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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신지요? 5월도 거의 끝나가네요.
지난달은 초반에 선거 공보물 때문에 바쁘다가, 중반에는 간행물 탓에 분주했고, 이제서야 슬슬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번에 감상을 남기는 작품은 벨기에 소설입니다.
도서명: 여름의 겨울
저자: 아들린 디외도네
* 이 책은 아이프리 도서관 9번 문학에 4번 일반 소설 코너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8월의 크리스마스, 이 작품의 제목을 보고 처음 연상된 문구였다. 여름에 크리스마스라니, 불일치도 그런 불일치가 없다. 하지만 천청의 여름 하늘에서 흩날리는, 고운 입자를 닮은 하얀 눈은 꽤나 운치가 있지 싶었다. 같은 이유로 이 책 ‘여름의 겨울’이란 제목에서도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렸었다. 한 소녀의 성장을 다룬 소설이고, ‘성장의 고통, 성숙의 달콤함’이라는 짧은 요약 슬로건을 보고는 나름대로 내용을 추측하기도 했다. ‘빨간 머리 앤’과 엇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소녀의 이야기는 내가 상상한 범주보다 더 답답하고 한층 더 묵직했다.
“나는 누군가가, 어른이, 내 손을 잡고 데려가 침대에 눕혀 주길 바랐다. 내 생의 방향을 바꾸어 주길 바랐다. 내일이 올 것이고, 이어서 또 그다음 날이 올 거라고, 그러면 결국 내 삶은 얼굴을 되찾을 거라고. 내게 말해주길 바랐다. 피와 공포는 옅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봄이 시작의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계절이라면, 그 다음 계절인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녹음이 짙어지고, 잎은 무성해지며, 가지는 더욱 자라난다. 강렬하고 뜨겁지만 에너지 충만한 태양 아래서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소녀인 ‘나’의 여름은 작품의 제목처럼 겨울 안에 있었다.
소녀는 밥을 굶거나, 집이 없거나, 가난 등의 고통을 겪지는 않는다. 대신 소녀에게는 성장의 에너지를 주고, 때로 옆에서 보듬어줄 이가 없을 뿐이다.
가장 안정감을 느껴야 할 보금자리인 집은 살얼음 판을 걷는 것 같은 불안함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사냥과 TV, 술 외에는 관심이 없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의 지속적인 폭력에 길들여져 무기력해진 어머니까지. 소녀를 보호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줘야 할 태양은, 어른은, 부모는 그녀의 세계에는 없다. 대신 그녀가 세상 무엇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남동생 ‘질’이 있었다. 주인공인 ‘나’는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동생 질을 사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비극은 예고도 없이 나와 질 앞에 나타난다. 아이스크림 할아버지의 끔찍한 사고를 바로 눈앞에서 목도한 것이다. 그 생경하고도 생생한 사고는 이후 ‘나’와 질의 삶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영화에선 자동차가 한 대 나오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해요. 플루토늄 에너지였는데, 플루토늄이 없을 땐 벼락을 이용했어요. 자동차를 찾아서 조금 고칠 순 있을 것 같은데 벼락은 어떻게 일으켜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폭풍우를 일으킬 수 있을까요?”
사고의 후유증은 컸다. 솔직히 나이와 상관없이 바로 눈앞에서 얼굴을 아는 누군가의 죽음을 본 일이 어디 담담하게 넘길 일이겠는가. 성인에게도 그건 힘든 일이다. 하물며 10살 소녀는, 한국식으로 따지자면 고작 11살인 ‘나’는 어떻겠는가. 동생 질은 말할 것도 없다. 네 탓이 아니라고, 너의 잘못은 없다고, 그런 위로를 건네줄 어른도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트라우마를 앓게 된다.
결국 동생 질은 자기 자신을 잃고 해소되지 못한 두려움과 공포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고 만다. 코끼리의 상아와 온갖 동물들의 가죽과 머리 등 아버지의 전리품들이 가득 쌓여 있는, 정서적으로 하등 도움이 될 게 없는 ‘시체들의 방’은 소년의 유폐 장소가 된다. 머릿속 악의(하이에나)가 둥지를 틀고 조금씩 질을 갉아먹어가면서 소년은 아버지와 똑같이 잔인한 폭력의 길을 걸어간다. 친친라, 고양이와 강아지, 염소까지 주위에 희생양이 될 것들은 충분함으로.
