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 53 - 청나라의 쇠퇴기가 시작된 시대의 첫번째 황제 가경제!
1644년에 순치제가 베이징에 들어온후 이자성 세력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고사성어에 "강건성세 (康乾盛世)" 라고 있으니 청나라때 강희제- 옹정제 -
건륭제로 이어지는 1661년 부터 1796년 까지 135년 동안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저 강건성세는 한(漢) 나라 문제와 경제때의 문경지치 (文景之治) 등과 더불어 중국사에서
이름난 태평성대 중 하나로....... 청나라는 대만을 손에 넣고
서북쪽 신장을 정복했으며 러시아 남진을 저지해 영토는 사상 최대의 크기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 부터 잦은 대외 원정으로 군비 증가, 황실과 귀족들의 사치
등으로 쇠퇴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으니 19세기 들어 청은 산업혁명 등
으로 빠르게 발전하던 서구 문명에 기술·사상·군사적 으로 열세를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은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으며 강건성세의 마지막 황제인 건륭제시대는 화려
했지만 1795년 재위 60년만에 퇴위하여 상황(上皇) 이 되었고 15번째 아들 영염이
가경제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는데 가경제때 부터 유입된 아편으로 인해 서서히 몰락하게 됩니다.
15번째 아들 영염의 생모는 영의 황귀비 위가씨로 건륭제의 후계자로 낙점되기
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건륭제가 후계자로 낙점한 아들은 효현순
황후 소생의 차남(적장자) 단혜태자 영련 (永璉) 이었으나 이른 나이에 요절합니다.
건륭제는 두번째로 낙점한 아들은 7남 영종 (永琮) 이었으나 역시 일찍 죽었고 1748년 효현순황후가 사망
했을때, 서장자였던 영황 (永璜) 과 3남 영장 (永璋) 에게 국상 중에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언을 퍼부었으며 4남 영성(永珹) 과 6남 영용(永瑢) 은 다른 집안에 양자로 보냈으니 탈락합니다.
1748년 이후 최초로 화석친왕의 작위를 얻은 5남 영기 (永琪) 가 잠정적인 후계자였는데 그는 만주어
구사 능력과 무예가 뛰어났지만 1766년에 사망했고..... 계황후를 내친 건륭제는
새 황후를 두지 않고 총애하는 영염의 생모 영귀비 위씨를 황귀비에 책봉해 후궁을 다스리도록 합니다.
건륭제는 영귀비 위씨를 황후에 올리고 싶었으나 한족 출신 (한군팔기) 인 것이 문제가 되어 황귀비
에만 봉해 육궁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1795년 당시 살아있는 아들들은 8남 영선(永璇),
11남 영성(永瑆), 15남 영염(永琰/가경제), 17남 영린(永璘) 등 4명 뿐이었으니
친왕에 책봉된 아들은 11남 영성 (성친왕) 과 15남 영염 (가친왕) 으로 정무에 참여시킵니다.
8남 영선은 일처리를 못하고 17남 영린은 여자를 밝히며, 11남 영성은 무예를 싫어하고 문약
하며 결단성이 없다는 이유로 건륭제와 대신들의 신망은 15남 영염에게 모아지게
되었으니..... 마침내 1795년 9월, 건륭제는 영염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듬해 영염이
36세가 되었을 때 제위를 물려주었는데 가경제는 유일하게 어머니가 한족인 청나라 황제였습니다.
