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신비], 조민아, 2023, 삼인
어제는 김지현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갑자기 파주에 찾아오시겠다는 전갈입니다. 선배는 ‘함께 걷는 예수의 길’이라는 천주교 네트워크 운동을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기억마저 가물거릴 만큼 오래된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가 없어지고 나서, 그 후신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라는 연합운동도 퇴조를 거듭하고 있으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전후해서 활동을 시작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도 지지부진하고, 가톨릭의 평신도운동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징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제외한다면, 예수살이 공동체나 우리신학연구소, 팍스 크리스티, 가톨릭기후행동 등 지식인들이나 수도성직자가 중심을 세우고 있는 그룹만 가톨릭사회운동의 맥락을 잇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별적으로 의식이 성장하고 행동하고 있는 평신도 개인들은 상당히 늘어났지만, 이들이 함께 고민하고 경험을 나누고 연대할 수 있는 안정적인 그릇은 없는 셈입니다.
김지현 선배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한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이 사람을 위한 지지그룹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조직운동이 아닌 시대적 조류에 걸맞는 네트워크 운동을 시작하자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함께 걷는 예수의 길”이라는 이름은 참 잘 지은 것 같습니다. 전략과 전술을 고려하는 조직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반하는 운동을 표방한다는 것은 분명한 영적 기반 위에서 활동하겠다는 다짐이겠기 때문입니다.
함께 걷는 예수의 길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수 있다면, 분명한 영성적 기반 위에서 발걸음을 떼면 좋겠습니다. 신비와 저항, 관상과 실천, 영성과 사회적 투신은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사회운동에 헌신하던 분들의 고민이었고, 아직도 충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입니다. 새로운 운동은 실천적 과제에 앞서 실천하는 사람들 자체에 주목하는 운동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신앙적 확신 안에서 기쁨으로 투신하는 활동가들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본당에서 일하다보면 항상 느끼는 것은, 교회가 봉사자들을 과제 중심으로 배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진할 때까지 활용하는 교회 관행을 볼 때마다, 교회와 기업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다지 차별성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자들을 양성하지 않고 소진시키는 교회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과제 중심의 운동에서 희망을 얻기란 불가능합니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을 하면서 “일 때문에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기도 없는 실천활동은, 나를 그 길로 이끄시는 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분을 잃어버리고서야 가톨릭운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함께 걷는 예수의 길’이라는 명칭은 우리 운동의 원천을 항시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선택입니다.
일상과 신비
가톨릭운동의 영적 기반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이참에 주목할 만한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조민아 선생님의 <일상과 신비>(삼인, 2023)입니다. 223쪽의 작은 책자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맑고 깊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물그릇 하나에 온 하늘을 담아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 밝혀 놓은 조민아 선생님의 프로필을 보면, 200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모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구성신학과 영성신학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본인을 ‘이민자’이며 ‘외국인 교육노동자’라고 소개하고 있는 조민아 선생님은 “교회와 세상, 가톨릭과 개신교, 미국과 한국, 문학과 신학, 학교와 광장, 스트레이트와 퀴어 등 서로 다른 삶이 겹치는 경계들에 머물며, 그 속에서 떠오르는 갈등, 긴장, 도발, 타협, 창조의 언어와 이미지들을 신학적 상상력으로 길어 올리는 글을 쓰고 경계를 교차로로 바꾸는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조민아 선생님이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를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죌레는 <신비와 저항>(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7)만으로도 충분히 세상과 교회, 관상과 실천의 고리를 하나로 엮어 왔던 분입니다. 신학이 실천이 될 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만든 분입니다.
예언과 치유, 시와 사랑
조민아 선생님은 글쟁이란 형벌과 축복을 한꺼번에 살아내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에 덧없는 (지식)노동을 해야 하지만, “언어의 바다에서 반짝이는 심상 하나 건져 올리는 찰나의 기쁨”을 축복처럼 여기는 사람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겪는 환희는 “섬광처럼 강렬하지만 공기처럼 가볍고, 터질 듯한 기쁨인 동시에 가눌 길 없는 슬픔”이라 말합니다. 이런 기쁨과 슬픔을 감당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이야기 했던 “미칠 듯한 갈망”에 사로잡혀 있거나 “신이 부여한 광기”를 떨쳐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소크라테스는 거룩한 갈망에 휩싸인 자가 경험하는 환희는 주로 예언과 치유, 시와 사랑에서 발견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병든 지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이 땅의 예언자들, 집 앞을 떠도는 길고양이 한 마리 불쌍히 여겨 밥 한 그릇 놓아주는 보살핌과 치유의 손길들, 노래와 글과 그림 혹은 춤에 기꺼이 삶을 바치는 예술인들, 그리고 부드럽고 애틋한 마음 그대에게 어찌 전할까 밤을 새우는 연인들, 이들은 모두 어찌할 수 없는 갈망에 사로잡혀 ‘나’를 내어주고 ‘축복일지 천형일지 모를 환희에 몸과 혼을 맡기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우리는 “빠르고 편하고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것들을 강요하는 세상의 질서에서 뛰쳐나와 느리고 불편하고 어쩌면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에게 내 마음을 내어주는 행위”를 통해서 “일상의 신비”를 맛본다고 조민아 선생님은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이 뜨거운 흔들림의 끝에 하느님이 계심을 고백하고, 그것을 언어로 담아내는 것이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기이한 사랑
조민아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신학이란 어떤 것일까, 더 궁금해집니다. 신학이란 통상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진리를 신앙과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학문이라고 말하지만, 조민아 선생님은 다르게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초대하신 당신과의 관계에 응답하고, 하느님께서 이미 열어주신 신비에 신앙으로 참여하며, 그 무한한 사랑에 유한한 인간의 언어를 입히는 것”이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응답해야 할 하느님의 신비는 무엇일까요? 조민아 선생님은 그 결정적인 신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다고 전합니다. 결정적 신비이신 예수님은 인공지능이 추론할 수 있는 최고 값의 반대편에 위치에 있습니다.
“예수는 변두리 마을 축사에 지친 여정을 푼 가난한 난민 노동자 부부에게,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약하디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다. 예수의 탄생을 가장 처음 접한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목자들이었다. 예수는 평생 ‘갑’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는 방랑자요 노숙자였으며 짧은 평생을 오로지 ‘을’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는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를 차마 이루지 못한 채 서른세 살 청년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이 비참한 실패를 통해 부활이란 기적이 일어나고,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우리에게 열렸다.”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기에 ‘신비’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우리 인생들에게 진입해 들어오시는 놀라운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 기이한 사람, 기이한 하느님 예수가 드러낸 사랑과 그가 죽어서까지 살리고자 했던 세상을 공부하는 학문”이라고 조민아 선생님은 말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공부이면서 기도가 됩니다. 기이한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기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처럼 기이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믿는다면, 그분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신학은 기도가 된다고 조민아 선생님은 믿습니다.
기이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이들이 하는 운동은 그래서, 상식을 거슬러 저항하는 힘이 됩니다.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맞서 싸우면서도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하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하고 말하게 됩니다.
* 이 글은 <공동선> 2023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