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5일 평화목교회 성탄절 설교
홍지훈 목사
마태복음 2:16-23
모두에게 기쁜 날
인터넷에서 올 해의 세계 10대 뉴스를 검색해보았습니다. 10대 뉴스라고 할 만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대단히 변혁적이지만 인류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 일과, 반면에 그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들로 구분이 됩니다. 미국의 정권교체나 독일의 총리가 퇴임한 것 등등 세계사의 변화를 예고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도 10대 뉴스입니다. 여전히 부동의 1위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입니다. 백신이 공급되기 시작한 것도 올 해이고, 변종 바이러스로 돌파감염이 생긴 것도 올 해입니다. 세계는 아직 코로나와 전쟁 중입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한 봉쇄정책이 불러온 경제적 참화는 세계경제를 마비시켰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철수한 유럽에서는 물류대란이 일어났고, 반도체 생산이 감소되어 공업경제가 순탄하게 돌지 않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와중에도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은 경제적 고통에 신체적 고통까지 겸하여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 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탈레반정권을 벗어나려는 난민들이 유럽을 떠돌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안에서는 빵을 구하지 못해서 굶는 사람이 아우성을 치지만 탈레반 정권 때문에 끊어진 원조 물자 없이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미얀마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약 1300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21세기 개명천지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TV 프로그램에서 콩고민주공화국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광산에서 코발트 광석을 캐는 콩고 젊은이들 이야기입니다. 수직으로 내려가는 약 100미터의 땅굴로 줄을 타고 들어가, 맨손으로 광석을 캐서 자루에 담아가지고 올라옵니다. 그들은 하루 10시간 일하고 4달러의 임금을 받습니다. 광산 채굴권은 이미 선진국들이 소유하였습니다. 콩고정부가 이미 오래 전에 팔아먹었습니다.
코발트는 전기차를 움직이는 전지의 재료인데, 콩고는 기술이 없어서 이를 가공하지 못하니 원재료를 팔아야하는데, 이미 그 원재료 채굴권조차 팔아버려서, 콩고 청년들은 저임금에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코발트 가격은 오르지만, 그들은 여전히 4달러 밖에 벌지 못합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 중에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시에라리온이 이미 같은 경험을 하지 30년이 지났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직 더 많이 남았는데, 너무나 우울해져서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책임도 아닌데 말입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제 나라와 나라의 구분은 무의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구 전체의 공통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 원합니다. 따듯한 집에서 살고, 맛있는 밥을 먹고, 쓸 만한 옷을 입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60년대를 살아온 어른들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못살았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잘살게 된 나라는 유례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다가 해방된 것이 이제 76년 지났습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직선으로 나라를 구분한 것이 대부분 아닙니까? 유럽 국가들이 20세기 초에 베를린에 모여서 자기들의 식민지 경계를 나눈 지도입니다. 그 후에 하나둘씩 독립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은 여전히 지독하게 가난합니다. 그에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6.25 전쟁까지 겪고도,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과 분단 속에서도, 동서진영 사이에 끼어서 숨조차 쉬기도 어려운 정세 속에서도 이런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코로나 19로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들도 많지만, 국가가 이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라입니다. 아프리카 같은 나라와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잘 살고 아프리카는 굶어 죽어가는 일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도합니다.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1300명이나 죽은 미얀마의 사태에 대해서도 우리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척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히말라야와 알프스 그리고 남미의 만년설들이 점점 적어지고,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문제가 일으킬 세계적인 재앙과 결을 같이하는 심각한 공통의 문제입니다.
