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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4·19 민주묘지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국립 4·19 민주묘지 전경 |
☞ 4·19 혁명의 배경
1945년, 35년 동안의 일제의 억압과 질곡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강대국들에 의해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6·25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우리 국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났으며, 우리 경제는 자생력을 잃고 외국의 원조에 의존함으로써 물가는 자꾸 오르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찿지 못해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나 국가를 재건하고 국가경제를 일으켜야 할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꾀하며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1956년 민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자 이에 불안해진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에 있을 정·부 통령 선거를 대비해 선거 1년전부터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
▲ 국립 4·19 민주묘지 입구 |
▲ 국립 4·19 민주묘지내 조형물(정의의 불꽃) |
☞ 4·19 혁명의 전개 과정
대구 2·28 학생의거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에 동원 하자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2·28대구학생의거는 불의와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거로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
▲ 4·19 민주묘지 상징문 |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마침내 정·부통령 선거날이 밝았다. 이 날은 장기집권을 꿈꾸는 이승만과 그의 갑작스런 유고시 뒤를 이을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예정된 승리의 날이었다. 3·15선거는 사상유례 없는 다음과 같은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첫째] 세 사람 또는 다섯 사람씩 짝지어 기표하고 자유당원에게 검사 받는 3인조, 5인조 공개 투표 |
▲ 4·19 기념탑 및 분향소 |
마산 3·15 의거 민주당 마산지부의 선거무효 선언과 함께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섰고 마산에서는 경찰의 사격으로 학생과 시민이 쓰러졌다.
무고한 시민, 학생의 죽음을 공산당의 책동으로 무마하려고 애쓰던 이 무렵, 마산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소년의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3월 15일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군이 실종 20여일 만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진실규명은 외면한 채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고문하였고, 이에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
▲ 4·19 기념탑 좌우로 설치된 군상부조 |
4·19 혁명의 시발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이 무차별 테러를 가해 수십명의 학생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의 평화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압한 정권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이 고대생 피습사건을 계기로 자유당 정권은 걷잡을 수 없는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
▲ 만장(화강석 탑주)과 묘지 |
▲ 묘지 전경 |
4·19 혁명 "피의 화요일" 이라 불리우는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 시위대열은 경무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규탄과 학원의 자유를 요구했던 시위가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혁명의 대열로 바뀌고 있었다. 젊은 학생들은 전우와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시민들도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서울시내는 온통 민주를 외치는 시위대열로 뒤 덮혔다.
이무렵 시위대의 숫자는 이미 10만명을 넘고 있었다. 경무대로 향하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의 공방은 치열했다. 최루탄과 공포 사격으로 저지하던 경찰의 1차 저지선은 민주신념에 불타는 학생과 시민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경찰의 최후 저지선인 경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미터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경무대 사격을 시작으로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이 가해져 꽃다운 젊은 학생과 시민들이 수없이 희생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보도를 일삼았던 신문사를 불태웠으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소방차를 뺏고 경찰관서를 습격하는 등 항의 시위를 전개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없이 번져가자,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사건 무마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만심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
▲ 묘역 좌우 안쪽에 유영봉안소가 있습니다. |
▲ 유영봉안소 전경 |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과 전국민의 궐기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과 전국민의 궐기 4월 25일,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는 시위가 일어났다. 제자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하던 대학교수들이 시민과 학생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온 국민이 궐기했다. 부산과 마산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 노동자, 농민, 구두닦이까지 민주를 향한 외침에 참가했다. 민주주의를 바라는 진정한 염원이 전국에 물결치고 있었다. 4·19혁명의 승리는 희생을 아끼지 않은 이 땅의 모든 이들이 붉은 선혈위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소중한 산물이었다. |
▲ 유영봉안소 앞에서 내려다 본 4·19 기념탑과 묘역 |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및 자유당 정권 종말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및 자유당 정권 종말 4월 26일, 서울 시내엔 삼엄한 경계태세가 취해졌고 시위대의 규모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교수단 시위 이후 국민들의 요구는 이승만의 하야로 모아졌다. 4·19혁명때 경찰의 발포로 친구를 잃은 초등학교 학생들도 어깨동무를 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경무대를 지키던 계엄군은 실탄을 장전한 상태였지만, 처음부터 엄정중립의 입장을 지켜 군은 더 이상 국민의 희생을 원하지 않았다. 사태수습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린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마침내 불의에 항거한 민주이념이 승리한 것이다.새로운 민주시대를 염원하는 환호와 만세소리로 전국이 들끓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부통령 이기붕일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승만의 하야 후 허정 내각수반이 과도정부를 이끌었고, 학생들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의원내각제의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 국립 4·19 민주묘지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국립 4·19 민주묘지 안내도 |
국립 4·19 민주묘지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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