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혼자서 지낸 3년. 연고 없는 절해고도 적소라는 기분으로 시작한 생활이었다. 3년 후 가족이 있는 대구로 돌아 왔지만 인생에서 내관심분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공부하고 좋은 사람들과 돈독한 교류를 쌓은 기간이었다.
울고 왔다 울고 간다는 골깊고 험한 산골에 부임하였다가 그들의 따뜻한 인심으로 울고 떠났다는 역사속의 고을원님도, 근래의 초임 교사도 아니지만 나역시 울고 왔다 울고 돌아온 도시다. 대한 민국 공업화와 경제개발 계획의 중심부 계획도시인 까닭에 정보다는 명분과 실익이 우선되는 삭막한 환경일거라는 생각은 나의 기우였다.
아직도 그시절이 그립고 그때 교류했던 님들이 보고싶고 내마음에 늘 자리하고 있다. 참 좋은 사람들......
성주사를 찾는 시간은 거의 밤이었다. 객지라는 이유, 정 붙일 마땅한 대상도 없었고, 낯가림이 심한 성정탓으로 말없이 통할 곳은 절집이 최고이지 않은가? 그시절에는 차를 타고 통과하여 용화전 존재여부도 몰랐었다. 창살에 영어의 몸이 된 불상, 지붕위 나무는 옥살이하는 죄수의 헝커러진 머리칼 처럼 보인다.
기분 나빠하지 않을련다. 정형화, 고착화에서 벗어 나자. 어느시절 일탈의 즐거움을 뒤돌아 보면서...
왜 관음보살인지, 친절하게 단정한 안내문이지만 나는 모르겠다. 차라리 용화전각에 어울리게 미륵불이라고 하면 어떨까? 안내문 한자 오류(設法-->說法) 처럼 민머리와 보관 참 부조화다.
투명보관을 착용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숏다리라 균형감이 없는 건가? 오히려 안정감을 주지 않는가? ㅎㅎ 키 큰 부처님은 싱겁지 않을련지...
할아버지 산소에 상석, 비석이 없으면 하대에도 조성하지 않는 것이 법도인데...
본래 위치인가. 범종이 경내 진입전에 자리하고 있다. 명문으로 조선시대 후기인 1783년(정조 7)에 조성한 동종으로 알려져 있다. 음통은 보이지 않으며, 상,중,하대 구분도 없다. 조선동종 특징처럼 유곽은 상대에서 구분되었고,보살상이 보이며, 당좌는 없다.
신라종 상원사 계열, 에밀레종 계열의 특징과 차이 설을 풀었지만 지금쯤 젖가슴으로 구별하는 방법만 기억하고 있겠지?
성주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창건에 연연하지말고 창건 설화로 이해하길 빌며 한국전통사찰 정보에서 옮겨온다.
33계단. 도리천이 어드매뇨?
성주사에서 바로 보이는 앞산. 저 형국이 뱀의 지세라고 한다. 청도 신둔사 석탑도 같은 형국이라 탑기단을 맷돼지로 조성하였으며 우리나라 많은 지방에서 목격되는 비보책이다.
상생과 상극 외에도 십이간지와 관련해서도 돼지와 뱀은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온다.
뱀과 돼지에게도 악연이 있다. 뱀은 12지 가운데 가장 느린 동물로 꼴찌를 면하기 위해 우선 미런한 돼지를 이용하기로 했다. 뱀은 돼지의 강약점을 분석한 결과 돼지가 꿀꿀거리면서 꿀만 보면 사족을 못쓰고 상하좌우를 분별하지 못한 채, 꿀을 먹으면 낮잠자는 특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뱀은 돼지에게 하느님에게 새배하려 가는 날, 꿀이 있는 벌집을 가르쳐 주었다. 돼지는 뱀이 시킨 데로 벌집의 꿀을 털어먹다가 그만 낮잠을 자고 말았다. 낮잠을 한숨 자다가 일어나보니 이미 다른 동물들은 하나님 대문에 새배하여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돼지는 죽을둥 살둥 달려 하나님 대문에 간신히 12등 꼴찌로 도착을 하였다. 하느님은 돼지가 '꿀을 먹다가 꼴찌를 했다'는 증표로 꼬리를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때부터 돼지는 꼬불꼬불한 꼬리를 달고 다녀야 했다. 돼지는 그 꼬리를 볼 때마다 꼴찌의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뱀만 보면 잡아먹게 된 것이다.
뱀!! 넌 내 밥이야!!
싱글벙글.
절집의 상극은 상생이니라!!
대웅전 앞에 고려시대의 석탑과 신라형의 팔각원등 석등 2기가 있다. 탑의 위치가 이상해 보이더니 성주사에서 400m 정도 되는 서북쪽에 있는 창건 당시의 절터에서 탑재를 옮겨와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1604년 진경 스님이 중창할 당시 옛 터에서 석탑과 석등을 찾아냈다는 기록이 있어, 절을 중창하면서 옛 절터에 있던 석탑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상기단 면석에 2개의 모서리 기둥과 중앙 기둥을 새겼다. 초층 탑신에는 간략하게 문비를 새겼으나 희미하여 명확하지 않다. 옥개석 받침 수는 4단씩이다. 상륜은 멸실되었으며 다른 보주를 올려 놓았다.탑 앞에는 배례석, 석등 간주석이 보인다.
대웅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처음 1681년(숙종 7)에 지은 뒤 1817년(순조 17)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기단 오른쪽에는 장애우를 위해 경사로를 두었다.
대웅전 솟을꽃빗살문
대웅전 오른쪽에 자리한 영산전(좌측에는 삼성각).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영산전에는 경주 옥돌로 빚은 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봉안된 삼세불이다.
불상과 보살상의 상호는 서로 비슷한데 사각형에 가깝게 넓적한 편이며, 전체 신체에 비해 차지하는 면적이 넓다. 불상의 경우 머리카락은 나발이 뚜렷하고 이마에 계주도 표현되어 있지만 머리 위의 육계는 전대에 비해 매우 작아져 형식화가 눈에 띤다. 전체적으로 볼 때 19세기 후반에 봉안한 불상이라고 전해온다.
2008.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