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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의학(佛敎醫學)
『불교적 통찰은 인간을 단순히 하나의 기계적인 요소로 바라보지 않는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간관은 외적 현상인 주변 환경과 인간의 내적인 구성 요소가 서로 연동해 역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로병사의 모든 문제도 단순한 개체의 문제로만 보지는 않는 것이 특징이다.
즉, 이전에 쌓은 업(業)과 번뇌가 현재의 존재성을 구성하며, 그에 따른 노병사의 문제는 끊임없이 변해 가는 외적 현상과 내적 구성 요소의 무상성(無常性)으로 인해 야기되는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으로 본다.
따라서 어느 한 순간도 영원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에 나와 나의 것이라고 믿는 존재에 대한 인식은 무아적 실체에 대한 왜곡된 믿음일 뿐이다.
이러한 왜곡된 믿음이 생병로사에 대한 집착으로 이끌고, 그에 따른 탐⋅진⋅치의 삼독이 쌓여서 결국 외계와 내계의 임시적 조화로 이루어진 균형을 잃고 존재의 병고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인간의 완전한 건강은 있을 수 없다.
존재 자체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건강이 그대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현재적 시점에서의 균형을 찾는 노력만이 건강 유지의 비결인 것이다.
인간은 존재(生)와 동시에 병로사(病老死)가 시작된다. 다만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잘 병들고, 잘 늙고, 잘 죽어갈 수 있는 임시적 균형과 조화의 건강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 뿐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무상과 무아를 바르게 깨우칠 때, 존재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모순을 수행으로 극복하고 건강하게 살다가, 건강하게 죽어서, 다시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존재는 항구적이고 근원적인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의 결합으로 인한 끊임없는 연기적 변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병이고, 노사의 원인이며, 그것은 인과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건강을 유지하거나 병을 치유한다는 것은 인과의 모순을 인식하고, 제거해 나가며, 건강한 인과를 끊임없이 재구성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와 의학은 이와 같은 인간 존재의 병고와 건강에 대한 진단과 치유체계의 만남이다.
마치 불교의 사성제(四聖諦)가 인간고의 원인을 밝히고 그에 대응한 치유(治癒)의 수행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승 삼보를 의사와 약과 병원에 비유하기도 한다.』- 최로텐
불교의 관점에서는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 사대(四大)의 균형을 건강의 기본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고, 수행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의 과정에서 이들의 균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대의 불균형은 곧 질병의 기본적인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선(禪)을 포함한 불교 수행 과정에서 사대(四大)의 균형을 도모하는 수행이란 근본적으로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한 실천이기도 하지만, 또한 건강의 기본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향해 몸과 마음을 닦아 나가는 수행의 길은 힘겹지만 건강과 참된 기쁨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불교는 수행을 통해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추구한다.
의학은 치료를 통해 병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추구한다.
비록 그 접근방법이 다르다 해도 인간조건인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점에서 불교와 의학은 공통된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ttha)의 출가 수도의 목적은 중생들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불교는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초기불교 당시의 사회 환경이 생산력과 의학 수준에 있어서 무척 열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생명과 건강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심리적 고통이 생리적 고통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질적 조건과 의학 수준이 발달했더라면 굳이 심리적인 면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대표적인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흔히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네 가지로 꼽는다. 이 가운데 특히 ‘병고(病苦)’는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겪는 가장 치열한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열반(涅槃)이란 행복을 얻는 데 있어서 불교에서는 필연적으로 의학적인 방법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래되면서 보다 발달된 인도(불교) 의학체계가 함께 전해져 한의학으로 대표되는 동양의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 있어 불교와 의학은 예로부터 깊은 관계를 맺으며 발전돼왔다.
특히 질병은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이므로 직접적으로 인간의 심신을 단련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우선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도들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불설(佛說)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의학지식도 보급해야 했다.
그렇게 해야 보다 많은 신도들을 확보할 수가 있었으므로, 불교의 전파와 함께 의학지식도 발전하게 됐다.
