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뭣꼬"는 화두다. 사람 겉매 가지고 있는 지금 당신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자신에게 던져보라는 뜻일게다. 사람은 층층만층 구만층이다. 사람이 점액과 껍질로 된 생명에서 진화하여, 스스로를 영장류로 분류하고, 문명의 탑을 쌓아 달나라까지 갔다왔다. 하지만 사람은 곤충 군에 속하는 부류도 있고, 몸뚱이는 사람이고 머리는 뱀인 부류도 있고, 머리는 사람이고 몸뚱이는 물고기인 부류도 있다. 우리 옛말에 "이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는 호통소리가 있다. 사람 너울 쓰고 있지만, 짐승보다 못한 행동 했을 때, 질타하는 고함소리다. 그러나 사람중에는 자기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까지 기꺼이 버리고, 본능을 뛰어 넘어 자기 꿈을 꽃피운 빼어난 인물도 있다. 나의 그날 화두는 "천반산과 정여립"이었다. 나는 오늘 산행이 천반산과 정여립에 대해 보다 폭넓은 답사가 되도록 마음을 추스려 다잡고 있었다. 버스가 장수나들목에서 국도로 빠지자, 무진장 고장에 온 것이 실감난다. 전라도 깊은 산골 무주, 진안, 장수를 통틀어 무진장이라 부른다. 비록 도로망이 괄목하게 발전되었으나 작은 평야를 둘러싼 산군들이 기백 있고 당차기 그지없다. 말을 부러지게 하자면, 산첩첩 물첩첩 골짜기가 여실하게 드러나는 곳이었다. 오늘 찾게될 산, 천반산은 바로 정여립의 꿈과 좌절이 서려있는 곳이다. 사람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지마는, 내가 다른 사람을 다알 수는 없다.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 산행이 천반산, 정여립의 꿈과 좌절을 알 수 있는 하루가 되어, 그의 원혼을 조금이라도 달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알고보니, 천반산 입구였던 가막리에 주차하고,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에게 현지사정을 물어본다. 노인은 천천히 그러면서 자세히 천반산을 가르키면 산길을 설명해 주신다. 때는 오월이고, 오지중의 오지라, 자연의 향기가 달디달다. 산자락 들머리에 외딴집이있고, 마당 귀퉁이에 솥 걸고 구수한 김이 나는 삼계탕 끓이고 있다. 큰 느티나무에 기대어 지은 스레트집은 매우 친환경적으로 보였다. 작은 샘에서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나는 이 분위기에 매혹되어 잠시 서서 구경 한다. 아 젊은시절, 술에 빠져 허우적됐던 10년세월, 금복주 소주놓고, 금방 익은 닭고기 쭝쭝썰어 막소금에 찍어 안주하던 자뻑의 시절, 오늘 도리어 그리워진다. 술이란, 좋고도 나쁜 음식이다. 그 뒤 금주하면서 나는 금단현상에 시달리고, 좋은약 먹고 하면서 명현현상에 고통 받아야 했다. 한번 형성된 습관 고치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산자락길로 얼마 가다가 우측으로 꺽으니, 된 비알길에 원목계단까지 만들어 놓았다. 나는 팥죽땀 흘리며, 쉬지않고 산길 오른다.
