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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과 문화 콘텐츠>, 소명출판, 2022년 12월 10일.
신동엽이 읽은 김소월의 「초혼」 다시 읽기
맹문재
1.
신동엽이 김소월의 「초혼」을 읽고 해설을 덧붙여 사람들에게 소개한 일은 최근에 알려졌다. 2018년 이대성 연구가가 신동엽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던 신동엽이 쓴 방송대본 육필원고를 발굴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그 원고는 1967년 동양라디오의 심야 프로그램인 <내 마음 끝까지>에 사용되었다. 당시 청취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밤을 잊은 그대에>의 바로 앞 시간에 배치된 프로그램이었다.
신동엽이 방송 대본에서 소개한 시작품은 타고르의 「내가 혼자」, 헤르만 헤세의 「안개 속에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나의 길」, 포르의 「윤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마음 무거울 때」, 딜런 토머스의 「내가 먹은 이 빵은」, 예이츠이 「시골로 가자」, 발레리의 「석류」, 로랑생의 「갑갑한 여자보다」, 그리고 김소월의 「초혼」 등이었다. 서정주의 시를 소개한 것이 눈길을 끄는데, 그의 친일 활동을 미처 알지 못했고, 동시대의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동엽은 시작품 외에도 소설, 수필, 희곡, 철학서 등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 청취자들에게 소개했다. 가령 한흑구의 수필 「보리」, 김진섭의 수필「주부를 노래함」「백설부」,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 그리고 입센, 니체, 톨스토이 등의 작품에서 좋은 문장을 뽑아내 소개한 것이다. 아울러 작가의 생애를 소개하기도 했다.
신동엽학회에서는 신동엽의 방송대본을 살려 2018년 10월 6일부터 11월 17일까지 총 7회에 걸쳐 팟캐스트로 방송했다. 신동엽 시인이 국어 교사로 재직했던 명성여고(현 동대부여고) 학생들이 시를 낭송했고, 정우영 시인이나 김응교 시인 등 신동엽학회 회원들이 출연해서 작품의 의미와 신동엽의 삶 등을 소개했다. 필자도 출연할 기회를 얻어 신동엽이 읽은 김소월의 「초혼」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박민영 학생이 「초혼」을 낭송했는데, 그 방송은 ‘팟빵’(podbbang.com)에서 볼 수 있다.
신동엽이 쓴 방송대본 「내 마음 끝까지」는 2019년 강형철과 김윤태가 엮은 『신동엽 산문전집』(창비)에 수록되어 김소월의 「초혼」에 대한 신동엽의 해설을 보다 편리하게 읽어볼 수 있다.
2.
산산히 부서진이름이어!
虛空中에 헤여진이름이어!
불너도 主人업는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이름이어!”
心中에남아잇는 말한마듸는
ᄭᅳᆺᄭᅳᆺ내 마자하지 못하엿구나.
사랑하든 그사람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붉은해는 西山마루에 걸니웟다.
사슴이의무리도 슬피운다.
ᄯᅥ러저나가안즌 山우헤서
나는 그대의이름을 부르노라.
서름에겹도록 부르노라.
서름에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소리는 빗겨가지만
하눌과ᄯᅡᆼ사이가 넘우넓구나.
선채로 이자리에 돌이되여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이름이어!
사랑하든 그사람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 김소월, 「招魂」 전문
위의 작품은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에서 간행된 『신달내ᄭᅩᆺ』(164~165쪽)에 수록된 것이다. 『신동엽 산문 전집』에 수록한 작품은 현대 맞춤법과 띄어쓰기 규정에 따른 것이기에 읽기가 수월하지만, 행갈이 등이 원본과 차이가 있다. 가령 원본의 4연 4행 전체에서 앞의 2행인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설움에 겹도록/부르노라”를 4연으로, 뒤의 2행인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를 5연으로 구분한데다가, 4연 2행을 2~3행으로 행갈이 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원본 3연 2행의 “사슴이의”를 “사슴의”로 오식하고 있다. 물론 신동엽이 방송대본에서 쓴 원고를 그대로 살려 놓은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본과 대조를 해서 그 사항을 밝혔으면 좋았을 것이다.