건륭제는 89세까지 살며 장수했고 더 오랫동안 재위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할아버지
강희제의 61년 재위 기록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60년째 되는 해에 양위한 것이었는데,
건륭제는 양위한 이후에도 죽기 전 3년 동안은 상황으로 군림하며 막후의 실권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가경제는 건륭제 치세 후기부터 드리운 재정 파탄과 권신의 부정 축재로 인한 부패 및 관료
사회의 타락이라는 재앙을 물려받아 골머리를 썩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니오후루 허션이 있었으니 허션은 아들이 공주와 결혼해 건륭제와 사돈이기도 했으며,
건륭제의 비호를 받아 황제 노릇을 하며 매관매직 같은 온갖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1799년 상황 건륭제가 붕어하자 가경제는 바로 허션을 체포하고, 그의 죄상을 조사하게 하니 허션이
축재한 재산은 황실의 15년치 예산과 맞먹었다는데, 이러한 부정 축재는 만주 - 몽골 귀족, 중앙
과 지방 관료, 향신층의 축재와 사치를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와 청나라 멸망의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경제는 몰수한 허션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지 않고 내탕금에 넣어 제 것으로
만들었으니.... '화신이 넘어지니 가경이 배부르게 먹었다.'(和珅跌倒,嘉慶吃飽)
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는데, 허션은 그저 건륭제의 비자금 관리자일 뿐이었지만
가경제가 이 비자금을 손에 넣기 위해 허션을 부정 축재로 몰아 처단햇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가경제는 이렇게 손에 넣은 비자금을 사치에 사용하지는 않았으니 허션을 개인 청지기로 썼던
건륭제 보다는 나은 셈이었으며..... 또한 가경제는 1799년 이 해에 1차 아편 금지령을 내립니다.
허션 한명 잡았다고 건륭제 말기의 흐트러진 관료 기강이 잡히지는 않았으니 이미 엄청난
수준의 부패가 청나라 관리들 사이에서 만연한 상황이었고, 특히 건륭제 때
북경의 황제와 귀족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방 관리들에 대한 통제가 소홀해집니다.
그러자 지방 관리의 부패가 심각해졌으니 서쪽의 관중에서는 100만명이 넘는
농민들이 수탈을 피해 도망쳤고, 하북성 (河北省) 에서도 대량의 농민들이
고향을 이탈해 내몽골이나, 한족에게는 금지( 禁地) 였던 만주로 도망쳤습니다.
관리의 부정부패는 건륭제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명나라도 마찬가지로 쇠퇴했으며, 명나라 제도를 이어
받은 청나라 통치제도에서 똑같이 발생될수 밖에 없는 문제였는데,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관료들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니 봉급을 적게주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국가 지출이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황제가 제대로 감시하지 않는다면 관리들이 정해진 세금을 넘어서 사적인 이득을 챙길수
밖에는 없는 구조였는데, 급여가 매우 적다보니 관리들로선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사적인 이득을
챙길 수밖에 없었던지라 명나라도 구조적 부패가 생겨났고, 청나라도 이를 그대로 반복했던 것입니다.
이에 강희제는 청렴한 관료들을 포상하고 우대함으로써 명청교체기때의 흐트러진 공직 기강을
바꾸고자 노력했고, 옹정제는 관료들을 철저하게 감시하며 부패한 관료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고, 모선귀공제와 양렴은 같은 생계수단을 주어 부패와 같은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건륭제는 이러한 업무를 태만시하면서 문제가 커졌고....... 이러한 부패가
모이고 모여서 허션이라는 대표적인 부정부패 관료를 만들었습니다.
강희제나 옹정제와 같이 감시의 눈을 계속 번득이면 일시적으로나마 줄어들지만, 건륭제 말기
처럼 황제가 태만해져서 조금만 감시의 눈이 벗어나면 심각한 현상이 벌어지니,
허션 아래에 연결되어 있었던 부정부패의 사슬을 끊지 못해 심해지는데, 조선도
이와 비슷한 체제에다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부정부패가 더욱 만연해져 결국 망하게 됩니다.