이정표따라 가니, 할미굴이 나온다. 커다란 암벽 밑에 물기 잔뜩 머금은 동굴이 있다. 깊이보다 높이가 더 긴 굴이 신비스럽다. 여기저기 무속인들의 기도흔적이 보인다. 샘물도 있고 시원해, 그만 여기 주저앉아 놀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다. 안내판 세워져 있어 읽어본다. 세종31년 예조판서 지낸 송보산이 조정에서 관직생활하다가, 그 후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 버리고, 처가가 있는 현 장수군 계남면 방아재로 낙향하였다. 그 뒤 단종을 지키지 못한 죄 씻으려고, 천반산 동굴에 은거하여 수도하였다. 그것이 여기서 1.5Km떨어져 있는 송판서 굴이고, 여기 할미굴은 그의 부인이 수도하던 굴이라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조카 죽인 패륜의 나비효과가 여기에도 나타나있다. 세조가 단종 죽인 나비 날개 짓이 피비린내나는 토네이도 되어 세상을 휩쓸었다.사육신 생육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피흘리며 사라져간 이름모를 단종의 충신들, 송판서도 여기 기록된 한 줄기 토네이도 바람이다. 일어나 이십여분 오르니, 천반산 최고 조망대인 한림대바위다. 꼭지에 서니, 신봉산 북동 뜬금샘에서 발원하여 천천 지나 온 연변천 강줄기가 패션쇼하는 모델 걸음처럼 날렵하고 아름답다. 또 연변천 너머 진안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보이는 데, 그 옛날 병졸들이 정여립을 포박하려 넘어 오던 고개길임을 알수 있다. 우측으로는 덕유산 향적봉에서 발원한 구량천이 꽃뱀 몸뚱아리 처럼 이리휘고 저리휘면서, 푸른 자취를 남긴다. 저토록 아름다운 꽃뱀에게 철 없는 청개구리들, 얼마나 삼켜질 것인가. 이렇게 양측에서 흘러 온 물, 천반산 양자락 휘감아 돌아가자, 천반산 줄기에서 뻗어 강으로 내려가 평지를 만든 땅이 마치 섬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땅의 생김새가 대밭에서 솟은 죽순이 우거진 모양이다. 사람들은 육지의 이 수승지를 죽도라 불렀다. 지긋이 내려보니, 죽도 주위 경치가 황홀하도록 아찔하다. 합수지점 둘러친 기암괴석은 그렇다 하더라도 불어 난물이 빠져나가는 계곡은 절세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 이 물은 흘러 흘러가 용담댐에서 똬리를 트는 터이다.
어디 그뿐이리, 진안쪽으로 마이산 두귀가 쫑끗하게 솟아있는 데, 저 신기하게 생긴 말귀는 은방울소리 쩔렁쩔렁 울리며, 어느 숙녀를 찾아가는 석마의 머리위에 달려 끄덕이고 있는지. 고개를 돌리니, 남덕유, 적상, 운장, 구봉산 마루금이 사파이어 빛 물결로 굽이친다. 한림대에서 내려 와 다시 천반산 정상으로 걷는다. 걷는 능성은 성벽을 따라가는 길이다. 정상에 도착하니, 깃대봉으로 가는 경사길목에 무너진 성문이 있고, 해발을 알리는 빗돌이 서 있다. 정상에는 죽도방향으로 마치 소반같은 모양의 평평한 땅이 매우 넓게 퍼져있고, 둘레에는 사람이 오를 수 없도록 깍아지른 절벽이 천연 성벽 만들고 있다. 가히 천험 요새라 할 만했다. 옛적에는 우물 있어 물이 풍부했다는 걸로 봐서 산성으로서 구비조건 거의 완전에 가까웠다. 이런 장소에서 무술을 익힌다면 그 솜씨는 일취월장할 것이다. 이런 느낌을 반영하듯이 산정에는 정여립과 대동계원들이 무예 익혔던 장군바위, 마당바위, 뜀바위, 시험바위가 있다. 어디선가 무예 익히는 기합소리, 활시위소리 들려 올 것만 같은 데, 무성한 숲에서 새소리만 간헐적으로들려 와 고즈넉한 분위기를 깨우면서 허공으로 달아난다. 나는 송판서굴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정여립이 쫒겨 숨어있다 최후를 장식하기도 한, 굴로 내려갔다. 굴은 소반같은 땅이 갑짜기 급경사를 이루는 단애의 절벽밑에 있었다. 나는 이 무덤덤하고 왠지 메말라보이는 동굴에 앉아 인물 정여립의 역사성을, 끝난 바둑 개가하듯이 복기해 보았다.