초혼(招魂)이란 사람이 죽었을 때 육체를 떠나는 영혼을 부르는 일이다. 임종 직후 지붕에 올라서거나 마당에서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은 허리에 댄 채 북쪽을 향해 죽은 이의 혼을 세 번 부른다. 이와 같은 의식은 고대로부터 전해 온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는 사고와 원초적인 주술 사고가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죽은 이를 살리고자 하는 유족의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작품의 화자가 육신이 없는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는 것이 그 모습이다. 화자는 “산산히 부서진이름이어!/虛空中에 헤여진이름이어!”라고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부르는데, “부르다가 내가 죽을이름이어!”라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려고 한다. “心中에남아잇는 말한마듸는/ᄭᅳᆺᄭᅳᆺ내 마자하지 못하엿구나.”라고 토로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안타까워 “서름에겹도록 부르”는 것이다.
화자는 “선채로 이자리에 돌이되여도/부르다가 내가 죽을이름이어!”라고 호소를 마무리 짓는다. 자신이 망부석이 될 때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부르는 화자의 목소리는 처절하다. 유한한 존재로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사랑의 한계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도 큰 것인지를 깨닫는다.
3.
필자는 신동엽이 청취자들에게 소개한 김소월의 「초혼」을 읽으며 그 대상이 누구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정말 김소월이 그토록 사랑한 사람이 있었을까, 궁금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김소월의 생애에 관심이 들었는데, 마침 근래에 읽은 한 자료가 떠올랐다.
이 자료는 1939년 6월호로 간행된 『여성』(96~100쪽)에「소월의 생애」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김억이 구술한 내용을 백석이 옮겨 적은 것이다. 김종욱 서지학자가 발굴한 것을 최동호 교수에게 전해 2017년 『서정시학』 봄호에 소개되기도 했다.
소월은 1902년 평북 정주에 있는 곽산의 남산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금광에 종사해 집안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일찍부터 정신 이상자여서 소월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났다. 소월은 15살 때 그보다 세 살 위인 홍상일과 결혼했다. 구성에서 태어난 순박하고 어여쁜 시골 처녀였는데, 소월은 아내를 굳게 사랑했다.
소월은 장가를 든 해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오산은 곽산에서 50리를 나와야 했는데, 신문화의 발상지였다. 소월은 그곳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는 안서 김억을 만나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소월은 누구보다 문학에 대한 정열과 재질이 뛰어났다. 『진달래ᄭᅩᆺ』에 수록된 상당수의 시들은 오산학교의 기숙사에서 초고로 쓴 것이었다. 소월은 다감하게 시를 썼지만, 마음은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이 성실하고 학과 성적이 우수해 15~6개 과목에서 체조가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을 뿐 모두 9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소월은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배재에서도 학교 성적이 우수해 우등생의 영예를 차지해 동향의 선배와 친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월은 키가 작고, 몸집이 가냘프고, 살결이 까무잡잡하고, 얼굴이 동글납작했는데, 눈은 샛별같이 빛났다. 소월은 내심이 상냥한 면이 있었지만 차디찬 샛님이었다. 냉정하고 이지적인 사람으로 할 것은 한다 하고 못할 것은 못한다고 분명하게 처리하는 성격이었다.
소월은 배재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조선인 학생이 일본의 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문학하는 사람이 장사나 돈을 모을 궁리를 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던 때였기 때문에 그의 상과대학 진학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소월은 동경에서 1년가량 보내다가 인생에 큰 회의를 품고 상과대학 공부조차 헛된 것으로 여기고 귀국했다.
소월은 서울에 머무르면서 나도향과 염상섭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소월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절제해 취하지는 않았다. 소월은 ‘카이다’란 비싼 담배를 비울 정도로 사치를 내기도 했고, 술좌석에서나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는 자리에서는 자작시를 읊기도 했다.
소월은 서울에서 한두 달 지내다가 고향인 곽산으로 내려갔다. 소월은 그곳에서 서울을 그리워하지 않고 향리에서 사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오산학교에서부터 써서 동경으로 서울로 끌고 다닌 시들을 정리해 마침내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그렇지만 소월은 시골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기가 어려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술집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곳에서 한 여성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어디론가 떠나버려 소월은 헛된 사랑에 쓸쓸하게 웃고 돌아섰다.
