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헤라클레이토스
Nature loves to hide(5)
-본질은 숨기를 좋아한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한
결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발견하기도 어렵고
얻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본질은 숨기를 좋아한다.」
사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을 얻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것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그대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을 옆으로 밀어 놓을 것인가?
마음은 아주 미묘하다.
《마음을 밀어 놓는 일에도 마음이 남아 있다.》
마음은 “좋다! 나는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 또한 마음이다.
마음은 “이제 신이 문을 두드리게 하라.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또한 마음이다.
마음은 “나는 명상할 것이다. 나는 모든 사념을 버릴 것이다” 하고 말한다.
마음은 “봐라. 나는 모든 생각을 버렸다. 나는 텅 비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또한 마음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건 마음이 끼어든다.》
이것이 문제다.
핵심을 보라.
노력은 도움이 안된다.
그저 핵심을 보라.
마음은 주장을 통해 존재한다.
이 핵심을 보라.
왜 나는 핵심을 보라고 말하는가?
핵심을 볼 때에는 주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핵심을 보지 못할 때 마음이 “봐라. 나는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핵심을 보아라!
《“나는 비어있다”는 주장이 아니라 ‘비어 있음emptiness’이 필요하다.》
《깨어 있음awareness이 필요한 것이지 “나는 깨어 있다”는 주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가 끼어 든다면 그대는 아직도 칠흑 같은 마음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빛이 나타난다.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투명한 인식이 자리잡는다.
이때 그대는 멀리까지 볼 수 있다.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마음의 속임수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때 마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
예를 들어, 마음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자.
이때 그 생각들과 싸우지 말라.
싸우는 자가 곧 마음이다.
그대가 싸움을 시작하면 마음은 이렇게 주장한다.
“보아라. 나는 모든 생각을 버렸다! 이제 너의 신은 어디에 있는가? 깨달음이 어디에 있는가?”
싸움을 일으키지 말라.
싸움과 더불어 마음의 주장이 나온다.
그저 관찰하고 릴랙스relax하라.
마음의 속임수를 관찰하면서 즐겨라.
마음은 얼마나 속임수에 능한가?
얼마나 용의주도한가?
얼마나 끈질기게 끼어 드는가?
힌두교에서는 마음을 개꼬리와 같다고 말한다.
12년 동안 개꼬리를 곧게 편 상태로 유지한다 해도 그대가 손을 떼는 순간 다시 구부러진다.
그대가 아무리 달려가도 마음은 그림자처럼 따라올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주장하건 그 모두가 마음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진리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했다.”
주장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본질은 표면에 있지 않다.
본질은 중심에 숨어 있다.
본질은 나무의 뿌리처럼 깊은 곳에 숨어 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깊이 숨어 있다.
눈에 보이는 나무의 부분을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부분은 표피에 불과하다.
진짜 나무는 땅속에 숨어 있다.
대지의 어두운 자궁에 숨어 있다.
나무를 잘라도 새 나무가 자라날 것이다.
그러나 뿌리를 자르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대의 본질은 피부 표면에 있지 않다.
그것은 표피일 뿐이다.
진짜 그대는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신은 표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표면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밝혀 내고 있다.
피부의 차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 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이 들어간다 해도 과학은 진짜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과학은 외부에서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는 피부밖에 알 수 없다.
진짜는 안에 숨어 있다.
그대의 본질 또한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사원에 숨어 있다.
그런데 그대는 표피적인 차원에 살기 때문에 그것을 놓친다.
존재에는 중심이 있으며, 그 중심은 숨어 있다.
「본질은 숨기를 좋아한다.」
왜 그런가?
왜 본질은 숨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그대는 숨바꼭질을 해보았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존재계는 게임이다.
하나의 놀이이며 유희leela다.
본질은 숨는다.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대는 발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내가 ‘비발견자nondiscovere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표피적인 차원에 머문다.
그 다음에 ‘발견자discoverer’ 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중심으로 들어간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표피의 차원에서 살아간다.
시장, 정치, 성공, 출세, 이 모두가 표피적인 차원이다.
이 차원에 머무는 사람들은 발견자도 아니고 모험가도 아니다.
그들이 달에 간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모험이 아니다.
진정한 모험은 종교적이다.
종교적인 모험은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먼저 그대는 그대 자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대는 우주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먼저 그대는 자신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그곳으로부터 난생 처음 우주의 법칙을 일별한다.
진짜는 숨어 있다.
표면에 있는 것은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표면에 있는 것은 꿈이다.
그것은 쇼show에 불과하다.
내면 깊은 곳,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숨은 조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존재를 향해 나아가라.
중심, 근원적 기반을 향해 매진하라.
항상 뿌리를 찾아라.
이파리에 속지 말라.
그러나 그대는 이파리에 현혹된다.
표면적으로 아름다운 여자가 있을 때 그대는 사랑에 빠진다.
이것은 이파리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이 여자의 내면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내적으로 아주 추악한 여자일 수도 있다.
이때 그대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와 다른 내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내면의 빛이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빛이 나오고 있다.
그대는 겉모습은 아름답지만 추하게 느껴지는 여자를 볼 수 있다.
이 반대의 경우도 볼 수 있다.
겉모습은 추한데 왠지 아름답게 느껴지는 여자가 있다.
이렇게 추한 여자가 아름답게 느껴질 때, 그대는 이 아름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겉모습, 생물학적 조건은 매력적이지 않다.
그런데 뭔가 내적인 것이 그대를 끌어당긴다.
《외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내적인 존재까지 아름다운 존재가 있을 때 그녀는 아주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이것이 카리스마charisma다.》
간혹 그대는 어떤 사람에게서 카리스마를 느낀다.
이 카리스마는 그의 표면과 중심 사이에 숨은 조화가 있음을 뜻한다.
이런 사람은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무엇인가 신성한 기운이 있다.
《중심과 표면의 만남, 이것이 숨은 조화다.》 끝.
서양의 붓다(헤라클레이토스 강론)
오쇼 강의/손민규 옮김 태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