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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사(源佛寺) 원문보기 글쓴이: 단현
위빠사나와 실천불교 사띠진명스님
이 글은 선암사 템플스테이와 재가자 교육담당 사띠 진명스님의 선암사 사보에 몇 차례 기고된 글을 단현이 소제목을 붙여 새로 편집한 것입니다.
1700년의 불교의 전통과 수행의 역사를 올곧이 전승해온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사보에 위빠사를 통한 실천불교를 쓰게 됨을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알아차림 합니다. 지금도 열정적으로 학인스님들에게 범음을 가르치시고, 선암사 중흥 그리고 중생들과 함께 하는 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경담 주지스님의 열정을 존경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지금의 시대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 우리 모두 깨어있는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위빠사나가 무엇인지 부터 알아차림 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2500년 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이룬 부처님의 깨달음은 불교의 처음이요 끝입니다. 그 깨달음을 진리로 풀어놓은 것이 불교의 모든 것이며, 그것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는 단순한 이론이나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깨달음을 향한 실천 즉, 수행과 일상생활에서 적용시켜 살아감을 요청합니다. 따라서 참 불교인은 수행과 정진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선업은 증장시키고 불선업은 방하착하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어떠한 것일까? 불교의 수행은 본질적으로 스스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실천과 노력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모든 것은 변한다. 부디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불방일에 대한 마음 알아차림의 당부도 이러한 불교적 실천, 수행의 성격을 잘 나타내 보여주시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한시도 마음을 방일하지 않으시고 사띠수행과 전법의 길을 가면서 중생과 함께하는 실천불교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부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인간으로써 완성을 이루시는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삶은 팔정도의 실천이었습니다. 일체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정진, 바른 관찰, 바른 선정의 여덟 가지 실천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 바른 실천이야말로 불교의 골수이자 모든 것입니다.
마음공부를 기본으로 하는 선(禪) 또한 그 근원을 팔정도에서 찾아야합니다. 팔정도 가운데서 특히 수행의 기본이 되는 실천은 바른 관찰, 바른 선정 즉 正念과 正定의 두 가지 입니다. 정정은 삼매에 드는 것이며, 정념은 통찰지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즉, 지관(止觀)이라고 할 때 止는 정정, 觀은 정념을 말합니다.
대승불교, 특히 중국에서 발달된 선 역시 그 뿌리를 정념과 정정의 실천에서 찾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러한 근본불교의 실천이 발달, 변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각국사 의천께서 중국에서 천태지관을 배우시고 들어오시어 조계산 선암사 대각암에서 천태지관의 법을 펴신것이 우리나라 실천불교의 근간이 되어왔습니다. 그럼 여기서 대각국사 천태지관과 위빠사나에 대해 고찰해보고 가겠습니다.
대각국사 천태지관과 위빠사나
지(止)와 관(觀)은 각각 범어 사마타(samatha)와 비파사나(vipasaana)를 한역한 것입니다. 먼저 지의 의미에 대해 대각국사님은 지란 제어하는 것이고 또한 그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억눌러서 유동하지 못하게 하므로 ‘제어한다(制)’고 하고,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뜻을 고정시키면 온갖 어지러운 생각이 쉬게 되므로 ‘그친다(止)’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란 일어나는 마음, 즉 생각을 제어하는 것과 생각을 한데 모아 잡념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란 자신의 뜻대로 일정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불쑥불쑥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선정에 들고자 마음을 다잡을 때는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해야 하는데 뜻하지 않게 불쑥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빨리 알아차림 하여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집중수행이 잘 되면 온갖 잡념이나 망상 등의 거친 생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는데 이를 그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제어하여’ 잡념을 ‘그치는’ 작용을 ‘지’라고 한다는 것이 천태대사의 정의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작용과 끝없이 이어지는 망상, 그리고 의식 자체에서 미세하게 이어지는 생각의 작용들을 모두 그치도록 하는 것이 ‘그침’으로서의 지입니다. 선정에 들기 위해 마음을 제어하되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이어지지 않도록 제어하여 거칠거나 미세한 생각들이 모두 그치도록 하거나 사제의 진리에 생각을 집중시키다가 진리를 보면 거기에 안주하여 체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마타수행의 이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 째. 