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70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영산홍’]
영산홍
멀리서 보니
지난 봄밤 그 슬픈 눈 가진
카페 여인 스카프인줄 알았어
두근두근 다가가 보니
어허라 타는 불꽃 진분홍 립스틱 도발
반금련潘金蓮 입술이 영락없네
숨이야 가빠도 아린 눈길 허공에 던져
이 한세상 덧없는 세월 헤아려보면
금세 설움처럼 깊은 그리움이 맺히듯
꽃에다 가슴달린 입술을 대고 있노라면
멍울진 추억들도 저린 환희로 피어오르는 구나
꽃이여 바람이여 붉어서 좋구나
그러나 그러나 진분홍은 단심이었어
이 꽃은 스카프 두른 반금련이 아니었네
뭉게구름 시리게 아득한 옛날
비포장 신작로 황토먼지 속 고개 넘던
털털털 완행버스 창가에 애처로이 펄럭이던
열아홉 그녀의 분홍빛 손수건 이었어
(2006 . 5 . 3)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영산홍〉은 봄날에 피어난 강렬한 진분홍빛 꽃을 바라보며 촉발된 시선의 변화와 기억의 환기 과정을 감각적이고 서사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시는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도발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아련한 순수함과 그리움을 품고 있는 영산홍의 이중적 이미지를 '여성적 상징물'들을 통해 입체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구조와 표현법을 중심으로 시를 입체적으로 비평해 드립니다.
1. 시선의 이동과 역동적인 이미지의 변화
이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멀리서 보니’ → ‘다가가 보니’ → ‘헤아려보면’ → (과거로의 회귀)로 이어지는 시선의 이동과 그에 따른 인식의 심화에 있습니다.
⚫1단계 : 아련한 슬픔 (스카프)
멀리서 본 영산홍은 ‘지난 봄밤 그 슬픈 눈 가진 카페 여인의 스카프’로 다가옵니다. 이때의 정서는 애수(哀愁)와 서정성입니다.
⚫2단계 : 도발적인 관능 (반금련의 입술)
가까이 다가간 영산홍은 ‘타는 불꽃’, ‘진분홍 립스틱’, 중국 소설 속 요염함의 대명사인 ‘반금련(潘金蓮)의 입술’로 변모합니다. 시각적 이미지가 극대화되며 화자의 호흡도 '숨이야 가빠도'처럼 거칠어집니다.
⚫3단계 : 본질의 발견 (순수한 손수건)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진분홍은 단심(丹心)이었어"라며 반전을 꾀합니다. 도발적인 줄 알았던 꽃의 본질이 사실은 일편단심의 순정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2. '반금련의 입술'에서 '열아홉의 손수건'으로 : 전복의 미학
시의 후반부는 이 시의 깊이를 더해주는 핵심부입니다. 화자는 화려한 관능(반금련)의 표상을 지우고, 기억의 저편에 있던 ‘열아홉 그녀의 분홍빛 손수건’을 소환합니다.
⚫과거의 시공간적 배경
‘비포장 신작로 황토먼지 속’
‘털털털 완행버스 창가’
이 구체적이고 토속적인 묘사는 영산홍의 진분홍색을 도시적인 '립스틱'에서 향토적이고 애처로운 '손수건'의 정서로 전착시킵니다. 떠나가는 완행버스 창가에서 흔들리던 손수건은 이별의 아픔이자, 붙잡고 싶었던 청춘의 순수함 그 자체입니다. 결국 영산홍의 붉은빛은 유혹의 빛깔이 아니라, 세월의 먼지 속에 묻어두었던 첫사랑(혹은 청춘)의 애틋한 그리움이 터져 나온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 총 평
한기홍의 〈영산홍〉은 봄꽃의 강렬한 색채감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흘러간 청춘의 한 장면을 길어 올리는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2006년 5월이라는 창작 시점이 보여주듯, 이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완행버스'와 '신작로'라는 근대적 향수를 영산홍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감각적으로 복원해 냈습니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애처로운 영산홍의 역설을 '스카프 → 립스틱 → 손수건'으로 이어지는 소품의 변주로 깔끔하게 풀어낸, 한 편의 영화 같은 서사성을 지닌 아름다운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