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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先知者. 함석헌
1. 선지자 연구의 의미
성경 안에는 선지자라는 일종 특별한 인물들의 언행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신약 중에도 선지자의 말이 자주 인용이 되어 있고,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는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누가 7;28)고 예수께서 칭찬하신 세례 요한은 구식 선지자의 최종이요 최대한 자(者)이었다. 예수 이후에도 사도행전과 고린도서를 보면 선지자가 다수(多數)히 났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예수 당신이 선지자 중의 선지자셨다. (누가 24;19 이하, 13;33, 7;16, 마태 13;57) 그러나 신약에 보다도 구약에는 더욱 많다. 많다는 것보다도 구약은 선지자의 서(書)다. 선지자는 구약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지만 또 선지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로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중축을 짓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원의 역사다. 사람 편으로 보면 반항의 역사며 타락의 역사요, 하나님 편으로 보면 간단없는 은혜의 역사요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노력의 역사다. 물론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한하지 않는 것이요 세계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의 역사를 물론하고 결국은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야 역사상에는 자못 비참한 때도 있었고, 말할 수 없이 타락하고 죄악이 창일(漲溢)한 시대도 있었으며, 현재에도 문화는 인류를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으나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맨 밑에는 역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의 구원에 대한 기대가 흘러 있다. 그는 배반한 탕자가 이제나 돌아올까 저제나 돌아올까 하고 밤과 낮으로 기다리시던 자다. 우리는 이를 잡답(雜沓)한 사회의 광람(狂濫)하는 죄악의 물결 중에서 때때로 가다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정의의 부르짖음, 진리의 부르짖음이 있는 데서부터 깨달을 수가 있다.
역사는 뜻있게 참으로 읽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이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다른 어느 민족에보다도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이는 더욱 명확히 나타나 있다. 선민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아브라함의 갈대아 출분(出奔), 이스라엘족의 이집트 탈출로부터 그들의 가나안 도달, 그후 파란이 중첩(重疊)되는 그들의 역사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유대의 멸망, 그리스도의 강탄(降誕)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구원을 바라는 하나님의 “암탉의 병아리 부르듯 하는” “목자의 잃은 양을 찾듯 하는” 사랑의 의지는 변함없이 시종(始終)을 관통(貫通)하여 흘러 있다. 그리하여 이 이스라엘족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취하신 방법이 선지자의 파견(派遣)이다. 그는 선지자라는 특수한 사람을 자기의 사랑하는 민족 가운데 보내어 혹은 가르치고 혹은 다스리고 혹은 지도하며 격려(激勵)하고, 위험이 있을 때에 경고하고 드디어 죄를 범하였을 때에 꾸짖고 노하고 벌하고 저주(咀呪)하고 잔패(殘敗)까지 시켜 그들의 회개와 귀래(歸來)를 촉(促)하였다.
구약을 읽어서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의 개과를 위하여 혁연(爀然)한 노를 발(發)하여 손에 채를 들고 죽어도 일호(毫)의 가차(假借)가 없을 듯이 임하면서 그러나 속으로는 쓰리고 아프고 애연(哀然)한 맘을 금치 못하여 차마 얼굴을 바로 향하지 못하는 엄부자부(嚴父慈父)의 맘성을 보아낼 수 있다. 선지자를 보내어 노하고 꾸짖고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돌아왔다. 돌아왔으나 미구에 또 배반했다. 선지자는 허다하게 왔다. 이스라엘은 끝없이 배신을 반복하였다. 드디어 해골구상(骸骨丘上)의 성비극(聖悲劇)을 보게 되었다. 이렇듯 하여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축이요 진수(眞髓)며 또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역사의 중축이요 진수다. 그는 선지자가 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마침내 영영 천지의 주재신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恭敬)하기를 잊었을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만일 이를 잊고 버리었다면 인류는 영원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멸망에 빠졌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때에는 전 인류의 운명은 모세의 한 명령에, 이사야의 한마디 말에 혹은 예레미야의 한번 놀리는 혀끝에 달려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보아서 선지자의 의미는 더욱 크고 깊어지고 연구의 흥미와 가치는 더욱 더[加]하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견딜 수 없는 곤궁과 비참에 빠졌고 민족적으로 파멸에 빈림(瀕臨)한 우리에게는 더욱 흥미가 있는 일이요, 거기서 가르침을 얻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약에 있어서 복음은 완성되었다. 우리는 이것만 있으면 구원을 얻기에 족하다. 그러나 때로는 구약으로써 보탤 필요가 있다. 구약은 한 민족으로서 구원을 어떻게 얻는가를 더욱 밝히 보인 것이다. 구원은 개인의 구원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개인으로서의 참 구원을 받으면 그는 필연적으로 민족적 사회적 구원에까지 이르고야 말 것이다. 내 목숨과 바꾸려는 내 사랑하는 자, 내 동포의 구원을 내어놓고 내게 완전한 평화와 쾌락과 찬송은 있을 수가 없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逼迫)이나 기근(饑饉)이나 적신(赤身)이나 위험이나 도검(刀劍)이라도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없다고”한(로마 8;35) 바울은 “대개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께 끊어지는 데까지 이를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까지 하여 그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는 열애를 토로(吐露)하였다.(로마 9;3) 자기의 사랑하는 자의 비참과 파멸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이와 같이 부르짖지 않고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 9장 1절 이하를 읽음에 그와 같은 설움의 눈물을 흘림이 없고 가슴 아픔이 없이 읽는 자는 감히 말하거니와 배척하여야 할 이기주의자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개인의 영혼의 구원도 허락지 않을 것이다.