가경제는 관료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에 따라 건륭제 말기에 허션이 사실상의
황제 노릇을 하며 실추되었던 황권도 어느정도 회복되었는데, 황족의 부정부패를 엄단한
것 과는 별개로 아버지 건륭제가 냉대했던 자신의 이복형제들에게는 꽤 나은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친왕이나 군왕에 봉해진 건륭제 소생 황자들의 상당수는 건륭 연간에 책봉받은 것이 아닌 가경
연간에 책봉받았으며 이복 형제자매들의 외갓집이라 할수 있는 건륭제의 후궁
가문에게도 파격적인 대우를 보장하여 한족이나 조선계 혈통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가문이 '~가'(佳) 를 붙인 새 성씨를 하사받고 정식으로 팔기만주 기적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이들은 옹정제나 건륭제에게 까불다가 혼쭐이 난 반세기 전의 여러 황자들과는 달리 찍소리도
않고, 조용히 YOLO 를 영위하며 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냈으니.... 공신들과 술 한잔 마시면서
병권을 회수하고 거금과 벼슬을 쥐여주어 고향에 돌려보낸 북송의 태조 조광윤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건륭제 말기 민생 악화는 건륭제의 무분별한 대규모 원정과 화려한 사치로 인해 청나라 재정을
탕진해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청나라의 인구 증가가
결정적인 원인이었으니, 강희-옹정-건륭 대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아메리카에서
들여온 고구마, 감자 및 옥수수와 같은 구황작물로 인해 인구가 폭발하여 민생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청나라는 건륭제의 치세때 내정이 안정되고, 소금세와 서양과의 교역 확대로 인한
관세에서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재정은 튼튼한 편이었지만, 인구가 폭증해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건륭 말기까지도 재정은 그럭저럭 버텨나갔으나
점차 반란이 다발적으로 일어나 가경제 시절까지 이어지면서 진압 비용으로 재정이 탕진됩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해지면서 소수의 지주
들이 막대한 토지를 겸병하게 되었으며, 무거운 소작료를 내지 못한 빈농들은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전에 인구가 거의 없었던 산악지역에 흘러들어 거주
하게 되었고 이들은 현실의 곤궁함을 잊기 위해 미륵신앙을 신봉하는 백련교에 빠져듭니다.
백련교는 세력이 확대되자 청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게 되니 호북성 - 사천성 경계의 산악지역
에서 1796년에 폭발한 백련교 (白蓮敎) 의 난은 워낙 규모가 큰데다가 1805년까지
10년이나 계속되어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백은 2억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썼고, 관중과
호광 (湖廣) 일대의 농지와 향촌 질서가 일거에 붕괴하여 내륙 지방이 극도로 피폐해졌습니다.
반란 진압에 10년이나 애를 먹으면서 민심의 이반이 명확해졌으며, 막대한 전비 (戰費) 지출은
19세기 내내 청나라를 괴롭힌 재정 파탄의 불길한 전조가 되었으니, 이 전비 지출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지불한 배상금인 2,100만냥 보다 10배나 더 많았으니....
아편전쟁 배상금에 상응하는 액수를 10년동안 백련교도 반란 진압에 지출하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진압된 백련교의 반란은 1813년 이문성과 임청 등이 '천리교' (天理敎) 라는 이름을 내걸면서
재발했는데, 수도권인 직예, 하남성, 산동성 등 북방 지역의 64개 현에서 동시에 터졌는데
일시에 위세를 떨친 천리교는 이문성을 천왕으로, 임청을 문무성인으로 추대하고 세력확장을 꾀합니다.
북경 황궁과 멀리 떨어져 있지않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첩보를 들은 가경제는 너무 놀라 직예총독
온승혜와 하남순무 고기 등에게 진압을 명령하니, 천리교도들은 관군이 북경 수비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관군으로 위장해 포섭한 환관의 인도를 받으며 고작 70여명이 자금성을 습격하니 계유지변 입니다.
하지만 가경제는 승덕의 피서산장에 있었으므로 화를 피할 수 있었는데, 자금성 습격은 황궁의 남서방에
있었던 가경제의 적장자 민녕과 친왕들이 황급히 금위군을 소집하여 가까스로 진압했지만 가경제는
계유지변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변란을 당하여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우변죄기조” 를 반포합니다.
