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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찬 교수의 '구속사 설교, 이대로 좋은가?' 에 대해 ▣
⊙ 구속사적 설교가 지향하는 원리인, '창조-타락-구속' 의 큰 틀과 '그리스도에 의해 이 구속의 역사가 성취되었다' 라는 강조점은 구약과 신약을 해석할 때 포기해선 안될 개혁주의적 해석 방법론이다. (글)
* 김 교수는 '창조-타락-구속'을 하나의 해석 방법론으로 보지만, 그러나 이것은 구속사의 중심이다.
⊙ 실제로 화란과 한국교회에서 지금까지 시행되어 온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는 기존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고 약간의 수정만을 가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내장적(內藏的)'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 개혁주의적 성경 해석학은 '문법적(문예적)-역사적-신학적(정경적)' 방법이다. (글)
* 여기서 김 교수는 개혁주의적 성경 해석학은 '문법적(문예적)-역사적-신학적(정경적)'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창조-타락-구속' 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김 교수는 '창조-타락-구속'을 소설책에 나오는 줄거리로 보는 것이다.
⊙ 성경 해석자는 먼저 주해할 본문의 장르를 결정해야 한다. ... 중요한 단어들의 의미론적 특성을 살피는 문법적-문예적 해석에 주력해야 한다. 그 후에 본문의 역사적-지리적-사회적 배경을 살피고, 본문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찾아보는 역사적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 이것이 정경적-신학적 해석이다. (글)
* 이런 글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기존의 틀을 깨지 않고 심도 깊게 하면, '창조-타락-구속' 의 큰 틀이 부각이 되는 것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 위의 과정에서 보면 구속사적 설교 원리는 정경적-신학적 해석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속사적 설교 원리는 본문에 대한 1차적 주해, 즉, 문법적-역사적 주해가 끝난 후에, 2차적인 수준(구약과 신약과 관계)에서 본문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글)
* 김 교수에 의하면 1차적 해석에는 정경적-신학적 해석법이 포함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의 말대로, 2차적인 수준인 구약과 신약과 관계에서 본문에 적용이 되는가?
⊙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보면, '구속사' 라는 틀(때로는 온당하지 않은 잘못된 구속개념을 가지고)이 1차적 본문주해를 집어삼킴으로써 본문의 문법적-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글)
* 여기서 잘못된 구속개념이라는 것은, 한국교회 설교자의 문제점이 잘못된 주해가 아니라, 사실은 잘못된 구속개념에 있다는 것이다.
⊙ 고신대에서 7년 동안 가르쳤던 화란인 고재수 교수가 창세기 12장 10-20절을 본문으로 한 '아브람의 거짓말' 이란 설교를 실례로 살펴보자. ... 고재수 교수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미 3000년 전에 우리의 구원을 내다보시면서 사래를 바로의 왕궁에서 건지셨다" 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것이 창세기 기자의 메시지인가? (글)
* 그러면 과연 아닌가?
⊙ 오히려 근접 문맥인 창세기 12장 1-3절의 약속과 연결시켜야 옳지 않은가? 여호와께서 사래를 바로의 궁에서 건져낸 사건을 통해, 아브람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 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 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성淪絿척?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은가? (글)
* 연관시키면 앞의 말이 틀리는가? 요 8장에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을 미리 보냈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는 것과 고재수 교수의 주장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 그리스도로 절정에 이르는 구속사를 너무 '빠르게' 본문 안에 읽어 들인(reading into) 결과 이런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 이런 내장적 문제가 있는 한, 약간의 교정과 수정만으로 기존의 구속사적 설교를 지속시킬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오직 성경 본문만으로' 라는 종교 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글)
* 천천히 들어가면 진리가 나오는가? '오직 성경 본문만으로' 라는 종교 개혁의 정신이 과연 김 교수가 주장하는 이러한 정신인가?
⊙ 모범적 설교든, 구속사적 설교든 간에 성경 본문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려 한다면, 계속 구속사적 설교를 고집하기보다는 본문 설교로 돌아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성경 본문은 구속사의 틀로 해석해야 비로소 살아나는 해석의 객체가 아니다. (글)
* 처음에는 구속사적 설교를 보완한다고 하다가, 이제는 구속사적 설교를 고집하기보다는 본문 설교로 돌아서는 것이 났다고 하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를 철폐하자는 것이다.
