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부터 심화된 경제적 어려움은 사회, 정치적 위기로 발전되었으며, 끝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폭발되고 만 것이다. 朴대통령 서거의 충격은 나라를 더욱더 어려운 총체적인 위기로 빠뜨렸다. 朴대통령 서거와 동시에 강력했던 그의 통치기구도 한순간에 무너졌으며 취약한 정당, 국민과 군부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는 정치지도자의 부재 등으로 한국사회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유신헌법은 국민다수의 불신을 받고 있었고 국회의원1/3이 박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으므로 국회도 불신 당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은 선장을 잃고 폭풍을 만난 배처럼 표류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도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소위 3金씨들은 난국수습보다는 대권경쟁에 몰두함으로써 시회혼란을 가중시켰다.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경제가 파산위기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제2차 석유위기의 후유증과 朴대통령 시해사건이후의 정치, 사회적 혼란으로 경기는 얼어붙어 있었고, 물가는 폭등했으며, 국제수지는 크게 악화되었다. 朴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석유위기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차관과 국내자원을 총동원하여 중화학공업에 무리한 투자를 했으나 수출을 목표로 건설된 대규모 공장들이 수출을 하지 못하면서 전혀 가동을 하지 못하고 있거나 매우 낮은 가동률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1978년 말에 이르러 인플레는 20% 수준에 도달함으로써 한국 수출품의 국제경쟁력은 크게 악화 되었다. 그간의 경제적 성공은 역사상 최악의 인플레를 수반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이 분명했다. 인플레를 고려하지 않은 과잉투자와 제2차 석유위기로 인한 원유가격 급상승. 인플레를 잡기위한 선진국의 긴축정책과 이에 따른 국제금리 폭등으로 차관에 대한 원리금 상황부담의 급상승, 그리고 세계경제 침체로 인한 수출격감 등 국제 경제 환경악화와 겹치면서 한국경제는 그야말로 붕괴위기에 직면했다.
더구나 1979년 제2차 석유위기 이후 1980년 한국의 원유수입가격이 22억 달러에서 56억 달러로 두 배 이상 뛰어오르면서 외채도 급속히 늘어났다. 1978년 외채는 180억 달러였으나 1980년에는 270억 달러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그 결과 대외부채 상환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1979년 원리금 상환액이 30억 달러였으나1981년에는 50억 달러의 외화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사회, 정치적 안정과 경제회복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원리금 상환을 위한 외자조달은 사실상 불가능 했다.
한국의 위기사태는 세계금융계에 경종을 울렸다. 대부분 한국회사들은 해외차관에 대한 원리금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한국은 기존차관에 대한 원리금을 지불하고 늘어나는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막대한 외국 차관이 필요했으나 외국투자자들은 오히려 한국에서 자금을 회수하려는데 급급했으며 신규 차관을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1980년 1월 미국 전국은행협회 회의에서 중앙은행인 연방 준비 제도이사회(FRB)는 한국을 특별히 지목하여 금융거래 위험성을 경고했다. 한국의 과도한 경상수지적자, 어두운 수출전망 그리고 정치 불안 가속화 등을 고려할 때 한국에 추가적인 차관 제공에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미국중앙은행은 또한 중앙정보부(CIA)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북한의 도발가능성도 한국경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 사회적 위기에 직면했다 하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나라를 이끌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朴대통령 사망으로 정치전망이 불확실해지면서 경제정책이 표류하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0.26사태이후의 정치, 사회적 불안은 20년 가까이 피땀 흘려 이룩한 경제를 단번에 무너뜨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최규하 정부는 무능했고, 집권당이던 공화당은 지리멸렬했으며 야당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지도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집권가능성에 대비하여 과도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3공화국의 계속된 악선전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야당은 수권능력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