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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한국의 美_우리 음식
ysoo 추천 0 조회 182 15.12.10 16: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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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색의 화합으로 음양오행의 조화를 엿볼 수 있는 나물 요리와 생선포를 떠서 각종 채소를 넣고 말아서 찐 어선으로 장식했습니다.

보기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맛과 정성이 드러나는 우리 음식의 풍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음식, 자연에 정성을 더하다.

 

 

소박한 밥상_ 이선명


소박한 밥상엔 소박한 삶이 담겨 있네
어머니의 잔소리처럼 매운 고추와
아내의 지갑처럼 짠 된장이 얼얼하게 하지만


친구와 나누는 대화처럼 칼칼한 국물과
할매의 구수한 사투리 같은 숭늉이 속을 달래는
소박한 밥상엔 소박한 삶이 담겨 있네


때론 거짓된 유혹처럼 달고
헛된 욕심처럼 느끼함이 가득해
소박한 밥상이 먹을 것 없는 식사가 되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처럼 쌈을 싸고
아내의 배려처럼 전을 붙여
아버지의 삶같은 막걸리 한 잔과 함께 쓸어내리며


쓴맛도 신맛도 떫은맛도
소박한 식사처럼 뜨끈해져오네
고되고 지친 삶과 하루가
아이들의 요란한 잠처럼 평온해지네

 

 

 

 

한국의 美_우리 음식

 

우리 음식, 자연의 정성을 더하다

 

우리네 전통 음식에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단순한 먹거리의 범주를 넘어서는 고유의 민족 정서와 결합된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비빔밥에는 오색오미의 화합으로 음양오행의 조화를 추구하고, 차고 더운 재료가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어울림의 미학이, 김치와 젓갈에는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기다림의 지혜가, 시절 음식에는 자연이 내주는 풍요에 감사하고 나누는 겸양의 덕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온 가족이 둘러앉은 밥상은 맛과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소통의 자리였습니다.
KB고객 여러분, <GOLD&WISE>는 정성 어린 마음을 담아 우리의 전통 음식을 차렸습니다.


에디터 조민진 캘리그래피 강병인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선우 스타일리스트 박용일(yong style) 어시스턴트 남경현

 

 

 

 

유산의 가르침

 

그리 크지는 않아도 세상 좋다는 모습은 모두 갖추었다.

산이면 산, 강이면 강, 바다면 바다….

수려한 그 산천은 청정하기도 했으니 한번 깃든 사람은 떠날 리 없었고 성품은 저절로 안온하게 화(化)했다. 오순도순, 세상 누구도 그리 말할 줄 모르는 ‘정(情)’을 나누니 밥상 위의 수저가 갈수록 늘어났다. 둘러앉아 나눠 먹는 건 즐거운데 차려 올릴 가짓수와 양이 문제였다.


차라리 빼어난 건 덜하더라도 널찍하기라도 하면 초원으로 가꿔 목축을 하거나 밭이라도 제대로 일구련만. 좁은 밭이랑 논고랑에만 의지해서는 목구멍에 풀칠도 어려우니 산과 들로 눈길을 돌렸다. 이름도 모르고 모양새도 비슷했지만 먹을 것 버릴 것 가려내는 눈썰미는 있었다.


등짐이 되도록 한 보따리 뜯어와 펼쳐놓고 다듬으니 소쿠리 하나로 줄어들고, 다시 물 끓여 데치거나 삶으니 에라, 기껏 한 보시기로 남았다. 그래도 이것저것 양념이라고 넣어 조물조물 정성으로 버무리니 쓰면 쓴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별미가 되고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부족한 먹거리에 그렇게라도 둘러앉아 배 채우는 식구를 보니 흐뭇하기는 하지만, 내일 또 산과 들을 누벼 한 보따리 등짐 채울 생각하면 어느새 허리가 쑤셨다.
여인이라는 이름, 어머니라는 무게로 품어온 ‘사랑’이 첫 번째다.


이웃한 대국(大國)은 땅 넓고 박물(博物)하여 온갖 진기함에 풍성함까지 갖춰 입에 달고 기름지다는데. 나라는 작아도 버젓이 나라님 존귀하고 집안어른 지엄하며 자손들 소중한데 흉내라도 내야지. 콩 삶아 메주로 띄우고 소금물 끓여 숨 쉬는 옹기에 나누어 저장하니 된장되고 간장이 되었다.