“슬프도다. 내가 내 머리로 물을 삼음이여 내 눈이 눈물 근원이 되었은즉 내가 내 백성의 살육당한 자를 위하여 밤낮 울리로다. 슬프다.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우거(寓居)할 처소를 얻게 함이여 내가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저희는 안다. 간음을 행한 자요 패역(悖逆)한 자의 족속이 됨이로다.”(예레미야 9;1-2)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족을 바라보고 부른 애가는 그중에 ‘유대’를 ‘조선’이라 바꿔 쓰고 ‘시온’을 ‘한양’이라고만 바꿔 쓰면 그대로 오늘날 우리가 부를 것이 아니고 무엇인고.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 거민(居民)이 많더니 어찌 적막히 앉았느뇨. 본래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 과부와 같고 본래 열방 중에 공주(公主) 되었던 자가 이제 수종드는 자가 되었도다. 저가 밤새도록 곡하고 또 눈물이 그 뺨에 있고 본래 저를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그 친구도 다 속여서 마침내 원수가 되었도다.……”(다 쓰지 못한다) (예레미야 1;1-2)
네가 만일 조선을 사랑하거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여라. 그의 회개와 구원을 절망하거든 선지자의 가르침을 듣고 그 불행이 어디서 원인하였으며 그 구원이 어디서부터 올 것임을 알아 유대의 전철을 밟지 말게 하라.
이스라엘 흥망 그의 구극사(救極史)와 선지자의 관계 또는 인류의 구극사와 그들의 관계, 더 가깝게는 목하 우리의 구원의 길과 그들과의 관계는 그러한 것이거니와 우리는 거기서 산 교훈과 진리를 얻어내기 위하여, 선지자란 어떠한 사람들이며 어떠한 사명을 가졌는가를 다소 자세히 연구할 필요 있다.
2. 선지자의 명칭
선지자란 어떤 사람이었던가는 ‘선지자’라는 그 명칭을 고찰하면 알 수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여 ‘선지자’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어(希臘語)에는 프로페테스라는 명사다. 이 프로페테스라는 말의 뜻을 분석해보면 “전에(미리) 말하는 자라 혹은 (누구누구)를 위하여 말하는 자, (누구누구)를 대신하여 말하는 자”라는 뜻이 있다. 전에 말한다 함은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그 장차 올 곳을 말한다 함이요, 위하여 대신하여 말한다 함은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시키는 바를 말하며 그의 성의(聖意)를 해석 번역한다는 말이다. 고로 선지자라기보다는 예언자라는 것이 더 본뜻에 가깝고(우리말에도 그 동사는 예언한다고 번역되어 있다) 예언자라는 말도 그 뜻의 일면만을 전하는 것이므로 완전한 역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프로페테스의 뜻은 그것만 아니다. 그리스어의 이 말은 본래 히브리말 나비라는 데서 원인하여 생긴 말이요, 따라서 그 나비라는 사상이 전연 히브리에서 기원이다. 나비라는 말의 뜻은 ‘말하는 자’라는 의미가 있는 밖에 또 ‘비등(沸騰)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런 고로 이 나비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그 말이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이 끓어나오는 선지자의 면목을 보아낼 수가 있다. 우리는 이를 예레미야의 고백에 의하여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이러므로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일을 반포(頒布)하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가지고 말하지 아니하려 하면 내 맘 속에 마치 불붙는 것 같은 것이 있어 내 뼈 가운데 깊이 들어 있는 고로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 없도다.” (예레미야 20;9)
그러나 선지자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잊어서 아니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상고(上古)에는 선지자(혹은 예언자) 즉 나비를 가리켜 ‘보는 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무엘상」 9장 9절에 보면
“옛적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면 말하기를 선견자(先見者)에게 가자 하였으니 대개 지금 선지자라 하는 이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하였나니라”
라고 하였다. 이 ‘보는 자’라는 것이 선지자를 이해하는 데 자못 중요한 일이다. 그들은 사상가 사색가가 아니었다. 학자가 아니었다. 사색하고 숙고하여서 장차 올 일을 추측하는 자가 아니었다. 도서관과 연구실에 잠겨 있어서 의어(衣魚)같이 책 귀에 붙어 있어 고개를 갸웃거려가며 눈살을 찌푸려가며 한숨을 지어가며 고심육력(苦心戮力) 각고면려(刻苦勉勵)하여 사람의 피와 기름을 있는 대로 다 짜서 사상의 모자이크(細工)를 빚어내는 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보는 자였다. 약여(躍如)한 사실을 눈앞에 만질 듯이 보는 자였다. 그런 고로 그들은 흔히 “내가 보니” 여사(如斯)여사(如斯)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더구나 특별한 일례를 들면 「이사야」2장 1절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대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말이라”라고 하였다. (국문 성경에는 “묵시받은 말씀”이라고 하였다). 말을 본다는 것은 우스운 듯하나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을 보는 자였다. 알려고 힘써 생각하여 아는 것이 아니요, 그들이 생각지 않는 바를 홀연히 보여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꿈같았는지 혹 이상(異像) 같았는지 혹은 상시(常時)대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어둔 밤중에 갑자기 번쩍이는 전광에 의하여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 여러 가지 것을 일시에 보고 다시 캄캄한 중에 감추이는 것같이 장차 각 세대 각 방역에 나타날 역사가 그 앞에 단번에 생현(生現)하였을 것이다. 고로 아마 생각건대 선지자 자신도 어찌하여 자기에게 그 일이 알려지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연고를 모르나 알려지고, 알려진 것을 말하라고 항상 최촉(催促)하는 무엇이 있었으므로 그저 말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보여주는 것은 전혀 하나님에게 속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언할 때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대”라든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다”라든가 하는 말을 부가하였다. 그렇듯 하여 본 말 본 사실을 민중 앞에 전하는 것이었다. 그런 고로 그들의 말은 생생한 것이요 결코 가작(假作) 이야기같이 무력한 것이 아니었다.