만일 온 세계가 모두 우리만큼 다 잘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우리나라의 등록차량 숫자가 2천 4백만 대라고 합니다. 인구 2명당 1대꼴입니다. 물론 일본은 우리보다 3배가 넘습니다. 만일 중국도 그렇게 되면 어떻데 될까요? 아프리카 인구가 대단한데 그렇게 된다면, 자동차 제조사는 떼돈을 벌겠지만, 환경은 극도로 나빠질 것입니다. 그러니 못사는 나라가 못살기에, 잘 사는 나라가 잘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못사는 나라는 계속 못살게 두고, 잘 사는 나라만 계속 잘 살겠다는 것인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지구는 하나이거든요. 그래서 생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공존과 상생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전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얼마나 유명한지 이에 대한 종교적 해석도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어서 안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안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의 승자가 남기까지 너무나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힘들게 합니다. 영화가 다 그렇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끝까지 집중해서 보았으니,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영화 말미에 부자 영감님이 죽기 전에 남긴 말입니다. 그를 찾아온 게임의 승자에게 “여보게, 돈이 아주 많은 사람과 돈이 아주 없는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두 경우 모두 인생이 재미없다는 것이야”이런 말을 남기고 그 부자영감은 죽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그것입니다. 돈이 너무 많으면 무엇을 해도 심드렁하게 느낄 뿐이랍니다. 돈이 너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에 인생이 시시하다는 것이지요.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돈이 너무 많은 사람과 너무 없는 사람의 공통점은 “돈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한 쪽은 지켜야하고, 한쪽은 모아야하니까요.
만일 우리의 마음이 물질에 관심이 너무 깊이 가고 있다고 느끼신다면, 우리 역시 양자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돈이 너무 많지도, 너무 없지도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지금 필요한 만큼은 가진 사람이니, 이제는 돈 생각 그만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며 살아야합니다. 나의 인생에만 집중하지 말고, 모두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잘 사는 나라는 못사는 나라를 돌보는 일에 협력해야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도 그렇고 정치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엊그제 뉴스에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 접경에 군사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항공사진이 공개되었습니다. 뉴스 해설에서는 러시아가 또 우크라이나를 침공할지 모른다고 염려합니다.
전 세계는 2차 대전 이후로 지금까지 여전히 군비증강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지킬 힘은 군대와 무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20세기까지 몸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면 온 세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고 말 것입니다. 20세기의 전쟁처럼 구식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최첨단 무기들이 등장하고, 가장 큰 문제는 온 세상을 움직이는 네트워크가 파괴되면, 그 혼란은 말도 못할 지경에 이릅니다. 끝없는 경쟁은 결국 공존을 파괴합니다. 하지만 공존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결국 남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헤롯대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보고를 그렇게도 기다렸지만, 사태를 예견한 동방박사들이 피해가는 바람에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헤롯에게 새로운 왕의 탄생은 무슨 의미일까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이고, 이제부터 왕권을 놓고 무한경쟁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방 피가 섞인 자신이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이가 더 자라기 전에 싹을 자르겠다는 무서운 결심을 하고 아기 예수의 소재파악에 나섰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와서 당장 베들레헴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일러주었다고 기록하였고, 요셉은 천사의 말을 실행합니다.
결국 헤롯대왕은 베들레헴과 그 주변지역에서 최근 출생한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몇 명이나 죽였는지 모르지만, 울부짖음이 컸다는 구약의 말씀이 본문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결국 경쟁상대를 무참하게 제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무고한 약자들의 희생이 따랐고, 그들의 절망과 비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성경은 담담하게 “헤롯이 죽은 뒤” 요셉이 이스라엘로 돌아왔다고 기록합니다. 헤롯이 그토록 오래 가지고 싶어했던 왕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독한 고통 속에서 헤롯은 죽었고, 유대왕국은 로마제국의 손으로 분할되고 지역마다 분봉왕과 총독이 나누어 다스리게 됩니다. 결국 권력과 무력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평화목교우 여러분,
2000년 전 아기 예수의 탄생이야기의 이면에는 이런 슬픈 역사가 숨어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밝은 세상의 이면에는 정말로 어두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성탄절은 기쁘고 밝은 것을 축하면서, 동시에 어둡고 힘들어 하는 곳에 반드시 희망을 주어야만 하는 절기임에 분명합니다. 우리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외칠 때에는 우리에게만 기쁜 구주탄생이 아니라, 세상 모든 곳에서 기쁜 날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평화목교회의 성탄은 모두에게 작은 기쁨이라도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기쁜 성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