소월이 3~4년 동안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이에 가정이 어려워졌다. 할아버지의 광산업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월을 남은 가산을 정리해 장이 서고 면사무소가 있는 구성의 남시라는 곳으로 이사했다. 소월은 그곳에서 얼마 가진 현금으로 대금업을 시작했다. 몇 해만 하면 돈을 잡는다고 슬픈 자랑을 했다.
몇 해 지나 소월은 돈을 벌려고 하는 자신의 삶에 회의가 들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흥미나 애착이 없었다. 아내에게도 술을 권했는데, 잔을 받지 않으면 화를 내었다. 어쩔 수 없이 술을 배운 아내는 점차 술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월은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 채 노래를 부르며 남시 거리를 지나다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1934년 어느 가을밤 소월은 아내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또 술상을 대했는데, 그날 밤 세상을 떴다. 서울에 머무를 때 나도향이 술을 먹으면 울고, 염상섭이 술을 먹으면 탈선하던 모습을 보며 웃었던 그가 술에 빠져 살다가 세상을 뜬 것이었다.
소월의 유족으로는 구생, 구원이라는 딸 둘과 아들 넷이 있었다. 딸들은 결혼해서 잘 살았고, 맏아들 준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삭주 광산에서 일했다. 윤호, 정호, 낙호는 미망인과 정주 곽산에서 지냈다. 소월의 묘는 구성 남시에 있었다. 미망인은 남편의 묘를 곽산으로 옮기고 비석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4.
소월의 생애를 보면 「초혼」에서 처절하게 부른 상대는 실제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술집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여성이 있었지만, 작품에 나타난 것처럼 절박한 정도의 인연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그 여성은 소월이 시집을 간행한 뒤에 만났고, 이 세상을 뜬 것도 아니었다. 또한 소월의 이지적이고 냉철한 성격으로 봐서 사랑하는 대상이 여성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그에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연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은 가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초혼」에서의 “그 사람은” 사랑하는 여성이 아니라 시적인 대상일 수 있다. 시작품에서 추구하는 상징적인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단서는 소월이 인생에 회의를 느껴 술에 빠진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소월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술에 취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살아가야 했던 세상이 일제 강점기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모순되고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월같이 양심을 가진 조선 지식인은 일제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월이 동경상과대학 공부를 포기한 이유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유추된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關東)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일본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해 각 지역의 경찰서에 치안유지를 지시했는데, 재난을 틈타 조선인들이 방화와 강도 등을 획책하므로 주의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 내용의 일부가 신문에 보도되자 순식간에 유언비어로 확대되어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고 자경단을 조직해 가차 없이 학살했다. 소월은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공부에 회의감을 가졌던 것이었다.
소월이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연유도 일제 치하 상황과 관계가 있었다. 소월이 두 살 무렵 그의 아버지는 음식 선물을 마련해 말 등에 싣고 처가 나들이에 나섰다. 철도 공사장을 지나는데 일본 노동자들이 음식을 빼앗으려고 했다. 소월의 아버지는 맞서다가 집단 폭행을 당했다. 그 일로 한 달 정도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났다. 그렇지만 이후 정신 이상자가 되어 가장의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 일을 돕거나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했지만, 돈을 벌 수 없어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소월은 조선인으로서 친일 행동을 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민족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울분을 참지 못해 시를 쓰고 술을 마신 것이었다.
소월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처한 조국의 상황을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뜬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초혼」에서 세속적인 남녀 관계로 설정했다. 민족인들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통해 동질감을 확보하고, 일제의 검열을 피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보면 소월의 「초혼」은 주도면밀하게 민족의식을 표출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곧 항일 의식을 토대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신동엽은 청취자들에게 김소월의 「초혼」을 소개하면서 바람직한 사랑을 제시했다. “남에게 보수도 없이, 조건도 없이, 그저 무조건 뜨거운 사랑을 보내는 일”(『신동엽 산문 전집』, 438쪽)이라고 한 것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는 경우보다 주는 경우를 더 큰 사랑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가치가 큰 것은 분명하다.
세계적인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이고 그리고 인문주의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의 기술』에서 대부분 사람은 사랑을 ‘하는’ 문제가 아니라 ‘받는’ 문제로 여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렇기에 실제로 사랑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랑을 ‘하는’ 문제로 여기고 실행할 때 그것을 보다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신동엽은 김소월의 「초혼」에서 그 사랑을 발견하고 청취자에게 제시한 것이었다. “사랑하든 그사람이어!/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신동엽이 읽은 김소월의 「초혼」 다시 읽기
맹문재
1.
