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평화방송을 키면 자주 들리던 용어가 있었다. 바로 ‘뉴에이지’. 조금 더 오버해서 이야기하자면, 같은 시기에 개신교계에서 ‘신천지 OUT’이라는 슬로건이 넘쳐났던 것과 비슷한 정도로 한국의 가톨릭계 언론 및 매체에서 뉴에이지에 대한 비판 및 비난의 담론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뉴에이지의 위험성 담론이 한국 가톨릭계에서 유행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개신교계에서도 뉴에이지가 교회에 끼치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책자나 칼럼이 여럿 나왔고, 소위 ‘이단적 종교’를 논할 때 끊임없이 거론되었다. 필자의 지인 중 한 명은 뉴에이지를 ‘사탄 숭배’와 동일시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위협적인 여러 이단 종교와 동일시했다. (그 지인은 신학과 목회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바 있는 전형적인 개신교인이었다) 한국의 한 로마 가톨릭 신부는 뉴에이지를 ‘신영성운동’이 아니라 ‘신흥영성운동’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기에는 경멸적인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한동안 이 뉴에이지라는 경향은 교단과 신학적 성향을 막론하고 뜨거운 논쟁의 소재가 되었고,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신학적인 담론 중에 서로를 비방하는 일종의 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뉴에이지의 위험성을 논하는 제도권 그리스도교의 성직자 및 평신도들이 간과하는 점이 하나 있다. 뉴에이지는 하나의 사회 문화적 경향이자 현상에 가깝지, 구체적으로 제도적인 울타리를 지닌 집단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더군다나 뉴에이지는 20세기말~21세기에 새로이 등장한 독창적인 사상과 철학 체계라기보다는 여러 기성 종교들(그 중에서는 물론 그리스도교도 포함되어있다) 및 심리학적 담론들을 편의적으로 절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먼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가 규정한 바에 따르면, 뉴에이지는 “일반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건강과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변용을 이루며, 그 결과 새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며, 자연중심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고, 서구 종교와 사상에 동양 종교와 사상 및 수련을 접합시키고자 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동양철학의 기(氣)나 범재신론적인 의미에서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뉴에이지’라는 사회 문화적 현상을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서 보기는 힘들다. 가톨릭 교회나 개신교회의 경우 소위 세례자 명단이나 신자 명단이 있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범위를 명목상으로나마 파악하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물론 신자 개개인이 서류상에 속한 교회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표방하는 신앙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파생된(주로 개신교계열의) 신흥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뉴에이지는 그러한 범주화조차 불가능하다. 거대 자본의 후원을 받는 마음 수련원이나 명상 센터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뉴에이지 신봉자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기관들이 뉴에이지 운동과 어느 정도 공통분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뉴에이지라는 신 경향에 대해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총체적인 관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순전히 현 경향을 ‘진정한 그리스도인들’과 ‘뉴에이지 신봉자 그룹’으로 이분화 시키고 ‘우리’와 ‘그들’로 나누어 상대방을 타자화시키는 기존의 접근 방식은 과연 온당할까? 뉴에이지가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등장한 배경에는 제도권 교회도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닐까? 과연 우리가 제도권 그리스도교 교회에 속해 있고 꾸준히 참석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타자화시킬 자격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교회에서 자주 나온 ‘뉴에이지 경계령’은 누군가를 콕 집어 심판하고 정죄할 것 같은 뉘앙스마저 풍긴다. 그에 비해서 왜 뉴에이지가 하나의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 번져나갔는지, 상품화된 ‘신 영성’이 교회 공동체와 종교계에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필자는 이러한 태도로는 사회/문화적 현상으로서의 뉴에이지 운동과, 뉴에이지 운동의 난점과 한계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도 그다지 온당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이런 의문에서 현대 한국 뿐 아니라 여러 산업 선진국의 중산층/노동자 계층 전반에 불고 있는 ‘신 영성 열풍’과,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에 대해서 다소 얕고 부족한 견해나마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댓글 '나와 다른 너'에 대한 인식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모든 것라고 보아도 될 만큼 크다고 생각됩니다.
나와 다른이들뿐만 아니라 나과 자연, 나과 어떤 사건, 나과 동물등~~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인식하는 한 조화가 아닌 투쟁을 통한 정복만이 난무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나와 다른사람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의 종교나 사상, 삶들도 이와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도 같은 생각으로 오래전부터 뉴에이지 비판에 대한 비판을 했었습니다. 사실 뉴에이지 현상을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규정도 없이 그들에 대한 공격적 선교를 하는 것은 기독교의 위기에 대한 속좁은, 아니 폭력적 대응방식의 하나입니다. 기독교를 기독교답지 못하게하는 이런 류의 비판은 너무나 저열해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 입니다.
아직도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니 신기하군요. 폐기된 담론을 천주교에서 누군가 리바이벌했나보군요. 90년대 초중반 뉴에이지 운동에 대한 비판을 이슈화시켜 상업적으로 이용한 한 문화사역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특히 문화적인 영역에서 비(반)기독적인 요소들을 몽땅 뉴에이지 운동과 결부시키던 그 억지스런 접근법에 개신교 전체가 들썩했던 일도 생각나고요. 마음수련을 하든 뉴에이지 음악을 듣던 인간에게는 모두 영성에 대한 갈급함이 존재합니다. 이는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흐름으로 분석해야 할 부분이고 제도권 종교의 성찰로 이어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겠지요. 간만에 케빈컨의 음악이나 들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