『불교와 의학의 만남을 대승적 보리심을 전제로 한 중도적 전환의 수행체계와 찰나적 깨어 있음(憶念)을 통한 중도적 균형 회복의 치유체계가 만나는 장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병인론(病因論)---자신의 속박된 세계관에 의한 업의 축적으로 인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 쌓이고 그에 따라 심신의 균형을 잃어서 발병하게 된다.
② 치유론(治癒論)---단계적인 심신의 정화와 균형 회복의 과정을 거쳐 건강을 회복한다.
• 신정화(身淨化) 단계 ― 병인에 대한 대증적 처치(경험의학을 통한 약물과 음식의 조절)
• 심정화(心淨化) 단계 ― 병의 원인이 되는 삼독을 정화하기 위해 마음의 치유에 필요한 대치법의 수행.
• 심신의 정화를 통해 균형을 회복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단계.
• 심신의 건강을 회복한 후에 자신의 건강만으로는 언제든 또 균형이 무너질 수 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의 균형까지 회복하도록 애씀으로써 중도적 균형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정진하는 단계.
③ 보유론(補遺論)---치유과정을 거쳐 심신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세상 모두가 삼독의 업력에 의해 병들게 되는 것을 자각해 언제나 건강과 행복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회향의 보리심을 실천해 불교의 본래 목적에 계합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수행은 계(戒)⋅정(定)⋅혜(慧)의 세 가지 실천방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사법인(四法印)의 구조에서 다시 살펴보면,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진리(印)는 존재의 균형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음을 밝혀주는 진리로서 병인(病因)에 해당하며,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존재의 실체에 대한 자각과 깨달음의 상태를 밝혀주는 도리로서 인간 존재는 심신의 끊임없는 찰나적 균형 회복을 통해서만 건강한 삶(涅槃寂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치유(治癒)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하나의 의학체계를 논한다는 것은 단순히 환자의 질병과 의사의 치료에 대한 이론적 정의나 경험적 적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물리적 장애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장애와 천체 ― 환경적인 장애를 함께 겪는다. 인간 자체에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인간 존재 자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따라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방법론적 체계가 달라질 수 있다.
이 외에도 천체의 외적 환경이나 그와 관련한 존재의 다양한 역동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의학은 건강한 존재성을 회복하기 위한 종합적 이해 체계이자 실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 최로덴
고대 인도에서 불교도들은 ‘오명(五明)’을 공부했다. 오명은 오명처(五明處)라고도 하는데, 고대 인도의 다섯 가지 인간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기술에 관한 세속적인 학문을 말한다. 여기서 명(明)은 학문이란 말이다. 즉, 오명은 고대 인도의 오문학과(五門學科) - 오종의 실용적인 학문을 말하는데, 그 간단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 성명(聲明) - 성운학(聲韻學-음운학)과 어문학(語文學)을 일컫는다. 언어ㆍ문자ㆍ문학ㆍ문법ㆍ음운ㆍ문장ㆍ가사에 대한 학문과 지식이며, 이에 관한 학문으로 경문을 읽은 때 음률을 붙이는 것도 성명의 분야이다. 중국에서는 성명학(聲明學)이 주로 한자음 연구에 이용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 세종대왕 때 심미(信眉) 스님에 의해 한글 창제에 활용됐다.
② 인명(因明) - 인명이라 함은 모든 학문과 지식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논리학과 인식론(認識論)이다. 어떤 주장이나 명제의 정당성이나 확실성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증명하는 논리학이다. 이러한 인명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데 활용했다.
③ 내명(內明) - 내명은 이 우주의 질서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말하는 철학이며, 외적 학예에 대해 자기 종교의 취지를 밝히는 학문을 내명이라 했다. 예를 들면, 바라문교에서는 4베다(4Veda-四吠陀)학을, 불교에서는 불교학을 말한다. 즉, 불교학은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인 인과의 이치 등을 연구 토론하는 불법에 관한 학문을 말한다. 자신의 종교나 믿음의 타당성과 정당성을 밝히는 학문분야이다. 불교의 많은 논서(論書)와 소(疏)⋅송(頌)들은 바로 내명을 말한다.
