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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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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졸저<원저 편저자 (1973년도 초판)> 평택 소통 김평탁입니다.
1973년 초판 이래 조선일보를 비롯 각 신문들과 각방송국 특히 ytn 을 비롯하여 컴퓨터 인터넷.......오늘까지도 각 방송들과 신문 인터넷의 덕택으로 원저자의 보람을 온 국민들과 함께 만끽하며 감사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소생은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개인<일기>를 60여년 동안 지금까지 쓰고 보존해 오면서,
오늘의 국민 소통 운동과 우리 한민족 한가족 소통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으며 다행히도 박근혜정부<한민족미래창조과학기술부>의 탄생을 한없는 기쁨과 소원<소망>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국민 여러분 !
그리고
국내외 동포<가족> 여러분 !
어서빨리 동서남북 우리나라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십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
2013년 0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CCCC C-man 평택 소통 김 평 탁 올림
(국민소통운동본부.017-727-3863,(031)692-3650
평택건강생명사랑상담소<교회> 본교회는 상담 대화 토론 소통 중심의 교회입니다.
소통이란 말<용어>부터 살펴봅니다.
영통 0통 1통 2통 3통 4통 5통 6통 7통 8통 9통 10통 100통 1.000통 10.000통………….
소통은 바로 영통부터 시작됩니다.
소통=영통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한 말이고, 영통은 사람과 하나님과 관계된 말로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사람 곧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는 절대관계 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조물주>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상대관계입니다.
절대관계 절대 !
상대관계 상대 !
우리 국가<민족>동포의 지도자<영도자>는 <영통>부터 시작하여(영통령)<소통령><중통령><고통령><대통령>(원통령)이어야 하겠습니다.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017-727-3863,(031)692-3650 ,1588-9191)
9월 11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11장 전문
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삼상23:14, 삼상24:2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시64:3, 시64:4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시82:5, 겔30:4
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
② 잠언 11장 전문
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3.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하느니라
4.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
5.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길이 곧게 되려니와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잠3:23
6.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7.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잠21:18
9.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잠11:6
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에8:15
11.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잠29:8
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19:11
14.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17.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18.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19.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20.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21.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찌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22.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23.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26.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욥29:13
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29.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잠15:27, 전5:16, 잠14:19
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31.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 정직한 자와 사특한 자
○ 신실한 자와 입이 가벼운 자
○ 구제하는 자와 재물을 의지하는 자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오늘의 샘터
① <로렌스의 말> : 그는, “남녀간의 완전한 사랑이란 모두가 이중의 성격을 지녔다.
사랑은 또한 모두가 정답게 합일속으로 사라져 몰입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사랑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그밖에 남녀간의 사랑에 관한 명언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② 당신은 <사랑을 받는 비결>을 아십니까?
③ 선거로 뽑힌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 칠레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말 : !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될 것입니다.
마야가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조국의 운명에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사람들이 싸워 승리를 거둘 것이 고, 곧 우리의 아름다운 거리들이 다시 개방돼 시민들이 걸어 다닐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더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 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오늘의 역사
① 고구려 멸망(668) :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세 아들이 서로 다투는 중에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와 고구려는 28대 668년만에 망함.
② 상해 임시 정부 대통령제 채택(1919) :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4월 17일.
********대한민국 임시헌법 공포 : 1919년 9월 11일 개정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我) 대한민국은 아국(我國)이 독립국임과 아(我) 민족이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도다.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克明)하였으며 차(此)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永有)케 하였도다.’
근대 헌법의 체제를 갖춘 첫 번째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으로 평가받는 대한민국 임시헌법.
이 헌법의 뿌리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수립에 닿아 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임시정부 수립의 열망을 안고 중국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헤치고 29명을 선출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다.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했고 여기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그리고 조소앙이 기초해 제출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통과시킨 뒤 11일 이를 공포했다.
이어 이틀 뒤인 4월 13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4월 11일 공포된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헌법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되어 있어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0개조로 된 선포문, 선서문, 정강으로 이뤄져 그 내용과 구성이 아주 간략해 본격적인 헌법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선언문 성격이 강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은 1919년 9월 들어서 좀 더 체계적인 면모를 갖추게 됐다.
그 계기는 임시정부의 통합 확대였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서울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이어 받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하여 통합정부를 구성했다.
이에 따라 헌법도 개정해야 했다.
신익희 등이 기초한 헌법개정안은 9월 6일 임시의정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9월 11일 공포됐다.
임시정부가 새롭게 도약하면서 개정한 임시헌법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애초부터 남달랐다.
게다가 내용과 구성도 체계적으로 보완되었다.
임시헌법은 전문을 비롯해 강령, 인민의 권리와 의무, 임시대통령, 임시의정원, 국무원, 법원, 재정, 보칙 등 58개조로 이뤄졌다.
