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시73편)
서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 73편 말씀은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은 누구인가하면 군대 지휘관들 가운데 찬양을 주관하는 이 사람들을 세웠다고 이 역대상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대상15:16-19) 이 사람의 역할이 무엇이었냐 당연히 음악 담당자, 악기라든지 찬양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주관하는 사람이었는데 또 역대상에 뭐라고 써 있냐면 선견자라는 표현도 나와요((대하 29:30→35:15, 대상 25:5). 선견자는 뭐냐 예언자와 비슷한 한데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대언한다면 선견자는 시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대언하던 사람입니다.
1. 이 시편은 악인의 형통에 대한 이야기예요.
즉, 누가 봐도 악을 행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바른 길을 걷지 않고 죄 가운데 행했던 그 사람이 그에 합당한 대가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는 나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고 그렇게 있는 모습처럼 묘사되어진 것이 시편 73편에서 묘사하는 악인의 형통입니다.
본 시는 아삽의 시로 알고 있습니다. 아삽은 다윗이 특별히 고르고 골라서 세운 사람이에요 군대 지휘관들과 함께 세웠다고 역대상에 기록되어 있는데 군대 지휘관은 능력도 뛰어나야 돼요 지휘관으로서 군인으로서 용맹함과 잘 싸우는 것은 기본이고 전략도 뛰어나야 되고 군인들이 따라서 싸우려면 리더십도 있어야 되고 순간적인 판단력도 있어야 되고 무엇보다도 왕에 대해서 충성심이 있어야 되니까 군대 지휘관을 왕이 뽑을 때 왕이 심혈을 기울여서 뽑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아삽을 뽐은 다윗은 어릴 때부터 살아온 것이 평탄치 않았습니다. 부모를 떠나서 또 아버지처럼 따르던 사울반응은 걸핏 하면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가 왕이 돼서 말년에 그가 바랬던 것은 혼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게 아니라 찬양을 주관하는 자들을 세워 가지고 우리가 온 백성이 함께 이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마음으로 이 사람들을 세웠던 겁니다.
아삽의 시편이 여러 편이 있는데 사실은 그냥 얼핏 읽어보면 이게 다윗이 쓴 건지 아삽 쓴 건지 그냥 느낌적으로는 잘 구분이 안 돼요. 그 만큼이 아삽과 다윗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었다는 거지요. 이 사람을 드디어 세워 가지고 이제는 나 혼자 평생 찬양하였던 그 여호와를 다같이 찬양하는 그 자리에 섰는데 도대체 아삽이 이 삶 가운데 무슨 경험이 있었기에 이토록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절규하였고 무슨 일로 악인들의 형통에 대해서 이토록 이렇게 시편으로 쓸 정도로 그가 속상한 마음이 있었는가? 다만 우리가 짐작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아삽이 다윗의 말년에 세워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솔로몬이 왕이 되고 성전을 지은 그 당시에도 활동을 했었고 그 이후에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다시 돌아와서 성전이 재건될 때도 이 아삽의 후손들이 다 이제 레위 지파 사람들이죠. 계속적으로 이 찬양에 관련된 사명들을 감당했을 것란 정도까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이제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되었고 솔로몬때 성전을 지었어요. 드디어 다윗의 꿈 ,어릴 때 도망 다닐 때 혼자서 찬양하던 선한 목자 되신 여호와를, 이제는 온 백성이 함께 찬양 할. 그 찬양대를 이끄는 담당자 선견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들이 세워졌을뿐만 아니라 성전까지 지어졌으니까 이제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예배를 드릴 수 있겠구나 얼마나 가슴이 설렜게는가 가히 짐작이 가지요. 그리고 드디어 그 성전이 완공되었는데 솔로몬이 거기까지는 참 잘했는데 그 다음에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들이기 시작하고 그 이방 신들까지 그리고 그 신들을 예배하고 또 그 이방 여인들을 통해 수많은 자녀들을 낳고 하여튼 저가 성전이 지어질 그 당시만 해도 이 아름다운 거룩한 성전에서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그 찬양을 올려드리고 그 제사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이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 깨달아지고 심겨지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볼 때 너무나 그 은혜와 기쁨이 컸을 텐데 오히려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우습게 아는 그 이방 여인들 그 여인들을 통해 태어난 자녀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예배를 모욕하는 수많은 우상 단지 이방신들을 예배하는 그 모습 속에서 이 아삽이 얼마나 절망했을까? 아마 마음이 찢겨지는 것보다 더 큰 고통 가운데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어찌 이 악인들을 그대로 보고만 계십니까라는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 10절에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리 하는도다..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이거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악인들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뭐 아는게 있어?’. 그런데도 그 악인들은 하나님이 징벌을 받기는 커녕 형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시편을 쓴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아삽은 이 악인의 형통에 대한 자신의 절망스러운 마음, 어떻게 이런 사람들은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고 오히려 강건하고 오히려 부요하고 그 가운데서 그 때문에 더 교만하여지고 어느 정도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근데 왜 이 사람들을 내버려 두십니까? 