물론 누나인 ‘나’는 동생을 지키려 한다. 그렇지만 소녀 역시 누군가의,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트라우마로 변해버린 동생 질을 위해, 시간을 되돌리기 위한 타임머신을 만드는 데 몰두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이스크림 할아버지의 사고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 크림을 얹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다면, 아니, 최소한 그 사고를 목도하지 않았다면 소년을, 동생 질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성장의 시기는 언제고 닥치기 마련이다. 꽃봉오리 속에는 요정이 없고, 옆집에 사는 할머니는 대모 마녀가 아니며, 산에 계곡에는 드래곤이 없고, 토끼가 말을 걸어오는 일도 없으며, 강가에는 용궁으로 통하는 물길이 없다는 것, 또 남극이나 북극에 산타 클로스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시간을 거스르는 방법 따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말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놀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 아니었니?”
과거로의 여행이 불가능함을 막연하게나마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포기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유일하게 매달릴 밧줄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과학과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론이나 공식 등 모든 것을 저절로 이해했다는 대목은 없다. 어쩌면 절박함, 혹은 간절함만이 그 소녀의 재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나고 또 다른 여름이 되어 감에 따라 소녀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은거한 영 교수의 수업을 받고, 이웃인 챔피언과 깃털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는다. 폭력이 지배하는 집으로부터, 아버지의 감시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구원할 방법을. 하지만 늘 그렇듯 폭력이 난무하는 가정에서는 언제든 시한폭탄이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버지와 질, 그리고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에 ‘나’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냥감이 되어 참가하게 되고, 그 야만적인 상황 속에서 크게 다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공포가 ‘나’에게서 포식자를 키워내고 ‘질’은 상처 입은 누나로 인해 아주 잠깐이지만 예전의 반짝이는 모습을 보인다. 같은 여자로서 어머니와는 달리 폭력의 굴레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나’는 공포를 삼키고 분노를 내뱉는 포식자를 앞세워 아버지에게 대항한다. 그녀 앞에 잔인하게 내던져진 삶과 죽음의 기로에 ‘나’와 ‘질’은, 그리고 무기력하기만 했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상대로 고통받은 육신과 상처 입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야기엔 원래 우리가 무서워하는 걸 몽땅 집어넣기 마련이야. 그래야 그런 일들이 진짜 삶에선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거든.”
마음이 무거운 책을 읽는 것, 그리고 그 작품을 독서한 후 감상을 적는다는 것은 예상보다도 좀 더 답답한 일이다. 책이 마음의 추가 되기 때문일까? 앙금처럼 무겁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 느낌에 한동안 시달려야 겨우 작품의 여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주제 자체가 받아들이고 소화하기에 너무 버거워서든, 나의 이야기와 닮아서든, 이 답답함은 후유증이 제법 가는 편이다. 때문에 초반에 빨간머리 앤’과 유사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책을 펼쳤던 내게는 이 ‘여름의 겨울’이 한층 무거웠고, 중반쯤 가서는 책을 덮고 전자도서 파일을 지울까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나’의 겨울이 끝나면서 진정한 여름이 올 거라고, 햇빛이 부서지는 날이 올 거라고, 그런 마침표를 바라며 이 소설을 끝까지 완독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는 이름이 없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누군가의 딸이자 누나로만 묘사된다. 그런 대목이 더욱 안타까움을 부추기는 장치가 되었다. 그렇지만 소녀는 약하지 않았고, 굴하지 않았으며, 강인하게 버텼다. 그럼에도 ‘나’의 대항은 강인한 마음과는 달리 여름날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성장은 변화한다는 것과 동의어이고, 변화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순수한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 또한 달달하지만은 않다. 누구에게나 눈부신 계절의 한 뼘의 아픔으로 남겠지만, 마음의 성숙이 뒤따르는 것에는 조금 더 책임이 따르는 법이고 성장의 시기에 올바른 어른이 없다면 조금 더 힘든 성장통을 겪게 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그저 이야기이기를,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온갖 상황을 담은 이야기이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는 ‘나’와 같은 사건을 겪는 소녀가 있을 것임을 안다. 혹은 그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를 현실로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까지 이르게 되면, 이 소설의 여운은 더욱 묵직하게 가슴에 박힌다.
담담한 성장은 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한다. 어린 아이면 어린 아이답게 굴라는 말이 결코 어른들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변화는 변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올바르게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더욱 결정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모델을 통해 스스로를 틀에 가두어야만 했던 소년과 사랑을 받고 자라는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소녀의 시선을 계속해서 되새기게 된다. 과거의 가부장적 문학에서 뛰쳐나온 듯한 폭력적인 아버지와 단순하게 아메바처럼 대응하는 어머니,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상당히 건조하다. 혹은 객관화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럴수록 읽어내리는 마음은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묵직하다. 그런 시선을 갖게 되기까지, 담금질처럼 겪었을 수난이 떠올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는 멈추지 않고 매해 여름이 지날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깨달으며 나아간다.