* 성경 본문에 과연 목소리가 있는가? 글자에 무슨 목소리가 있다는 것인가?
[ 김치찬 교수의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에 대한 반론 ]
1. 지난 11월 4일 자, '기독 신문'에 나온 김교수의 글은 비록 짧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뒤로 감추어놓고 시작된 첨병적 글이라 할 수 있다. 김 교수에 대해 생소한 사람은 그가 내세우는 '문예적 해석' 이라는 생소한 표현에 대해 별로 주목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는 구속사적 설교를 보다 완벽하게 보완하기 위한 충정심에서 이와 같은 글을 남겼을 것이라고만 짐작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글을 쓴 김 교수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구속적 설교를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하는 모든 설교자들이 착각하오 있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 착각을 도와 이차에 구속사적 설교를 아예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싶어서 그와 같은 글을 남긴 것이다. 김 교수의 주장대로 라면 논리상 반드시 다음과 같은 원칙이 우선 성립되어야 한다.
"문예적 해석과 구속사적 해석은 서로 상충되지 않고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를 제대로 알지를 못한다(아니면 알면서도 구속사를 의도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하여 문예적 해석을 먼저 언급한다).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문법적-문예적 해석하고 난 뒤에 그 다음 구속사 해석에 들어가야 하고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참된 구속사 설교는 이러한 문법적-예술적(?) 해석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고, 이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해석을 쓰며 들어오는 것을 배척한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에 있다. 구속사 설교라는 것이 단지 성경 줄거리를 뽑아 그 내용물을 소설화시키고(문예화 시켜) 나열한 설교가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설교를 해왔던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서 도리어 새로 십자가 해석으로 죽음을 당해야만 했던 것에 대한 심판과 정죄의 차원에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행 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행 8:31)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행 8:32)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행 8: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행 8: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행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 에디오피아 내시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이사야의 글을 보고 구조분석을 못해서, 문자적인 의미를 몰라서 모른다고 했는가? 원어 분석을 하면 다 해결이 되는가? 언어의 주체가 누구인가? 바로 인간인데, 인간을 몰라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 내시가 선지자가 한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묻자, 성령 받은 빌립이 언어 분석을 해서 예수라고 가르쳐 주었는가? 어떻게 '그' 가 예수가 되는가? 구조분석에서 그런 답이 나올 수 있는가?
* 아마, 김지찬은 신약은 자기의 분야가 아니라고 변명을 할지 모르지만, 모르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도 못한 인간이 성령 받은 자를 모독하면 안 되는 것이다. 빌립 뿐만 아니라, 신약의 모든 해석이 다 예수로 시작을 하는 것이다.
* 언어학을 배설물로 여기고 신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언어학을 공부해야 성경을 제대로 해석을 하고,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령은 필요 없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김지찬이 하는 짓은 무엇인가? 섬 무당이 사람잡는 꼴이 아닌가?
쉽게 말해서 인간들이 성경을 보면서 발췌 할 수 있는 모든 시도 - 문법적, 문예적, 정치 경제 사회적 해석, 언어학적 해석 - 그 자체를 정죄하기 위한 해석이 아니면 절대로 구속사적 해석이라고 명칭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약 사도들에 의한 구약 인용이나 구약 해석이, 그 당시 구약을 같이 보는 유대인들이나 자연인들의 문예적 소양과 문학적 품성에서 우러나오는 해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주장들을 해서 극과 극으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도들의 구약 해석은 구속사적해석 뿐이었고 그 외의 해석은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수난을 자처한 것이다. 진짜로 예수의 영을 받은 사도들은, 구약을 보면서 일방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글로 보고 시작했다. 절대로 다른 방식의 해석을 용인할 수 없었다(김 교수는 이러한 해석법은 가지고 실재론적 해석법, 혹은 연역적 해석법이라고 해서 비이성적이고 비학문적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만약 이점에 이의를 건다면 그것은 성령 받은 사도들에게 이의를 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는 사도와 같은 성령 받은 자라 할 수 없다. 정말 성령 받은 자라면 사도의 '구약 해석법'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사도의 해석법은 곧 성령님의 해석법인데, 성령님의 해석법은 십자가 사건으로 전 우주와 역사를 재조명하는 해석법이다.