한족 농민의 반란 외에도 가경제 치세에는 소수민족들의 반란도 빈번했으니 가경 2년 정월,
포의족의 왕낭선 (王囊仙) 이 서남쪽 귀주성의 남롱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낭선은 19세에 불과한 처녀였으나 무술에 능하고 신통력으로 병을 치료하는 선녀라는
소문을 퍼뜨려 귀주성에 거주하는 포의족, 묘족, 이족등 남방 소수민족의 여신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끄는 반란군은 몇개월만에 보평, 흥인, 자운, 장순, 직금 등을 점령하고 귀주성의
수도인 귀양까지 진격할 정도로 청나라 조정을 뒤흔들었으니, 가경제는 운귀총독
늑보에게 대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하니......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왕낭선은 포로가 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능지처참형을 당합니다.
이미 1726년~1729년, 1746년~1749년, 1758년~1759년, 1781년~1784년에 잇따라 폭발한
바 있는 이슬람교도와 사천 (四川) 일대의 소수 민족 봉기는 점점 격화되어 1795년~
1797년의 제1차 묘족 반란과 1833년의 제2차 묘족 반란으로 가시화되었고, 1807년에는
티베트족 (장족) 의 봉기가 터지니 변경 지대에서도 청나라 통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외에도 광둥성과 푸젠성과 같은 해안지방에는 해적이 창궐하기 시작하여 청나라의 통치력은 점점
약화되어 결과적으로 공백상태에서 서방 세력의 침략은 가속화되고, 나중에 태평천국 잔당
들도 해적이 되면서 19세기 후반까지 남부해안지역 및 남중국해는 청나라의 통제불능 상태가 됩니다.
고종 건륭제 때 일어난 베트남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베트남과 청나라는 어정쩡한 휴전을 맺었으니,
1802년 응우옌 푹아인에게 패퇴하고 있었던 떠이선 왕조의 잔당이 청 조정에 지원을 요구했으나
해적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베트남에는 떠이선 왕조가 멸망하고 응우옌 왕조가 들어섭니다.
초대 황제로 즉위한 응우옌 푹아인을 '월남국왕' 으로 책봉하니 이때 베트남은 한자로 "대월(大越)"
을 공식 국호로 하고 있었는데, 응우옌 왕조는 이를 폐기하고 청나라에 "남월 (南越)" 과
"월남 (越南)" 둘 중에 남월을 희망했지만 청나라는 "월남" 을 골라주었으니, 고대 국가 남월이
베트남 및 중국 남부를 지배한 나라였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매우 꺼림칙한 명칭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중국 명나라에 우리나라 이름을 지어 주십사고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 화령 (이후 영흥) 을 올리니 주원장은 너희 나라 이름은 앞으로
“조선” 으로 하라고 내려준게 떠오르는데..... 그리하여 "월남" 은 이후 베트남의
공식 한자 명칭이 되는데, "베트남(비엣트남)" 이란 말도 "월남" 의 베트남어 한자 발음입니다.
조선이나 베트남이 왜 자기나라 이름을 스스로 짓지 못하고 중국의 황제에게 지어 주십사고
부탁하느냐 하면.... 앞으로는 중국의 천자를 임금으로 섬기는 사대 (事大) 를
하겠다는 말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강대국의 침략을 받지않고 평화를 유지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방의 강대국인 러시아 제국과는 교류도 있었지만 약간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러시아 사신들은 청나라에 계속 오고 있었으니 1805년 러시아 특사단은
외몽골 국경 문제로 청나라에 왔는데, 삼배구고두 문제로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때 가경제는 사신단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으나, 러시아가 끝내 삼배구고두를 거절하여 험악하게
끝났고, 기분이 상한 가경제는 러시아가 가져온 선물을 모두 돌려보냈는데, 물론 이때 러시아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극동에 진출할만한 역량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은 중국의 이권을 침탈하지는 못합니다.