선지자라는 명칭이 표시하는 의미는 여사(如斯)한 것이나 물론 명칭이 실상의 전부를 전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완전한 이해를 함에는 선지자들 그 사람의 실지 생활, 성격, 위인, 언행에 접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하 성경의 예언서와 그[其]밖 경전 중에 나타난 바에 의하여 선지자는 어떠한 사람이었던가를 보려 한다.
3.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관통(貫通)하여 다수(多數)히 출현하였다. 예수 이후 사도시대(使徒時代)로부터 나타난 선지자는 제(除)하고라도 모세로부터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선지자가 있었다. 그중에 주요한 자만을 열거(列擧)하면 여좌(如左)하다.
모세, 나단, 엘리야, 엘리사.
4 대선지자ㅡ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12 소선지자ㅡ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니야, 학개, 즈가리야, 말라기.
이밖에도 당시에 선지자 학교가 있었다고까지 하니까 많은 선지자가 있었을 것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그 많은 사람이 다 진정한 선지자는 아니었을 것이요, 또 진정한 선지자들도 시대가 상하 천 수백 년에 긍(亘)하였고 각자의 개성이 상이하니 그 특색도 각양이었을 것이요 일률로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개성 개성 격(格)이 다르고 하여도 선지자의 특색으로 항상 변치 않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들 선지자는 철두철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들은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자기 명리(名利)를 위하여 내지(乃至) 자기 인격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그를 위하여 그의 뜻을 세상에 펴기 위하여 사는 자였다. 자주를 존중하는 현대인에게는 이는 견디지 못할 일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인간 본위를 주장하는 현대인에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고, 하나님에게 전부를 들어 바치고 살고 그 의식이 시키는 대로 산다는 것은 열약(劣弱)한 것 같고 인생의 존엄을 잃는 듯할 것이다. 정말 자주가 되었으면 좋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이론과 판이한 것을 보여준다. 모세와 바로는 누가 참으로 강하였던가! 엘리야와 아합에는 누가 참으로 이겼는가! 한 촌 교회의 일동 목사인 루터와 열국 제왕의 모임인 보름스 회의와는 어느 편이 굳세었던가! “내 뜻대로 하려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함이라”(요한 5;30)고 한 나사렛 목수 앞에 로마 제국도 구주의 열강도 전세계의 사람이 지은 신과 우상도 마침내 패하고 굴복하지 않았는가! 참으로 굳센 자가 누구뇨? 하나님의 사람! 참으로 높고 위대한 자가 누구뇨? 하나님의 사람! 사람은 자주를 요구한다. 생명의 오저(奧底)에서부터 이를 요구한다. 아무런자에게도 지배받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그가 아무런자에게도 속하지 않기 위해 오직 한 분에게 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절대로 독립하려 하여 사람은 도리어 문화의 노예가 되고 철학의 노예가 되고 욕망의 노예가 되고 이욕적(利慾的) 자아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오직 한 분인 전능의 신을 의지하는 자는 다른 아무런자에게도 예속 하지 않는다. 사람이여, 네 힘으로 갈 수 있거든 가는 데까지 가보아라. 네 힘으로 설 수 있거든 섰는 때까지 서보아라! 우주는 어리석은 자존자(自尊者) 너를 내어버리고 그의 법리대로 운행하여갈 것이다. 한없는 허무와 멸망의 공포는 너를 위협(威脅)할 것이다. 인생아!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 너는 우주를 네 것이라고 주장하여 보았으나 그 순간에 네 영혼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느냐? 탕자가 돌아온다! 종으로나 두어달라 하겠다고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모든 것의 전부를 그에게 맡긴다. 사람의 아들이여! 자주를 원하는가? 굳세기를 원하는가? 원하거든 마땅히 섬길 자를 섬기고 순종할 자에게 순종하여라! 고대 인간 문명의 대표적 권위자이었던 바로로 하여금 신혼(身魂)이 미접(未接)케하던 모세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였다. 제왕을 대적으로 전국민을 상대로 바빌론, 앗시리아, 이집트, 수리아…… 당시 열강 전부를 적수로 감연(敢然)히 서서 꾸짖고 싸우던 모든 선지자는 다 하나님에게 절대 복종하는 사람들이었다. 근대(近代)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에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배경 없는 사막의 무대에 소연(消然)히 서기를 참아 견디지 못하였다. 지주(支柱)를 구하였다. ‘제도’의 지주를, ‘사회’의 지주를! 사람의 아들들아! 의지를 구하려거든 코 아래로 숨쉬는 사람보다는 전 우주를 지으신 자요 그를 다스리시는 의(義)의, 애(愛)의, 진리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낫지 않으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배에서 만들기 전에 그를 알았고 그가 태에 나오기 전에 그를 거룩하게 하고 그를 세워 열방의 선지자가 되게 하였다.” (예레미아 1;5)그들이 선지자가 된 것은 자기가 원하여 자각하여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시키신 것이다. 이 점이 세상의 소위 선각자(先覺者)처(處)하는 자, 일세의 목탁(木鐸)처(處)하는 자, 인류의 구주(救主)처(處)하는 자와 다른 것이다. 그들은 겸손하였고 자기의 소약(小弱)과 무능을 알아 사양하는 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세우시고 명하여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사사(士師) 기드온은 부름을 입었을 때에 대답하여