위빠사나수행을 제대로 하기 위한 기초가 됩니다. 위빠사나수행을 잘 하기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집중력이 결여되면 번뇌 망상에 휘둘려 허상의 집만 여러 채 지어가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삼매는 위빠사나수행을 분명하게 하여 통찰지가 일어나게 하고, 반면 위빠사나는 삼매를 방해하는 것들을 소멸시켜 선정에 들게 도와주는 상호보완적 역할을 합니다. 둘 째. 선정상태에 들어가면 선정상태에서의 기쁨과 희열 그리고 고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셋 째. 신통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넷 째. 이 생에서 죽은 뒤 다음 생에는 색계, 무색계세상에서 범천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다섯 째.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불교 수행의 목적은 모든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에 있으며 그것은 통찰지를 계발하여 지혜를 드러나게 하여 일상생활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지혜를 발견하는 수행법은 위빠사나수행이며,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몸과 마음의 현상을 관찰하여 진리를 체득함으로써 열반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위빠사나라는 빨리어는 '위'와 '빠사나'의 복합어입니다. '위'는 '여러 가지'라는 뜻입니다. '빠사나'는 꿰뚫어 본다' 또는 '통찰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여러 가지를 꿰뚫어본다, 또는 여러 가지를 통찰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가 알아차림 하여 봅시다. 모든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에서 나타나는 무상,고, 무아의 삼특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움직이는 모든 현상들을 삼특상으로 관(觀)하는 심동관(心動觀)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사띠를 두고 있는 그대로 보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진봉이 미얀마에서 직접 위빠사나수행을 하면서 체험하고 발견한 것은 이 수행법은 점차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근기에 따라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수행법이라는 것입니다.
진봉은 위빠사나 수행 중에 원효대사가 중국을 가지 않으시고도 지관법을 아셨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스님임을 확인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암사에와서 의천대각국사가 중국의 천태지자의 법을 이어 천태지관법을 펴신 것이 진정 감동의 물결로 다가왔습니다.
선암사에는 대웅전과 각황전에는 석가모니 한 분씩만 모셔져 있는 진정으로 위빠사나 수행도량이 면면히 살아 움직이며 때를 준비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각황전의 철불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의 가사를 입고계시며 항마촉지인을 하시고 모든 마구니를 항복받은 모습으로 선암사를 지키고 계시니 최적의 전법의 도량입니다.
의천대각국사께서 선암사 말사인 대각암에서 크게 깨달은 법이 지관법이니 어찌 선암사가 위빠사나수행도량의 근원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선암사는 위빠사나 수행도량으로 의천 대각국사의 천태지관의 실천적 수행법 즉 사마타수행과 위빠사나수행을 중생들과 함께 실천하는 수행도량으로 선교양종의 위상을 바로 세울 시기입니다.
천태지관의 현대적 의의와 지관법과 여러 수행법과의 관계를 마음챙김 하여 봅시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이라고 통칭되는 불교의 수행이란 지와 관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와 관으로써 불교수행의 원리를 밝히면 현재 불교의 각 종파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수행법들도 지관으로써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계종에서 권장하는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은 오로지 화두에 마음을 매어두는 것이므로 계연지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콧마루나 단전이라고 하는 시각적 대상(色境)을 떠올려 그것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나 화두라고 하는 정신적 대상(法境)을 떠올려 그것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은 원리상 전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천태종의 관음수행과 진각종의 진언수행도 계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음수행이란 보살의 모습이나 공덕을 떠올리며 의식을 작용시키는 염불과 달리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소리(聲境)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일체의 다른 생각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육자진언을 구송하는 진각종의 수행법도 오로지 육자진언만 외우는 무상삼밀(無相三密)의 경우는 수행원리가 천태종의 관음수행과 똑같습니다. 요컨대 간화선은 화두에, 관음수행은 보살명호에, 진언수행은 육자진언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일체의 다른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계연지를 행하는 수행인 것입니다.
이 차이를 찾는다면 간화선의 경우 집중이 강해지도록 하기 위해 간절한 의심(疑團)이 일도록 하고, 관음수행이나 진언수행은 불보살의 가피력에 일정 정도 의지하고자 하는 점입니다.현재 우리나라 불교의 4대 종단에서 주로 행하는 참선법은 그 원리가 계연지로서 이루어지는 데 반해, 새롭게 남방불교에서 수입된 비파사나는 말 그대로 관법(觀法)수행입니다.