이 임시헌법의 또 다른 특징으로 대통령제를 채택했다는 점, 삼권분립의 체제를 마련했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근대적 헌법 체제를 갖춘 첫 번째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으로 평가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2008)
③ 전국 새마을지도자 중앙협의회 창립(1980) : 새 시대를 맞아 새마을 운동을 국민정신 개혁운동으로 승화시킨다는 취지로 1980.9.
11 서울에서 창립.
새마을 정신의 현대적 구현을 놓고 아직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④ ‘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발표(1989) : 1989년 오늘 국회에서 !
노태우 대통령 발표.
1988년의 7.7선언에서 천명한 남북동반자관계를 구체화한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
제 6공화국의 새 통일방안입니다.
새 통일방안은 자주, 평화, 민주 3대원칙에 입각해 민족공동체 헌장 마련 단계, 남북연합을 위한 과도기구 설치 단계, 통일민주공화국 실현 단계의 3단계를 거쳐 통일을 실현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새 통일방안이 분단구조를 영구화하고 민족분열을 고착화하는 분열주의자들의 책동이라고 비난했습니다.
⑤ 김주열군 어머니 소파상 수상(1960) : 새싹회는 3․15부정선거에 항거, 마산 학생의거 때 희생된 김주열군 어머니 권여사에게 소파상을 줌.
⇨4월 19일.
⑥ 서포 김만중 남해로 유배(1689) : 1636년 12월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함락되기 직전 한 부인이 다섯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복중(腹中)에 아이를 또 품은 몸이었다.
부인은 곧 남편이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다 강화도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란이 수습된 후 부인이 친정에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서포(西浦) 김만중(1637∼1692)이다.
그는 한글을 사랑한 조선의 선비였다.
우리 문학의 전형을 한문 문학이 아닌 국문 시가(詩歌)에서 찾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문학관을 가졌다.
“자기 말로 마디와 가락을 갖추어야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까지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대제학(정2품)과 대사헌(종2품) 등을 지낸 고위 관료였지만 나무를 하는 아이들이나 우물가의 여인들이 주고받는 상스러운 말에서 진심과 감동을 읽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평가했다.
특히 한자어가 적은 ‘속미인곡’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고대 국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집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윤 씨에게서 아버지 김익겸의 죽음을 들으며 애국자로 자랄 것을 당부 받았다.
또 당시 조선사회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부녀자들의 순절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청나라의 침탈로 인한 이런 사회 문제는 그의 애국심과 국어 사랑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가난했지만 관청의 서고에서 책을 베껴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의 뒷바라지 덕분에 그는 29세의 나이에 정시 문과에 급제한다.
그러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품 때문에 한 번의 삭탈관직과 두 번의 귀양살이를 겪게 된다.
희빈 장 씨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남인(南人)들과의 정쟁에 휩쓸려 결국 1689년 남해의 노도(櫓島)로 떠난 귀양살이가 결국 ‘마지막’이 된다.
하지만 그는 가시 울타리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혹독한 귀양살이를 국문학사에 빛나는 한글 소설을 쓰는 시간으로 승화시켰다.
한글을 사랑한 그가 자신의 문집 서포만필(西浦漫筆)에 남긴 글은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고유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말로 글을 지으니, 설령 뜻과 느낌이 비슷하다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2007)
⑦ 일본군 무장해제(1945) :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27일이 지난 1945년 오늘 !
닷새전(9월 7일) 우리나라에 진주한 뒤 남한에 군정을 선포한 미군 !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제24군단 소속 미군들은 가장 먼저 일본군의 무장해제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미군의 감독아래 이루어진 일본군의 철수 !
미군은 철수하는 일본군을 검색해 밀반출되는 무기들을 모두 압수합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제물포조약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주둔하기 시작한 일본군 !
한반도 주둔 63년만에 일본군은 본국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⑧ 중공군, 금문도 공격(1958) : 대만의 대중공 전초기지인 금문도 !
1958년 오늘 금문도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입니다.
본토에서 약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금문도 !
이런 지리적 이유때문에 금문도는 중공과 대만이 정치, 군사적으로 긴장상테에 있을때마다 늘 관심의 대상이 돼왔습니다.
⑨ 인도 반카스트제도 반대 시위(1972) : 1972년 오늘 !
수백명의 인도 국민들이 델리시에서 시위를 벌입니다.
불법적인 계급 차별을 규탄하는 시윕니다.
시위의 발단은 인도에서 가장 낮은 계급인 "하리잔" 계급의 여학생을 학교 선생이 차별대우한데서 비롯됐습니다.
인도 정부가 해당 선생을 체포한 뒤 곧바로 풀어주자 하리잔계급의 국민들이 뿌리깊은 계급차별에 격분한 것입니다.
폭동의 양상을 띠며 확산된 시위는 경찰의 진압으로 사흘만에 진압됐습니다.
⑩ 미국 전역서 동시다발 항공기 자살테러(2001) : 2001년 9월 11일 오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펜타곤)가 항공기와 폭탄을 동원한 동시다발적인 테러공격으로 무역센터 건물 2동이 붕괴되고 펜타곤이 화염에 휩싸이는 등 대참사가 발생, 미 전역을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테러범들이 납치한 여객기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남쪽 동에 처음 충돌한 것은 오전 8시45분이었다.