“주여 내 족속이 므낫세 지파 중에 극히 간난하고 내가 아버지 집에서 매우 낮은 자오니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오리까.” (사사기 6;15)
하였고, 예레미야는 부르시는 바를 사양하여
“주여 보시옵소서. 나는 어린아이오니 말할 줄을 모르나이다.”(예레미야 1;6)
하였다. 그밖에 모든 선지자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자면허(自免許)한 것이 아니고 전능하신 자 그가, 절대로 복종하고 공경(恭敬)하는 자가 몸소의 권능으로 빌려주시기를 허락(許諾)하시며 임명한 것이므로 마지막까지 싸워서 이길 수가 있다. 사람의 일이 시종여일하게 관철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성허(聖許)가 없이 자기 면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직임은 하나님이 친히 명하신 것이었다. 국왕이나 제사(祭司)나 국민이 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이 명한 것은 그 권세가 없어질 때 같이 없어진다. 선지자의 사명은 생존하사 변함없는 우주적 권위로써 명한 것이므로 변하는 길은 없었다. 물론 당시에는 선지자 학교가 있어 일종 사회적 기관이 되어 있었으나 진정한(眞) 선지자는 그 학교를 나옴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신학교 출신이 다 참 목사가 아닌 것과 일반이다. 목사 중에는 영혼보다 ‘떡’을 위해 더 염려하는 이가 자못 많다. 그가 직업적 목사일지언정 참 신도의 영혼을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아니다. 선지자에도 허다한 가짜(僞)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 아니요 자기면허 혹은 학교의 면허였다. 이런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을 그들의 입에 넣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4. 의의 사람 선지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므로 또한 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애(愛)의 하나님이요 또 의(義)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의(義) 쪽이 더 강하게 나타난 시대다. 구약을 읽어서 율연(慄然)한 두려움을 느끼고 옷깃을 정(正)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애(愛)의(義)가 구전(俱全)하신 하나님이나 인류를 가르치고 제도(提導)하시는 데 무질서하게 하시지 않는다. 고대에 있어서는 우선 의로써 다스리신 후 비로소 애의 은혜로써 주실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오는 데도 우선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의 열사와 풍경과 기근 질병과 온가지 곤란 중에 40년 동안을 두어 의의 엄정과 늠렬(凜烈)로써 단련하실 필요가 있었다. 실로 따뜻한 봄날의 감사한 맛은 늠연(凜然)한 추상(秋霜) 동설(冬雪)을 지나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의 단련을 지났으나 미구에 다시 추락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의의 엄정하고 가차 없음을 가르치기 위하여 선지자를 보내어 꾸짖고 바빌론, 앗시리아를 보내어 징계를 하시었다.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 가지고 온 자이므로 당시에 사회에 충일(充溢)한 타락과 불의를 볼 때에 참을 수 없었다. 죄악을 보고 미워하지 않는 자는 자기 안에 의가 없음을 증명하는 자다. 자기 맘이 의의 법에 의하여 행하면 행할수록 불의를 인용(忍容)치 못하는 것이다. 의의 사람인 선지자는 그 백성의 행하는 죄와 불의의 더럽고 악독한 것을 볼 때에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의분(義憤)과 인노(忍怒)와 질책(叱責)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고로 “화 있을진저 이스라엘이여…….” “화 있을진저 패역된 자식들이여……” 하고 벽력(霹靂)을 내리었다. 제왕이고 군왕이고 백성이고 제사(祭司)이고 적어도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보고 안연(安然)할 수는 없었다. 그 의기는 태산보다 더 높고 검극(劍戟)보다 날카로웠다. 그들은 세상에 소위 도덕가・종교가・경세가라는 사람들이 한동안 세폐(世幣)와 죄악에 대해 꾸짖다가도 자기의 지위, 자기의 명예, 자기의 생명이 다소 위태해질 때에는 어느덧 잠자듯 잠잠하고 도피하며 타협하는 것과는 달랐다. 불의면 일신이 어찌되거나 일국이 어찌되거나 최후까지 일호의 가차 일분이 이완(弛緩)이 없이 질책하고 매도(罵倒)하고 저주하였다. 우리는 한낱 선지자에게서 전세계의 불의나 오예(汚穢)를 다 태우고도 오히려 남는 불길의 성치(盛熾)을 본다. 그들은 도덕가나 종교가가 하는 것 같은 미온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미온적 태도를 취하려 해도 그들의 뼈 속에서부터 솟아나오는 불길이 그를 허락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直) 죄의 근본에까지 본영에까지 돌격하지 않고는 못 견디었다. 위대하도다, 의의 사람이여!