시대를 넘어 천재는 항상 문제를 풀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다. 정여립은 전주 남문 밖, 현 완산구 색장동에서, 1546년 첨정 희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재능이 워낙 출중해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재주란 날카로운 칼과 같다. 잘쓰면 익기이나, 잘못쓰면 흉기가 된다. 괘일록이나 토역일기에 보면, 정여립은 나이를 먹을수록 성격이 잔인무도하여, 이웃을 놀라게 했다. 한번은 자신의 악행을 말한 여종의 배를 갈라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그후 정여립의 행적으로 보아, 아마 음해일 것이다. 만약 그렇게 잔인했다면,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의 봉건사회 정서로 봐서 벼슬을 하거나, 대동계를 조직하여 600여인의 수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암튼 정여립은 명종2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 2년(1570년)식년문과에 급제한다. 조정에 발을 디디면서, 예조좌랑 홍문관 수찬을 하였다. 그는 두뇌가 명석할 뿐만아니라, 학문이 비상하고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한 준재로 알려지기시작했다. 게다가 기백이 활달하고 언변도 출중해 좌중을 탄복시키는 일이 많았다. 아울러 병술과 무예도 능수능란했고 통솔력까지 갖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즉 비범함으로 비벼놓은 것 같은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당대 최고의 지성이고 학자의 한사람인 이이와 성혼마저 다소 급하고 과격한 기질을 안타깝게 생각했으나 정여립의 박식에 탄복하고 조정의 요직에 추천할 정도였다. 그러나 끝이 예리한 송곳은 호주머니를 찌르고, 기어코 밖으로 나온다. 정여립은 조정에서 처음에 서인으로 활약하였으나 이이가 사망하자, 이발을 따라가 동인이 되었다. 당시는 사색당파가 초벌구이로 익어가는 시대였다. 왕 선조는 서인에서 동인으로 변절한 정여립을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정여립의 생각은 이와 판이 하게 달랐다. 어차피 당쟁은 힘없는 무지렁이인 백성의 후생복리를 위해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서인동인이 있겠는가. 두꺼비 씨름같은 당파싸움에서 니편네편이 어디 있겠나. 백성에게 덕이되면 되는거지.라고 정여립은 개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인물이 다 그러하듯이 정여립은 실학주의자이고, 명분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였다. 이렇게 되자 서인이 들고 일어났다. 서인에는 정여립의 스승격이 되는 이이가 생전에 속해 있었는 데, 그가 발군의 언변으로 서인을 치자, 정여립은 스승을 배반하고 욕보인, 패륜적인 사람으로 몰고 갔다. 아둔한 왕인 선조도 여기에 가세하게 되었다. 선조는 정여립에게 열등감이 있었다. 제왕학을 공부하던 세자시절, 정여립은 세자의 글벗이었는 데, 품격과 재주에서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선조는 정여립의 발치에도 따라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후에 군신관계가 되어서도, 옛날의 우열이 영향을 미쳐, 어전에서 아뢰는 정여립의 목청이 높고, 선조는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어 정여립의 정연한 논리에 항상 뒤로 물러섰다. 한번은 정여립이 어전에서 아뢴 후, 물러나오며, 고개를 돌려 왕을 꼰나 보았다고 하는 데,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지존무상인 왕에게 이런 무례를 하였다면, 감히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궁중의전을 당대 석학반열에 있는 그가 범했을리가 없다. 이런 저런 연유로 하여 정여립은 벼슬도, 명예도 싫다하고, 고향으로 낙향해 버렸다.