이어 9시3분 경에는 피랍된 또 다른 여객기가 북쪽 동을 들이받아, 두 빌딩에서는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두 건물은 충돌 후 1시간30분이 지나, 강력한 폭발과 함께 붕괴됐다.
9시43분 경에는 미국 안보의 심장부인 펜타곤에도 납치 여객기가 충돌, 건물 일부가 붕괴되고 화염에 휩싸였다.
곧이어 여객기 한 대가 테러범들에게 납치돼 피츠버그 상공에서 추락하자 미국인들의 테러공포는 극에 달했다.
이 여파로 뉴욕 증시도 대공황기였던 1933년 이후 68년 만에 4일간 폐장했다.
사망자와 실종자는 2002년 8월 현재 2,819명으로 집계됐다.
이중 신원이 확인된 숫자는 전체의 절반도 안 되는 1379명.
나머지는 시신을 찾지 못해 대부분 유족들이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적 피해상황도 엄청나 뉴욕시는 테러로 인해 市경제가 2년에 걸쳐 약 1,000억달러의 직․간접 피해를 입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범인으로 지목, 그를 보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빈 라덴의 인도를 요청했으나 탈레반 정권의 모하메드 오마르가 빈 라덴의 구체적인 증거를 적시(摘示)하라며 인도를 거부하자 미국은 마침내 테러발생 26일 만인 10월 7일,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했다.
⑪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괴테 : 괴테는 법률 실무 견습을 위해 1772년 5월부터 프랑크푸르트 북쪽에 있는 베츨러에 체재했다가 마을무도회에서 로테를 만나 동경을 품었지만 그녀는 이미 한 법무 서기관과 약혼한 사이였다.
세 사람은 저마다 괴로워하다가 결국 괴테가 결심하고 그해 9월 11일, 베츨러를 떠났다.
괴테는 전에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하던 한 친구가 역시 베츨러에 파견되어 있다가 불행한 연애때문에 자살한 것을 그 고장을 떠난 뒤에 알게 되었다.
괴테는 이때의 체험과 친구의 자살 사건을 모델로 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고 그가 25세 되던 1774년에 출판했다.
⇨3월 22일.
⇨8월 28일.
⑫ 최초의 부관(釜關)연락선 '일기환(壹岐丸)'취항(1905) : 1905년 9월11일 밤, 부산. 여객선 일기환(壹岐丸ㆍ이키마루)이 항구에 들어섰다.
최초의 부관정기연락선이 도착한 순간이다.
최고속도인 시속 14노트로 11시간30분 동안 달려온 배는 승객 300여명을 토해냈다.
러일전쟁 승리를 업은 일본은 부관항로에 온 힘을 기울였다.
경부선ㆍ경의선과 함께 대륙행 직항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식사가 포함된 뱃삯은 1등실 12엔, 2등실 7엔, 3등실 3엔50전. 쌀 한 가마에 5엔이었으니 낮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배는 늘 붐볐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많아지자 일제의 국영회사 산요(山陽)기선은 크고 빠른 배를 속속 선보였다.
1913년부터 투입된 3,020톤짜리 고려환과 신라환은 여객 603명을 싣고 16노트로 현해탄을 오갔다.
1922년부터는 3,619톤급 20노트짜리 경복환과 덕수환ㆍ창경환을 연이어 투입했어도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여객이 넘쳤다.
배가 확충된 것은 1936년부터. 7,081톤에서 7,960톤의 덩치에 여객 2,048명을 싣고 시속 23노트를 내는 대형 여객선 금강환과 흥안환, 천산환과 곤륜환을 투입하고야 여객 정체가 풀렸다.
1942년에는 이용객 300만명을 넘어섰다.
특이한 대목은 여객선의 이름. 대한해협의 섬인 일기와 대마로 시작해 조선의 옛 국호와 궁궐 이름, 명산까지 섭렵한 뒤 만주ㆍ몽골 접경 흥안령산맥을 지나 히말라야(천산)와 전설상의 곤륜산까지 뻗어나갔다.
누가 지었는지 일제의 대륙침략 경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일제 패망과 함께 사라진 부관연락선은 1970년 부관페리라는 이름으로 부활, 민간 교류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사의 찬미’를 불렀던 윤심덕이 빠져 죽은 처절한 낭만의 바다 정도로 기억되고 있는 현해탄. 침략의 뱃고동은 과연 완전히 끊겼을까.
(권홍우 편집위원.서경.07)
⑬ 칠레 쿠데타 발발(1973) : 9.11 !
9월11일 아침. 수도 한복판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범인은 알 카에다가 아니라 칠레 군부 !
선거로 뽑힌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대가 1973년 초가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대통령궁에 폭탄이 떨어지기 직전인 오전9시10분, 아옌데 대통령은 마지막 방송을 내보냈다.