➃ 공교명(工巧明) - 공교명은 예술, 과학, 공예, 농업, 건축을 비롯한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의미한다. 즉, 공교명이라 함은 음악, 산수, 그림, 글씨 등의 온갖 예술과 기술 등 주로 수공업을 말한다. 공예와 기술과 역산학(曆算學) 등도 포함된다. 즉, 공예ㆍ건축기술ㆍ목수에 대한 학문과 역학(曆學-달력)과 수학 등이다.
➄ 의방명(醫方明) - 병의 원인과 예방 및 치료에 관한 의학ㆍ약학 등의 의술에 대한 학문이다. 의학, 약학, 나아가 다라니 등을 통해 몸을 건강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질병을 치료해서 중생을 구한다고 하니, 요가 수행체계를 갖추고 있던 대승불교 유식학의 가르침과도 불가분의 관계이다.
의방명은 당시 인도에서 독자적인 의학체계를 갖추고 있을 정도로 상당히 정밀해서 의료기술이 부족했던 당시로는 인간질병 치료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내명’을 배우고 닦아 마음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건강한 육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깨달음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사대(四大)의 균형을 유지하고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재가자나 출가자 모두 중요한 문제이며, 완전한 깨달음은 ‘지혜’와 ‘방편’의 완성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견성성불이 지혜의 완성이라면, 오명을 통달하는 것은 방편의 완성이다. 대승불교에서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이 두 결과를 완성하는 원인을 구족하는데, 오명 중 의방명이 아마 가장 큰 방편을 제공할 것이라 하겠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 제자 기바(耆婆)는 의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스님이었다.
그의 의술이 중국에 전입돼 한의학(漢醫學)의 발전에 기여했다.
본명이 지와까 꼬마라밧짜(Jīvaka Komārabhacca)이다. 아버지는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왕사성(王舍城) 창녀 암라팔리(Amrapali) 혹은 살라바티(sālavati)라는 말이 있다.
그녀는 자기 인기가 떨어질까 두려워 아들을 낳아 쓰레기 더미에 버렸는데, 마가다국(摩揭陀國, Magadha) 빈비사라왕의 아들이며, 아사세태자의 이복형제인 아바야(abhaya)왕자가 데려다 양육했다.
성장한 기바는 펀자브 북쪽 지역에 있던 건타라국(乾陀羅國) 탁샤실라(takṣaśila)에 가서 그곳의 명의였던 빈가라에게 7년 동안 사사받은 뒤 본국으로 돌아와, 왕사성에 머물면서 치료했다. 그는 불법에 귀의해 깊은 신심을 지녔고, 부처님의 풍병을 고쳐서 의왕(醫王)이라고까지 칭송됐다.
그래서 빈비사라왕과 궁중의 주치의로 임명됐으며, 부처님과 승가의 주치의 역할도 했다.
아버지 빈비사라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아사세왕도 가바를 주치의로 삼았다고 한다.
기바는 수다원과를 증득한 뒤 하루에 두 번씩 부처님께 인사드리러 갔으며 부처님께서 머무는 왕사성의 죽림정사(竹林精舍)가 너무 멀어서 그가 소유하고 있던 망고 숲을 승가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래서 경전에 ‘망고 동산’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특히 아사세왕이 태자였을 때 아버지 빈비사라왕을 시해한 뒤 왕위에 올랐으나 그 후 크게 뉘우치는 모습을 보고, 아사세왕을 부처님께 귀의시킨 사람이 기바였다.
대승불교에서 중생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출가자는 오명을 반드시 배워야 했다. 오명에 관한 <오명론(五明論)>이라는 서적을 중국에서는 삼국시대 위(魏) 명제(明帝) 때 인도 파두마국(波頭摩國) 출신의 삼장율사 양나발타라(攘那跋陀羅)와 야사굴다(耶舍崛多)가 공동으로 한역했다.