영국은 건륭제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광동성 부근에 군함을 파견하여 자유무역을 요구하며
청나라를 긴장시켰는데, 1808년에는 포르투갈 (영국의 동맹국) 의 마카오
방어를 위한다는 구실로 광동성의 향산에 상륙하여 주둔하니..... 미온적으로
대응한 광동순무 손옥정을 파면하고 병력을 파견해 영국이 더이상 침탈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더 팔아먹으려고 건륭제 시절 부터 중국에 전면 개방을 요구했으니 중국은
강희제 당시 17세기를 통틀어 서방과의 교역으로 은 2,800만kg (90억냥) 의 무역
흑자를 보고 있었는데, 영국은 중국에서 모직물이 인기가 없고, 면직물은 이집트산과
미국산에 치여 경쟁력이 없었으니 1780년대 부터는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팔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자 중국에 아편중독자들이 점점 늘어났는데 아편의 폐해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옹정제 시절부터 몇차례 금지령이 내려졌으나, 건륭제 말기가 되면 관리들의
부정부패 때문에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서방세력과 결탁하여 아편이 밀수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1810년 가경제는 다시 아편금지령을 내렸으나, 당연히 유명무실해졌으며 결국 청나라의
막대한 무역흑자는 무역적자로 변했고, 아편중독자들이 늘어나면서 나라가
점점 더 산으로 가다가 아들인 도광제 대에 이르러 한번에 터진 참변이 바로
아편전쟁이며 조선 사신들은 가경제에 대해 매우 엄격하지만 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청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강건성세 시기에 전례 문제를 계기로 시작되었으나, 정작 전례 문제를
공론화한 황제들이 서양인 수사들은 총애하여 그들의 사생활을 빙자한 선교활동을 눈감아
주면서 알음알음 선교가 성행했으며...... 천주교 신부를 참수하는 지방관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방관들은 식솔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자 보호하기 위해 신부들의 활동을 눈감아주기도 합니다.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천주교 단속은 중구난방으로 체계가 없이 이뤄지곤 했는데 가경제는
천주교 박해를 일관적으로 시행했으니, 당시 기독교 교단은 지나치게 유럽에 있는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어 있어 청나라 조정은 위협을 느꼈으며.... 교황청이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제사를 우상숭배로 취급하며 금지할 것을 요구하자 반감이 더욱 강해집니다.
청 조정은 《대청률례》의 '금지사무사술' (禁止師巫邪術) 조항을 기독교에 적용시켰으며, 도광제 시기와
동치제 시기에는 탄압이 가중되었는데, 서양인 선교사들은 한족과 만주족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처형
되기도 했으며 개종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서부의 이슬람 도시로 보내져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선교를 막기 위해 서양인들의 내륙 여행을 엄금하고 이를 어긴 자는 사형에 처했는데, 가경제는 백련교도
의 난을 계기로 종교반란이 청나라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잠재적인 반란 세력
으로 간주되었던 외래종교인 천주교에 대해서도 탄압을 계속했으니 서방에서는 이런 박해에 반발합니다.
천주교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그러했듯 서방 세력의 침투 도구로 이용되는
면이 강했던지라..... 중앙집권형 정부 체제가 오래 전부터 정립되어 있었던 동양 국가에서는 이들을
거세게 탄압했으며 청나라도 박해는 꾸준히 진행했지만 기본적으로 선교사들이 단속대상 이었습니다.
신자들에 대한 대량 처형은 드물었으며, 사실 서양인 및 중국인 신부들도 이런저런 수단으로 단속을 빠져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그러나 조선이나 도쿠가와 막부는 아예 내국인 신자들을 무차별하게
처형했으니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고 있었으며 신유박해가 일어났습니다.