현대생활의 어려움을 불교 수행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수행 이론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조계종이나 태고종 등 전통종단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가풍 때문에 이론 방면이 미약하고, 천태종이나 진각종 등 새롭게 창건된 종단은 아직 수행 이론이 체계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주요 종단에서 행해지는 수행법이 모두 지와 관을 원리로 삼고 있음을 안다면 그 수행 이론 또한 천태지관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원돈지관에만 주목하지 않고 점차지관에 눈을 돌린다면 천태의 지관의 실천수행법은 현대 불교의 각종 수행 원리와 방법론에 대한 훌륭한 수행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입니다.
이 진봉은 사띠를 심동관(心動觀)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대상의 움직임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식과 느낌 그리고 미세한 감정들을 보고 알아차리면서 무의식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없어서는 안 될 근본적인 수행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띠를 우리는 정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빠싸나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움직임을 마음챙김 하면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연속이 되어 선업을 증장시키고 불선업은 방하착하는 실천적 수행법인 것입니다.
이 실천법은 부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마음공부로 지금까지 남방불교의 여러 나라에 전승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미국을 위시한 서양에서 수행불교가 열풍적으로 보급되고 수많은 위빠사나 명상센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띠는 어려운 것인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시고 45년 동안 한 순간도 방일하지 않으시고 전법의 길을 가셨던 가장 근본적인 수행법이 바로 사띠입니다. 사띠는 가장 기초이자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알아차림입니다. 그럼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띠에 대해 알아차림 하여 봅시다.
빨리어는 붓다 당시 서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중생들의 눈높이 맞춤과 대중성을 위한 부처님의 자비심의 표현입니다. 인도의 최상류층인 바라문 사제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채택하여 사용하지 않으시고 서민들의 방언인 빨리어를 선택하여 중생들을 위해 법문을 설하시었습니다.
빨리어는 문자가 없어 초기 비구들에 의해 낭송되어 계승되어 오던 것을 스리랑카에서 자국어로 나뭇잎에 기록한 것이 최초의 빨리어 경전입니다. 빨리어는 붓다께서 직접 사용하신 언어입니다. 또한 붓다께서는 제자들이 전법의 길을 가면서 빨리어로 법을 전하라고 말씀하셔서 제자들도 빨리어를 사용했습니다.
빨리어를 낭송할 때는 음률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진봉이 미얀마 수행센터에서 밤에 좌관을 할 때 적막을 뚫고 비구가 빨리어 경전을 밤새워 낭송하는 소리를 들을 때는 한편의 음악을 듣는 듯이 아름다웠습니다. 부처님의 열반 후에 초기부터 방대한 양의 경전을 이렇게 낭송해서 잊어버리지 않고 후대까지 전했던 비구들의 신심과 부처님에 대한 불퇴전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위빠싸나(vipasssanaa)와 사띠(sati)에 대한 용어 이해
위빠싸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위빠싸나(vipasssanaa)와 사띠(sati)에 대한 용어를 알아차림 하여 봅시다. 의빠싸나수행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꿰뚫기 위해서는 위빠사나와 사띠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위빠싸나(vipassanaa)는 위(vi)라는 접두사에 빠싸나(passanaa)라는 말의 합성어입이다. 모음(母音) 앞에 접두사로 붙는 위(vi)는 분리, 다름, 여러 가지 등의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내용은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三法印)을 의미합니다. 세 가지 법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핵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빠싸나(passanaa)는 직관(直觀), 통찰(洞察), 철견(徹見), 간파(看破), 응시(凝視), 관찰(觀察), 수관(隨觀. 계속해서 본다.), 꿰뚫어 본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 같이 알아차림의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싸나(vipassanaa)는 올바른 직관, 통찰력, 명확한 관찰, 여러 가지를 꿰뚫어 봄, 삼특상을 직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적인 뜻의 위빠싸나는 신, 수, 심, 법이라는 사념처를 통찰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물질과 마음을 대상으로 통찰한다는 것입니다. 사념처 또는 위빠싸나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방법입니다.
