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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ㄴ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사랑하여 자루없는 도끼<거시기>를 허락한다면
주춧돌 없고 벽없는 집을 짓겠다는<****스님은 아이를 낳으면 안되기에>
이야기를 하였다는 고사를 듣고 10년전 쓴 글입니다
원효대사는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진 분이며 학자로써 뿐만 아니라, `해동(海東)의 석가'라는 칭호까지 받은 분이었다.
스님은 해동종(海東宗) 혹은 분황종(芬皇宗)의 조사로서 중국의 계통을 받지 않고 그의 독특한 교설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해동종이라 부르고, 그것을 다시 분황종이라 한 것은 지금의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오래 계셨다고 하여 분황종이라고도 불렀다.
대사의 성은 설씨(薛氏)였다.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라고 하였으며 오늘 날 우리가 부르는 원효라는 이름은 `첫 새벽'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써 그의 불교사에 있어서의 위치를 쾌적히 드러내는 이름이다. 그는 압량군(押梁郡) 자인면(慈仁面) 불지촌(佛地村)의 어느 밤나무 밑에서 탄생하였다. 어머니가 대사를 잉태할 때 꿈에 유성(流星)이 품에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열 달이 차서 그 어머니가 마을의 큰 밤나무 아래에 이르러서 돌연히 산고를 느껴 해산하였다. 그 때 오색 구름이 땅을 뒤덮고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한다.
대사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명하여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아는 신동(神童)이었다. 그래서 15세 전에 학문을 통달하여 이미 선비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궁중의 기마술, 투창술에도 뛰어나서 화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무상을 느끼고 15세 때 흥륜사(興輪寺) 법장(法藏)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일정하게 배운 일도 없었으므로 학무상사(學無常師)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 낭지법사(朗知法師)에게 배우고, 전주(全州) 고덕산(高德山) 경복사(景福寺)에 있는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을 배웠다고도 한다.
대사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다. 그 때 중국에 있던 현장법사(玄캌法師)는 천축을 다녀 온 이래 삼장법사란 칭호를 들었으며 경, 율, 론 삼학(三學)에 뛰어났고 또 화엄학의 거장인 지엄(智儼)스님도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자기보다 10세나 연하인 의상(義湘)과 같이 중국 유학 길을 떠났다. 경주를 떠나 강주(수원) 남양(南陽) 해안에 이르러서 날이 저물었다. 날은 궂어 소낙비가 쏟아지고 더욱 컴컴해 졌다. 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어떤 움집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지새기로 하였다. 한 밤중에 원효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행여나 하여 주위를 더듬거려 보니 손 끝에 물이 담긴 그릇이 닿았다. 그는 황급히 물을 마시고는 계속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날이 활짝 밝자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움집이라 여겼던 곳은 고총이었고 그릇의 물은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 옛날 무덤은 지하실 같이 돌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 관을 넣고, 생시에 사용하던 물건을 넣어 두는 풍속이 있었다. 그가 빗물이 고인 해골을 보니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심한 구토를 느껴 전 날 먹은 음식까지 몽땅 토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원효는 이 고통 끝에 크나 큰 진리를 발견하고 참 깨달음을 얻었다. 곧 기신론(起信論)에서 본 법문이 되살아 났다. 그 법문은,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만이 짓는 것이다.(心生卽種種心生 心滅卽種種心滅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唯心所作)」
라고 한 것이다. 사실 이런 것이 팔만대장경의 요지라 할 수 있다. 곧 마음에 대한 해석이 수 많은 경전을 일관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사상(事象)이 오직 이 마음의 분별에서 생긴 것이라고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 하겠다.
원효대사는 이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미친 사람처럼 너털웃음을 웃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의상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원효는 빙긋거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다가 드디어 의상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에 갈증이 나서, 무척 애쓰는 것을 보았는가?”