어떤 나물은 간장으로 맛내고, 어떤 채소는 된장 풀어 끓이고 무치고. 더하여 참기름, 들기름까지 한 방울 곁들이면 각양각색 저마다의 빛과 향으로 산해진미 부럽지 않았다.

자연에 순응하며 천지의 흐름을 읽어 활용한 빼어난 ‘지혜’가 두 번째다.


온전히 자연에 의지해서 살아야만 했던 오래전 그때, 가장 넘기기 힘든 건 겨울이었다.
추수해 갈무리해둔 곡식은 있다지만 지난 세 계절 풍성하던 나물이며 채소는 모두 숨 죽였다. 그래도 진작 삶은 뒤 말려서 보관하는 법을 찾아내 시래기 등속으로 그럭저럭 보충은 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더구나 싱싱한 채소에 맛들인 입이었으니 생각만 해도 입안이 텁텁했다.
무를 소금물에 절여 숨 쉬는 항아리에 넣어 땅속에 저장하니 무르지 않고 싱싱하게 먹을 수 있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배추도 그리하다 보니 갖은 양념으로 버무릴 생각까지 떠올랐다.

해안가는 바다 냄새 진한 양념으로, 산간은 산천의 향기 그윽한 양념으로, 팔도의 고을마다 저마다의 특색으로 겨울을 채비하니 온갖 김치가 유산이 되었다.
낙담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헤쳐가려는 의지로 빚은 ‘창조’가 세 번째다.


세상의 문이 열리자 온갖 것이 쏟아져 들어왔다.

만한전석(滿漢全席) 등에 업은 청(淸)요리에 알록달록 보기만 해도 회가 동하는 법국(法國, 프랑스)요리, 굶주린 뱃가죽 요동치게 하는 두툼한 고깃살의 스테이크나 햄버거….

환장한 듯 목구멍에 쑤셔 넣으며 된장, 김치라면 인상찌푸리며 고개 돌린 날도 있었다. 그런데 불뚝 튀어나온 뱃살이 떳떳하던 건 잠시, 금세 몸뚱이가 탈 나며 입맛부터 돌아서는 게 아닌가.

‘에라, 너무 오래 없이 살아서 어쩔 수 없는 DNA’ 라며 원망도 했다.


세상에, 어쩌다 외국에라도 나가게 되면 눈치 살펴가며 챙기던 그 냄새 나는 된장이, 김치가, 어느새 자연의 건강식이라며 세계인의 입맛을 뒤집다니!

질기게 오래도록, 온갖 간난(艱難)과 신고(辛苦)에도 끝내 살아남아 기어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이 위대함이여!


여인이, 어머니가 품은 사랑의 마음은 만사의 근본이다.

지혜는 짧은 영악함이 아니라 자연과 천지의 흐름을 순응하는 중에 얻어짐이다. 역경에 굴하지 않는 의지가 창조하는 끝은, 다시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하리라.

 

글 김정현(소설가)

 

 

 

밥상, 지혜와 정성으로 차리다

 

음양오행의 우주를 담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하얀 밥에 따뜻한 국,
잘 익은 김치, 나물, 고기 등 다양한 음식이 각각의 그릇에 소담히 담긴 밥상은 한 폭의 동양화가 된다.

이 그림 속에는 우주의 질서인 음양오행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음(陰)과 양(陽)의 우주적 흐름에 입각해 음의 성질과 양의 성질의 재료를 사람의 체질에 맞춰 음식을 만들었고, 오방 사상으로 다섯 색깔의 성질과 맛까지 담아냈다. 이를 고집스레 지켜온 우리 음식의 철학적 지향점은 포용과 조화다.

마찬가지로 상과 식사 도구에도 음양오행의 사상이 담겨 있다.