당시 조선 사회는 피폐해 있었다. 비롯 성공하기는 했으나 역성 혁명을 한 이성계는, 자신이 모신 왕을 세분이나 죽였다. 우, 창, 공양왕이다. 이것은 충효를 제일 본으로 삼는 봉건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이 개국하고 지은 용비어천가를 뻥튀기에 넣어 튀겨서 주장하더라도, 역적질이 성공한 것 외에 달리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구나 이성계는 자기의 생명을 세번이나 살려준 삼생지은이 있는 최영을 죽이고, 만고 충신 정몽주를 철퇴로 죽여 선죽교의 대나무로 만들었다. 이 정도이니, 나라를 바꾸면서 죽인사람이 무릇 그 얼마이겠는가. 조선이 개국하면서 흘린 엄청난 피의 인과가 금시 그렇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개국하자말자, 왕자의 난으로 골육상쟁이 있어, 콩깍지로 콩을 삶는 형제간에 살상이 있었고, 인륜을 저버린 정권싸움을 본 백성들은 왕궁을 향해 몰래 침을 뺃었다는게 맞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며, 연산군의 패륜정치 이후, 중종은 왕의 권위를 신하에게 거반 빼앗기고, 신도정치가 횡행하여 매관매직이 백주대낮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탄생한 탐관오리들이 백성의 고혈을 참기름 짜듯이짜내는 폭정이 이어졌다. 폭정은 호랑이 보다 무섭다. 조선은 개국때부터 도적이 횡행했으나, 세종때부터 농민들의 봉기가 자주있었다. 이런 시류를 타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것이 것이 의적 "홍길동"이다. 도적에게 의리 의자를 붙여서 백성들이 호응하고 영접한다면, 나라꼴이 어떻다는 것을 알수 있지 않겠는가. 1500년 홍길동이 체포되고 무대에서 사라지자, 뒤를이어 임꺽정, 장길산이 나타났고, 의적이 도리어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어처구니 없는 사회가 되었다.
1559년은 정여립이 14세 들던 명종14년 이었는데, 임꺽정이 의적활동을 시작한 첫해였다. 당시 실록을 인용해 보면(한국사 이야기) "나라에 훌륭한 정사가 없고 교화가 밝지못해 재상들이 마구 탐욕을 부리고 수령들이 백성들을 학대해서 살을 발라내고 뼈를 부러뜨리며, 피땀을 모조리 빨아내는데도 백성들은 손발을 놀리지도 못하고 호소할 데가 없었다. 굶주림과 추위가 닥쳐 조석사이에도 보존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한순간이나마 목숨을 연장하려고, 도둑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임금의 정사가 잘못 된 탓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측은하지 않은가." 실록은 정사이며 더구나 임금의 신하가 기록하는 역사가 아닌가. 그 실록의 내용이 이 정도라면 당시 참혹상이 어떠했는가을 알수 있다. 이러한 나라사정은 이미 철이 든 소년 정여립에게 비분강개 함을 주는 현실이었으며 그가 진보적인 개혁성을 갖게되는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누구라도 정의감이 있는 준재라면, 이런 현실을 바꾸려 하지 않겠는가. 만약 당신이 정여립이라면 어떻게 하였겠는가. 당시 당대 최고의 인물로 꼽는 이이도 진보적인 개혁이론가였다. 이이는 대사헌 대제학을 지낸 왕의 측근이면서도 나라에 빈번히 출몰하는 도적 떼, 농민이 죽음을 무릅쓰고 봉기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수탈때문이라고 설파하고 임금에게 선정을 요구했다. 이이도 서리발 같은 현실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이이가 낙향하여 목민의 차원에서 정여립의 대동계와 유사한 단체를 만들었다면, 역시 정여립과 같은 운명을 겪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이맘 쯤에는 전국시대를 통일한 왜적이 약해진 조선을 넘보는 시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유약한 사회에 등장하는 유언비어와 도참비기가 성행하고, 또 인근나라 명과 왜가 조선을 깔보는 위험한 외교가 공중줄타기를 하던 시대였다.
