보게끔 했다.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가 눈을 떼지 못하다 스케치북에 그려갔다고 한다. 뽀얀 마사토가 깔린 마당을 앞에 둔 사대부 집은 순정효 황후가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가례(嘉禮)를 올리기 전에 살았던 곳이다. 안방 창문 너머로 남산과 성곽 길 풍경이 아스라하게 이어진다.
박물관 안엔 장인의 지혜가 느껴지는 가구가 많다. 1시간 예정으로 왔다가 3시간을 머물렀던 브래드 피트가 탐을 냈다는 오동나무 책함이 대표적이다. 책을 넣어 하나씩 들고 다닐 수 있고, 여러 개를 쌓아올리면 책장이 된다. 피트는 "수백 년 전 가구가 이토록 모던하다니 놀랍다"며 "어이구 세상에나(Oh, my god)"를 몇 번이나 외쳤다고 한다.
옷을 한 벌씩 넣어두던 관복장(官服欌)에선 옛 주인의 취향이 드러난다. 옥단추 2개를 위아래로 달거나 난(蘭)을 그려 넣어 멋을 냈다. 휘가시나무, 단풍나무 등의 재질을 고스란히 드러낸 장롱은 비례와 균형미가 빼어나다. 유달리 길고 쭉 뻗은 촛대는 인체를 가늘고 길게 표현한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박물관 박중선 이사는 "조상들은 생활이 예술이었다."며 "자연이 집을 안고, 집이 가구를 안고, 가구가 사람을 안았던 유기적인 미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 박물관이 있는 곳은 법정스님이 있었던 길상사가 있는 성북동으로 이곳은 서울의 성곽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다양한 문화재를 간직하며, 주민 간 교류와 외부 손님에 대한 응대도 좋은 곳이다. 이 동네는 2013년 서울시 최초로 역사문화지구단위계획 지구로 지정됐다. 한양도성, 선잠단지, 고종의 아들 의친왕이 살던 별궁의 정원 성락원, 이종석 별장, 만해 한용운의 유택인 심우장, 최순우 옛집 등 다양한 문화유산이 모여 있고, 주민들의 보존의지도 높기 때문이다.
▶ 관장 : 정미숙(70세)
가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친정어머니 덕분이다. 정 관장의 부모는 8선 의원을 지낸 정일형 전 외무부 장관과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박사다. "어린 시절 머리맡에 있던 물건들이 죄다 헌 가구들이었어요. 일제 시대 선교사들이 쓰다 버리고 간 의자며 반닫이 같은 것들을 어머니가 주워 오셔서 재활용했지요. 저 찬탁도 제가 책장으로 쓰던 겁니다."
조선시대 목-가구를 제대로 연구하기 시작한 건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한 뒤 미국, 터키, 대만 등지에서 유학할 때였다. "유신시절 야당 정치인으로 핍박받는 부모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려고 외국 생활을 오래 했어요. 근데 (외국) 친구들이 물어요. 너희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니? 말문이 막혔지요. 한글과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인 건 분명한데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통 모르겠는 거예요.
다시 돌아와 인사동을 찾아다니고 우리 가구의 역사, 아시아 주거와 가구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선지 시 주석 내외보다도 박 대통령이 더 반가웠단다. "원망이라니요. 저는 야당도 여당도 아닌 '대한민국당'이에요. 국민과 운명을 함께한 대통령인데 힘껏 도와드려야지요. 시 주석에겐 아내가 있는데 우리 대통령은 혼자라 어찌나 마음이 안됐던지…."
가구박물관을 열게 해준 사람은 시아버지였다. 1960년대부터 모으기 시작한 고가구들이 2000점을 넘어서자 관리가 어려워졌고 서울시에 기증할 생각에 시아버지께 상의를 드렸더니 "네가 직접 박물관을 지어보라"며 성북동 땅을 내줬다. 정 관장의 시댁은 조선 철종시대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자손. 한때 의친왕 이강이 살았던 '성락원'은 심상응의 별장으로, 2008년 명승 제35호로 지정됐다. 한국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으로 세계조경학회가 주목하고 있는 곳이다.
박물관은 땅을 판 지 15년 만에 완공됐다. 개발로 헐려 나가는 서울 북촌의 한옥들을 옮겨오는 일부터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까지 정 관장의 지휘 아래 심어졌다. "이 박물관은 '너희 나라는 어떻게 사니?'라고 묻는 외국인들에 대한 저의 답입니다. 미국의 1개 주보다도 작은 땅덩어리의 나라인데 가구는 통영 스타일, 남원 스타일, 전주 스타일 등 70개 지역으로 분류되지요. 어마어마한 문화적 자산 아닌가요. 산하나, 강 하나를 두고도 그 마을의 문화들이 섞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한 겁니다.
가구 하나만 해도 이러한데, 현재 남아 있는 1000여개의 향교와 서원, 종갓집들까지 잘 보존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릴 수 있다면 한국이 문화관광 대국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성북동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같은 문화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정 관장이 재미난 얘기를 했다
“가구박물관 주변에 있는 외국 대사관만 38곳입니다. 그들이 한국의 생활상을 느낄 만한 곳이 적습니다. 우리는 한복을 버리고, 한옥은 훨씬 전에 잃었습니다. 남은 것은 김치 정도일까요. 제가 만난 외국 대사들은 똑같은 말을 합니다. ‘한국 가정집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요. 반만년 역사에서 지금이 가장 잘사는 시대일지 몰라도 우리 문화재는 가장 많이 잃어버린 시대일 수 있습니다.”
“조선 세종과 영·정조 시대에 이어 제3의 문예부흥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우선 가구박물관 주변에 있는 박물관·정원·왕릉·미술관을 묶는 문화 클러스터 조성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기업들의 후원이 필요하죠.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메디치 가문이 우리라고 없으라는 법은 없겠죠.”
“제 스스로 ‘가정부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손에서 걸레나 빗자루가 떠날 새가 없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닦고, 털고, 씻어내고 여간 고된 일이 아닙니다. 손톱에 매니큐어 한 번 바른 적이 없습니다. 손끝이 갈라져 피가 자주 났고, 반창고를 달고 살았죠.”
“우리 것에 대한 자존심 때문이죠.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순 없잖아요. 외국 전문가들도 조선시대 가구를 보고 ‘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현대미술)’라고 감탄합니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낸 절제미, 면과 선의 빼어난 비례미에 ‘원더풀(wonderful)’ ‘어메이징(amazing)’을 연발합니다. 그럴 때 늘 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We live like this)’라고요.”
정 관장이 가장 아끼는 가구는 아낙들의 손때가 묻은 뒤주다. 박물관 로고로도 뒤주를 쓴다. 우리 속담 중에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가 있다. 무엇이 없어진 다음에야 그것이 더 간절하게 생각난다는 뜻이다. 정 관장은 하나 둘씩 사라지는 우리 문화재를 아쉬워하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오늘도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