“형님이 갈증으로 고생하다가 그릇의 물을 마시는 것을 보았지요.”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그것은 보통 물이 아니고 사람의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네. 어젯밤 그것을 마실 때는 그토록 시원하여 세상 모르게 잠을 잤는데, 오늘 아침 그것이 해골의 썩은 물이란 것을 발견하니 구토가 나서 큰 고생을 하였다네. 밤중의 마음과 아침의 내 마음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모를 때는 시원하던 것이 알고 나서는 기분이 좋지 않으니 더럽고 깨끗한 것이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一切唯心造)이라고 이제 깨달았다네. 화엄경에도,
「온갖 법은 분별에서 생기고 또한 거꾸로 분별을 따라 사라지니, 온갖 분별하는 법을 꺼 버리면 이 법은 생멸이 아니로세.(法從分別性 還從分別滅 滅諸分別法 是法非生滅)」
이라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을 이길 길이 없네. 그러니 내 어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의상은 원효의 말이 그럴듯하게는 들려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계기를 통해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사상을 깨달은 원효대사는 굳이 멀리 당나라까지 들어가 법을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도반(道伴)인 의상(義湘)에게
“나는 다시 서라벌로 돌아 가겠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의상은 깜짝 놀라며,
“형님,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법을 구하고자 모처럼 신심을 내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되돌아간다는 말이 무슨 말인니까?”
한다. 원효는 다시
“법이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요,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생각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생각을 돌이키는 데 있는 것일세. 이제 이것을 깨닫고 보니 멀리 당나라까지 가서 다른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원효는 이렇게 말하고 입당유학(入唐留學)을 단념하였다. 그러나 의상은 원효의 뜻을 들어도 석연치 않기 때문에,
“형님 생각은 그렇지만 나는 이미 뜻을 세워 큰 꿈을 품고 떠났으니 끝까지 가 보고자 합니다.”
“자네 생각 역시 옳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여러 생각 말고 당나라로 들어가세. 나는 오던 길로 되돌아 가겠네.”
원효와 의상이 서라벌을 떠날 때는 뜻이 맞아 왔지만 이곳에 이르러, 한 사람은 깨닫고 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여 서로 뜻이 엇갈렸다. 섭섭하지만 서로 작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앞으로 가고 다른 사람은 뒤로 돌아오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남양 해안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대오(大悟)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니 마치 허공에 걸림 없이 날아가는 붕조와 같이 불(佛)에도 걸릴 것이 없고 법(法)에도 승(僧)에도 아무 걸릴 것이 없었으니 하물며 세속의 시비 같은 것이겠는가?
그 후로 원효스님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 그 언동이 해괴하고 그의 행리(行履)가 괴상하였다. 어떤 때는 속인처럼 술집에 들어 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여자를 희롱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절간에 들어가 붓을 들고 화엄경의 주석인 소(疏)를 짓고 강설(講說)을 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는 신당(神堂)에 들어가서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기 잡는 어촌에 들어가서 자신도 고기를 잡고 어느 때는 나무 밑에서 참선을 하며 앉아 있기도 하였다. 실로 그는 스님인지 속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반 승려나 거사들은 원효가 그 전의 원효가 아니요, 마(魔)가 들었거나 요귀에 홀린 타락승이라고 손가락질까지 하게 되었다.
이때 나라에서는 국왕이 백좌인왕경법회(百座仁王經法會)를 열고 국내 고승 백 명을 법사로 초청하게 되었다. 대사의 고향 사람은 원효대사를 추천하였으나 다른 법사들은 대사의 행동을 밉게 생각하고 왕에게 참소하였기 때문에 왕이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그런 일 같은 것은 우습게 여기고 한결같이 역행(逆行)하기를 마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무애자재(無碍自在)하여 날개 돋친 호랑이 같이, 혹은 여의주를 얻은 용과 같이 무슨 일에든지 걸림이 없었다.
그러나 대사의 진의(眞意)를 모르는 자들은 대사를 가리켜 미치광이라고 흉을 보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
대사는 화엄경(華嚴經) 문명품(問明品) 가운데 있는 게송을 항시 즐겨 외고 다녔다.
「문수여, 법은 본래 이러한 것이니
법왕의 법은 오직 한 법이니라.
온갖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 길로 나고 죽음에 뛰어 나느니라.
(文殊法常爾 法王唯一法
一切無애人 一道出生死)」
대사는 또 무애의 노래[無애歌]를 지어서 호로병을 차고 뒤웅박을 두드리며 천촌만리(千村萬里)로 돌아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였다. 또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여러 사람에게 따라 부르기를 권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기억케 하였다. 어떤 때는 촌락에 병자가 있으면 찾아가 위문하고 염불을 하며 손으로 만져 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해 주기도 하였다. 또는 부락 가운데 사망자가 있으면 찾아가 다비(茶毘) 법문을 일러 주고 그의 극락왕생의 천도(薦度)를 빌어 주기도 아였다.