결코 문헌적 구조에서 십자가가 나올 수 없다. 만약 나온다면 유대인들은 결코 예수님을 살해하는데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교 학자들은 도리어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보다 율법대로 해석하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나무랐다.
이 갈등으로 인해 빚어진 사태가 십자가 사태이다. 따라서 김 교수 주장되는 문예적 해석과 제대로 된 구속사적 해석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바로 이 해석이 절단됨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성경 해석은 십자가의 영으로 등장되는 성령으로만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계속해서 '언어의 직공이 되자' 라고 외친다. 자, 이로서 주어진 결과가 무엇인가? 또다시 성령 받은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십자가 사태를 유발시키는 장본인이 될 것이다.
*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 언어의 직공이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2.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자를 질 낮은 설교자로 간주하고, 만약 문법적-문예적 해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의 주장은 뒷받침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구속사적 설교를 거부하는 것이지만), 계속 질 낮은 상태를 머물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본인이 보기에 도리어 김 교수가 질 낮은 설교자이다.
왜냐하면 김 교수 주장대로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차근차근 빠트린 바 없이, 다 문법적이고 문예적 해석을 여러 번 수행한 바 있는 설교자가 전체적 핵심을 모순 없이 파악한 후, 그 다음 어느 본문을 숲을 본 입장에서 명쾌한 결론을 내리게 되면,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이 보고,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고 불평하면서 처음부터 문법적-문예적 과정부터 다시 따져야 나서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모든 경우에 설교 형편상 호응해 주지 못할 것이 뻔하다. 만약 그 주장에 호응해 주고자 하면 그 후의 내용을 또다시 거론해야 하고 그 다음 또 그 후의 성경 내용을 또다시 연결시켜 설명해야 하는 끝없는 번거러움이 기다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마치 마라톤에 이미 반환점을 돌고 온 자를 보고 이제 막 출발하는 자가 도리어 뒤 처져 온다고 조롱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진짜로 당신이 다 돌고 온 자인지 자신이 납득하도록 다시 돌고 오너라 하는 무례함을 서슴없이 徨構?되는 경우이다.
따라서 이런 저런 질적 차원의 차이를 빨리 파악하는 방식은 바로 성경 해석이나 설교가 종국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느냐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 어떤 해석이나 설교든 그 지향점이 예수 그리스도로 모아져 있는가 아니면 다른 것 - 예를 들면, 교회성장, 부흥이나 개인적 구원론에 관한 것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경건의 모습이나 종교 테크닉이나 사회 정의나 예배 갱신 같은 것 - 에 모아져 있는 가로 구별하면 된다.
즉, 제한된 범주 내에서 성경 해석을 문법적-문예적으로 하게 되면 마치 이 다른 것에 해당되는 사항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찬찬히 신약 전체를 전부다 파악하게 되면 결국 성경이 말하는 바는 교회도 아니요, 인간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지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호식 씨의 글을 보면, 정돈이 안 되어있음을 보게 된다. 너무 흩어지는데, 그래도 하나를 뽑아 낸다면,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도와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십자가를 언급해도,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 新人合一
* 헬라종교를 잘 살펴보면, 오늘날의 이러한 사태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신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다. 인간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폰 라드의 [ 종교에서 철학으로 ] (이화여대출판사) 참고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을 바로 언급하니 김 교수는 짜증이 나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가 너무 일방적이라서 받아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해석이 너무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신학'이라는 학문 만들기를 시도하는, 소위 자칭 학자라는 자들의 교만성과 비복음적 정신이 스며 나오는 구멍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증거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언어로 학문 안에 고형화시킴으로 성령과 예수 마저 납득되는 대상으로 전환시켜 뭔가 주의 보탬이 되는 가치 있는(?) 자아상을 유지, 확립하려는 것이다. 즉, 예수 믿기보다는 자기 믿기를 감추고 또 자신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 건방지게 말씀까지 도용하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밝히기를 주의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을 뿐이다.
"누가 먼저 주께 드려 갚으심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롬 11:35-36)
참 성령 안의 신앙인지 아닌지를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모든 주체를 십자가 안에만 살아 역사 하시는 주님으로 넘기는 열매로만 파악되기에 이 십자가 걸림돌은 신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도 예외 없이 검증기준으로 삼아야만 한다. 십자가는 곧 인간의 장례식장이요 빈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십자가 증인되기 보다 십자가를 거론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증인으로 남기를 원한다. 이러한 더러운 열매들이 들고일어나 이 시대에 또다시 십자가 증인들을 못살게 굴고 있다.
