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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으로 이민가신 형수님을 그리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11:23-27)
3월 12일 수요일 같은데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모처럼 가족들을 헤아려 가며 기도하는데, 침상에 누워계신 형수님을 위해 기도드리다보니 보고 싶어진다. 다음주간에는 찾아보리라. 3월 16일 주일아침 손자 준이와 함께 어린이예배 그리고 주일공동예배를 드리고, 오후 찬양예배시간에는 찬송가 28장“복의 근원 강림하사”를 37년 전 결혼식에서 찬양 드렸던 곡인데 그 날을 기념하며 우리 부부가 찬양을 드렸다. 오후 4시에는 석교감리교회에서 교회학교서울연회연합회 임원회의가 있다. 1부 예배, 2부 회의, 3부 친교의 시간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한다. 가족행사로 저녁시간에는 자녀들이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오후예배를 마치고 회의에 가는 길에 이희선권사로부터 어머님이 오늘을 넘기시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화를 받고, 오늘 밤에는 형수님을 뵈어야지 마음먹고, 회의에 참석해 회의 진행 중에 형수님 소천 소식을 받으니 허탈해진다. 오늘 밤은 만나 보리라고 했는데... 자식들도 어머니를 면회하고 돌아가다가 위급한 소식을 듣고 되돌아와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단다. 늦었지만 형수님 곁을 향해 달려갑니다. 형수님!
형수님이(전옥년권사) 한 평생을 살아오신 고향 장막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지내시게 됨을 남은생애의 낙으로 삼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해 추석에는 휠체어를 이용해 거실로 나오셔셔 함께 추도예배를 함께 드리셨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4년여의 날들을 하루같이 누워계시는데, 전화를 드리면 반갑게 맞아 주셨지요. 목소리만 들어도 건강 상태를 알기에 많이 좋아 지셨네요. 훌훌 털고 일어나세요. 어쩌다 찾아뵙게 되면 외로우셨는지, 그리우셨는지는 모르지만 늘 반가이 맞아주시며 상냥하신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음에 환자라는 느낌이 사라진다. 형수님 목소리를 듣거나 용안을 뵈면 내 마음이 평안해진다. 헤어지며 안녕히 계셔요 하면, 잘 가라시며 손을 흔들어주시니 힘들게 돌아서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형수님과 나이 차가 20십년이 되니 어머님 같고, 장조카와 함께 9년을 한 반에서 공부를 하였으니 모든 준비를 똑같이 잘 해주셨지요? 부모님의 손주 사랑은 어린 제 눈에도 표가 나지만, 형수님은 시부모 눈치 보시느라 그러신 것은 아니시겠지만 나에게 더 잘 해주신 것 같아요. 아들 같은 시동생을 챙겨주시고 아버님과 함께 식사하도록 겸상도 차려주셨던 기억이 난다. 형수님이 우리 동네에서 제일 아름다우셨던 것 같았다. 나도 형수님이 좋았던지 자주 부엌에 들어가서 연기가 많이 났지만 아궁이 앞에 앉아서 불도 때드리고, 나뭇가지 잘 꺾어 모아드리고, 솥에 물도 길어 들이고, 어린조카들도 업어주고, 마루를 닦고, 마당 쓸고, 청소하나는 잘 한 것 같다. 학생시절 둥근 소나무를 다듬어서 책꽂이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잘 만들었다고, 청소 잘한다고 동생은 복 받을 거라고 큰 형님께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에 상경해서도 누구도 쉽게 청소 할 수 없었던 곳을 밤새 아주 깨끗이 청소해서 큰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형수님 하면 또 기억나는 것은 무더운 여름철 힘든 농사일을 하시고 점심시간 식사하실 때면 싱싱한 상추에 보리밥과 된장을 넣어 쌈을 싸서 맛있게 드시던 모습에 반해서 나도 무척이나 먹고 싶었는데 꾹꾹 참았답니다. 왜냐하면 학교 선생님이 상추를 먹으면 회충이 생긴다고 하셔서 선생님 말씀을 잘 지키느라고 그랬지요. 후회 많이 했어요. 지금이야 쌀밥에 삼겹살을 기름장에 찍어 넣고 마늘 양파와 된장을 넣어 쌈을 싸 맛있게 먹을 때면 늘 형수님 맛있게 드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더니, 정말 어린 시절의 추억이 오래 가네요. 명절 때나 농한기가 되면 아버님 형제들은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시고 안방에서는 사촌 형수님들이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시곤 했지요 그 중심에는 형님내외분이 계셨지요. 대가족(17명)이 한집에 사는데 10여명은 학생들이다. 여하튼 즐거운 우리 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새벽 별을 보고 일터에 나가셔서 달이 떠오르는 밤에 귀가하시는 부지런히 일 하시고, 성실하시고 인자하신 부모님! 형제지간 우애 좋으시고, 이웃을 사랑하시고 찾아오는 나그네들 잘 대접하셨다고 기회만 되면 큰 형님께서 이야기 해주셨다. 새로운 가옥을 아름답게 건축하셨는데 건축에 필요한 석가래 감, 기둥감, 대들보 감등을 직접베어 오시는 등, 새로운 가옥을 건축하시고 초가대신 기와를 올리셔서 기와집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름을 받으셨다. 또한 지혜와 명철함을 겸비하시고 용기백배하신 큰형님! 가문을 세워 가시는데 하늘도 감동하셨는지 우리 가문에 축복을 더 하시려는 계획이 있으셨나봅니다.