전주 지역이 낳은 발군의 인물, 정여립이 낙향하자, 그의 주위에 백성이 모이는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더구나 정여립이 개혁주의자이고, 진보주의자임에랴. 학문을 통합적으로 파악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역사관을 가진, 그의 눈에 작금의 현실이 불합리하고, 어둡게 보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상민, 떠돌이 승려, 무사, 양반 등의 백성들을 모아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원들은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모여 서예와 활쏘기 무예를 익히며, 공동체 의식을 길렀다. 대동계를 움직이는 그의 신뢰가 얼마나 굳건했던지, 음력 보름에 만나기로 약조되어 있는 곗날에는 한명도 빠짐없이 모두 꼭 참석했다고 한다. 무려 600여명이나 되는 계원들이 죽도와 천반산에 모여 재주를 다투고, 무예를 겨루는 장면은 일대 장관이었을 것이다. 뚜렷한 비전이 없는 암울한 시대에 이 소문은 이봉주의 발처럼 달려 전국으로 번져갔고, 꿈을 술잔에 담아 마시던 시간많던 의협남아들이 가세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희귀한 모임, 심지어 칼과 활까지 사용하는 모임을, 전주부나 진안현에서 모랐을리가 없다. 단지 지방에서 뿐만아니고, 중앙정부에도 보고 되었고, 불온한 기색이 전혀 없으므로 정부에서 대동계를 묵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단적인 사실로, 1587년 선조 20년 2월, 즉 전라도 손죽도에 열 여덟척의 왜선이 침범하여, 지방군사들이 출전하였으나 녹도 권관 이대원이 전사하고 초전에 참패하였다. 전국시대 백전의 전투에서 익힌 왜적의 칼솜씨를 아무도 당할 수가 없었다. 일차방어선을 쉽게 무너뜨린 왜적은 전선으로 전라도 흥양땅과 가리포까지 침입하여 조선병선 4척을 빼앗고 육지에 상륙하여 약탈하였다. 왜적은 예기가 날카로운 정예병이었다. 군사의 손실이 커지고, 사단이 화급하게 돌아가자, 전주부윤 남언경은 정여립에게 손을 벌이고, 대동계를 움직여 왜적을 물리쳐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체면을 목숨처럼 중시하는 유교나라에서, 오죽하면 관의 체면을 다쳐가면서 그렇게 했겠는가. 이에 정여립은 기꺼이 응하여, 대동계원과 같이 신속히 출전하여 왜적을 크게 깨뜨렸다. 조정에서는 뒤늦게, 공간과 시간으로 봐서 늦을 수 밖에 없는, 김명원을 전라 순찰사, 신립을 방어사로 파견하여 변란을 수습케 하였으나 현지에 갔을 때, 이미 왜적은 싸움에 지고 물러 난 후였다. 정해왜변은 왜적의 단순 약탈, 방화, 납치가 아니었다. 왜적이 조선의 군비와 무력을 탐색 하는 일과 정찰이 목적이었다. 전라도의 지리를 꿰차고 있는 조선인 사화동을 앞세워 주도면닐한 계획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은 5년뒤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실록에 정해왜변으로 기록되는 이런 승리를 정부에서 몰랐을 리가 없는 것이다. 당시 왜적이라면 저승사자 보다 더 무섭고 숭하게 여기던 시대였다.
이렇게 대동계가 정부군이 패한 왜적을 격파하여 인심을 얻고, 무지렁이 같은 민초들도 정여립의 민본사상에 공감하고, 승복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정여립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백성들의 민심이탈이 확산되자 조정은 대동계라는 새로운 골치거리로 불안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왜적의 움직임이 심상찮고 조정은 붕당을 지어 다툼으로 계절과 밤낮을 모르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렇다면, 상하층을 막론하고 그들을 매혹시킨 정여립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대동계의 대동은 공자가 주장한 이상세계로 평등과 화합이 실현되는, 사람 차별없는 사회였다. 또 누구라도 일해야 하고, 골고루 나누어 먹으며, 서로 화합하는 사회를 말한다. 또 정여립은 (1)천하공물론을 말했는 데, 천하는 모두의 천하이고, 모두의 공유물이라는 것이다. (2)하사비군론을 말했는 데, 왕위는 혈통으로 이어갈 것이 아니고, 왕재가 되는 인물에게 선양 즉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3)삼국지에서 촉나라가 정통이 아니고, 좋은 정치로 백성을 안정시키고 잘 살게 한 위나라가 정통이라는 것이다. 지금 민주주의와 저울질해보아도, 눈금이 형평을 이루는 것같다. 그러나 당시로는 평등을 정치철학으로 한 이 진보적인 생각이, 왕권을 뒤집는 발칙한 역모로 반영될 수 있는 시대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대 실학자들의 민권사상으로 계승되었다. 