음식이 놓이는 반상 대부분은 둥근 형태로 이는 양을 나타내며, 상다리 네 개는 음을 뜻한다. 둥근 숟가락 한 개는 양이고, 짝을 이루는 젓가락 두 개는 음으로, 이를 함께 사용하는 것 역시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

 

 

아낌없이 나눠주는 미덕

 

주안상엔 손님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우리네 정의 문화가 배어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좋은 술이 많았고, 주례(酒禮)와 주행(酒行)을 존중했으므로 빈객에게 주안상을 차려 대접함이 상례였다. 음식을 놓을 때는 맛있는 것을 더 가까이 놓아 젓가락이 자주 가도록 했다.
손님상은 외상이나 겸상을 하는데, 술은 왼쪽에 놓고 대접한다. 외상으로 손님을 대접할 때는 마주 보지 않고 옆에 앉았다. 또 술과 그 술에 적합한 안주로 구성하되 술이나 안주는 계절과 어울리는 것을 냈다.

 

 

뚝배기 한그릇에 담긴 소박한 기쁨

 

국밥 문화는 임진왜란 이후 장시(場市)의 발전과 함께 객줏집과 주막에서 번성했다.

행상과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뜨끈한 장국밥 한 그릇과 탁주 한 사발은 일로 지친 몸을 잠시라도 편안하게 하는 위로의 음식이었다.

조선간장을 넣은 장국에 무를 넣고, 나물과 약산적을 얹어 낸 장국밥은 칼슘과 단백질이 풍부한 완전 식품에 가까웠다. 또 콩나물국밥은 숙취 해소에, 부산의 돼지국밥과 충청도 내륙 지방의 올갱이국에 들어간 부추는 간
기능 보호에 효험이 있었다. 국밥 한 그릇에 담긴 선조의 지혜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염원을 담다

 

설날이 한 해를 시작하는 만큼 신성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맞는 명절이라면, 대보름은 신나는 명절이었다.

대보름 음식은 1년 건강을 기원하며 먹는 절기 음식이기도 했다. 겨울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과 영양분을 보충하는 음식이 주를 이룬다.

오곡밥과 구색나물, 견과류와 약밥, 김쌈과 배추, 취 등으로 이뤄진 복쌈을 먹는다.
특히 보름달 보며 먹는다는 원소병은 찹쌀로 빚은 경단을 익혀 차가운 꿀물이나 오미자를 우린 물에 띄워 낸 떡 화채다.

 


에디터 조민진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선우 요리&스타일링 이종국(푸드아티스트) 어시스턴트최은미, 박진우, 윤현석 참고도서 <굿모닝! 한식입니다>(전혜경 지음, 모던플러스 펴냄)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주안상, 책거리상

 

 

 

 

 

버리는 것 없이 두루 살피는 포용력, 한식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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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에 반찬 10가지가 나오는 백반을 먹으면서 놀라지 않기란 전 세계에 오로지 한국에서만 가능하다.
게다가 반찬 종류와 조리법이 모두 다르다. 어떤 나라에서도 그런 풍성함을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다.

인심 좋고 풍족한 우리 식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놀라운 지혜도 숨어 있다. 그래서 한식에 대해 알수록 자부심은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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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기자로 일하면서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가장 자랑한 우리 문화는 늘 ‘한식’이었다. 한식만큼 건강한, 정성을 쏟는, 인심이 후한, 조리법과 재료가 다양한 음식이 또 있을까.


상처투성이 역사를 치유하는 게 바로 지혜로운 우리 식문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유명 전시관에서
담당자와 점심 한 끼를 먹으며 문화별 조리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한식이 얼마나 자연 그대로의 음식인지 설명했으나 그들은 된장과 고추장도 일종의 가공이 아니냐고 물었다.

놀라운 오해를 풀기 위해 우리 음식의 근원을 설명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을 것이다.

 

철학을 알면 더 확실해지는 한식의 위대함

 

우선 한식에는 음식 종류나 맛과 영양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철학적 가치가 담겨 있다. 각기 다른 문화권이 모여 하나의 식자재로 음식 경연을 벌이면 아마 한식에서 쓰레기가 가장 적게 나올 것이다.

한식은 식물의 이파리뿐 아니라 뿌리와 줄기, 꽃까지 모두 음식으로 만든다. 게다가 좋은 식자재가 아니어도 한식에 오면 음식이 된다. 벌레 먹은 무청은 말리고 삶아 시래기로 만들고, 눌어붙은 밥은 숭늉이나 누룽지 과자로 먹는다. 같은 쌀 문화권에서도 누룽지를 먹는 건 우리나라뿐이다. 작은 것 하나도 쓰임새를 만들어냄이 한식의 기본 철학이다.


