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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우수의시인, 옥봉 백광훈(2)
이장희 추천 0 조회 98 14.05.16 20: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수의 시인 옥봉 백광훈 (2)

 

 

                  김세곤 (노동부 법무행정팀장)

 

 

 

 

한편 「용강사」는 백광훈이 28세 때 지은 시라고 한다. 옥봉은 20세나던 해 하동 정씨와 결혼한다. 하지만 그녀는 2년 후 자식 없이 세상을 떴다. 24세나던 해 백광훈은 다시 하동 정씨를 얻는다.(일설에는 그는 어려서 옥천에 이사를 와서 옥산서당 정응서의 문하생으로서  수학하였다 , 그의 처 정씨는 스승의 딸이고, 두 번째 처도 스승의 딸로서 첫 처의 여동생이라 한다.: 필자 주) 그는 재혼을 하면서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가난하였다. 그래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려,  서울로 와서 과거 공부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지은 시 「別家」는 당시 백광훈의 내면이 잘 그려져 있다.

‘ 뜬 인생 백년간을 괴로워하며
웃는 얼굴로 처자를 달래었지.
금릉성 아래 와서 올려다보니

흰 구름이 아직도 구봉산에 걸려 있네.

浮生自苦百年間 說與妻兒各好顔
却到金陵城下望 白雲猶在九峯山‘



 금세 돌아오마고 웃는 얼굴로  가족과 작별했지만 괴롭기만 한 옥봉. 마음이 약해질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릉성 아래까지 단숨에 이르렀다. 참고 참다가 그때서야 구봉산을 돌아보니, 올라올 때 걸려있던 흰 구름이 여태도 그대로 걸려 있는 것이다. 白雲은 제가 무슨 바위라도 되는 양 산 위에 꼼짝 않고 걸려 있는데, 浮生은 왜 이다지도 괴롭게 떠도는가.


다음 「洛中秋夜」는 서울에서 가을밤에 고향의 아내를 그리며 지은 시다.

‘이 밤 서루에 가을 생각 스며드니
성근 주렴 내리잖아 이슬이 맑았구나.
한 소리 이십사교 위에 뜬 저 달
강남 땅 그 임은 먼 이별 상심하리.

此夜西樓秋思生 疎簾不下露華淸
一聲二十四橋月 人在江南傷遠情 ’

가을밤에  주렴도 내리지 않고 맑게 맺히는 이슬을 본다. 이십사교 다리마다 달빛은 흐른다. 그 위로 남녘 가는 기러기 울음이 슬프다. 저들은 가는데 나는 왜 못 가나. 사랑하는 아내는 멀리 강남 땅에서 이 밤에 마음 아파하며 날 그리면서 저 달을 보고 있겠지.


 한편 옥봉 백광훈의  큰 아들 형남은 26세 때, 둘째 아들 진남은 그의 나이 28세인 갑자년에 태어난다. 백광훈은 둘째 아들이 태어나던 갑자년에 마침내 진사시에 급제한다. 하지만 그 해에 옥봉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만다. 이러한 앞 뒤 사정을 헤아리건대 「용강사」는 바로 앞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서울 생활에 한참 갈등을 겪으며 낙향을 결심하고 있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떠날 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말을 배워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도 갑자년에 맏아들 형남이 세 살이 되는 사정을 헤아리면 다소 시적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시 속의 정황과 그런대로 맞아 떨어진다. 백광훈은 「용강사」를 지은 후 낙향의 결심을 굳힌 듯하다. 서울 생활에서 느낀 고립무원의 절망감도 적잖게 작용했을 터이다. 그의 과거 포기 이유는 당대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도 무관치 않다.


 한마디로  「용강사」는 가난 때문에  서울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하는 옥봉이 고향의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여보, 미안하오.’를 그린 思婦歌다.  이 시에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9세) 첫 아내를 젊어서(22세) 사별한 옥봉이  가난한 집안에서  병약한 아내를 그리워하는 우수가 짙게 깔려있다. 


  차에서 정민 교수가 쓴 “용강사” 논문을  읽으면서 조선시대 선비들도 이렇게 아내를 그리워하는 글을 쓴 것에 대하여  신기함을 느낀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애처가가 있었네?