한국 124위 순교복자에 주문모 야고보 신부 일화가 있으니 주 신부는 청나라 출신으로 신부가 되었고,
조선의 천주 '학자' 들이 역관들을 통해 몰래 전해온 신부 파송 요청에 북경교구 지시로 조선에
파견되었으니 밀입국후 주 신부는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으며, 한국어도 익혀 평신도들과
섞여 지냈지만, 체포된 후에는 중국어와 한문 필담으로만 진술하면서 외교문제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조선에서는 박해를 주도한 정순왕후 김씨와 여러 중신들이 난처해하다가 결국 주문모 신부의
처형을 결정했는데 그와 별개로 외교적 문제에 대한 걱정에 몹시 노심초사했지만,
가경제도 천주교 박해에 나섰기 때문에 조선 조정의 중국인 처형 소식을 듣고도
'멋대로 월경해서 전교하다가 죽었으니 자업자득이다' 라는 답변으로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가경제는 1820년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청더의 피서산장으로 사냥을 떠나 요양하기 시작
했지만 그럼에도 건강은 악화되었으며 결국 1820년 9월 2일에 피서산장에서 붕어합니다.
《청사》에는 가경제의 정확한 사인을 적어놓고 있지 않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사람들은 황제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등 급사한 것을 봤을 때,
대체적으로 학계에서는 비만으로 인한 심장마비 또는 뇌졸중을 주된 요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년의 가경제는 상당한 비만이었으며 특히 가경제는 붕어하기 전에 담에
걸려 온몸의 통증이 심했고, 더위까지 먹어 땀을 많이 흘렸고 피로까지 심했는데
아버지 건륭제가 하루에 2끼만 먹으며 과식과 과로를 피하며 놀기 좋아한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청나라는 고종 건륭제때 국력이 정점에 달했지만, 말기부터 싹튼 쇠퇴의 조짐이 인종 가경제의 치세하에서
수면 위로 드러났으니 백련교도의 난이 터지면서 평화에 종지부를 찍었고, 반란이 연이어 터지며
청 조정의 통치력은 약화되어갔으며 군대는 기강이 해이해져갔고 관료의 부정부패로 국고는 말라갔습니다.
게다가 서양 열강들이 중국 내부에 강력한 마약인 아편을 유통시키면서 사회는 썩어들어갔고 은의 유출이
심화되면서 경제는 무너져갔는데, 가경제의 시기만 해도 청나라는 외형적으로 여전히 세계
최강국들 중 하나였으며, 이후 황제들의 시기 처럼 국가가 완전한 막장으로 까지는 치닫지 않았습니다.
가경제는 부지런하고 노력하는 군주였으니 아침에 선대 황제들의 전기를 읽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여 밤늦게
까지 정사를 돌봤고, 성군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황권을 강화하고 지방 관료들과 서한을 주고 받는
주필(붉은먹 서한) 제도를 부활시키는등, 열정적으로 국정에 임했으며 중앙정부가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면서도 농민들의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자 세금을 깎아주었으며 부정부패 근절에도 노력합니다.
가경제는 도덕적이고 원리를 중시했으니 스스로가 유교적인 인의를 신조로 삼았기 때문에 옹정제식의 공포
정치도 자제했고, 부황인 건륭제가 수많은 선비들을 잡아 처형했던 문자의 옥이라고 불리던 검열도
폐지했으며 또한 유교 통치자의 덕목 중의 하나인 신하들이 말하는 쓴소리(간언) 역시 주의깊게 들었습니다.
대신으로 이름난 학자이자 시인 홍량길이 ‘건륭제 실록’ 을 편찬하던 중, 말기의 쇠락을 비난하는 기사를
넣은 것을 알고 효심이 지극한 가경제는 엄청나게 화를 냈는데, 건륭제 같았으면 황실이나 황제를
비난하는 것은 9족이 멸족될 대죄였으나, 가경제는 서쪽 끝인 일리로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합니다.
이것도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100일후 사면해 주었고 가경제는 '인' (仁) 의 군주를 자처했으며
백련교의 난과 아편의 확산을 최선을 다해 막으려고 힘썼으며, 유교 이념의 보급과 공자
숭배를 강화하여 건륭제 말기의 향락풍조도 일소해 사상적인 해이도 바로잡으려고 했습니다.