‘나는 항상 국민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
아옌데는 경호대에게 대통령궁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고 소총을 들고 항전하다 머리에 실탄을 맞아 숨졌다.
미국의 지원으로 성공한 쿠데타 직후 칠레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시민 3,000여명이 학살되거나 실종되고 13만명이 감옥에 갇혔다. 10만여명은 아직도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쿠데타군의 명분은 경제난국 타개.
아옌데가 집권한 1970년 34.9%였던 물가 상승률이 3년 만에 508.1%로 뛰고 성장률은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경제난의 주요인은 미국의 봉쇄. 구리 재고를 있는 대로 풀어 칠레의 주수출품인 구리 국제가격을 떨어뜨리고 네슬레 같은 식품회사에 압력을 넣어 분유 수출까지 막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관료들을 물갈이하면서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출신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규제완화와 정부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던 밀턴 프리드먼의 제자들인 이들 ‘시카고 보이스’는 칠레를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칠레의 신자유주의는 과연 성공했을까.
평가가 극과 극이다.
외환위기를 겪자 1982년 피노체트는 시카고 보이스들을 퇴출시키고 동아시아식 통제경제를 접목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피노체트는 아옌데가 남긴 경제적 유산 덕분에 재정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은 ‘칠레의 월급 봉투’로 불리며 수출의 절반가량을 채우고 있다.
(권홍우 편집위원.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⑭ 영국과 프랑스, 세바스토폴(Sevastopol) 점령(1855) : 12개월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러시아 흑해 함대 기지인 세바스토폴을 함락하는데 성공했다.
크림(Krym) 전쟁은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크림 반도를 둘러싸고 1853∼1856년 러시아와 영국·프랑스·프로이센·오스만 투르크 둥으로 구성된 연합군 사이에 벌인 싸움이다.
러시아는 1815년 빈 회의 이후 투르크 제국의 세력권 편입을 대외 정책 기조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투르크 제국 내의 이슬람 성지에 대한 카톨릭 교도의 특권 투르크 술탄에게 요구하자,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가 여기에 반대하고 나온 것이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1853년 7월 러시아는 프랑스 견제를 위해 투르크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등을 침공 무력 점령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양 열강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투르크를 지원함으로써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1854년 9월 연합군은 6만 대군을 크림반도에 투입, 러시아 흑해 함대의 본거지인 세바스토폴 포위 작전을 구사했다.
러시아는 연합군에 맞서 항구를 폐쇄한 채 349일 동안 처절한 방어전을 폈으나, 결국 1855년 9월 11일 함락되고 말았다.
세바스토폴 함락으로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는 1856년 3월 점령지 일부의 반환과 흑해에서의 해상 작전권 포기를 명시한 파리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⑮ 모리스코 추방 : 1609년 9월11일, 스페인 발렌시아항. 수십 척의 배가 아랍인 남녀노소를 가득 싣고 항구를 떠났다.
목적지는 북아프리카. 스페인의 모리스코(Morisco) 대추방이 시작된 것이다.
모리스코란 개종한 무어인을 일컫는 단어. 781년에 걸친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 지배를 종식시킨 1492년의 레콩키스타(탈환) 이후 강압에 못 이겨 기독교로 개종한 이슬람인을 말한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 당시 남아 있던 마지막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에 종교의 자유와 재산권 보장을 약속하고 무혈 입성했으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개종하지 않으면 추방하겠다'며 억지로 개종시킨 것도 모자라 스페인을 무조건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페인이 모리스코를 추방한 이유는 세 가지. 극단적인 종교 이데올로기와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침입해올 경우 모리스코의 내응 가능성 차단, 모리스코의 재산강탈을 노렸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추방령으로 모리스코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스페인이 금과 귀금속ㆍ화폐 반출을 금지해 사실상 빈손으로 쫓겨났다.
가족도 흩어졌다.
4세 이하 어린이의 출국을 금지한 탓이다.
대추방으로 스페인을 떠난 모리스코는 모두 32만5,000여명. 프랑스로 들어간 1만3,470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새롭게 자리잡은 북아프리카에서도 모리스코는 '이슬람의 배신자'로 배척 받았다.
이교도를 내치고 재산을 빼앗은 스페인은 잘살게 됐을까.
그 반대다.
학자와 상공업자ㆍ농업기술자였던 모리스코들이 빠져나간 결과 스페인의 제조업과 농업기반이 무너졌다.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황금도 모자라 스페인은 수 차례 국가부도까지 겪었다.
모리스코 추방과 스페인의 몰락은 만고의 진리를 말해준다.
'경제 운용의 가장 소중한 재산은 사람'이라는 진리를.
(인터넷한국일보, 2009/09/10)
⑯ 9·11 테러 :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5분.
아메리칸항공 소속 AA11편이 미국 뉴욕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가운데 북쪽 건물과 충돌한다.
이어서 9시 3분 유나이티드항공의 UA175편이 남쪽 건물을 들이받는다.