이치를 잘 말하는 사람은 오늘날엔 그것이 필요치 않다고 하겠지. 애(愛)의 복음이 이미 완성된 지금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충분하다 하겠다. 이론은 그럴 듯하나 의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애(愛)는 결코 알려지지 않는다 함을 나는 단언한다. 의! 늠연열연(凜然烈然)한 의! 숙연정연(肅然正然)한 의! 악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양립을 불허하고 사느냐 죽느냐 하는 데까지 싸우는 의! 나는 사랑하는 조선을 위하여 의의 사람을 절원애원(切願哀願)한다. 의의 사람의 출현을 갈망한다. 백의의 동포들아, 너희의 불행을 비탄하는가? 비탄을 하거든 다시금 그 원인이 어디 있음을 찾아라. 너는 네 불행이 어디로서 왔다 하는고? 네 집이 무너지고 네 전원이 황폐함이 어디로서 원인한다 하는고? 네 고향이 너를 추출(追出)하고 네 이웃이 너를 해하여 남으로도 못 가고 북에서도 학시(虐侍)받음이 무슨 까닭이라 하는고? 모르겠거든 백두산에 올라 남으로 방방곡곡을 굽어보고 한라에 올라 북으로 면면촌촌을 살펴보아라. 북악산에 올라 거리거리, 골목골목, 집마다 뜰마다 찾아보아라! 불의! 죄악! 음해! 편당! 사탐(私貪)! 무신(無信)! 붉기 피보다 더하고 더럽기 부시(腐屍)에서 더하고 구린내나기 포어사(鮑魚肆)에서 더하고! 네 옷이 흰 것이 아니었던들 그 얼마쯤을 완화하였을 것을! 네 옷이 흰 고로 네가 죽인 허다한 의인의 피가 더욱 나타난다. 인류는 죄의 자식으로 그 역사에는 자못 더럽고 끔찍한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근세사같이 비극참극(悲極慘極) 누극추극(陋極醜極)한 것이 어디 있는고!
주여! 아, 주여 의의 사람을 보내시옵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의 불의를 꾸짖고 노하는 성도를 보내시옵소서!
5. 진용의 사람 선지자
진용(眞勇)이라 함은 참 용기하는 의미만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참 용기는 어김없는 참 용기겠지마는 나는 이 말로써 진리의 파지(把持)로부터 얻는 용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썼다.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의의 사람이었던 선지자는 또 진리의 사람이었다. 진리는 물론 오직 첫째(一位)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기가 복종하고 또 일반 백성에게 그를 전하는 것이 그의 직능이었다. 그런 고로 허위는 그들이 극력으로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노한 것은 물론 하나님의 노하심이었다. 하나님은 온갖 죄악을 미워하시나 거짓 것, 헛된 것을 섬기고 거기 복종하는 것같이 미워하시는 것은 없다. 참 생명의 근원이요 복종하여야 할 자에게 복종치 않고 생명 없는 것, 가작의 것에 복종하는 것은 조금도 용사(容赦)하지 않으셨다. 사람의 받는바 온가지 징벌 불행은 지켜야 할 길을 지키지 않는 데서 원인하는 것이다. 지켜야 할 바를 지키지 않고 적은 이욕(利慾)이나 혹은 명예나 지식을 위해 진리에서 떠날 때에 사람은 약하여진다.
힘은 진리의 파수(把守)에서 나오는 것이다. 선지자의 의기를 볼 때 우리는 그 위대와 장엄에 감복한다. 세상에 참 위대가 있다면 선지자에 있을 것이다. 이집트(埃及) 왕 ⎯ 당시 천하의 패주였던 ⎯ 의 앞에 선 모세의 모양을 상상만 해도 놀랄 만하다. 일개의 망명자가 만승(萬乘) 앞에 감연히 서서 이스라엘은 놓아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내려 너를 멸하겠다 하고 싸우는 그 용기 그 위대는 어디서 나왔는고. 자기는 하나님의 뜻을 받았고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은 성의에 합한 것이라는 확신을 제하고 다른 데서 올 곳이 없다. 아합의 앞에 서서 그 죄악을 꾸짖은 야인 엘리야의 용기는 어디서 왔는고. 몸에는 야수피(野獸皮)를 입고 가죽띠를 묶었다 하니 그 얼마나 초야소박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그의 가계도 이력(履歷)도 없었으나 그 얼마나 한주(寒做)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만군의 주 여호와의 뜻을 행한다는 확신을 얻을 때에 제왕이 그 무엇이며 정치가는 무엇인고. 그밖에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할 것 없이 전 국민에 대하여 서서 그들의 죄악, 그들의 불의, 허위를 책망하는 그 용기는 모두 다 같이 성의를 행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선지자의 모양에 비할 무엇이 세상에 있다면 만장(萬丈)의 화염(火㷔)을 뿜는 활화산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그들의 말은 불같이 뜨겁고 타는 것이었다. 그 불길에 접하여 타지 않을 것이 없었다. 그는 사람의 지은 아궁이에서나 풀무에서 나온 불이 아니요, 지심(地心)에서 폭발하여 나오는 굉대한 음향과 바라보지 못할 광휘와 가까이하지 못할 백열을 가지고 폭발하여 나오는 불길이었다. 하나님 자신이 부치시는 풀무에서 나오는 불길이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보던 불길이었다.