원효대사는 그야말로 민중 속에 파고 들어가 생활 속의 불교를 전도하였다. 이것을 보면 대사는 보살화현의 성좌라고 할 만하다. 결코 미친 풍광한(風狂漢)이란 말은 그에게 조금도 관계 없는 말인 것이다.
궁중에서는 왕비가 뇌 속에 종기가 나서 어떤 명의를 불러서 치료해도 효험이 없었고 방술가(方術家)를 불러서 치성을 드리는 등 별 짓을 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생각다 못하여 사신을 중국에 보내 약을 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사신이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 가는 길에 뜻밖에 바다 가운데 노인이 나타나 배에 올라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비의 병을 고치려면 나와 함께 용궁에 들어 가서 용왕님을 뵈어야 묘방을 얻으리라.”
하면서 노인은 사신을 이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 가 용왕을 뵙게 하였다. 용왕은 사신에게 물었다.
“어디서 온 백성이오?”
“신라국의 사신으로 왕비의 약을 구하러 당나라로 가다 이 용궁으로 들어 오게 되었나이다.”
“잘 왔오. 경의 나라 왕비의 병은 곧 고치게 될 것이오.”
“무슨 묘약이 있습니까?”
“묘약이 아니라, 묘방이 있오. 경의 나라 왕비는 곧 청제(淸帝)의 세째 따님인데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라 반드시 불사(佛事)로써 병이 나을 것이오.”
“그 불사란 무엇입니까?”
“우리 용궁에는 아직까지 세상에 전하지 않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는 불경이 있오. 이제 왕비의 병을 인연 삼아서 이 경을 세상에 유포시키면 왕비의 병이 쾌차할 것이오. 빨리 가지고 가도록 하시오.”
하고 수 십 장 되는 경을 사신에게 주었다. 그런데 용왕은 잘못하여 이 경을 잃을 염려가 있다 하며 사신의 다리를 째고 그 속에 경을 넣어 약으로 발라 주었다. 그래도 사신은 아픈 줄을 몰랐다. 용왕은 또 나머지 약을 주면서,
“그대가 본국에 가서 다리에서 경을 꺼내고 다시 이 약을 바르면 깜쪽같이 회복될 것이오.”
했다. 용왕은 다시,
“이 경은 책장이 다소 뒤바뀌었을지 모르니 대안성자(大安聖者)를 모셔다가 순서를 찾게 하고 원효법사(元曉法師)를 청하여 소(疏)를 지어서 강설케 하시오, 그래야 왕비의 병이 나을 것이오. 다른 방도가 없오. 달리 약을 구해 설산(雪山)의 아가타약(阿伽陀藥)을 얻어 쓴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꼭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하고 용왕은 바다 위까지 나와 바래다 주었다. 사신은 꿈과 같이 황홀함을 느끼고 다시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상감에게 모든 일을 낱낱이 보고하고 허벅지에서 흐트러진 금강삼매경을 꺼내 바쳤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곧 대안(大安)성자를 찾았다.
그러나 대안성자가 누군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다. 하루는 이상한 복색과 구리쇠로 만든 바루 같은 것을 두드리면서 `대안 대안'하며 돌아다니는 스님이 있었다. 사신은 그가 혹시 대안성자가 아닌가 생각하고 예배를 하였다. 그가 용궁에 다녀 온 이야기를 하고 중중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그가 바로 대안성자였다. 스님은 말하기를,
“나는 궁중으로 들어 갈 필요가 없으니 경전만 가지고 오시오.”
했다. 사신이 경전을 갖다 바치니 대안은 경을 곧 순서대로 6품을 맞춰 놓았다. 그때야 비로소 글 뜻이 통하여 읽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경을 사신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경에 소(疏)를 지어 주석을 하자면 이 나라에서는 원효대사 밖에 없으니, 원효를 찾아 보시오.”
하고 다시 `대안 대안'하며 사라졌다.
이 때 원효대사는 상주(尙州)에 있었다. 사자(使者)가 경전을 받들고 갔더니 원효는 그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소를 타고 마중 나왔다. 사자가 경을 올렸더니 원효는 슬쩍 보고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붓을 들어 주석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가 소를 타고 서라벌에 이르기 전에 소(疏) 5권을 지었다. 그래서 이것을 각승(角乘)이라고도 부르니 곧 소를 타고 소 뿔 사이에 필연(筆硯)을 놓고 대승경전의 소(疏)를 지었다 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왕은 곧 황룡사(皇龍寺)에 법석(法席)을 베풀고 이것을 강설케 하였는데 원효대사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밤 사이에 이 주석 5권을 훔쳐 갔다. 대사가 강경을 하려 하니 책이 없었다. 그래서 대사는 왕에게 연유를 아뢰어 3일간을 연기하고 다시 3권의 소를 지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3권의 소인데 이것을 약소(略疏)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조사의 글이 아니고, 보살의 글이라 하여 논(論)이라고 불러 후대에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라고도 이른다.
