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송수(元松壽)는 과거에 급제하여 춘추수찬(春秋脩撰)에 보임되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서연(書筵)에 거둥했을 때 안진(安震)이 말하기를, “신(臣) 등이 양부(兩府)에 관원을 배치하였으나 하루 종일 시강(侍講)하기에는 부족하오니 단정한 선비를 택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원송수와 민식(閔湜)이 천거를 받았는데, 판삼사(判三司) 이제현(李齊賢) 등이 또 말씀을 올리기를, “티가 있는 옥은 반드시 훌륭한 장인이 새기고 다듬은 뒤에야 보배로운 그릇이 되는 것인데, 임금인들 어찌 모두 실수가 없겠습니까? 반드시 어진 신하[良工]가 충언(忠言)으로 인도한 뒤에야 능히 그 성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원송수는 중찬(中贊) 원부(元傅)의 증손(曾孫)이고 재상(宰相) 원선지(元善之)의 아들입니다. 신 등이 시강(侍講)에 참여하지 못할 때에는 이 사람에게 항상 좌우에 있게 하여 도의(道義)를 갈고 닦으시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원송수는〉 충목왕(忠穆王) 때 헌납(獻納)에 제수되어 헌납 곽충수(郭忠秀)와 함께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를 탄핵하기를, 〈정천기가〉 고신(告身)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정방(政房)에 곧장 들어가 인물을 평가하였고, 또 그 아내를 버리고 항상 창기의 집[倡家]에 있다고 하였다. 〈오히려〉 왕이 노하여 원송수 등을 국문하자 재상(宰相)과 대간(臺諫)이 궁궐에 나아가[詣閤] 그를 구해내려고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고 끝내 파직되었다.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서해도안렴(西海道按廉)이 되어 나갔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 고려로 돌아오는데[東還] 원송수가 길로 마중 나가 뵈었는데, 풍채가 깨끗하고 준수하며 행동거지[進退]가 법도에 맞아 왕이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곧 발탁하여 내서사인 겸 좌부대언(內書舍人 兼 左副代言)으로 삼고 기밀(機密)을 맡겼다. 나날이 왕의 가까이에서 신임을 받게 되었고 지주사(知奏事)로 승진하여 전주(銓注)에 참여했을 때에는 벼슬자리를 주는 것을 신중하게 하여 조금의 사사로움도 없었다. 왕이 일찍이 중에게 관직을 제수하고자 그를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또 윤택(尹澤)이 〈왕을〉 보좌하고 받든 공이 있었으므로 그 손자 2인을 능단직(陵壇直)에 보임할 것을 명하였으나 원송수는 다만 1인만 임명하는데 그쳤다. 뒷날 왕이 그 일을 묻자 빈자리가 적어 능히 왕명을 다 받들지 못했다고 대답했는데, 윤택은 원송수의 좌주(座主)였다. 왕이 이로 말미암아 〈원송수를〉 더욱 공경하고 중히 여겨 원송수가 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일어나서 그를 기다렸다. 원송수가 일찍이 아내의 상[妻服]을 치르고 있었는데 나와서 일을 보라는 명령이 있자 원송수가 아뢰기를, “승선(承宣)은 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복상 중에 일을 보는 것은 고례(古禮)에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자, 왕이 옳다고 여겼다.
〈공민왕〉 10년(1361), 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해 남쪽으로 갔을 때 원송수가 호종하였다. 감찰사(監察司)가 어떤 일로 목인길(睦仁吉)을 탄핵하자 목인길은 환관(宦官)과 함께 왕에게 참소하고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개경[京城]에 분사(分司)를 두게 하여 〈자신에 대한〉 탄핵을 막고자 하였다. 원송수가 불가하다는 것을 힘써 아뢰어 〈분사 설치가〉 마침내 중지되었다. 홍건적이 평정되자 호종한 공을 포상받아 1등공신이 되었다. 원송수는 8년간 나라의 기무(機務)에 종사하며 항상 근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교체를 간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卿)이 경과 같은 이를 천거한다면 교체해 주겠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강(李岡)을 천거하여 교체되었다. 〈이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제수되었고 충근찬화공신(忠勤贊化功臣)의 공신호를 하사받았다.
〈공민왕〉 14년(1365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돈(辛旽)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이듬해 신돈이 더욱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근심하고 분노하다 병이 나 죽으니 나이 43세였다. 〈원송수는〉 재상(宰相)이 될 그릇이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 왕이 유사(有司)에 명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관등을 높여주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라 하였다. 아들은 원서(元序)와 원상(元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