하나님의 풀무에 들어갈 때에 영혼은 힘과 용기를 얻어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죄와 싸울 용기가 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두려움이 맘을 지배하고 얼마 못 견디어 곧 악과 타협하고 세상과 결혼을 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불길에 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 불길이 뜨겁고 진리는 불같이 빛나고 맹렬하다. 활화충천하는 화산 앞에 서서 공포를 느끼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진리의 산 불길 앞에 반항하여 설 자는 우주간에 조각만한 그림자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진리는 땅에 떨어졌고 세상에는 백귀야행(百鬼夜行)한다. 죄의 자식인 사람들은 그 사이에 있어서 죄로 불어오는 사망의 빙풍(氷風)이 뼈 속에까지 스며드는 것을 떨어가면서 오히려 고식적 구안(苟安)을 투공(偸貢)하고 있다. 동방의 군자국이라고 일컬음을 듣는 곳에 지금은 진리의 용사가 몇이나 있는고?
살기 위하여 불퇴전의 용기가 필요하다. 악과 싸우기 위하여 무타협의 진용이 필요하다. 진용의 전사 선지자에게 가자!
다음에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다. 참 용기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일세를 대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고로 그같이 힘들고 괴로운 직임은 없었다. 아마 그들은 몇 번 사퇴하고 낙심하려 하고 원망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놓지 않는 손이 있었다. 드디어 자기 맘대로 하기는 절망이로다 하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 염(念)은 결연히 일어났을 것이다. 선지의 직책이 어떻게 괴로운 것이던가는 예레미야로서 대표하여 말하게 할 수 있다.
“내가 말을 낸즉 비참한 말을 하고 또 포학(暴虐)하고 잔인(殘忍)한 것을 말하나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종일토록 내 몸에 수치(羞恥)가 되고 조롱거리가 되는지라. 이러므로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일을 반포(頒布)치 아니하고 또 그 이름을 가지고 말하지 아니하려 하면 내 맘속에 마치 불붙는 것 같은 것이 있어 내 뼈 가운데 깊이 들어 있는 고로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 없도다.” (예레미야 20;8∼9)
“슬프다 나의 낳던 날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내 모친이 나를 낳던 날이 복을 받지 못하였으리로다. 사람이 내 아비에게 고하기를 득남하였다 하여 내 부친을 크게 기쁘게 한 사람은 저주를 받았으리로다.” (예레미야 20;14∼15)
비통무극한 부르짖음이다. 실로 동정할 만한 애소(哀訴)다. 그러나 역시 수행치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할지라도 네가 경계하지 아니하고 또한 말로써 악인을 경계하여 그 악한 길을 떠나서 생명을 구원케 아니하면 그 악인은 반드시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반드시 그 피를 네 손에서 심문하리라.” (에스겔 3;18)
선지자의 직책이 어떻게 괴로운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오늘날 목사들은 이를 보아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동포의 범죄 멸망으로 인하여 그 피의 심문을 맞지 않을 목사가 몇이나 되는고? (바울은 이방족속 데살로니카 사람이 예수께서 강림하시던 날에 주 앞에 서는 것으로 자기의 소망과 낙과 자랑하는 면류관을 삼았다. 데살로니카전서 2;19)
선지자들은 이렇듯 하나님으로부터 어찌할 수 없이 책임지움을 입었으므로 드디어 헌신적, 희생적 용기가 솟아났다. 용기는 자기를 세우는데서 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몰각(沒却)하여 전능자에게 맡길 때에 나오는 것이다.