나는 정여립이 한참 앞 시대를 타임머신으로 다녀 간 선각자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가 조정에 올린 비밀장계로 기축옥사는 점화됐다. 왕은 정여립의 모반을 담은 이 두루마리를 읽고, 정신이 혼미하였으나, 기민하게 중신회의를 열어 대처했다. 당시 영의정은 이산해 였고, 우의정은 정언신이었는 데, 창백하면서 파리한 얼굴로 허둥되는 선조에게, 정언신은 정여립이 결코 모반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간곡히 아뢰었던 것이다. 여기서 왕이 잘못 받아드리면, 목숨이 달아나는 위험한 언간임에도 정언신은, 정여립의 결백을 변명해 주었다. 이것은 정여립의 그간 행동에서 모반의 기미가 없다는 판단 끝에 신중히 아뢰는 말이었다. 그러나 정여립의 재능을 알고 있는 선조는 내심 겁에 질려, 정여립을 미리 역적으로 몰고, 서둘러 잡아들이라고 어명을 내렸다. 의금부도사 유금이 밀명을 받고 군사를 점고하여 전주로 떠났다. 그러나 흉보는 항상, 화살보다 빨리 달리는 말과 같다. 조정에서 자신을 역적으로 몰아 의금부도사가 급파되었다는 귀뜸을 듣고, 정여립은 아들 옥남, 대동계원인 변숭복, 박연령의 아들 춘룡과 함께 황급히 죽도 천반산으로 피신했다. 정여립은 죽도선생으로 불리는만큼, 그의 행방을 찾으려면 죽도가 가장 먼저 지목된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정여립은 자기에게 쒸워진 모반의 죄명이 왕인 선조의 발상이라고 단정하고, 대동계를 움직여 무력반란을 계획하고, 천반산으로 향했다는게 더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피신하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그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이세상을 하직하기로 결심한 듯이 생각된다. 지략이나 무예에서나, 지역 민심을 장악한 것에서 보더라도 그가 마음먹고 덤볐다면, 전라도 지역은 동학혁명 이전에 그와 유사한 혁명운동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여립은 괜히 승산없는 혁명으로 흘려야 될 피의 양을 계산하고, 억울하고 분하기 짝이 없지마는, 모든것을 단념했다고 해야 할것이다.
기록에는 "정여립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피한 터라 마을에서 밥을 빌어먹고, 아무곳에서나 잠을 청하였다." 하였으나 이건 사실과 다를 것이다. 비록 악의에 찬 평가를 받기 하였지만, 한 시대 뿐만아니라 역사에 큰 혐의도 없이 역적으로 몰려, 기축옥사란 큰 획을 긋는 문무겸비의 큰 대기의 인물을, 이렇게 폄하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비상한 정신력과 도도한언변, 신출귀몰하는 책략을 가진 그를, 비렁뱅이로 넋을 놓아버린 노숙자로 표현한 것은, 강자에게 꼬리를 말고 마는 인간의 비열함을 보는 것 같아 수치감을 느끼게한다. 기록은 이어서 "그런데 이를 수상히 여긴 마을 사람들이 관아에 알리자. 진안현감 민인백이 관군을 이끌고 와서 정여립일행을 순식간에 포위하였다."고 하였지만 이것도 사실과는 다를 것이다. 당시 그 쟁쟁한 명성과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재주의 비빕밥인 정여립을 마을사람들이 모를리도 없고, 깍아지르는 벼랑의 동굴에 피신한 정여립일행을 포위하였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소리이다. 당시 전라도지역에서 불세출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그를 아무리 시세가 변했다 할지라도, 지역민들이 하루 아침에 정여립을 비렁뱅이로 전락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야사에 보면, 민인백이 직접 동굴 앞으로 나가 정여립에게 투항을 권했다고 한다. 당시 최고 검객이기도 하고, 그 검귀같은 왜적을 물리 친 정여립의 칼솜씨가 아닌가. 섣불리 덤벼서는 안될 것이다. 또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역적이면, 선조의 역적이지, 전라도의 역적은 아닌 것이다. 이에 정여립은 최후가 왔음을 알고, 그는 울부짖으며 쥐고 있는 칼로 아들 옥남을 베고, 변숭복을, 춘룡을 차례로 베었다. 그가 우는소리는 마치 큰 황소가 우는 소리, 같았다고 한다. 그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 대장부가 구차하게 큰 소리로 울부짖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여립은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정여립의 시체는 다시 조정으로 옮겨져 육시로 찢어지는 두벌죽음을 맞이했다.