신동엽이 김소월의 「초혼」을 읽고 해설을 덧붙여 사람들에게 소개한 일은 최근에 알려졌다. 2018년 이대성 연구가가 신동엽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던 신동엽이 쓴 방송대본 육필원고를 발굴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그 원고는 1967년 동양라디오의 심야 프로그램인 <내 마음 끝까지>에 사용되었다. 당시 청취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밤을 잊은 그대에>의 바로 앞 시간에 배치된 프로그램이었다.
신동엽이 방송 대본에서 소개한 시작품은 타고르의 「내가 혼자」, 헤르만 헤세의 「안개 속에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나의 길」, 포르의 「윤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마음 무거울 때」, 딜런 토머스의 「내가 먹은 이 빵은」, 예이츠이 「시골로 가자」, 발레리의 「석류」, 로랑생의 「갑갑한 여자보다」, 그리고 김소월의 「초혼」 등이었다. 서정주의 시를 소개한 것이 눈길을 끄는데, 그의 친일 활동을 미처 알지 못했고, 동시대의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동엽은 시작품 외에도 소설, 수필, 희곡, 철학서 등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 청취자들에게 소개했다. 가령 한흑구의 수필 「보리」, 김진섭의 수필「주부를 노래함」「백설부」,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 그리고 입센, 니체, 톨스토이 등의 작품에서 좋은 문장을 뽑아내 소개한 것이다. 아울러 작가의 생애를 소개하기도 했다.
신동엽학회에서는 신동엽의 방송대본을 살려 2018년 10월 6일부터 11월 17일까지 총 7회에 걸쳐 팟캐스트로 방송했다. 신동엽 시인이 국어 교사로 재직했던 명성여고(현 동대부여고) 학생들이 시를 낭송했고, 정우영 시인이나 김응교 시인 등 신동엽학회 회원들이 출연해서 작품의 의미와 신동엽의 삶 등을 소개했다. 필자도 출연할 기회를 얻어 신동엽이 읽은 김소월의 「초혼」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박민영 학생이 「초혼」을 낭송했는데, 그 방송은 ‘팟빵’(podbbang.com)에서 볼 수 있다.
신동엽이 쓴 방송대본 「내 마음 끝까지」는 2019년 강형철과 김윤태가 엮은 『신동엽 산문전집』(창비)에 수록되어 김소월의 「초혼」에 대한 신동엽의 해설을 보다 편리하게 읽어볼 수 있다.
2.
산산히 부서진이름이어!
虛空中에 헤여진이름이어!
불너도 主人업는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이름이어!”
心中에남아잇는 말한마듸는
ᄭᅳᆺᄭᅳᆺ내 마자하지 못하엿구나.
사랑하든 그사람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붉은해는 西山마루에 걸니웟다.
사슴이의무리도 슬피운다.
ᄯᅥ러저나가안즌 山우헤서
나는 그대의이름을 부르노라.
서름에겹도록 부르노라.
서름에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소리는 빗겨가지만
하눌과ᄯᅡᆼ사이가 넘우넓구나.
선채로 이자리에 돌이되여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이름이어!
사랑하든 그사람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 김소월, 「招魂」 전문
위의 작품은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에서 간행된 『신달내ᄭᅩᆺ』(164~165쪽)에 수록된 것이다. 『신동엽 산문 전집』에 수록한 작품은 현대 맞춤법과 띄어쓰기 규정에 따른 것이기에 읽기가 수월하지만, 행갈이 등이 원본과 차이가 있다. 가령 원본의 4연 4행 전체에서 앞의 2행인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설움에 겹도록/부르노라”를 4연으로, 뒤의 2행인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를 5연으로 구분한데다가, 4연 2행을 2~3행으로 행갈이 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원본 3연 2행의 “사슴이의”를 “사슴의”로 오식하고 있다. 물론 신동엽이 방송대본에서 쓴 원고를 그대로 살려 놓은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본과 대조를 해서 그 사항을 밝혔으면 좋았을 것이다.