위빠싸나는 어떤 종교이든지 할 수 있는 수행법이고, 어느 누구나 가장 쉽게 일상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이상적인 수행법입니다. 종교를 초월하고 모든 인류의고통받는 인간 모두에게 필요한 위빠싸나는 상좌불교의 전유물이 아니고 수행하고 있는 모든 수행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위빠싸나는 수행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며 알아차릴 대상은 사념처인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위빠싸나는 통찰력을 의미하는 꿰뚫어 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은 궁극적으로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지혜를 얻기 위해서 대상의 모양을 보지 않고 빠라마타(paramattha. 실재. 성품)를 알아차리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통찰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위빠싸나는 통찰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없는 오직 유일한 길이라고 부처님께서 직접 "와서보라 붓다는 비밀이 없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통찰을 해야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겨야 사물의 본성을 바로 알아 집착을 끊게 되고 이 과정을 거쳐 궁극의 열반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통찰해야 하기 때문에 깊은 삼매에 빠지면 안 되고 가볍게 찰나삼매에 들어야 합니다.깊은 삼매에 빠지면 대상에 빠져서 고요함밖에 없기 때문에 찰나삼매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위빠싸나와 사마타(samatha) 수행의 차이이기도 커다란 차이입니다.
위빠싸나라는 말은 불교수행법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위빠싸나와 사띠라는 말은 같은 의미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위빠싸나를 하되 수행을 할 때는 사띠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 위빠싸나는 통찰, 또는 관찰이고 사띠는 알아차림입니다.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알아차림 하는 것이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빨리어 사띠(sati)는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기억, 알아차림, 주의 깊음, 주시, 의식, 인식, 염(念), 마음 챙김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억이란 말입니다. 사띠를 기억이란 말로 번역은 하지 않지만 기억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온전한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기억이란 바탕에 입각해서 인식할 때 정상적으로 인식을 합니다.
사띠에서 말하는 기억은 과거를 기억하는 의미의 뜻도 있지만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한 것입니다. 현재의 이 찰나에 깨어있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핵심입니다. 항상 찰나에 깨어있는 마음의 움직임이 사띠(알아차림)라는 것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띠(sati)는 마음이 일으킨 선업을 증장시키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이 상태를 방일하지 않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선업의 마음상태이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하면 계율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통찰지가 일어나 지혜가 성숙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탐, 진, 치가 방하착이 되어 그것 자체가 선업이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사띠(sati)는 기억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데 대체로 알아차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한다고 하는 사띠는 저 스스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대상에 마음을 붙여주는 역활을 합니다.
사띠와 오온의 관계에 대하여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안, 이, 비, 설, 신이라는 오근은 식(識)을 의지처로 하고 식은 사띠를 의지처로 하고, 사띠는 해탈을 의지처로 하고, 해탈은 열반을 의지처로 한다." 라고 사띠와 오온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띠의 중요성은 오온을 알아차려서 닙바나에 이른다는 것이 위빠사나수행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사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은 새로 마음을 내서 각성(覺醒)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는 집중도 없고 무엇을 하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서 하는 무의식적인 것인데 알아차림은 현재, 하고 있는 행위나 마음의 상태를 분명하게 의식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띠(sati)라는 알아차림은 사띠(sati) 하나로써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삼빠쟌나(sampaja~n~na, 正知)라는 마무리가 필요합니다. 삼빠쟌나를 분명한 앎이라고 합니다. 알아차림과 함께 항상 분명한 앎이 필요합니다. 삼빠쟌나라고 하는 분명한 앎은 알아차림을 좀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네 가지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알아차림에 이익이 있거나 유용한 것인지 둘째 시기 상황이 적절한지, 셋째 불필요한 대상이 아니고 알아차릴 대상의 범주에 있는 것인지, 넷째 어리석지 않게 삼특상의 지혜를 알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의 기본이 되는 사띠빠타나 숫따(satipa.t.thaana sutta, 念處經)경전이 있습니다. 사띠빠타나는 사띠(sati)와 파타나(pa.t.thaana)의 합성어인 사띠(sati)는 알아차림이라는 말이고, 파타나 (pa.t.thaana)는 확고하고 움직이지 않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확고하고 부동의 알아차림'이란 말이 사띠빠타나의 뜻입니다.