둘째 형님(순호)을 먼저 상천감리교회로 부르셔서 교회생활을 하게하시고, 교회에서 결혼예식까지 올리셨다. 그런데 큰 형님께서는 예안이씨 집안 가문을 세워 가시는 위치에 계셨기에 아니 예수님을 모르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형님이 신앙 생활하는 것을 많이 반대 하셨단다. 그러는 가운데 수년 후 1964년도로 기억이 되는데, 큰 형님(순경)을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교회에 출석한지 1년 안에 성경을 3번 통독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럼에 따라 우상의 마을에서 상상 못할 시험도 참 많았었음을 보고 듣고 체험 하였기에 잊지 못한다. (당시상천교회담임은 김홍도전도사) 그럼에도 주 안에서 승리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온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인가 봅니다. 나도 학생예배, 주일예배, 분반 공부, 수요기도회, 금요속회까지 참석을 하는데 교회생활이 즐거웠습니다. 주일 오후에는 기독교방송도 청취도하고, 신약성경을 다 읽어 가는데, 큰 형님께서 신구약성경 합본을 선물해 주셔서 구약성경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지금에 와 되돌아보니 신구약 성서통독을 다 마친 이후였다고 생각이 되어 지는데, 외5촌 김주석 조카님이 오셔서는 서울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는 눈을 뜨고도 코 베임을 당하는 곳이란 소문이 있었지요? 부모님과 형님께서도 서울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으셨던 것 같아요. 나에게 서울에 가려느냐고 물으시는데, 주저하지 않고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형제 고향을 떠나는 외로운 길인데....
형님의 안내로 상경해서 도봉구 우이동 4.19탑 앞 외딴곳 백운교회 근처에 머물게 되면서 서울에서의 생활이 시작 되었지요. 서울에 상경해서 주님의 인도하심가운데 만남의 복을 받아가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면서 큰 형님네 자녀들 이임선 조카를 시작으로 하나 둘 8남매 모두 그리고 어머님까지 상경해서 형제교회(현,평화를만드는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서울생활에 적응해가며 하나 둘 새로운 가정을 일구어 가게하신 것을 감사드렸지요. 한편으론 큰 불효를 한 것은 아닌지? 형님 내외분과 아버님 이렇게 3분만이 고향에 계시게 되어서 늘 송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조카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잘 돌보려고 나름 노력했지만...? 장조카(홍선)가 결혼한 후에는 동생들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책임을 넘겨 주면서 늘 마음속으로 조카 형제자매들이 보란 듯이 우애 좋게 단합해 잘 살아 주기를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같은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형수님과 떨어져 살아 온지 46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님내외분을 생각하면 보고 싶고 고향생각을 하면서 늘 푸근한 마음에 달려가고 싶은 고향입니다. 형수님! 자손들이 많으셔서 바람 잘 날도 없으셨겠지만, 큰 힘이 되시고 참으로 든든 하셨죠? 앞으로는 더욱 든든한 자손들이 되리라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나라 모든 공간을 초월하는 곳 낙원에서 계속 기도해 주세요! (형수님 직계자손이 외손 포함 34명이 되시네요)
생존한 삼남매(순경 형님과 유수 누님, 순훈 막내)가 그동안(서울 상경후) 형님과 한방에서 잠을 자본 기억이 없는데, 형수님 덕분에 이틀 밤을 함께 지냈어요. 연세 80이 되시는 누님께서 큰올케와 함께 지내셨던 옛 시절이 넘 그리우신 듯이, 다시 뵈올 수 없는 이별의 아픔의 자리에서, 오빠를 걱정 하시는 듯 눈물 흘리시며 나누시는 이야기가 조금은 위로가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저 부모님 같은 형님과 누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자리를 지키는 것뿐 이었습니다. 형님께서는 무엇이 힘드셨는지? 주무시면서 화가 나셔서 훈계하시듯이 잠꼬대하시는 것을 이틀 밤 동안 두 번을 듣고 지켜보게 되면서 살짝 등을 두드려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형수님이 하늘나라 그 좋은 낙원에서 형님을 위로해 주시고 기도해 주세요. 늘 함께 동행 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자손들은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성실하게 잘 살아가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리라 믿으시지요. 자녀들을 위한 사랑은 부탁 안 드려도 되지요?
상천교회 조인연 담임목사님께서 임종예배를 여러 자손들과 함께 드림에 감사 형수님이 장례식장에 도착하시니 먼저 와 계시던 망인 분들이 자리를 다 비워주시니 감사 그 넓은 장례식장 독채로 사용하듯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감사 문상 오신 손님을 편안히 잘 대접 할 수 있었기에 감사 여러 자손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시간시간 위로의 예배를 드려 주시니 감사 형수님이 살아오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장식하심을 감사 하나님나라로의 영결예식이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 자손들은 큰 이별의 슬픔 가운데서도 많은 위로의의 발길 손길에 감사
2014년 3월 16일은 부활을 기념하는 주님의 날이요. 유난히 따뜻한 봄날이요. 자녀들이 임종을 잘 지킨 날이요. 형수님이 평안히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날 이지요. 제 결혼기념일이기도 하지요. 시동생을 덤으로 주신 아들처럼 살펴주신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날이 되었네요.
형수님 이제는 마음 놓고 평안히 쉬세요. 먼저 가신 성도들을 만나시고 계시죠? 시부모님도 만나 뵈시니 어떠세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 하늘, 새 땅, 새로운 삶이시지요? 주님의 품 안에서 참 행복 마음껏 누리세요.
2014. 3. 20 막내 시동생 (순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