이 금강삼매경을 강설하는 날, 왕신도속(王臣道俗) 수 천 명이 구름 같이 모여 들어 황룡사 법당이 터질 듯 하였다. 대사는 낭랑한 음성으로 유창하게 조리 있고 평이하게 강설하여 듣는 사람들이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 때 대사는 이런 아이러니를 던졌다.
“전일에 서까래 백 개를 가릴 때는 내가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대들보 하나를 올릴 때는 오직 나 혼자 끼었구나.”
곧 인왕경(仁王經) 강설 때에 원효를 참소한 1백 법사를 야유하고 풍자한 것이다.
이 법회가 있은 뒤 왕비의 암종인 대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이 때부터 대안과 원효의 이름은 국내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대사는 그 뒤에도 여전히 호로병과 뒤웅박을 차고 돌아 다니며 춤을 추고 무애행을 행하였는데, 어느 날, 노래를 하되,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하나 깎을 터인데,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자는 누구인가?(我作支天柱 誰許沒柯斧)”
이런 노래를 서라벌 장안을 돌아 다니면서 쉬지 않고 불렀다. 그러나 그 뜻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수수께끼처럼 된 이 노래는 마침내 상감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당시 태종(太宗)왕은 이 노래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원효법사가 장가를 들어서 귀한 아들을 하나 낳을 생각이구나. 나라에 어진 사람이 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고 적당한 여자를 속 마음으로 물색하다가 때마침 요석궁(瑤石宮)에 과부로 있는 젊은 공주(公主)가 있음을 생각하고 대사를 그리로 모셔 들여 합궁하여 아들을 낳게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왕은 궁사(宮司)를 불렀다.
“내가 지금 원효대사님을 뵈옵고 싶으니 너희가 나가서 찾아 모시고 빨리 궁중으로 들어 오게 하라.”
하고 명령하였다. 궁사가 나가서 찾을 때 대사는 벌써 남산(南山)에서 내려 와서 문천교(蚊川橋) 다리를 건널 때였다. 궁사와 다리에서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대사는 이를 피하는 척 하며 거짓 물 속에 떨어 져 의복이 흠뻑 젖었다. 궁사들은 달려 내려가서 대사를 끌어 내 모시고,
“스님, 왕명이니 지체 마시고 대궐로 들어 갑시다.”
하였다.
“내가 의복이 이렇게 젖었는데 이대로 어떻게 간단 말이냐?”
“스님께서 언제는 체면을 차리고 다녔습니까? 그대로 가십시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
대사는 이렇게 말하고 따라 나섰다. 대왕은 벌써 요석공주에게 전갈하였다. 궁사가 상주하되,
“상감마마, 원효대사가 궐문 밖에 오시기는 하였는데, 문천교를 건너시다가 물에 빠졌습니다. 모시고 오기는 했으나 추위를 이기지 못해 떨고 계십니다.”
하였다. 왕은,
“그러면 대궐로 모셔 올 것 없이 요석궁으로 바로 가 옷이나 말려 입고 오시게 하라.”
하였다. 그들은 다시 요석궁으로 안내하였다. 그 때 기다리고 있던 요석공주는 반가이 일어나 맞아 들이고,
“스님은 어쩌시다가 이렇게 옷을 적셔 오셨습니까?”
“미치광이 중이 그렇지, 별 수 있겠오?”
하고 옷을 주는 대로 갈아 입고 요석궁에서 3일 동안이나 유숙하였다. 이 때 공주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동방의 유학자(儒學者)로 유명한 설총(薛聰)이었다.
설총은 총명한 재질이 있어 유학에 능통하더니 이두(吏讀)라는 문자를 지어서 한문을 해석케 한, 국가의 공로자이기도 하다.
원효는 그 뒤 속복을 입고 복성거나(卜性居士)라고 자처하였다. 복성이라는 것은 아래하(下)의 하반신이니 하지하(下之下)라 스스로 겸손하여 호를 지은 것이다.