사띠빠타나 숫따(Satipa.t.thaana sutta)라고 하는 염처경(念處經)의 핵심은 신, 수, 심, 법이라고 하는 네 가지를 확고하게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념처(四念處) 수행 또는 네 가지 알아차림확립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여 말하자면 통찰(洞察) 또는 관찰(觀察)인 위빠싸나(vipassanaa)는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이란 네 가지 알아차림(四念處)이라고 하는 사띠빠타나(satipa.t.thaana)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찰(洞察)함에 있어서 수행을 할 때는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으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또한 언제나 사띠(sati)는 삼빠쟌나(sampaja~n~na)라는 분명한 앎이 항상 따라다니며 함께 있어야 완전합니다.
이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기본적인 알아차림입니다. 위빠싸나(vipassanaa)라는 뜻이나 사띠파타나(satipa.t.thaana)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확립, 또는 염처(念處)나, 사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은 종합적이면서도 세분화 되어 조금 다르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위빠사나수행을 함으로써 우리는 긍정적인 마음의 알아차림의 힘을 강화시켜, 이 알아차림의 힘이 꾸준히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정진하는 과정입니다.
위빠사나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인 통찰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다섯 가지가 필요합니다. 신심, 노력, 알아차림의 힘, 집중, 지혜입니다. 특히 집중 위빠사나 수행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집중수행을 하게 된다면 변함없는 확고한 신심, 힘찬 노력, 깊은 집중, 예리한 알아차림, 갈수록 깊게 펼쳐지는 통찰지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위빠사나수행의 최종 성과물인 통찰의 지혜는 현실세계의 진리를 꿰뚫어보는 마음의 알아차림의 힘인 것입니다. 이 통찰지가 무명과 무명의 결과인 고(苦), 번뇌, 망상, 무지함 그리고 모든 형태의 불행의 요소들을 소멸시켜버리고 행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의 힘을 계발시키려면 반드시 적절한 정진이 있어야합니다.
첫 째, 의식의 대상인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항상 찰나생 찰나멸 한다고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둘 째,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조심조심하면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셋 째, 대상에 마음챙김을 놓치지 않아야합니다. 넷 째, 수행이 잘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합니다.(수행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좋은 환경 속에 보다 더 빨리 수행이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섯 째, 예전에 수행이 잘 되었던 환경이나 마음가짐 등을 참고하여 그런 환경을 조성하거나 마음가짐을 다시 되새김하여 정진하는 것입니다. 여섯 째, 통찰지가 생겨나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의 힘을 지속적으로 정진합니다. 일곱 째,수행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하고자하는 마음가짐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여덟 째, 역경과 장애가 오면 올수록 수행의 영양분으로 삼아 더욱 더 분발하여야 합니다. 아홉 번째는 해탈, 열반이라는 목표에 이를 때까지 계속 수행에 임하겠다는 서원을 세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모든 대상 즉 정신적 현상과 신체적 현상의 찰나생 찰나멸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림 하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불안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세상에 ,모든 스승들이 말씀하신 평온함과 고요함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구나!'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알아차림의 힘은 집중을 가져오는 선구자 역할을 합니다. 매순간 알아차림의 힘이 대상을 꿰뚫을 때, 마음은 안정되고 흩어지지 않고 집중됩니다.
이렇게 믿음, 노력, 알아차림의 힘, 집중으로 서서히 위빠사나수행이 깊어지게 되어 자연스럽게 통찰지인 혜탈의 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의 힘은 집중을 하게끔 하여 줍니다. 찰나찰나 알아차림의 사띠의 힘이 관찰대상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은 분별심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본질들을 꿰뚫게 됩니다.
알아차림의 힘이 강화되어 수행이 잘 되고 있을때는 정신과 물질이 인연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짐을 체험하게 됩니다.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와서 보라!" '곧 증명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정신과 물질의 인과관계를 통찰지로 알게되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명상수행 중에 "아! 이렇구나 모든 것들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구나! 그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아이구나"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은 평온함과 고요함을 가져다줍니다. 1차적으로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고(苦)이고, 그리고 무아(無我)임을 통찰하게 되는 실질적인 위빠사나 수행의 결과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재가자도 수행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잠깐 재가불자의 위빠사나 수행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법구경 35게송의 인연담에 나오는 우바이 마띠까마따(Matikamata) 이야기입니다.