9시 40분에는 AA77편이 위싱턴의 국방부 건물과 충돌한다.
9시 50분에는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붕괴되고 이어서 10시에 UA93편이 피츠버그 동남쪽에 추락한다.
10시 29분에는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고 이 여파로 오후 5시 25분에 세계무역센터 부속건물인 7호 빌딩도 주저앉았다.
세계 경제의 중심부이자 미국 경제의 상징인 뉴욕이 하루아침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9.11테러는 90여개 나라 사람 수천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다.
또 국제금리가 단숨에 하락하고 세계 증권시장들이 크게 흔들렸다.
미국은 용의자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인 알 카에다를 지목했다.
미국은 같은 해 10월 7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기지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한다.
⑰ 기타 오늘의 역사
1777 조지 워싱턴장군이 지휘하는 미국독립군, 영국군에 패배 1841 존 타일러 미국대통령의 은행법에 대한 거부권에 대항해 국 무장관을 제외한 모든 각료 사임
1885(조선 고종 22) 아펜젤러, 정동에 배재학당 설립
1895(조선 고종 32) 정부,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소학교 규칙 공포
1899 한국-청국 통상조약 체결
1899 한미통상조약 체결
1915 전신전화소 설치
1931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봉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추진 하여 금강산에 세워져 봉헌식을 거행했고 보통 금강산수양 관이라고 한다.
1932 이탈리아-소련 불가침조약 조인
1942 아일랜드, 반(反)미-반(反)영 소요. 미군철수 요구
1944 연합군, 베를린에 입성
1945 미군정장관에 윌리엄 H. 아놀드 소장 임명 맥아더사령부, 도 조히데키 전수상 등 일본전범용의자 39명 체포령
1945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 5개국 외상 런던회의 개막
1945 경의선 운행 남북분단으로 중단
1945 월남공화국 독립
1945 조선공산당(책임비서 박헌영) 재건
1948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행정 협정 조인 : 13일 행정권 완전 이양 합의.
1951 미국의 프로렌스 차드윅 여성최초로 영국해협 도영(渡泳)
1953 유엔군사령관에 헐 대장 임명
1962 한국-코스타리카, 국교 수립
1964 국회, 4년 만에 국정감사 실시
1964 월남파송의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교관단(10명) 부산 출발(22일 사이공 도착)
1965 전국뇌염발생 누계 550명. 사망 158명
1967 인도-중국 국경충돌
1970 한국-통가 국교 수립
1971 한국민간경제인단, 박람회 참석위해 유고 입국
1978 한국, 기능올림픽서 2연패
1979 이란 호메이니, 비상사태 종식 선언
1980 경주 안압지와 임해전 복원공사 준공
1982 공주사대, 공산산성서 길이21m, 너비15m, 깊이2.7m 크기의 백제시대 연못발견
1985 포르투갈 비제우읍에서 열차가 충돌. 300여명 사망
1985 미국의 피트 로즈 선수, 4,192번째 안타
1986 호남고속도로 4차선 개통
1990 김일성 북한 주석, 중국 방문(-13일)
1991 이스라엘 아랍인질 51명 석방
1991 정부, 제조업 강화방안으로 서울공대 입학정원을 3백명 증 원
1991 고르바초프, 쿠바철군 및 경원중단 방침 발표
1992 인도북부 캐슈미르주에 폭우. 600여명 사망, 수만명의 이재 민 발생
1994 인천 북구청 세금횡령사건
1996 한국-브라질 첫 정상회담. 상호투자 확대 관광-복수 사증 협정 체결
1996 국경없는 의사회, 제3회 서울평화상 수상
2000 북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 서울 방문(-14일)
오늘의 인물
① 김도태(金道泰 ; 1891.9.11 - 1956.12.26) : 평북 출생의 사학가․교육가.
3.1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광복 후 대한지리학회 회장․국사 편찬 위원․대한 교육 연합회 회장․서울대학교 교수․서울 여자 상업학교 교장을 지냈다.
⇨ 12월 26일.
② 이우경(李友慶 ; 1923 ~ 1998.9.11) : [요약] 간단하면서도 감각적인 선으로 대중적인 신문삽화를 그린 한국의 삽화가.
정감 있고 운치 있는 해학이 담긴 그림으로 소설가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어린이책 일러스트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1997년 일러스트부문 한국어린이도서상을 받았다.
국적 한국
활동분야 미술, 삽화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일러스트부문 한국어린이도서상(1997)
주요작품 《이우경전래동화집》
[본문] 1923년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서 태어났다.
간단하면서도 감각적인 선(線)을 구사한 대중적인 신문삽화로 삽화 1세대를 대표하는 선구자이다.
일제강점기 때 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 재학중 일본·만주까지 포함한 전국학생전람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1941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3회 연속 입선하였다.
1950년대 초부터 신문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서울신문·경향신문 등에 신문삽화만 100여 차례 그렸다.