초혼(招魂)이란 사람이 죽었을 때 육체를 떠나는 영혼을 부르는 일이다. 임종 직후 지붕에 올라서거나 마당에서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은 허리에 댄 채 북쪽을 향해 죽은 이의 혼을 세 번 부른다. 이와 같은 의식은 고대로부터 전해 온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는 사고와 원초적인 주술 사고가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죽은 이를 살리고자 하는 유족의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작품의 화자가 육신이 없는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는 것이 그 모습이다. 화자는 “산산히 부서진이름이어!/虛空中에 헤여진이름이어!”라고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부르는데, “부르다가 내가 죽을이름이어!”라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려고 한다. “心中에남아잇는 말한마듸는/ᄭᅳᆺᄭᅳᆺ내 마자하지 못하엿구나.”라고 토로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안타까워 “서름에겹도록 부르”는 것이다.
화자는 “선채로 이자리에 돌이되여도/부르다가 내가 죽을이름이어!”라고 호소를 마무리 짓는다. 자신이 망부석이 될 때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부르는 화자의 목소리는 처절하다. 유한한 존재로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사랑의 한계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도 큰 것인지를 깨닫는다.
3.
필자는 신동엽이 청취자들에게 소개한 김소월의 「초혼」을 읽으며 그 대상이 누구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정말 김소월이 그토록 사랑한 사람이 있었을까, 궁금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김소월의 생애에 관심이 들었는데, 마침 근래에 읽은 한 자료가 떠올랐다.
이 자료는 1939년 6월호로 간행된 『여성』(96~100쪽)에「소월의 생애」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김억이 구술한 내용을 백석이 옮겨 적은 것이다. 김종욱 서지학자가 발굴한 것을 최동호 교수에게 전해 2017년 『서정시학』 봄호에 소개되기도 했다.
소월은 1902년 평북 정주에 있는 곽산의 남산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금광에 종사해 집안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일찍부터 정신 이상자여서 소월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났다. 소월은 15살 때 그보다 세 살 위인 홍상일과 결혼했다. 구성에서 태어난 순박하고 어여쁜 시골 처녀였는데, 소월은 아내를 굳게 사랑했다.
소월은 장가를 든 해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오산은 곽산에서 50리를 나와야 했는데, 신문화의 발상지였다. 소월은 그곳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는 안서 김억을 만나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소월은 누구보다 문학에 대한 정열과 재질이 뛰어났다. 『진달래ᄭᅩᆺ』에 수록된 상당수의 시들은 오산학교의 기숙사에서 초고로 쓴 것이었다. 소월은 다감하게 시를 썼지만, 마음은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학과 성적이 성실하고 우수해 15~6개 과목에서 체조가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지만, 모두 9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소월은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배재에서도 학교 성적이 우수해 우등생의 영예를 차지해 동향의 선배와 친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월은 키가 작고, 몸집이 가냘프고, 살결이 까무잡잡하고, 얼굴이 동글납작했는데, 눈은 샛별같이 빛났다. 소월은 내심이 상냥한 면이 있었지만 차디찬 샛님이었다. 냉정하고 이지적인 사람으로 할 것은 한다 하고 못할 것은 못한다고 분명하게 처리하는 성격이었다.
소월은 배재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조선인 학생이 일본의 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문학하는 사람이 장사나 돈을 모을 궁리를 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던 때였기 때문에 그의 상과대학 진학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소월은 동경에서 1년가량 보내다가 인생에 큰 회의를 품고 상과대학 공부조차 헛된 것으로 여기고 귀국했다.
소월은 서울에 머무르면서 나도향과 염상섭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소월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취하지 않게 절제했다. 소월은 ‘카이다’란 비싼 담배를 비울 정도로 사치를 내기도 했고, 술좌석에서나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는 자리에서는 자작시를 읊기도 했다.
소월은 서울에서 한두 달 지내다가 고향인 곽산으로 내려갔다. 소월은 서울을 그리워하지 않고 향리에서 사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오산학교에서부터 써서 동경으로 서울로 끌고 다닌 시들을 그곳에서 정리해 마침내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그렇지만 소월은 시골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기가 어려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집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곳에서 한 여성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어디론가 떠나버려 소월은 헛된 사랑에 쓸쓸하게 웃고 돌아섰다.
소월이 3~4년 동안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이에 가정이 어려워졌다. 할아버지의 광산업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월을 남은 가산을 정리해 장이 서고 면사무소가 있는 구성의 남시라는 곳으로 이사했다. 소월은 그곳에서 얼마 있는 현금으로 대금업을 시작했다. 몇 해만 있으면 돈을 잡는다고 슬픈 자랑을 했다.