다만 증조부 강희제 처럼 희대의 명군은 아니었고, 조부 옹정제 같이 서릿발같은 결단력도 없었으며, 건륭제와
같이 시대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가경제의 노력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많은 노력을 했지만
청나라의 구조적인 개혁 없이 통치기구를 사용하는 노력만 가지고는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구할수 없었습니다.
강옹건성세가 지나치게 찬란했기 때문에 그에 묻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지만 가경제 는 도광제 이후의
암군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군주였으니, 결국 자기 치세에 일어난 큰 사건들은 어느 정도 수습
했으니 상황이 좋을 때인 강희제나 옹정제 다음에 제위를 이었다면 성군 소리를 들을만한 재목 이었습니다.
사천성-호북성 경계 산악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는데 10년이나 걸리면서
국고는 텅텅비었고, 영국이 들여온 아편은 청나라 정부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건강에 치명타를
가했으니, 가경제는 위기에 빠진 청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했지만 청나라의 제도가 낡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옌충녠 (閻崇年) 은 가경제를 근면했으나 능력이 평범했고 쇠퇴해가는 나라를 안정시키기엔 부족한 지도자
였다고 평가했는데, 청나라 사회문제와 산업혁명에 성공한 유럽과 동서양의 국력 격차가 커진 시점에
지나친 인구 과잉과 뒷받침 할수 있는 농업 생산력의 부족에는 화학 비료라도 발명하지 않는한 답이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서양에서 유입되어 오는 아편 문제와 이를 막을수 있는 군사력의 부재였는데, 가경제 시대쯤
되면 유럽과 중국의 군사력 격차가 너무 심각하게 벌어져서 가경제 개인이 해결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 청나라는 외형상 세계 최강대국이었지만 이미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에게 뒤떨어졌습니다.
기초 과학이나 각종 기술에서 엄청나게 뒤떨어진 건 물론 청나라가 자랑하던 압도적인 부(富) 마저
유럽에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 청나라의 최전성기라 여겨지던 옹정제와 건륭제 시절에
이미 영국과 프랑스는 청나라 보다 많은 재정 수입을 기록했고, 이 격차는 기하급수적
으로 벌어져..... 아편전쟁 직전 영국은 청나라의 5배에 달하는 재정 수입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17세기부터 유럽이 중국을 포함 비유럽을 군사적인 기술에서 압도하기 시작한 반면 가경제시기 청나라는 명나라
시절 무장에 머물었고, 화약 무기 분야에선 오히려 퇴화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오랜기간 동안 평화에
찌든 결과, 청나라의 군사력은 조선군이 죽창을 든 농민에게 패했듯 한족 농민군에게 쩔쩔맬 정도로 쇠락했습니다.
유럽은 끊임없는 전쟁을 치른 끝에 조직력과 전술의 경지를 달성한 상태였으니, 잘 무장하고 유럽식 편제를
갖췄으며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인도 조차 한줌에 불과한 영국군에 자주 짓밟힌 것이 건륭제
시절인 18세기였고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면서 당시 중국보다 강했던 군대가 더더욱 강해진 상태였습니다.
그 결과 가경제 사후 20년도 안되어 벌어진 아편전쟁에서 수십만명에 달하는 청나라 대군이
20,000명 남짓의 2선급 영국군 병력의 털끝 조차 건드리지 못한채 녹아내려 버렸으니
가경제는 자신의 위치에서 당시 중국인의 상식선에서 할수 있는건 모두 했지만
그가 마주해야 했던 문제들이 몇백년은 노력해도 어려운 희대의 난제들이었을 뿐입니다.
가경제 시기에는 청나라에 대항한 민족 - 민중 봉기가 잇따라 일어나 사회 혼란이 커지고
민심이 동요했으며, 거듭되는 아편의 밀수로 인해 재정 불안이 시작되고, 부패한
관료 및 귀족의 무능과 타락으로 제국의 붕괴가 실질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니 도광제의 대에 이르면 아편전쟁으로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