그림에 정감이 있고 운치있는 해학이 담겨 있어 소설가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그가 그린 신문소설 삽화로는 《인간교실》(손창섭), 《길》(손창섭), 《인생대리점》(이호철), 《곡예사의 혁명》(홍성원), 《허상과 장미》(이병주), 《밤의 무지개》(강신재), 《배회》(신상웅), 《달려라 백마야》(유호) 등이 있다.
어린이책 일러스트분야에서도 활동하여 1955년부터 위인전·전래동화·창작집 등 수많은 동화책의 삽화를 그렸다.
담백하고 익살스런 인물과 동식물 그림은 한국 고유의 웃음과 해학에 바탕을 둔 것으로 평가된다.
작품으로는 《이우경전래동화집》(전4권), 《춤추는 호랑이》 등이 있으며, 1997년 일러스트부문 한국어린이도서상을 수상하였다.
(두산백과사전.2009)
③ 피에르 드 롱사르(Pierre de Ronsard ; 1524.9.11 ~ 1585.12. 27) : ⇨12월 27일.
[요약] 16세기 프랑스의 대표 시인.
플레야드파의 대표자였다.
알렉산드란 시구를 확립, 고전극시의 길을 열었다.
《엘렌의 소네트》는 롱사르 시의 최고봉이다.
중세 서정시와 근대의 상징시를 잇는 계승자였고, 시형식의 개혁을 실천하였다.
[본문] 루아르 지방 방도무아의 라 포소니에르 성관에서 출생.
프랑수아 1세의 황태자 오를레앙공(公)의 시종으로 입궁하여 스코틀랜드 ․독일 등에 체재하였다.
18세 때 병으로 청각에 이상이 생겨 사임하고 파리의 코크레 학원에 입학하여 J.바이프, J.뒤벨레와 함께 교장이며 그리스 학자인 J.D.도라의 지도로 고대문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더 없이 순결한 그리스어 ․라틴어의 위치까지 끌어올리려는 이상을 가지고 공동선언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 Defense et 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aise》(1549)을 발표하였으며, 롱사르 자신도 그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고대그리스의 시인 핀다로스풍(風)의 서정시 《오드집(集) Les Odes》(1550)을 발표하여 새로운 시의 유파인 플레야드파(派)의 대표자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풍(風) 소네트 《연애시집 Les Amours》(1552-1556), 장엄한 장시 《찬가집 Les Hymnes》(1555-1556)을 발표하여 당시 프랑스 시인의 일인자가 되었고, 12음절로 된 알렉산드란 시구(詩句)를 확립하여 고전극시의 길을 연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당대의 참상을 논하는 시 Discourse des Miseres de ce Temps》(1562)는 종교전쟁에서의 자기변호와 가톨리시즘에 대한 지지를 읊은 종교적 내용의 장시를 포함한 시집이며, 《프랑스 시학제요(詩學提要)》(1565)는 산문으로 쓴 유일한 시론으로 고전시인 ․신(新)라틴 시인의 모방을 권고하고, 고어 ․신조어(新造語) ․지방어의 채용 등을 주장하였다.
《엘렌의 소네트 Sonnets pour Helene》(1578)는 사랑과 더불어 노쇠와 죽음을 음영(陰影)으로 묘사한 롱사르 시의 최고봉이다.
생콤의 수도원에서 생애를 마친 롱사르는 16세기 프랑스 최대의 시인이며, 중세 서정시와 근대의 상징시를 잇는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특히 시형식의 개혁을 실천한 공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④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 1885.9.11 - 1930.3.2) : ⇨3월 2일.
영국의 소설가․시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저자.
20세기 영국의 주요작가로 당대에 떠들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D.H.로렌스가 1930년 3월 2일 숨을 거뒀다.
광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조부의 대(代)부터 광부였던 아버지와 교사를 지낸 중류계급 출신인 어머니의 계급 차에서 오는 계속적인 불화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교양없는 주정뱅이 아버지와 격렬하게 대립했던 어머니는 모든 애정을 그에게 쏟았고, 이는 곧 사춘기의 그의 여성관계를 복잡하게 만들며 이후 그의 문학에 흐르는 주제가 되었다.
그러던 1912년 4월 어느날, 교편을 잡고 평범한 인생을 영위하던 그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다름아닌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랑은 그에게 너무나 많은 대가를 요구했다.
프리다 위클리라는 6살 연상의 이 여인은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의 아내이자 제1차 세계대전 중 적국인 독일의 귀족출신이었다.
그녀와의 사랑으로 그는 죽기까지 방랑자로서의 그의 운명에 순종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사랑은 곧 그의 후기 작품들의 주제를 이루었다.
유럽전역과 미국 .멕시코를 떠돌며 방랑생활을 계속하던 그는 만년에 이르러 피렌체에 정착해 채털리 부인의 사랑(1928)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기존의 무지개나 사랑하는 여인들에서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그의 성(性) 철학을 펼치면서 사회에 대한 신랄한 저주와 함께 새로운 성관계만이 현대 문명세계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은 사후 30여 년이 지나서까지 여러나라에서 외설시비로 발매금지를 당해오다 1959년, 1960년에 각각 뉴욕과 런던에서 비로소 완본이 출판됐다.