한때에 60명의 비구가 부처님께 명상수행의 주제를 받고서 산기슭의 마띠까 마을에 갔다. 거기서 촌장의 아내 마띠까마따가 그들에게 음식 공양을 하였다. 또한 그녀는 절을 지어 주어서, 비구들은 우기(雨期)에 그 마을에 머물 수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비구들에게 명상수행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비구들은 몸의 부폐와 해체를 깨닫도록, 몸의 32가지 구성요소에 대해 관찰하는 명상(身念)을 가르쳐 주었다. 마띠까마따는 열심히 수행하여 비구들보다 먼저, 세 경지의 길과 열매를 얻고, 더불어 "걸림 없는 분석적 통찰력"(無碍解)를 얻었다. 마띠까마따는 "길"과 "열매"의 환희심에서 깨어나서 천안통(天眼通)으로 바라보았었다. 그 비구들을 보았더니 아직 아무도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없었다. 그 비구들이 아라한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며, 알맞은 음식을 섭취해야 하겠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비구들을 위해 좋은 음식을 준비하였다. 알맞은 음식과 바른 노력으로 비구들은 바르게 정신집중을 할 수 있었고, 결국 아라한의 경지를 얻었다.
이런 마띠까마따 우바이의 보시 공양으로 스님들도 성취를 이루셨다.
우기가 끝나고, 비구들은 부처님이 계시는 제따바나 절에 돌아왔다. 그들은 부처님께 모두가 건강하였고 편안한 환경에서 수행하였으며, 음식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다. 또한 자기들의 공부를 염려 해주고, 알맞는 음식을 해준 마띠까마따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어떤 비구가 그것을 듣고, 자기도 그 마을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명상수행의 주제를 구해서 그 마을의 절에 갔다. 거기서 보니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띠까마따가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띠까마따가 오기를 바라면 그녀가 좋은 음식을 가지고서 절에 왔다. 식사 후에 마띠까마따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질문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하겠지요." 그래서 그 비구는 생각했다. "다른 속세의 중생처럼 나는 어떤 불순한 생각을 좋아하는데, 이 여인은 분명히 그걸 알아낼 거야." 그래서 겁이 나서 제따바나 절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부처님께 그녀가 자기의 불순한 마음을 알아차릴 것 같아 두려워서 마띠까 마을에 머물 수가 없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에게 하나만이라도 지키라고, 즉 마음을 다스리라고 분부하셨다. 또한 마띠까 마을의 절로 돌아가서,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명상수행의 주제만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비구는 다시 마을에 왔다. 마띠까마따는 전에 다른 비구들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음식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움 없이 명상 수행에 진력할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 비구 또한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
이 인연담에서 보듯이 얼마든지 재가불자도 보시와 지계 그리고 위빠사나수행으로 도과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수행자들이 섭생의 중요성을 알아차림 할 수 있는 좋은 경전의 내용입니다. 우리 수행자들도 이제는 자신의 체질에 맞는 알 맞는 음식을 섭생함으로서 평온한 마음의 환경을 만들어 보다 더 좋은 조건지어짐 속에서 아나빠띠사띠수행을 한다면 도과를 빨리 성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띠를 하면서 생활한다면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는 좋은 수행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인간으로써 인간의 삶의 완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현대의 경쟁 속에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우리들로써는 실천할 수 없다든가, 진정한 불자가 되려면 속세에서 떠나 산사나 명상썬터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부처님의 인간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오해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가수행자나 집에서 가족과 함께사는 재가불자들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반열반에 드시는 45년 동안 한 순간도 사띠를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모든 중생들에게 설법하시고 인간으로써의 수행과 정진의 삶을 하나도 남김없이 보여주시고 잘 가시었습니다. 우리 재가불자들도 기본적으로 삶에서 사띠를 하면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누구나 열반의 언덕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시었습니다.
이 세상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출가 수행자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교의 사상이나 수행이 숭고하고 거룩하다고 할지라도 현대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이 적용되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불교의 진정한 정신을 이해한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자비심을 가지고 나누며 실천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대한 상수제자 법의 사령관이신 사리뿟자 존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수행자라도 악하고 불건전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면, 숲 속에 외딴 거처에 살면서 걸식자로 탁발하고 분소의를 입고 거친 옷을 걸치고 지낸다고 해도, 그를 동료 수행자들이 존경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예경하지도 않는다. 어떠한 수행자가 악하고 불건전한 욕망을 버린다면, 속세에 살면서 식사하고, 가정의 옷을 입고 지내도, 그를 동료 수행자들이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경한다."