몇 해 지나 소월은 돈을 벌려고 하는 자신의 삶에 회의가 들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흥미나 애착이 없었다. 아내에게도 술을 권했는데, 잔을 받지 않으면 화를 내었다. 어쩔 수 없이 술을 배운 아내는 나중에 술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월은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 채 노래를 부르며 남시 거리를 지나다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1934년 어느 가을밤 소월은 아내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또 술상을 대했는데, 그날 밤 세상을 떴다. 서울에 머무를 때 나도향이 술을 먹으면 울고, 염상섭이 술을 먹으면 탈선하던 모습을 보며 웃었던 그가 술에 빠져 살다가 세상을 뜬 것이었다.
소월의 유족으로는 구생, 구원이라는 딸 둘과 아들 넷이 있었다. 딸들은 결혼해서 잘 살았고, 맏아들 준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삭주 광산에서 일했다. 윤호, 정호, 낙호는 미망인과 정주 곽산에서 지냈다. 소월의 묘는 구성 남시에 있었다. 미망인은 남편의 묘를 곽산으로 옮기고 비석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4.
소월의 생애를 보면 「초혼」에서 처절하게 부른 상대는 실제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술집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여성이 있었지만, 작품에 나타난 것처럼 절박한 정도의 인연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그 여성은 소월이 시집을 간행한 뒤에 만났고, 이 세상을 뜬 것도 아니었다. 또한 소월의 이지적이고 냉철한 성격으로 봐서 사랑하는 대상이 여성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그에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연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은 가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초혼」에서의 “그 사람은” 사랑하는 여성이 아니라 시적인 대상일 수 있다. 시작품에서 추구하는 상징적인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단서는 소월이 인생에 회의를 느껴 술에 빠진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소월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술에 취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살아가야 했던 세상이 일제 강점기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모순되고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월같이 양심을 가진 조선 지식인은 일제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월이 동경상과대학 공부를 포기한 이유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유추된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關東)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일본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해 각 지역의 경찰서에 치안유지를 지시했는데, 재난을 틈타 조선인들이 방화와 강도 등을 획책하므로 주의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 내용의 일부가 신문에 보도되자 순식간에 유언비어로 확대되어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고 자경단을 조직해 가차 없이 학살했다. 소월은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공부에 회의감을 가졌던 것이었다.
소월이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연유도 일제 치하 상황과 관계가 있었다. 소월이 두 살 무렵 그의 아버지는 음식 선물을 마련해 말 등에 싣고 처가 나들이에 나섰다. 철도 공사장을 지나는데 일본 노동자들이 음식을 빼앗으려고 했다. 소월의 아버지는 맞서다가 집단 폭행을 당했다. 그 일로 한 달 정도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났다. 그렇지만 이후 정신 이상자가 되어 가장의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 일을 돕거나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했지만, 돈을 벌 수 없어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소월은 조선인으로서 친일 행동을 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민족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울분을 참지 못해 시를 쓰고 술을 마신 것이었다.
소월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처한 조국의 상황을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뜬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초혼」에서 세속적인 남녀 관계로 설정했다. 민족인들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통해 동질감을 확보하고, 일제의 검열을 피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보면 소월의 「초혼」은 주도면밀하게 민족의식을 표출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곧 항일 의식을 토대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신동엽은 청취자들에게 김소월의 「초혼」을 소개하면서 바람직한 사랑을 제시했다. “남에게 보수도 없이, 조건도 없이, 그저 무조건 뜨거운 사랑을 보내는 일”(『신동엽 산문 전집』, 438쪽)이라고 한 것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는 경우보다 주는 경우를 더 큰 사랑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가치가 큰 것은 분명하다.
세계적인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이고 그리고 인문주의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의 기술』에서 대부분 사람은 사랑을 ‘하는’ 문제가 아니라 ‘받는’ 문제로 여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렇기에 실제로 사랑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랑을 ‘하는’ 문제로 여기고 실행할 때 그것을 보다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신동엽은 김소월의 「초혼」에서 그 사랑을 발견하고 청취자에게 제시한 것이었다. “사랑하든 그사람이어!/사랑하든 그 사람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