3. 문법적- 문예적 해석이 과연 정답을 낼 수 있는 해석인가?
언어학자 방브니스트는, "모든 기호계는 실존하기 위해서 그 기표적 언어에 의존한다" 라고 했다. 또 미하일 바흐찐은, "말은 고정된 점이나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의미들의 교차점이며 타자의 담론에 주인공의 의식과 말이 은밀하게 끼여들고 있다" 라고 했다. 또 "장르의 문제는 낳걋岵?예술작품을 신화로 바꾸어버릴 위험이 있다" 라고 했다.
* 객관적으로 언어를 본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자의 의미가 이미 다 포함되고 마는 것이다. 언어는 정치적으로 어느 쪽에 힘이 많이 쏠리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교차점이라는 것이다. 즉, 유행을 탄다는 것이다. 또, 장르는 그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르를 만들겠다는 것은 있지도 않는 것을 만들겠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또, 문학적 대상의 유일성에 대한 일반 이론을 제시한 제라르 쥬녜프라는 학자는, 글쓰기의 숱은 측면들과 수준들이 어떻게 하나의 네러티브 기능을 구성하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것은 하나의 스토리 텔링이라는 단일한 계시로 환원 될 수 없다" 라고 했다.
* 네러티브를 아무리 끄집어 내어도 그것은 하나의 스토리 텔링이라는 단일한 계시로 환원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서 다 다르다는 것이다.
또, 언어학자 옐름슬레우는, 기호의 이중분절을 언급했는데, 이는 모든 기호의 지층 안에서는 겉모습과 동일한 형식의 분절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표현'과 '내용'이라는 상이한 분절은 '나타나는 것' 과 '나타나지 않은 것' 과의 분절이다.
* 표현과 내용이 있는데, 이 표현 안에는 또 새끼 표현과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속 갈라지는데, 이것을 이중분절이라는 것이다. 표현은 겉모습이지만, 내용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는 관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나사에서 '오늘도 볼펜을 하나 쏘아 올렸다' 라고 한다면, 여기서 표현은 볼펜이지만, 그 내용은 우주선이라는 것이다. 이중 분절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볼펜이라는 용어대신에 다른 말을 써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 성경에 있어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라고 생각을 하지를 말고 한국말로 된 것을 봐도, 80세의 할머니가 보는 것과 중이 보는 것은 다른 것이다. 번역을 잘못해서 모르는 것인가?
* 김지찬은 나타난 것만 붙들면 나타나지 아니한 것도 나온다고 했지만, 옐름슬레우는 '표현'과 '내용'이라는 상이한 분절은 '나타나는 것' 과 '나타나지 않은 것' 과의 분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문학이라는 것도 결국 언어와 기호로 미끌어지면서 분해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최종 해석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이름지어져지지 않는 (비문학화되고 비 언어화된) 관념의 몫으로 남게 된다. 모든 문학이 그럴 진데 도대체 암묵적으로 비주관적으로 비선입견적인 해석이 가능한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예수님 자기 지향적으로 해석하신 예수님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성경해석이다.
* 이것이 바로 구속사라는 것이다.
< 결 론 >
김 교수께서 정말 한국 교회를 위하고, 설교자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발언해야 한다. "자신을 살려주는 설교를 하지 말고 자신을 죽이는 설교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동안 목사 자신의 생존욕에 가려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전면에 부각될 것이 아닙니까!"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사도)는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습니다"(고전4:13) 이런 설교자의 자세가 모든 세상적이고 작위적인 성경 해석법보다 먼저 우선되어 복음의 진수로 제대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가 정말 성경을 바로 해석하고 싶다면 자신의 10년 이상 연구한 그 해석법 조차스스로 육적임을 고백하는데 부터 시작해야 한다.
◈ 김지찬 교수의 주장 - "진리는 없다. 성경을 통해서 그냥 한 번 찾아 가보자 !"