6. 애국자 선지자
그들 선지자는 또한 애국자였다. 심혈을 쏟아내는 열렬한 애국자였다. 그들은 백성을 향하여 질타하고 책망하고 저주까지 하였으나 그는 도리어 극진히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강한 사랑의 반면에는 강한 증오가 있는 것이다. 극히 사랑하는 자가 기대에 반(反)하는 일을 행할 때에 우리는 불붙듯이 발노(發怒)한다. 독살스러운 입술로 꾸짖고 원망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밉고 망하기를 바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요 사랑하므로 그러는 것이다. 자모(慈母)는 그 아들이 그릇된 일을 행할 때 조금도 애처로워함 없는 듯이 벌하나 이는 사랑의 반동적 발로(發露)에 불외(不外)한다. 이사야 이하 모든 예언서는 한결같이 패하리라, 욕보이리라, 망하리라 하는 노질(怒叱)이나 그는 모두 마음 깊은 속과 뼛속에서부터 열애의 격조가 솟아나오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열렬한 애국심을 가지는 지사가 없지 않다. 국민의 의기가 땅에 떨어지고 영영탐리(營營貪利)의 아귀(餓鬼)배(輩)들이 당로(當路)에 들어앉아 천만 고수극참극(古羞極慚極)의 역사를 연출한 우리 근세에 있어서도 그들이 없었던들 정말 우리 입에 한마디 할만한 말이 없었을 것이요, 정의의 눈(公眼)앞에서 들 만한 면목이 정말 개무(皆無)였으리라 하는 기개 열혈남아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의 애국은 한갓 열정의 애국이 아니었다. 공도(公道)야 어찌 되었든 자국민의 이익만을 위하였으면 그만이요, 진리야 어찌 되었든 자국민의 소유면 진선진미라는 편견적 국수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들의 애국은 유일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근본 국시로 하고 영원의 진리, 보편의 정의에 의해 하는 애국이었다. 고로 그들은 적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거니와 국민에 아첨(阿諂)하는 일이 없었다. 의에 반하고 진리에 어긋날 때에는 주저없이, 가차없이, 사정없이 책망하였다. 그릇된 국민의 분노를 사도 좋고 내지(乃至) 그들의 손에 생명을 잃어도 무관하였다. 동포를 사랑하지만 의와 진리에 인도하려고 사랑하였다. 한갓 동포의 의식의 충족안락을 원하는 것이 아니요 선민다운 백성을 지으려 하는 것이었다. 고로 그 죄과를 비난 질책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 죄악, 그 불행의 근본 원인을 지적하여 회개를 촉(促)하였다. 타락한 국민에 향하여 이같이 위험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겁(怯)하지 않고 감연(敢然)히 행하였다.
죄악을 짓는 자일수록 자기의 죄과를 적발하는 것을 미워한다. 예레미야는 의로써 백성과 제사장을 책망한 연고(緣故)로 죽도록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에도 의를 굽혀 모피(謀避)는 않았다. “볼지어다 나는 너희 손에 있노니 너희 눈에 보기 좋은 것을 내게 행하라. 그러나 너희가 이러한 줄로 알라. 너희가 만일 나를 죽이면 무죄한 자의 피가 반드시 너희 몸과 성과 그 가운데 사는 자에게 돌아가리라.”(예레미야 26;14-15) 하여 강(强)하게 충고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가져 이스라엘의 불행의 원인이라 하였나? 하나님의 사람이요 의와 진리의 사람인 그들은 목소리를 같이하여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사야는 그 예언 벽두에 부르짖기를
“하늘이여 들으며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대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자식을 양육하여 길렀으나, 저희가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며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오호라 죄를 범한 나라이며 허물을 짊어진 백성이며 악을 행하는 종류며 스스로 망하게 하는 자식들이로다. 저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만홀히 여기며 배반하여 물러갔도다. (이사야 1;2-4)
이것이 진정 애국자의 부르짖음이다. 그리고 우리도 또한 이를 바른 것이라고 인정한다. 폐단백출(弊端百出)하고 비참편만(悲慘遍滿)하는 목전의 결점을 들어 공격하기보다는 그 유래하는 근본을 충격하여야 한다. 임시 부분적 개조만을 하여 가지고 항구적인 평화와 진정한 자유는 오지 않는다. 죄악을 뿌리 밑에서부터 삭제한 후에야 비로소 은혜의 이슬이 내리는 것이다. 그런고로 백성에 향하여 “평안함이 없는데 평안하다 평안하다”하는 자도 애국이 아니요, 단순한 감정으로만 하는 자도 참 애국자가 아니다. 혈기방강(血氣方强)한 모세는 동포를 사랑하는 열정에 몰리어 이집트 사람을 박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정당하다고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가 참 애국을 배우고 이스라엘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서는 광야 하나님의 학교에서 40년의 긴 세월 동안을 배우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세상에 자신과다하고 단기(短氣)열중하는 애국자, 사회개량가의 깊이 배울 만한 점이다.
애국은 열렬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단순히 열렬한 것으로는 부족하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의지에 맡겨서 사랑하는 데서 더 나은 것은 없다. 선지자들은 동포를 열애하였으나 일호도 자기 뜻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로지 성의(聖意)의 소편(所便)에 의하여 하였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의 사악을 증명하고 여호와의 참 신(神)임을 밝히었으나 승기(勝氣)를 타서 인의에 몰려 살육을 행하였다. 그로 인하여 엘리야로서는 가질 듯도 않은 공포심이 생겨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광야 고요한 가운데서 여호와 앞에 다시 겸손히 하고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한 자로소이다”하고 자복한 후에야 비로소 평안을 회복했다. (열왕기상 18〜19장) 인의인정(人意人情)으로 하는 일의 결과가 그렇다. 고로 불평이 있거든 의의 통치자인 하나님에게 신원(伸寃)을 호소할 것이요 불행이 있거든 사랑의 양육자인 하나님에게 권고(眷顧)를 애원할 것이다. 참 애국자의 취할 길은 그런 것이다.