우리수행자님들도 한번쯤은 사리뿟다 존자가 말씀하시는 것과 비슷한 조용한 산사에 서 수행하면서도 마음속은 번뇌망상이 드글드글 하다면, 시끄러운 시장바닥에서도 마음이 조용한 범부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육식에 관한 이야기
마띠까마따 이야기에서 음식이야기가 나와서 육식에 대한 것을 짚고 넘어가보자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육식을 전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스님들이 육식을 하면 사이비스님 땡중이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초기불교에는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절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해 놓은 계율은 없습니다.
팔리 {율장(律藏)} [소품(小品, cullavagga)]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사촌인 데와닷타비구가 율법조항을 명백히 하고자 다음과 같이 육식 등 다섯 가지 사항을 세존께 제안했습니다.
① 비구들은 평생토록 산림에서 거주해야 하며 마을[村邑]에 거주하면 죄가 된다. ② 비구들은 평생토록 걸식해야 하며 청식(請食)을 받으면 죄가 된다. ③ 비구들은 평생토록 분소의(糞掃衣)를 입어야 하며 거사의(居士衣; 재가 신자가 보시한 옷)를 입으면 죄가 된다. ④ 비구들은 평생토록 나무 아래에서 거주해야 하며 집 안에서 거주하면 죄가 된다. ⑤ 비구들은 평생토록 물고기와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야 하며 먹으면 죄가 된다.
데와닷따 다섯 가지 제안사항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은 반대 의견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비구는 원에 따라 산림에 머물러도 좋고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 ② 비구는 원에 따라 걸식을 해도 좋고 청식을 해도 좋다. ③ 비구는 원에 따라 분소의를 입어도 좋고 거사의를 입어도 좋다. ④ 8개월 동안은 나무 밑에서 좌와(坐臥)해야 함을 인정한다. ⑤ 스스로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거나 죽였다는 소리를 듣거나 그런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은 먹어도 좋다.
이러한 붓다의 답변에 데와닷따는 승복하지 않고, 500명의 비구들을 데리고 교단을 떠나 별도의 상가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갔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부처님은 다만 재가자들에게 "산 것을 몸소 죽여서는 안 된다. 또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도 안 된다. 난폭한 짓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걸식(탁발)을 나간 수행자는 누구 주든지 무엇을 주던지 자기의 알음알이로 "나는 채식을 좋아 합니다" "나는 육식을 좋아 합니다"이런 상이 있는 마음으로 공양물을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걸식은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명상주제를 알아차림 하는 중요한 수행의 시간이기 때문에 어떠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오로지 명상주제인 공양에 대한 고마움과 네 가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저 진봉이 체험한 남방불교에서는 더운 나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나 미얀마 명상센터에서는 생선과 육식이 제공되고 남방스님들은 아무런 장애 없이 공양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이 육식을 하면 사이비스님취급을 받고, 스님들도 눈치 보면서 공양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그런 법이 나왔는지 스님들과 수행자들은 육식과 오신채를 먹지 않아야 청정한 수행자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생겼습니다. 중국을 거쳐 불교가 들어오면서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가 신선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봅니다.
이제는 불교도 부처님이 "와서 보라!" "비밀이 없다"말씀하신 것처럼 경전에 입각해서 설법하고 부처님의 말씀이 전해 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사견을 넣어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다, 그러니 믿어라! 이런 식으로 중생들을 가르친다면 커다란 불선업을 쌓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부처님의 경전의 말씀을 공부하고 이해하고 나서 그 경전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불자님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수행자들과 스님들의 역할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잘 양념하여 중생들을 유혹한다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바라시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진실을 두고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노력할 때 불교는 살아날 것입니다.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많이 전하고 알려줄 때 불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밀함과 실천불교가 되어 부처님의 참 마음이 널리 전파 되리라 알아차림 하여 봅니다.
사띠진명 - 원불사 지도스님
원불사한국불교개혁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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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와 실천불교 - 사띠진명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