◈ 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 죄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이 권력과의 밀착관계, 하수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라고 하는 것은 권력이라고 하는 다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즉, 내가 선을 행하고 싶어도 내가 관계하는 권력이 가만두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다 죄라는 것이다.
* 이런 나쁜 세상이 지금이라도 박살이 났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고, 주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나쁜 놈들이 있어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김지찬 같은 자기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 죄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죄를 안 짓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죄가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네가 그러고도 목사라고 할 수가 있는가, 그 점만 빼고 조금만 더 잘해!' 등이다. 이런 것이 항상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화목 제물로 인하여, 우리 죄를 우리에게 죄를 돌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학대를 하는가? 바로 이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또한 권력으로 인해서 이러한 주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죄가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유(有)에서 무(無)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무에서 유로 창조하시는 것이다. 있는 것도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 가정, 목사 등, 이런 것이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 때문에 네가 있고, 마누라가 있고, 자식이 있고,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 죄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다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 당회장으로 되어있는 교회에 가서 원로 장로 투표를 거행하는데, 교회법에 원래 권사까지는 ⅔로 되어있지만 원로 장로는 없어서, ⅔로 투표하는 것으로 공동의회를 진행했는데, 나중에 한 목사가 노회에서 알아보니 과반수가 맞으니 ⅔로 진행한 것을 사과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원로 장로는 없는데, 원로 목사가 과반수이니까, 이것을 근거로 과반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사과할 문제인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면 몰라도. 사실 모든 임직은 교회의 화평을 위해서 ⅔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원로 목사는 목사가 그렇게 원리에 맞지 않게 만든 것이다. 사실 교회법보다는 교회가 원하는 데로 임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회법이란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 왜 그 목사가 나에게 노회에서 사과하라고 했겠는가? 그 목사는 어떤 권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워하면서, 실수를 했다고 사과하라는 것이다. 결국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 새 언약 6
☞ 하나님의 선택, 179 페이지
◈ 엘리야에 대해서 - 엘리야는 누구인가?
* 엘리야는 어디에 나오는가? 말라기이다. 그러면 말라기가 보여주는 것은? 완전히 이스라엘은 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400년간 선지자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선지학교는 있었을지 몰라도, 신학생과 교수는 많았을지 몰라도, 성령이 지목해서 성경에 개입하는 참된 선지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 400년이 보통 기간이 아니다. 학개, 스가랴는 바빴다. 미가, 예레미야, 이사야를 보면 선지자들이 중첩이 되면서 활동을 했는데, 이 말라기 이후에는 뚝 떨어져 있는 것이다.
*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말라기로서 구약을 끝내겠다는 것이다. 말라기로서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것도 끝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 말라기 → 세례요한 → 예수님 ],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말라기에 세례요한과 예수님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이 어려운 것이다.
* 요한 계시록이 마지막이 아니고, 요한 계시록은 말라기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마지막의 징조는 바로 엘리야가 오는 것인데, 그가 오면 끝이 난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다. 너무 커서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라기는 모든 것의 마침표이다. 요한 계시록도 말라기의 입장에서 마치는 것이다.
* 그러면, 그 마침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이스라엘 멸망이라는 것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로 시작해서 다른 어떤 것과도 접촉이 없이 말라기와 하나님과 바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말라기의 모든 내용을 성취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신약에서 세례요한이 엘리야로 오는 것이 마땅하다. 모든 것을 끝을 내니까 말이다. 세례요한이 엘리야로 왔을 때 역사는 이미 끝난 것이다.
* 총신대에서 어는 학생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이미와 아직에서 이미도 있지만 아직도 있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을 해서, '이창호가 9단인데, 지금도 바둑을 두고 있는데, 그가 9단이라는 것이 뭐가 어렵는가' 라고 답변을 했다. 9단이 되어서 노는 것이 아니라,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다. 9단이 된 것은 '이미' 이고, 바둑을 두는 것은 '아직' 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 시간적인 것을 빼고 안 빼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시간적인 것을 집어넣어서 자꾸 구원론적으로 생각을 하면, 복음 증거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게임(학문)하는 사람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에 있어서 말라기는 끝이라는 말이고, 엘리야가 왔다는 것은, 이방인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엘리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세상의 마지막을 고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인데, 이것은 그들에게는 충격이라는 것이다.
◈ 아, 끝났구나! 더 기다릴 것이 없구나! - 그러면 엘리야가 누구이지?