그는 결코 감정과 감각에 이성을 배제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보다 더 신중한 작가의 작품은 부자연스럽고 차가워 보이도록 만드는 위대한 상징문학의 탑을 세웠다.
⑤ 흐루시초프(Nikita Sergeevich Khrushchev ; 1894.8.17 - 1971.9.11) : 소련 당 제1서기.
수상.
1964년 실각.
1953년부터 1964년까지 11년동안 소련을 통치했던 흐루시쵸프가 1971년 오늘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 나이 일흔 일곱 !
장례식은 이틀뒤인 9월 13일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체(NOVODEVI-
CHYE)수도원 묘지에서 치러졌습니다.
1894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전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에 우뚝 섰던 흐루시쵸프 !
그는 1953년 스탈린이 숨진 뒤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쳐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재임기간동안 스탈린의 권력남용을 비판하는 등 탈스탈린 정책을 펼쳐 소련은 물론 동구 공산권에 자유화 경향을 심는데 기여했습니다.
외교에 있어서도 서방세계와의 평화공존 정책을 추구해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이로 인해 중국으로부터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흐루시쵸프는 그러나 중소분쟁과 농업정책의 실패등으로 권좌에서 물러납니다.
국장과 크렘린궁 안치가 거부된 흐루시쵸프의 유해는 그를 사랑하는 소련 국민들의 조용한 추모를 받으며 안장됐습니다.
⑥ 얀 스무츠(jan smuts) 사망(1950) : 남아공 전 총리
1950년 오늘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인 얀 스무츠가 숨을 거둡니다.
당시 나이 여든 살 !
스무츠는 1899년 남아프리카와 영국과의 전쟁인 보어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에 맞서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스무츠는 보어전쟁에서 패한 뒤 영국의 식민지가 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1919년과 1939년 두차례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습니다.
스무츠는 이후 숨질 때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영연방의 책임있는 회원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⑦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 ; 1908.7.26 ~ 1973.9.
11) : ⇨7월 26일.
칠레의 정치가.
칠레사회당의 서기장, 후생장관 등을 지내고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국내 대기업의 국유화 등 혁신적 정책을 추진하여 남아메리카에서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을 실현하였다.
출생지 칠레 발파라이소
칠레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정치운동에 참가하여, 1933년 칠레사회당 창당에 간여, 1942∼1943년 서기장이 되었으며, 1937∼1945년 하원의원, 1939∼1942년 후생장관, 1945∼1970년 상원의원을 역임하였다.
1970년 대통령선거에서 좌익통일연합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국내 대기업의 국유화, 농지개혁의 촉진, 쿠바·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국교 등 혁신적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남아메리카에서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의 실현에 성공하였으나, 1973년 9월 오늘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관저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
******1973.9.11 오늘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우익 군부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살바도를 아옌데 칠레 대통령은 대통령 궁에서 숨진채 발견됩니다.
아옌데 대통령은 쿠데타군이 대통령궁을 공격할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우익 군부쿠데타로, 중남미 최초로 자유선거에 의해 탄생한 아옌데 대통령의 칠레 좌익정부는 3년만에 그 막을 내립니다.
이후 칠레는 피노체트 장군이 이끈 우익 쿠데타군이 정권 장악에 성공합니다.
쿠데타에 성공한 피노체트는 곧 국가의 모든 권력을 독점해 1974~89년 군사평의회 의장 겸 대통령으로 칠레를 통치했습니다.
아옌데 !
1973년 9월11일 오전 9시!
무장을 한 채 자신의 관저인 모네다궁에 남아있던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그 때까지 군사반란군이 유일하게 접수하지 못한 국영방송 마야가네스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해 마지막 대국민 메시지를 남겼다.
그 직후 아옌데는 모네다궁으로 밀고 들어온 반란군과 맞서 싸우다 살해됐다.
65세였다.
1908년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출생한 아옌데 대통령 !
칠레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정치운동에 참여해 1933년 칠레사회당 창당에 관여했고, 1942년에는 서기장이 됐다.
1937-1945년 하원의원, 1939-1942년 후생장관, 1945-1970년 상원의원을 역임한 그는 1970년 대통령선거에서 좌익통일연합 후보로 입후보, 당선됐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에 오른 최초의 공산주의자인 그는 11월에 정식취임 해 은행-광산 등 주요기업을 국유화하는 좌익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 제도를 정착시켜 나간다는 아옌데 노선은 좌우에서 협공을 받아 곧 난관에 봉착했다.
그런 와중에 칠레의 육-해-공 3군사령관은 정국혼란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라는 최후통첩을 아옌데 대통령에게 보냈고 아옌데가 퇴진을 거부하자 이날 칠레군부는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권접수를 발표했다.