원효대사는 사상적으로 화엄경의 사법계무애의 도리를 몸소 체험한 성자로서 인도의 용수보살(龍樹菩薩)의 화신(化身)이라고도 할 만하다. 용수보살을 일러서 팔종(八宗)의 교조요, 종주라고 이르는데, 원효대사도 역시 그러한 분이다. 그는 어느 한 종파에 걸림이 없이 그 소의경(所依經)에 대하여 소를 짓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원효대사는 신승기승(神僧奇僧)으로 전설을 남겨 놓은 것이 많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하루는 대사가 분황사에서 식사를 하다가 별안간 밖으로 나가서 입에 물고 있던 물을 서쪽으로 뿜었다. 제자가 이상하게 보고,
“스님, 공양을 하시다 밖으로 나가 서쪽으로 물을 뿜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느 절에 불이 붙어 그 불을 꺼 주기 위해 물을 뿜었노라.”
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제자가 기억하였다가 그 절에서 온 스님에게 물었더니, 스님이 이상하게 여기며,
“어찌 그것을 아십니까? 어느 날, 우리 절에 불이 나서 도저히 인력으로는 끌 수 없었는데, 멀쩡한 맑은 날에 별안간 구름이 모여 들어 소나기가 억수 같이 쏟아 지더니 불이 꺼졌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대사의 분수멸화(噴水滅火)라 한다.
중국 장안(長安)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라는 큰 절에 천 명의 스님들이 공부하며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 절 앞 허공 위에 큰 소반 하나가 비행기 같이 빙빙 돌고 있었다. 이것을 본 스님이 안으로 들어 가 전갈하였더니 모든 스님들이 구경하러 절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런데 마침 근 방의 대들보가 부러지며 집이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서 돌던 소반도 땅에 떨어졌다. 스님들은 땅에 떨어 진 소반을 보니,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救衆)」
이라 쓰여 있었다. `해동의 원효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한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 천 명의 대중들은 매우 신기하게 여기고 해동 신라국으로 찾아 와서 경남 양산(梁山) 내원암(內院菴)에서 원효대사를 찾아 뵙고 제자가 되어 도를 물었다. 그리고 공부를 잘 하여 도인이 되었으므로 그 산은 천성산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당고승전(唐高僧傳)에 기록되어 있다. <법보878-99.2.6, 879, 880, 881호 연재>
<원효대사-참고자료-두산대백과사전>
원효(元曉/617~686.3.30)
신라 때의 승려. 속성 설(薛). 법명 원효, 아명 서당(誓幢)·신당(新幢). 설총(薛聰)의 아버지.
압량(押梁:慶山郡) 출생.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唐項城:南陽)에 이르러 한 고총(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大悟)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元曉宗·芬皇宗·海東宗 등으로도 불린다)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破戒)로 단정,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라 자칭,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왕과 고승(高僧)들 앞에서 강론,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저서에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화엄경소(華嚴經疏)》 《대열반경종요(大涅槃經宗要)》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대무량수경종요(大無量壽經宗要)》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범강경보살(梵綱經菩薩)》 《계본사기(戒本私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판량비론(判量比論)》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십문화정론(十門和諍論)》 등이 있다.
원효대사(元曉大師)
이광수(李光洙)의 장편 역사소설. 1942년 3월부터 10월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이것은 작가가 가장 원숙했던 시기에 겪어야 했던 민족적 질곡과 친일 등의 갈등·시련을 안고 쓴 작품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를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원효가 세속적인 체험을 승화시켜 수도승의 고행을 하면서 구국(救國)까지 한다는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원효는 도둑과 거지떼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여러 가지 수난을 겪지만, 마침내 그들을 모두 신라군에 편입시켜 황산벌 싸움에 나가서 큰 공을 세우게 한다. 또 원효는 자신에 대한 요석공주와 아사가의 사랑을 불심(佛心)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고행에서 얻은 득도(得道)의 결과이다. 작가의 해박한 지식, 심오한 불교관과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당시의 우리 민족에게 소망을 불어넣은 소설이다.
원효대사(元曉大師)
장일남(張一男)이 작곡한 오페라. 대본 김민부(金敏夫). 연출 이진순(李眞淳). 지휘 장일남. 출연 진용섭·김원경·이귀임·김성애·최명용·유충열 등. 공연시간 1시간 30분. 1971년 4월 김자경(金慈璟) 오페라단 주최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초연되었다.