회의도 생겼습니다만 근데 이 아삽이 이 시편 뒤로 갈수록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내가 생각만 할 때는 판단만 할 때는 울분이 차오르고 분노가 일어나고 이해가 되지 않고 절망스러운데 이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면서부터 점점 분명하게 깨달아지는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악인들의 종말은 너무나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가 사ㄴ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거기 계시며 여러분의 모든 생각까지 행동까지 다 지펴보고 계시다는 거예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고 하는 그들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다 종말은 정해져 있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한 씨름은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산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참고 견디며 인내해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이 이렇게 믿음 안에서 참고 견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공의대로 갚아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2. 문제는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현실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빨리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악한 자들에겐 하나님의 심판과 벌이 바로 임하여 응분의 대가를 치루고 선한 사람에겐 하나님의 상이 내리길 원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악인들이 형통하고 선한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들을 반복해서 겪다보면 신앙적인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도대체 뭐 때문에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했나?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사는 것이 무슨 소용있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이 여전히 있기에 그 의미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것을 16절이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라고 표현 합니다.
아삽은 악인의 삶은 형통한데 선하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자신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것은 풀리지 않는 난제입니다. 그것을 이해해보려고 하고 할수록 고통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악인들의 마지막이 어떤 지를 바라보자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일들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17-20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을 멸시하시리이다.”성소에서 악인들이 당할 일들을 바라보자 악인들이 형통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단지 꿈속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삽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눈으로 악인들의 마지막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선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악인들은 그 죄악의 보응을 받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과 하시면서 붙들어 주셨고 때를 따라 주의 말씀으로 인도해주셨으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거하게 하실 것을 보았습니다. 23-24절“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것을 깨닫게 되자 아삽은 자신이 사모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현실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악인들이 누리는 부귀영화를 즐거워하며 그것을 부러워하지만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분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계속적으로 무엇을 아삽이 찬양하냐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하시며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군시절 힘들 때 ‘꺼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 말이 있듯이). 마지막에 뭐라고 그러냐면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가장 내가 누릴 수 있는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그리고 주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니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이렇게 이 시편의 고백이 끝나요
결론
여러분들 보시기에 악인이 형통하고 나는 여전히 고난 가운데 그 받은 상처조차 회복되지 못하고 낙심에 있으십니까 주님의 성소 안에서 여러분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살아 역사하시며 악인들의 종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은혜이고 여러분 이미 그것을 누리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악인이라도 내 건강도 뺏어갈 수 있고, 내 재물도 뺏어갈 수도 ,내 지기도 뺏어갈 수 있고 ,다 뺏어갈 수 있지만 악인들이 뺏어갈 수 없는게 무엇입니까?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이 은혜의 복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이 가장 큰 은혜이고 내가 힘들 때 내가 고통당할 때 내가 핍박 당할 때여호와가 나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삽은 이 시를 어떻게 마무리짓냐면 처음에는 이 악인들의 형통에 대해서 너무 분노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예배를 훼손하는 것에 대해서 절망이 되었지만 주님의 성소 안에서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내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그 누구도 맛보지 못한 함께 하심의 은혜를 누리게 하신 그 주님을 붙잡고 주님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그의 시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 은혜 앞으로도 여러분도 변함없이 누리시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여!
조급해 하지 마시고 낙심하지도 마시고요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끝까지 믿음을 붙잡고 나아가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으로 그 큰 복을 그 누구보다도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