아옌데는 대통령궁을 포위한 군부대의 공격에 저항하다 피살된 것이다.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에 새로운 길을 열 것으로 좌익지식인들 사이에 기대를 모았던 사회주의도 그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의과 대학 출신의 아옌데는 25세에 칠레 사회당에 참여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당 서기장이 된 그는 1970년 대통령 선거에 좌파 정당들의 연합체인 인민연합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인민연합은 집권 뒤 대기업과 천연 자원을 국유화하고 무상교육,무상의료 등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는 한편 쿠바와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미국과 국내 우익 세력은 아옌데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마침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육군참모총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육해공 삼군과 경찰의 연합 쿠데타를 조직해 아옌데를 제거했다.
아옌데가 몸을 피했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했다.
그러나 이 노동자들의 대통령은 조국의 민주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했다(한국일보,고종석,2002.09.10).
피노체트 배후에 좌파인 아옌데를 축출하기 위해 미 CIA가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2000년 9월에 공개된 문서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⑧ 마르코스(Ferdinand Edralin Marcos ; 1917.9.11 ~ 1989.9.28) : ⇨9월 28일.
필리핀의 정치가로 대통령이 되어 21년간 장기집권하였다.
1972년 9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당활동을 금지하고 정적과 언론인을 투옥하였으며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강화하였다.
마닐라 출생.
필리핀대학교에서 법률학을 전공하였다.
태평양전쟁 때 바탄에서 일본군 포로가 되었으나 탈주하여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1949년 하원의원, 1959년 상원의원이 되고, 자유당 총재와 상원 의장을 지냈다.
1965년 국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21년간 장기집권하였다.
1972년 9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당활동을 금지하고 정적과 언론인을 투옥하였으며, 1976년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강화하고, 1981년 1월 계엄령을 해제하고 정치범 일부를 석방하였다.
한편, 부인 이멜다는 수도 마닐라의 시장, 장남 봉봉은 대통령보좌관으로 재직하였고, 1986년 2월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 취임하였으나 국민의 지탄과 여론에 밀려 하와이로 탈출, 거기서 숨졌다.
⑨ 오 헨리(O Henry ; 1862.9.11 - 1910.6.5) : 미국의 소설가.
본명은 William Sydney Porter.
어릴 때 부모를 잃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헨리는 은행돈을 몰래 쓰고 남아메리카로 도망갔다가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체포되었다.
3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한 오 헨리는 10여년 동안 300편 가까운 단편소설을 썼다.
그의 작품 속에는 따뜻한 유머와 감정이 녹아있다고 평가되며, 모파상이나 체호프와 비교되기도 한다.
뜻밖의 결말로 끝나는 교묘한 구성과 유머로 서민의 애환을 그려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대표작 : <마지막 잎새><현자(賢者)의 선물><크리스마스 선물>, <20년 후> 등
⑩ 기타 오늘의 인물 ⑪⑫⑬⑭⑮
1556 칼라산크시우스 출생. 사제요 교사이며,유럽에서 16세기 교육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로마가톨릭학교들의 수호성인.
1722 하이네키우스 사망. 독일의 신학자.박학한 인물이었으며,안정 되고 관대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온건한 루터교 정통파였 다. 두편의 찬송가도 지었다.
1723 바제도우 출생. 독일의 합리주의자이며,교육 방법에 있어서의 개혁자.
1834 빈센트 출생. 장로교 목사.1883년 이후 그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약주해 및 비평학교수로 재직하였다.
1838 아일랜드 출생.세인트 폴의 첫번째 총대주교.1896년에 워 싱턴 DC에 미국 가톨릭대학교를 설립하는 도움을 줌.
1872 송윤진 출생. 장로교 목사.1917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 하여 그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1875 로드 출생. 미북장로교 한국 선교사.교회사가.한국명 노해리. 뗏목으로 압록강 유역을 여행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99 이아주 출생. 기독교인 여성독립운동가.김성수의 부인,이봉섭 의 딸.
1903-1969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출생
1907 최명길 출생. 장로교 목사,순교자.
1925 하드 출생.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사,신학자.한국명 하도례.남 편과 내한 부산에서 여러 국민학교 교사로 봉사함.
1937 미국 최초의 우주왕복선을 조종한 크리픈 출생
1940 영화감독 브라이언 데펄머 출생
1946 연예인 폴라 팔라나 출생
1962 여배우 크리스티 맥니콜 출생
오늘의 샘터
① <로렌스의 말> : 그는, “남녀간의 완전한 사랑이란 모두가 이중의 성격을 지녔다.
사랑은 또한 모두가 정답게 합일속으로 사라져 몰입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사랑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그밖에 남녀간의 사랑에 관한 명언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② 당신은 <사랑을 받는 비결>을 아십니까?
③ 선거로 뽑힌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 칠레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말 : !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될 것입니다.
마야가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조국의 운명에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사람들이 싸워 승리를 거둘 것이 고, 곧 우리의 아름다운 거리들이 다시 개방돼 시민들이 걸어 다닐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더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 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