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신> 시는 詩가 아니다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오늘은 '시'라는 글에 관해서 잠시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시'라는 글은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시(poetry)'라는 글과 같지 않고 또한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詩(시)'라는 글하고도 다릅니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민족마다 다른 언어와 다른 관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생산된 문화들은 한결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주식(主食)은 밥이지만 서양인의 주식은 빵이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의 의상인 한복과 서양인의 양복이 다르지 않습니까? 술도 서양의 위스키와 중국의 백주 그리고 우리의 소주가 얼마나 다릅니까? 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는 중국의 '詩'나 서양의 'poetry'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이 같은 글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는 착각입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면서 기존의 우리 생각을 반성해 보도록 하십시다
詩≠시≠poetry
19세기말 개화기를 한국 현대시의 출발점으로 잡는다면 한국 현대시의 역사도 어느덧 한 세기를 기록하게 된다. 특히 1920년대 이후부터는 수많은 시인들의 등장과 함께 많은 작품들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1930년대부터서는 질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작품들이 적지 않게 창작되었다. 그리하여 21세기 초 오늘의 한국시단은 거의 세계적 수준에 육박하는 성장을 했다고 자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시를 들여다보면 마치 남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 같은 개운치 않은 느낌이 없지 않다. 그것은 우리 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회의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현대시가 외래시 특히 서구시의 영향 아래서 출발 성장해 온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기는 하나 오늘의 우리 시가 곧 서구시와 같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어느 민족의 문화이건 그 문화는 여러 주변 이문화(異文化)와의 융화의 소산이다. 그러나 A라는 어느 한 문화가 B라는 다른 한 문화에 종속적으로 예속된다고 할지라도 A+B와 B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두 문화의 개성은 계속 살아남기 마련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시는 고대로부터 중국 한시(漢詩)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 왔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정형시라고 할 수 있는 향가(鄕歌)도 얼마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 것은 문자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우리의 전통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민요나 가사의 가락에 실려서 구전되는 것으로 빈약하게 그 명맥을 이어 왔고 본격적인 시문학은 한시의 형태로 발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한글이 창제되면서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가 자리를 잡게 되고 가사문학의 발흥을 맞기는 했지만 그동안 길들었던 한문문학의 영향권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19세기말까지 우리 시를 주도해 온 것은 한시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한시는 중국의 한시와는 다른 우리의 한시문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아무튼 시란 무엇인가 하는 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큰 줄기만 따져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시(1)에서는 한시가 주도를 하게 되고, 다시 시(2)에서는 서구시가 주도를 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날 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서구시 내지는 한시에 기울어 있는 셈이다. 우리 고유의 것보다는 외래의 것들에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썩 마음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남의 좋은 것들을 그만큼 많이 우리 것으로 삼았다고 생각하면 굳이 나빠할 것도 없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한시가 지니고 있는 깊이 있는 동양 정신과 서구시가 지니고 있는 감각적인 표현 기법을 아우르고 있는 보다 높은 차원의 통합을 우리의 현대시 속에서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 시는 한시나 서구시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를 논하면서 한시나 서구시의 이론을 절대적인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온당치가 못하다. 우리 시에서의 한시성이나 서구성은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는 격으로 우리가 받아들인 외래적인 것들은 이미 우리 체질화되어 있다. 중국의 면음식이 이 땅에 들어와서 짜장면이라는 우리 특유의 음식이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 현대시는 한국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러한 특성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가야 하리라. 우리 시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이 곧 우리 시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 시에 대한 이론 정립이 필요한 시기에 와 있다. 그리하여 나아가서는 우리 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이 실현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현대시는 극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다.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나 드러내고자 하는 생각이나 표현하고자 하는 형식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그러니 시인이 쓰고자 하는 것들을 제 멋대로 드러내 놓아도 시라고 불러주어야만 되는 시인 천국(?)이 된 셈이다. 세상에 시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는 것처럼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너도나도 시인이 되겠다는 사람들로 거리는 넘치고 시인을 팔아 수지를 맞추는 장사치들이 북적대고 있는 실정이다. 시를 자유방임의 글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시는 어떠한 글보다도 가장 절제를 필요로 하는 글이다. 아무런 생각이나 시로 쓴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좋은 시는 격이 높은 생각을 담고 있다. 나는 그것을 시정신이라 부른다. 아무렇게나 표현해도 된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보통의 글에서와는 달리 시답게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 나는 이를 시적 장치라고 부른다. 시는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의 격과 멋은 여기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곧 산문과는 달리 시가 시로 불리어질 수 있는 소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시정신과 시적 장치란 어떤 것인가? 그것을 따지고 찾는 일이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그것이 곧 우리 시 이론을 세우는 일이며 우리 시의 정체성을 설정하는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 졸저 『엄살의 시학』(태학사) pp.13∼16
로메다 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시'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풍토, 우리의 체질, 우리의 정서에 잘 어울리는 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땅의 흙과 물과 영혼을 잘 빚어 자랑스런 고려청자를 구워냈듯이 우리는 세상의 어떤 시들과도 다른 우리만의 아름다운 '한국시'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맹목적인 모방이나 추종처럼 어리석은 행위는 없습니다. 서구에서 유행하는 풍조라고 해서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미국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향한다고 해서 우리가 추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평소 육류를 많이 섭취해서 비만해진 서구인들에게 맞는 이상적인 식단(食單)이 평소 채소를 즐겨 먹는 우리에게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체질에 맞는 우리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입니다.
로메다 님,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젊은이들이 깨닫고 실천에 옮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일의 우리 시, 더 나아가서 우리 문화는 바로 그런 의지를 가진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건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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