 이제 목포에서  떠난 지가  한 시간이 넘은 것 간다. 이윽고 차는  해남군 옥천면 사무소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한참을 갔다. 그런데 송산리 마을 입구를 찾지 못하고 계속 가고 말았다. 마을을 지나친 것 같아서 중간에 차를 세우고  사슴농장에서 물어보았다.   다시 차를 돌리어서 2km 쯤 가면 된단다. 차를 돌려서 얼마쯤 가니 송산리 가는 이정표와   ‘옥봉 선생 백공 유허비’가  길가에 보인다.  거기에서 1Km 정도를 더 가니 마을이 있다.  그런데  옥봉 유물관 안내표시판이 없어 유물관을 찾을 수 없다. 별수 없이  송산리 노인회관에 들어가서 물었다. 그랬더니 옥봉 선생 후손이라는 백선생이  친절하게도  안내를 해준다.


옥봉 유물관은  송산리 마을 위쪽에  위치하여 있다. 유물관 입구에는 송산세사(松山世祠)라고 써진 출입문이 있다. 백선생이  자물쇠를 열고 유물관에  들어가니 ‘옥산서실소장품 일괄‘ 이라고 써진 안내판이 있다.  이 안내판에는  옥봉 백광훈이 삼당시인이며 8문장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81호인 이 유물관에는 9종 113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고  적혀져 있다.


  삼당시인!  이성적인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낭만적인 당시(唐詩)의 시를  쓰려고 노력한 조선 선조시대의  최경창,  백광훈, 이달 세 사람을 성당(盛唐)시절(713-765)의 당나라 이태백, 두보, 왕유에 비교하여 삼당(三唐)시인이라고 붙인 이름. 팔문장가(八文章家)는 조선 중기에 널리 글 솜씨가 뛰어난  8대 문장가를 말하는 데,  이는  옥봉 백광훈, 고죽 최경창, 송익필,  윤탁연, 이산해, 이순인,  최립, 하응림 등을 말한다.

안내판 왼편에는 강당 건물이 한  채 있고, 가운데는 옥봉사(玉峯祠)라고 적힌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는 옥봉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안내판 오른편에는 유물관이 있다. 유물관 앞에는 옥봉선생유물관건립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기적비에는  유물관은 해남군에서 종친들과 함께 1981년에 세웠다고 적혀 있다. 나는   유물관을 열쇠로 열고 안내를 한 백선생과 함께 유물관 안을 구경한다.  그 안에는  목판 옥봉집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위 벽에는 옥봉이 40대에 선릉참봉으로 임명된 교지가 붙어 있다. 이 교지는 이조판서가  임명한 것이다. 선릉은 성종임금의 능이다. 능참봉은 왕릉이나 왕족의 능을 관리하는 종9품의 하급관리이다. 요즘 같으면 9급 공무원에 해당된다. 또 한쪽에는 옥봉의 글씨, 한석봉의 글씨가 있다. 한석봉은 한동안 영암에서 살았단다. 그리고  옥봉의 영화체 글씨는 초서로서 알아보기는 힘드나 필체가 유려하다.  또 한곳에는 영혼을 안치하는 가마인 영여(靈輿)가 놓여져 있다. 옥봉이 서울에서 별세하자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선조임금이 하사하였다는  영여가 매우 인상적이다. 이 영여로 옥봉의 영정을 서울에서 해남까지 직접  모시고 왔다고 전한다. (옥봉의 후손인 백선생에 의하면 옥봉의 묘는 해남에 있다고 하나 가는 길이 조금 험하다고 한다.)



 이제  해남의 옥봉 유물관 구경을 마치고 다시 목포로 간다. 돌아가는 길에  옥봉 백광훈과 고죽 최경창 그리고 그의 스승인 이후백을 같이 모신 강진 박산서원도 가보려고 하였으나 시간이 없어서 목포로 곧장 온 것이 아쉽다.


남도는 조선 중기 시대  한문학에 있어서도 화려한 꽃을 피운 곳이었음을 새삼 느낀다.

그동안 나는  격정과 비분강개의 백호  임제, 기개와 풍류의 고죽 최경창, 우수와 비애의 옥봉 백광훈에 대한 문화기행 글을 썼다. 이  다음에는 최인호의 ‘유림’ 소설로 더욱 유명해진 정암 조광조 선생과 양팽손을 만나러 화순군 능주를 가련다.


     (2006.3.1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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