그리고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따르면 후한 말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1,621부, 4,180권의 불경이 번역됐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에 의학에 관한 불경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당시에 인도에서 들어온 의학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불경이 10여종이나 있었다고 한다. <용수보살약방(龍樹菩薩藥方)>, <서역제선소설약방(西域諸仙所說藥方)>, <바라문제선약방(波羅門諸仙藥方)>, <석승의침구경(釋僧醫鍼灸經)>, <불설불의경(佛說佛醫經)>, <불설포태경(佛說胞胎經)>, <불설불치신경(佛說佛治身經)>, <불설주치경(佛說呪齒經)>, <용수안론(龍樹眼論)>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대장경>에는 의학지식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거나 또는 의학이론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불경이 400여종이 된다고 했다. 거기에는 의약과 위생, 생리와 병리, 심리요법, 수심양성과 같은 이색적이고 풍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적지 않은 의서와 의약처방이 대승불교의 용수(龍樹)와 기바(耆波)라는 두 승려의 이름에 가탁하고 있으며, 이들 의서들이 오랫동안 널리 전파되고 활용됐다. 불경에 포함된 의약과 위생에 관한 명칭과 술어는 약 4,600개나 되며, 해부, 장부, 경락에 관한 명칭은 물론, 의료, 약학, 심리학, 병명, 기타 잡론에 관한 술어가 풍부하게 들어 있었다.
이와 같이 불교의 의방명(醫方明)과 중국 동의학이론(東醫學理論)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불교의학에서는 인간의 신체가 지(地)⋅수(水)⋅화(火)⋅풍(風)이라는 4대(四大)가 기후적 영향에 따라서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모든 병의 근원은 이러한 4가지 요소의 실조로 발생한다고 했다.
“처음에 지(地)가 많아지면 몸이 가라앉는 것처럼 무거워지고, 두 번째로 수(水)가 많아지면 눈물과 타액이 항상 제멋대로 나오게 되며, 세 번째로 화(火)가 많아지면 머리와 가슴에 열이 많이 나게 돼, 두통과 심혈관 질환이 발생되고, 네 번째로 풍(風)이 많아지면 호흡이 불안정하게 된다.”고 했다. 불교의학과 동의학은 질병의 원인에 대해 거의 유사한 견해를 보였다.
특히 불교의학은 기생충학에 대해 독특한 발견을 했다. <선병법요경(禪病法要經)>과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서는 인간의 신체는 약 80종의 충(虫)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했으며, 각종 기생충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한편 그 생김새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학의 기생충학적 관점과 상당히 유사하다. 현대의 기생충병학에서는 인체에는 회충, 요충, 편충, 구충, 사충, 십이지장충 등의 여러 가지 기생충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불경이 상당히 과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에는 인체의 배태학(胚胎學) 방면의 연구가 집적돼 있다. “태(胎)는 7일만에 생성된다. 처음에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다가 27일이 지나면 옅은 막이 생성된다.… 97일이 지나면 5개의 거품 덩어리와 2개의 팔꿈치, 2개의 종지뼈와 목이 생겨난다. 17일 동안 계속 5개의 거품 덩어리가 생겨나면서 2개의 다리와 팔, 그리고 머리가 생겨난다.…”라고 했다.
이러한 기록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아가 자라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당시에 이러한 배태학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로 정밀하다.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불교는 직접적으로 동의학의 원기설(元氣說)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의 이론을 흡수해 질병의 원인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원기가 잘 배합되면 사람의 마음이 평안해지기 때문에 각종 번뇌와 욕망이 생기지 않지만, 원기가 제대로 배합되지 않으면 음양오행도 조화를 이루지 못해 마음도 평화롭지 못하게 되고, 각종 욕망과 번뇌가 생긴다고 봤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번뇌를 병으로 파악하고, 불교는 여기에서 비롯된 고(苦)를 떨쳐 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목적으로 하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를 ‘대의왕(大醫王)’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불교의학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의 불성을 획득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즉, ‘사고팔고(四苦八苦)’에 고뇌하는 질병자의 생명을 불성의 생명으로 변혁하는 데에 불교의학의 노력이 집약된다.