* 그런데 유대인들은 보낸 엘리야를 어떻게 했는가? 죽여버린 것이다. 한 여인의 춤추는 대가로 말이다. 이것은 사실, 이 세상의 육적인 마지막 시대의 죄악의 잔재로, 이 세상이 어떻게 마무리가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례요한도 목베어 죽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역사의 종착역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 마 21장에서, 이 악한농부 비유를 그대로 품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다. 아들을 헤친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시는 것이다.
(마 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 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 죄와 역사(歷史) - [ 복음의 회복 ] 에서, 계시의 끝이 십자가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은, 십자가로 인간의 모든 죄가 드러났고, 이러한 인간의 죄가 드러나면 계시는 끝난다는 것이다. 더 죄를 파헤치는 근거가 제시되지 아니하면 역사가 더 이상 진행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이런 마음이 없이 엘리야를 보면, 마치 야구처럼, 엘리야를 3번 타자정도로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4번 타자로 기다리는 것이다. 엘리야의 죽음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 세례요한은 지금 자기는 예수님?동일한 시대에 같이 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같은 층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자기를 엘리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마지막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의 선택, 180 페이지
(마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마 17: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엘리야가 또 와야 합니까? - 지금 제자들이 산밑에서 하는 말이, 산 위에서 엘리야도 예수님도 보았는데, '왜 예수님은 엘리야가 또 와야 합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미리 앞 당겨서 엘리야를 보여준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엘리야가 와야 된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보기에는 자기들이 산 위에서 이미 온 엘리야를 보았다는 것이다.
*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시간의 종착역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도대체 무엇을 기다렸는가? 오직 성경대로 만이다. 성경대로 메시야만을 기다린 것이다. '성경대로 살기' 라는 코미디 같은 말이 있는데, 이것의 반대말이, '예수 믿기' 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 17: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마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 인자가 왜 고난을 받는가?
* 엘리야가 못다 한 일이 있기에, 엘리야의 고난을 예수님이 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산상에서 처음에는 모세도 있고, 엘리야도 있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이 혼자 남으시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81 페이지
⊙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하고 죽었으며 그 뒤를 이어 예수님 자신도 엘리야 기능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책)
* 예수님이 엘리야의 기능을 마무리해야 말라기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호식 씨에게 제일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관심이 말씀성취가 아니고, 예수와 우리를 직접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성취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는 바로 상대하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그의 [ 마태복음 강해 ]를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이렇게 시작을 하면, 시편에서는 다윗에게 어떻게 약속을 했는지를 살펴서 설교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신약의 본문을 바로 교인들에게 적용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교를 하면 교인들은 은혜를 받을지 모르지만, 말씀성취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이 너무 약하다(?). 설교집만을 내지 말고, 신학책도 내어서 자기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공부도 너무 폐쇄적으로 하지 말고, 두루 다 섭렵해서,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살펴야 한다. 교제를 조심하면서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이다.
⊙ 참된 엘리야의 역할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비로소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날이 닥친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12제자를 뽑은 것은 엘리야의 입장에 서서 이스라엘 중에서 남은 자를 건져 참 이스라엘을 구성하시려는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
(롬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롬 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롬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 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 주님이 12제자들을 뽑은 것은, 말라기에서 말하는 엘리야의 역할을 감당시키기 위함인데, 그러면 이들도 엘리야처럼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뽑힌 사람은 뽑아준 사람과 동일한 운명이 되는 것이다. 따로 논다면, 뽑아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 뽑혀서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이미 뽑힌 자는 그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 모세도 이미 운명이 결정되었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는 것도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히 11장에서는, 애굽의 영화가 문제가 아니고,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오직 뽑아준 사람을 바라봄을 감사한다는 것이다. 모세를 선택한 주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사도바울이 옛날 엘리야의 상황을 재차 언급하고 새롭게 적용하는 이유는,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세례요한이 죽은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배척을 받아 죽으셨고 바울 자신도 그런 심정이라는 것이다. (책)
* 예수님 때문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구약의 엘리야의 상황과 같고, 말라기에 또 다시 재현되어있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 엘리야 시절에 이스라엘 모두가 여호와를 버리게 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칠 천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서는, 구원의 대상이란 오직 여호와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고 그 은혜로 택함 받은 자뿐임을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다. (책)
* 이호식의 경우에는,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되고, 이 책에서는, '그러니까 모든 일은 주님이 말씀을 완성했다' 라고 되는 것이다. 방향이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주님과 교제를 하니까 기분이 좋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과연 엘리야 시대의 칠 천명이 주님과 교제를 하니까 기분이 좋았겠는가? 두려워서 벌벌 떨었던 것이다. 사도바울도 마냥 싱글벙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서 살았던 것이다. 구원의 확신과 같은 자기의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유일한 근거는 화목 제물임을 알아야 한다. 교제가 아니고 말이다.