애국자가 조선에 많이 나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이 다 진실한 애국자가 되기를 절원한다. 하나님의 의와 애에 의하여 동포를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생활은 날로날로 비운에 빠진다. 곤궁에 빠진다. 우리는 예레미야와 같이 애가(哀歌)를 부르자!
“한양(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그 절기에 나가는 사람이 없고 그 모든 성문이 퇴락하고 제사장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고 저희가 곤고를 받음이로다.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怨讎)가 형통함이여, 저희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심이니 그 어린 자녀들이 대적 앞에 사로잡혀 가도다. 여자 같은 한양(시온)에 그 모든 영광이 떠나가고 저의 목백(牧伯)이 꼴을 찾지 못한 사슴같이 쫓는 자 앞에 힘이없이 가는도다.” (예레미야 1;4-6)
그러나 한갓 애가만을 부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의로써 이 백성을 책망하기를 바란다. 오늘날 당하는 비참이 그들의 부로(父老)와 그들 자신이 지은 바 죄악의 값임을 깨닫게 가르쳐주어 회개시키기를 절망(切望)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기 없음을 자탄한다. 그러나 죄에 잡히고 얽매여 피폐한 자에게 의기가 있을 까닭이 없다. 개인이고 민족이고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에야 비로소 의기가 오른다. 생기를 진작하자 하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자에게는 생기가 존재부터 하지 않는다.
뜻있는 자들아! 이 백성을 사랑하거든 그들에게 주 앞에 돌아와야 할 것을 고하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리오. 오히려 저가 돌이켜 그 길을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겠느냐” (에스겔 18;23)하시는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라.
젊은 생명들아! 너희 부모(父老)같이 하지 말아라. 의를 위하여 싸워라.
젊은 영혼들아! 하나님을 의지하여라. 모세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이사야 예레미야의 하나님을 의지하여라. 순종하고 겸손하여 이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피와 땀으로 기도하라.
젊은 용사들아! 이 백성을 사랑하여라.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어 일하여라. 이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라.
먼저 그 의를 구하자, 의로써 책망하자. 네 몸을 수술대 위에 눕히고 의의 칼을 들어 죄악의 썩은 살을 샅샅이 도려내라. 한 조각 남김없이 긁어내어라. 온갖 불의를 회개할 때에 은혜는 이슬같이 네 위에 내리어 너는 힘을 얻고 네 영혼은 기쁨과 평화를 얻을 것이다.
다시금 소리 있어 부르짖는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내 백성을 안위하고 안위하며 선한 말로 서울(예루살렘)을 위로하고 외쳐 이르되 그 전쟁이 그쳤고 그 죄를 사하였고 그 모든 죄로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倍)나 받았다 하라.” (이사야 40;1-2)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한양이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서울이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되 두려워 말고 조선 모든 성읍에 고하기를 볼지어다. 너희 하나님이 임하였다 하라. 볼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임하사 큰 권능으로 다스리시리니 그 상급이 함께 이르며 그 보응이 앞에 있나니라.” (이사야 40;9-10)
선지자는 전능하신 자의 입으로 하는 이 노래를 들었으므로 그에 의지하고 형언할 수 없는 현재의 곤란 비참 가운데 있어서도 오히려 빛나는 소망을 가지고 불의와 싸우기를 담대히 하였다. 우리도 이 노래를 들어 빛나는 희망을 가지고 허락하시는 날을 위하여 믿고 싸워야 할 것이다.
7. 선지자와 복음
마지막으로 간단히 한 가지를 더 말하자. 이상에 선지자의 의와 진리와 용기와 그들의 강의(剛毅)함 엄숙함 준열함을 말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엄숙의 발로였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의와 동시에 애가 있다. 선지자에게 나타난 것은 주로 의와 준엄한 쪽이었으나, 하나님의 사자인 그들은 또 그의 애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열렬한 애국심을 가졌던 것은 이미 말한 바나 그것만이 아니요 장차 올 애의 복음이 이미 그들에게 암시되어 있었다. 장차 올 복음을 위해 토대를 쌓고 준비를 하고 예고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사실 선지자에게서 복음이 이미 시작이 되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여 길렀으나 저희가 나를 거역하였도다········” 하는 말씀 중에는 분노와 공(共)히 한량없는 설움과 쓰라림과 자비와 애정이 가득찬 것을 느낀다. 고로 다시 곧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와 같이 의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반드시 눈같이 희게 되고 붉기가 진홍 같을지라도 반드시 양의 털같이 하리라” 하시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일찍이 모세더러 광야에서 배암을 들게 하였을 때 이미 복음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이사야 40장과 53장에 이르러서는 가장 명료히 나타났다고 하겠다.
이렇듯 의를 고조하는 한편에 부드럽고 따뜻한 빛을 두어서, 그 너무 준열(峻烈)함에 견디지 못함을 막으시며,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오히려 한없는 사랑을 주시려고 예비하고 기다리고 계시는 성심(聖心)의 간절함을 암시하는 가운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보다도 더 극진히 더 정(正)하고 선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면목이 나타나 있다.
1927. 12. 16.
성서조선 1928. 1월, 3호 4월, 4호
저작집30; 18-31
전집20; 1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