신라시대의 위대한 고승으로 추앙되는 원효대사는 이광수(李光洙)의 《원효대사》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역사적인 인물이다. 작곡자는 원효대사의 인간적인 오뇌와 거기에 얽매이지 않은 초연함, 참선의 경지를 이해하기 위해 절을 찾고 불경소리를 들었으며 음악적인 구상을 하였다. 초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5월에는 대구에서 공연을 가졌다.
원효대사전집(元曉大師全集)
신라 중엽의 고승 원효의 문집. 활자본. 10책. 1949년 간행.
동국대학교 불교사학연구실에서 신라불교전서(新羅佛敎全書) 제1집으로 발행하였다.
제1책에는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제2책에는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불설아미타경소(佛說阿彌陀經疏)》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제3책에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제4책에는 《영락본업경소(瓔珞本業經疏)》,
제5책에는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범강경보살계본요기(梵綱經菩薩戒本要記)》,
제6책에는 《기신론해동소(起信論海東疏)》,
제7책에는 《기신론해동별기(起信論海東別記)》,
제8책에는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제9책에는 《이장의(二障義)》,
제10책에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대승육정참회법(大乘六情懺悔法)》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화엄경소(華嚴經疏)》 《해심밀경소 서문(解深密經疏序文)》 《판비량론 발문(判比量論跋文)》, 전기(傳記)·찬(贊) 등이 수록되어 있다.
원효불기설화(元曉不羈說話)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에 실려 있는 설화. 고승 원효의 일생을 꾸민 설화이다.
《삼국유사》는 원효의 설화 7편을 소개하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만삭이 된 원효의 어머니가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해산했다는 사라수(娑羅樹) 이야기.
② 절을 주관하는 이가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에 밤 두 개씩만 주었는데 불만을 품은 종이 관가에 송사했다. 관가에서 그 밤을 살펴보니 밤 하나가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오히려 한 개씩 주라는 판결을 내리고 그 골짜기를 율곡이라 했다.
③ 원효의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천성이 총명하여 원효는 스승없이 깨쳤다.
④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 찍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원효가 이렇게 외치는 노래를 듣고 태종무열왕이 궁리를 보냈더니 문천교를 지나던 원효는 물로 떨어져 요석궁(瑤石宮)에서 옷을 말리게 된다. 그 곳에 머무르는 동안 요석공주는 잉태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다.
⑤ 설총을 낳은 뒤 원효는 파계승으로 큰 표주박을 얻어 무애(無3)라 이름하고 방방곡곡을 노래하고 춤추며 몽매한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⑥ 원효는 소를 타고 가면서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 소의 두 뿔 위에 놓고 썼다. 이 각승(角乘)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을 나타낸다.
⑦ 원효가 입적했을 때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빚어서 분황사(芬皇寺)에 안치했다. 설총이 절을 하자 원효상이 돌아보았는데 그 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었다.
무애가(無碍歌)
신라 때의 가요(歌謠).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재위 654∼661) 때 원효(元曉)가 파계하여 설총(薛聰)을 낳은 다음 속복(俗服)에 표주박 모양의 이상한 그릇을 들고 거리를 돌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화엄경(華嚴經)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에서 가명(歌名)을 붙였다고 한다. 그 유래만 《삼국유사》와 《고려사》 <악지(樂志)>에 전하고,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원효(元曉)가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한 《마하반야바라밀다경(摩訶般若波羅蜜多經)》의 요지를 기술한 책. 1권.
전체를 6문(門)으로 나누고 반야경의 중심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제1문 <술대의(述大意)>에서 반야경이 반야를 종(宗)으로 삼고 있다고 보고, 이를 실상(實相)·관조(觀照) 두 반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제2문 <현경종(顯經宗)>에서는 이 반야를 문자(文字)·실상·관조 셋으로 나누고, 주로 실상과 관조 두 반야를 설명하면서 그의 사상의 특징을 이루는, 여래장(如來藏)이야말로 실상반야라고 하였다.
제3문 <석제명(釋題名)>에서는 《대혜도경》의 대(大)·혜(慧)·도(度) 세 낱말의 의미를 풀이하였고,
제4문 <명연기(明緣起)>에서는 경전을 설(說)한 인연에 대하여 보살행(菩薩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해서, 중생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불법에 신심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등 그 나름의 6가지 사유를 들고 있다.
제5문 <판교(判敎)>에서는 중국 양(梁)나라의 법운(法雲)의 이교설(二敎說)과 《해심밀경(解深密經)》에 따른 현장(玄)의 삼종법륜(三種法輪) 교판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제6문 <소문(消文)>은 실제로 기술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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