불교의 이런 측면은 필연적으로 정신요법으로 연결돼,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의학적 의미에서의 심신(心身) 질환이나 고뇌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는 기본적으로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음[이고득락(離苦得樂)]’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는데 있어서 불교에서는 필연적으로 이른바 ‘의학’적인 방법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까닭에 불교에서는 ‘대의왕(大醫王)’의 명법(名法)이 나타난 것이고, ‘약사여래의 본원(本願)’이 발현된 것이라고 하겠다.
불교에서는 ‘사대부조(四大不調)’를 병인론(病因論)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원인은 바로 ‘진리에 대한 무지’로서 철저하게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병고와 생사의 괴로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음을 제시하니, 바로 ‘마음’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사대(四大), 오온(五蘊), 육근(六根)의 조화를 강조하는 한편, 삼독심을 극복하고 계(戒)⋅정(定)⋅헤(慧) 삼학(三學)을 닦아 불성을 얻는 것이 불교의학의 목표라 하겠다. 이는 곧 불교 수행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학은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도 유사한데, 인간의 ‘수요(壽․夭;오래 삶과 일찍 죽음)’를 ‘수향(修養)’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병인(病因)을 ‘심화(心火)’로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역시 ‘마음’의 문제로 귀결돼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이 불교와 사상의학의 대체적인 유사성이라고 하겠다.
----환자의 간병(看病)----
과학문명이 발전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의 사회영역이 있다. 그래서 종교는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사회현상 속에서 종교는 주체성을 확립하고 이러한 문제의 완성에 직결되는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종교 중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그 종교의 본질로 하는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참구하는 것과 동시에 인간생활 전반의 문제를 조명하면서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고뇌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구제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불교에 있어서 간병관은 환자의 미래에 대한 성취동기를 유발하게 하는 것이며, 정신적 성장의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근원적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다. 특히 임종 직전에 있어 간병은 임종하기 전까지 간병자에게 부여된 삶에 대해 정신적⋅육체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그 가족에게까지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배려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즉, 간병은 사회적⋅정신적⋅육체적 실망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며 종교적으로 생사관(死生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돕고, 자비로서 돌보는 총체적인 자비행(慈悲行)이다. 이러한 점은, 현대 의학에서 이루어지는 간병보다 훨씬 종교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고대의학----
의학은 순수한 과학이 아니며 그것은 다른 여러 분야와 폭넓게 겹쳐진다. 그 중에서도 의료와 종교의 관계는 각별한데, 특히 고대로 올라갈수록 의료와 종교의 관계는 더욱 긴밀했다.
삼국,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의료는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조선시대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도교와의 관계가 깊었으며,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물론 이들 각 종교가 의료와 맺는 관계는 각 시대가 처한 역사적인 상황이나 각종교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맥락에 위치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을 원효 대사가 활동하던 통일신라시대에 맞추어 당시 의료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중앙에는 약전(藥典)이라는 기관이 있었고, 봉공의사(供奉醫師), 내공봉의사(內供奉醫師) 등이 진료를 담당했다.
그밖에 의관(醫官)이라는 명칭도 보이고, 또한 의학(醫學)이라는 교육기관을 두어 의박사(醫博士)가 본초경(本草經), 갑을경(甲乙經), 소문경(素問經), 침경(針經), 맥경(脈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 등을 가르쳤다고 기록돼있다.
다만 이것은 당시 궁중의 의료제도였을 뿐, 민간에서는 의료 행위가 미약했다. 하지만 사찰의 의료행위가 민간의 치병에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불교 전파와 자비행의 일환으로 큰 역할을 했었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