☞ 하나님의 선택, 181 페이지
(눅 4: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 예수님께서 왜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한 과부 이야기를 하시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그 상황이 똑같다는 것이다. 그 때도 선택된 자만이 구원을 받고, 지금도 그러한 작업을 주님이 홀로 하신다는 것이다.
* 막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보고 있는데, 일부러 손 마른 병자를 고치셨는데, 안식일에 생명을 얻었으면 기뻐해야 하는데, 왜 바리새인들이 열을 받아서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을 했겠는가? 안식일 정도는 지킬 수 있는데, 왜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우리의 지킴을 방해하느냐는 것이다.
(막 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 3: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막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막 3: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막 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 우리는 어떠한가? 아마 예수님이 우리에게 집을 한 채 사주면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라면을 한 박스를 사 준다면 과연 좋아하겠는가? 너무 우리를 무시한다고 생각을 하지는 않겠는가?
*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참 뜻을 모르는 것이다. 참 안식일의 주인이 우리에게 생명을 그냥 주시는 것인데, 모든 것을 그 분이 다 베풀어주시는 것인데, 우리는 구별을 해서 양에 안 차면 섭섭해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 예수님이 오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라고 해서, 예수님이, '까불지마! 내가 알아서 다 한다' 라고 하면, 우리는 열을 받아서, 주님이 우리를 무시한다고 펄펄뛰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도와 주어야 한다면 예수님은 엘리야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혼자 다 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 없는 이근호를 만들어 놓았는데, 어떻게 이근호가 화를 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냉커피를 타서 커피는 자기가 다 마시고 주님에게는 얼음만 주는 것이다. 우리가 헌금 몇 푼 해놓고 얼마나 폼을 잡는가? 몽땅 다 주님의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몽땅 다 하시는 것이다.
* 이호식 씨의 설교집을 보면,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많이 있지만, 잘된 것도 많이 있다. 잘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7:3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너무 중구난방인데, 아마 박영선 목사의 영향을 받아서, 청중에게 따지고,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냥 선포해 버리면 되는데 말이다.
* 어제 주일 저녁설교를 하면서, 염려와 그 나라 의를 연관시켜서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시작하려는데 벌써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그것을 연결시키지 않고 그냥 끝내버렸다. 연결을 시키면 설교하는 사람은 정당할지 몰라도,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 대한 배려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으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고서 설교를 마친 것이다. 목사는 자기가 설교를 잘했다는 것에 대해서 벗어나야 한다. 염려와 그 나라 의를 연관시켜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내 백성 맞아!' 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 말을 가지고 요령을 피우는 것을 잘 끊는 분이 있는데, 바로 김달원 목사이다. 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시원한 것이다. 그냥 쏴 하고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를 배배꼬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는 완벽하게 하는지는 몰라도, 듣는 사람은 피곤한 것이다. 그것은 성격이 아니고 자존심이고, 교만이다.
◈ 신약 설교의 핵심은,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 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 지금은 종말이기에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듣는 사람들은 싫어해도 말이다. 사람은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리야가 다 이룬 것이다.
◈ 그러면 12제자가 보여주는 것은?
* 오직 예수만을 증거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아무리 전도를 많이 하고, 병자를 고쳐도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자를 보고 제자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 여기서 이근호와 이호식이 차이가 나는데, 이호식은 영의 구속은 1단계이고 몸의 구속은 2단계라고 하는데, 만약에 사람이 하면 1, 2단계가 있을지 몰라도, 주님이 하시기에 그런 것은 없는 것이다. 구원을 이해하기 싶도록 만들다보니 이런 단계가 나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구원단계는 치명적이다.
출처:십자가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