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피레네와 안도라공화국 여행을 다녀오고.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다.
예전 글과 사진을 다시 꺼내본다.
산맥은 언제나 국경이 된다.
그러나 피레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 말이 반만 맞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산은 경계라기보다 숨을 고르게 하는 긴 문장 같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나누고 있지만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저 오래 그 자리에 서서 사람의 속도를 낮출 뿐이다.
피레네로 향하는 길은 점점 말을 잃는다.
도시는 소음을 남기고 뒤로 물러난다.
휴대전화 신호가 약해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가 전부가 된다.
초여름의 피레네는 과장되지 않는다.
알프스처럼 위엄을 앞세우지도 않고 돌로미테처럼 극적인 선을 그리지도 않는다.
풀은 낮게 깔리고 숲은 사람의 키에 맞춰 숨을 쉰다.
바람은 세차지 않고 구름은 느리다.
이곳의 풍경은 삶을 닮았다.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다.
산자락 마을에 머물던 어느 오후.
석조로 지은 집들 사이로 시간도 함께 쌓여 있었다.
카페 앞 작은 테이블에서 노인이 커피를 마신다.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기다림이 생활이고 느림이 미덕이다.
여행자인 나는 그 느림을 배우러 왔다.
피레네의 길은 걷는 사람에게만 많은 것을 내준다.
차로 지나가면 풍경이 된다.
걸으면 이야기가 된다.
나무 사이로 난 오래된 순례길에는 수백 년의 발자국이 겹쳐 있다.
그 길 위를 걷다 보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보이지 않는 동행들이 함께 걷고 있기 때문이다.
안도라공화국에 들어서는 순간.
국가라는 개념이 작아진다.
지도 위에서는 점처럼 보이던 나라가 실제로는 넉넉한 골짜기와 단단한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작지만 하늘은 크다.
이곳은 나라라기보다 하나의 쉼표 같다.
안도라는 늘 중간에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
대국과 대국 사이.
그러나 그 중간은 약함이 아니라 균형이다.
작아서 살아남은 나라.
작기에 자기 방식을 지켜온 나라.
산으로 둘러싸인 수도 안도라라베야는 소박하다.
번쩍이는 건물보다 실용적인 공간이 많다.
면세점의 불빛도 산의 어둠 앞에서는 겸손해진다.
밤이 되면 도시보다 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의 밤은 소비보다 사색에 가깝다.
안도라의 아침은 맑다.
공기가 가볍고 숨이 깊다.
호텔 창문을 열면 산의 냄새가 들어온다.
차가운 공기 속에 풀과 돌과 나무의 기척이 섞여 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깨어난다.
피레네의 트레일을 따라 다시 걷는다.
국경 표지판을 넘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권도 질문도 없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구분은 의미를 잃는다.
산은 묻지 않는다.
어디서 왔는지보다 어떻게 걷는지를 본다.
이 여행에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비움이다.
일정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고 목표를 비운다.
그 자리에 풍경이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온다.
침묵이 들어온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난다.
피레네와 안도라는 크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 남는다.
한 번 다녀오면 자주 떠올리게 된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그 산의 능선이 생각난다.
경계에 있으면서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던 그 고요함이.
이 여행은 화려한 기억이 아니다.
그러나 단단한 기억이다.
시간이 지나도 마모되지 않는 기억이다.
피레네의 산길과 안도라의 골짜기는 내 안에 조용히 남아 있다.
다시 숨이 가빠질 때 돌아가야 할 방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