정여립의 자살로 그의 역절질이 인정되는 꼴이 되었고, 정여립과 대동계에 관련된 인사 천여명이 옥사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그 때 사람 귀하던 시대, 꽤 상당한 인물들도 죽거나 다치거나, 죄인이 되었다. 자칫 이순신도 정여립과 막역한 조대중에게 편지를 교환한 증거로 위험에 처할뻔 하였다. 이것이 옥사로서는 전무후무한 사상자를 낸 기축옥사다. 조선이 도륙 나버린 임진왜란은 기축옥사가 있은 지 겨우 이년 반지나 일어난 전쟁이다. 나는 임진왜란을 바탕에 깔고 정여립을 생각해야만, 그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임진왜란때 대동계가 있었다면 얼마나 조직적으로 병법에 맞춰 왜적과 싸웠겠는가. 나는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걸음느리고 갈길은 멀다. 나는 말바위 지나 정여립이 대동계원을 훈려시킬 때, 깃대를 꽂았다는 깃대봉을 지나면서도 온통 정여립의 생각으로 몰두해있었다.
정여립이 400년전에 군신강상론을 없애고, 선양론을 내세운 진보적인 혁명성이 있었음은 분명하나 목자는 망하고 존읍은 흥한다.(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뜻), 정팔룡이라는 신기로운 용맹있는 사람이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는 동요나 비어를 역모의 증거로 인정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나는 가막골의 반대편인 동향면 성산리로 내려왔다. 그긴 자연휴양림이 있었는데, 주인아저씨는 이고장 본토백이 였다. 사람이 얼마나 싹싹하고, 두심 즉 입심 인심이 좋은지 나는 금방 그와 친해져 여러가지 편리를 보았다. 내가 정여립에 대해 묻자, 그는 대뜸 아 정여립 장군님하면서 언사를 깍듯이 하고, 경의와 존경의 뜻을 내비친다. 그리고 천변에 수려하게 서 있는 낙락장송 소나무를 가르키며, 정여립장군님이 심었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거분들은 정여립을 장군으로 생각하고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흠칫 놀랐다. 전라도를 반역의 향으로 낙인찍어 호남차별의 빌미를 만든, 기축옥사의 주역 대동계의 정여립을 지금도 호남의 꿈으로 간직하고 있는 그에게 탄복하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여거서는 정여립을 모다 장군이라 부르지어 잉, 흠없는 장군잉께 누명을 썻군만이라." 정여립장군, 정여립장군 나는 몇번이나 입술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인간미에 몹시 공감하고, 그 후 영남대 총동문산악회, 법왕산악회, 중학교 동기회 산악회를 천반산으로 안내하였다. 영남대 총동문산악회와 법왕왕산악회는 그의 도움을 받아 돼지 삼겹살 왕소금 돌구이까지 하였다. 정여립의 꿈과 좌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지역 사람이 있다는 것 만해도, 정여립의 누명이 어느정도 벗겨지는 것 같아 속이 후련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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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여립의 신화를 읽고 많은 것을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정여립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죄로 죽었으나, 그의 사상을 기록한 책자라고 남았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김삿갓처럼 글이 있었으면 그의 사상을 특히 정치사상과 문학사상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좋은 글 특히 역사속의 인물과 산과 그 이름의 박식함에 놀랐습니다. 건필하시고 계속해서 좋은 신화를 많이 들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지난 번 e-mail 감사드립니다.
정여립의 안타까운 죽음, 아픕니다. 역사는 그렇게 아픈 것들이 많죠. 지금도 역사는 흐르고요. 산도 이리 깊은 생각과 공부를 하시면서 찾아다니고 오르고 하시나요. ㅎㅎ 모처럼 역사 공부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