이 책의 슬로건인 ‘성장의 고통, 성숙의 달콤함’은 소녀의 여름을 수식하는 문구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여름의 겨울’에서 가장 ‘씁쓸한 성장통’은 과거로 인해 나아가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삶에서 묻어나는 후회이자 정체된 상황이다. 사연 없는 이는 없다고, 이따금 라디오를 듣다가 눈물을 보이는 장면을 보면, 폭력적인 아버지에게도 뭔가 사연은 있어 보인다. 염소 문제와 정원 가꾸기 등을 볼 때 어머니 역시 마냥 아메바처럼 수동적이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폭력성이 합리화되지는 않고, 그녀의 방임이 정당화될 리 만무하다. 그래도 소녀의 가족이 한때나마 정상적이었다는 것을 보며 어쩌다 이런 파국이 되었을까 의아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 한편 ‘달콤한 성숙’과 얽힌 부분은 이 소설에서 가장 이해하기가 난해했다. ‘나’는 베이비 시터로 일하는 깃털의 남편 챔피언에 대한 짝사랑의 마음을 품는다. 어릴 적 도움을 받은 기억 탓에 동경과 호감이 발전한 건지, 아버지와는 달리 영웅적인 부분을 보여준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를 향한 감정은 어릴 때부터 사춘기를 겪는 십대까지 꾸준히 이어온 마음이다.
그러나 내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영 난감했다. 일단 챔피언은 유부남 아닌가. 엄연히 부인이 있고, 아이들도 있는, 한마디로 가정이 있는 남자란 거다. 그런 사람에게 ‘나’가 품은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부적절하다. 그냥 이웃도 아니고, 깃털의 호의를 봐서라도 이 전개가 상당히 읽기 불편했다. 문화 쇼크까지 받았을 지경이다. 만약 작가가 폭력적인 아버지와 대비되는 구도로 챔피언의 캐릭터를 활용하고자 했다고 한들, 굳이 십대 소녀와의 부적절한 관계까지 그 전개를 끌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장면이 오죽 납득이 가지 않았으면, 저 기억 속에 방치되어 있던 심리학 통계까지 끌어와 분석하는 기함을 토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학대당한 아이는 잘못된 모방학습으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자녀를 어떤 식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어려움을 겪고, 폭력적인 부친 혹은 불륜을 저지르는 부친을 둔 딸은 사춘기 시기에 자신의 아버지와 유사한 남자에게 끌릴 공산이 있다는, 그런 심리학 통계 말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 결과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자신이 당한 학대, 그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자신일 텐데, 자신의 아이를 똑같이 학대하다니. 그래, 이건 뭐 잘못된 롤모델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 어지간히 운 나쁜 케이스가 아니라면, 학대당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를 핚대할 확률은 교육과 지식이 갖춰진 이후라면 없다시피 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하지만 나쁜 이성에게 끌리는 건 내게는 아직도 수수께끼의 영역이다. 당한 경험이 있어서 폭력적인 남자, 바람을 피우는 남자, 그에게 신물이 났을 텐데, 소위 나쁜 남자에게 또 빠지다니. 이런 걸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자면 ‘개인 효과’가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단다. 인지부조화라고 하면 될까?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야’라고 합리화한다는 거다.
글쎄, 소설 속의 ‘나’와 챔피언의 경우랑은 약간 다른 것 같지만, 어쨌든 소녀의 삶에 있어 챔피언과의 관계는 십대의 갖는 성적 판타지든, 심리적인 극복이든, ‘나’의 성숙의 한 부분을 담당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불어 책의 말미에서 소녀는 고통스러운 성장과 일견 달콤했던 성숙을 지나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두렵지 않았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내 죽음을 받아들였다. 나는 삶이 나에게 선사한 그 모든 경이로움을 보았다. 공포를 보았고,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승리했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질을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이 소설의 제목인 ‘여름의 겨울’은 사실 조금 추상적인 면이 없지 않다. 제목만 보고 누가 이런 내용을 상상이나 할까? 하지만 프랑스어로 된 실제 제목은 ‘진짜 삶(La vraie vie)’이다. 개인적으로 원래 제목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겨울처럼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며 한 소녀가 자신을 억압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의 진짜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니까. 하지만 운치가 떨어져서 일부러 이런 시적인 ‘여름의 겨울’이라는 이름을 뽑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최종적인 평을 적자면, 거친 소재를 담담하게 풀어서 쓴 문체가 가장 압권이었다고 하겠다. 그나마 문체가 감정적이지 않아서 끝까지 읽었던 책이었다. 또 올바른 어른은 무엇인지 곱씹게 하는 소설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무서운 점은 나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나를 바라볼 누군가에게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외국의 유명한 상을 여러 건 휩쓸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어떤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고 준 상인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