게다가 한식은 융화의 음식이다. 서양의 코스 요리와 우리의 비빔밥은 극과 극으로 비교된다. 요리에 따라 식기와 커틀러리까지 바꿔가며 먹는 서양식에 비해 우리 상차림은 한 번에 총망라된다.

식기에 담길 때 완성되는 게 아니라 입에서 섞이며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밥은 싱겁고 반찬은 짭짜름해 함께 먹어야 중화되며 제맛이 난다. 밥과 반찬, 장과 채소, 고기와 김치가 입에서 섞이며 수없이 많은 맛의 조합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 음식은 어떤 조합을 만들어도 잘 어울린다.

밥에는 모든 반찬이, 김치에는 모든 육류가, 쌈에는 모든 음식이 가능하며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심지어 온도도 공존한다. 음식마다 제 온도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찬물에 씻은 싱싱한 채소에 따뜻한 밥이나 고기를
싸서 먹는다. 이토록 서로 다른 것을 한데 섞고 어우르는 식문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식자재가 부족한 데서 기인한 특성이라기에는 굶주림의 역사가 전 세계 공통이라는 점에서 설명이 부족하다.

 

한식이 조화와 융합을 기본 철학으로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쉽게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쌀은 수많은 잡곡으로대체할 수 있고, 쌈이나 나물 역시 한두 가지가 빠져도 무방하게 대체할 것이많다. 소금이 비싼 예전에는 고추가 소금을 대신했다. 바닷가에서 힘들여 생산한 소금을 산골까지 운송하면 소금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추는 어디서나 잘 자라기에 쉽게 구할 수 있고, 비타민 C와 E가 풍부해 지방의 산패를 막는다.
고추를 말려 붉게 만든 후 가루로 빻아 김치에 넣으면 소금이 많이 들어가지 않아도 오래 저장할 수 있고, 맨드라미 같은 붉은 꽃이 없어도 식욕을 자극하는 붉은색을 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지혜는 이렇게,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도록 재료와 조리법을 다양화한 것에서 정점을 찍는다.


세세히 들어가면 더 놀랄 일이 많다. 먼저 세계인이 인정하는 음식 중 하나인 나물을 보자.

나물과 버섯 요리만 수백 가지에 이른다. 이 작은 땅에 많이 있는 거라곤 산뿐이던 한국은 산이 주는 선물을 빠짐없이 챙겨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세계인이 사랑하는 비빔밥을 만들었다.

점잖은 자리에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는 일본의 비하가 있어도 1등석 기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여전히 비빔밥이다. 오색창연한 빛깔이 한데 섞여 오묘하고 조화로운 맛을 낸다는 것, 그 중심에 나물이 있다. 지금 세계가 주목하는 저칼로리 채식단의 해답도 나물에서 찾을 수 있다.

고사리와 취나물, 곤드레가 음식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험과 도전이 있었겠는가. 구한말 우리나라를 다녀간 선교사의 기록에 ‘한국인은 먹을 수 있는 온갖 풀 종류를 알고 있고, 독이 있는 나물도 삶아 물에 우려 독을 빼는 법을 알고 있다’고 나와 있다. 여기에는 선조의 ‘약식동원’ 사상이 깃들어 있다.

병에 걸린 뒤 약을 먹어 치료함이 아니라 병에 걸리지 않게 음식을 섭취하며 건강을 보전함이 우리 음식 철학의 기저에 있다. 나아가 약과 음식이 따로 있지 않고 사람도 자연의 일부며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라는 믿음이 한식을 만드는 것이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받아들인 조리법, 발효

 

한식이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이라는 오명은 우리 외식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시의 식당 수는 면적 대비 최고치에 이른다. 손님을 끌려면 즉각적인 맛을 낼 수밖에 없어 음식 맛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지만, 가정에서 만드는 음식은 그와 달리 부드럽고 담백하며 깊다. 그것이 한식의 진짜 얼굴이다.

 

여기에 ‘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한 고을 정치는 술맛으로 알 수 있고 한 집안 일은 장맛으로 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장은 그 집안의 일희일비를 함께하는 중요한 재산이며 집안 음식 맛의 기준이 되었다. 간장은 메주를 띄워 소금물에 담가 우린 물이고 된장은 간장을 뺀 건더기를 소금으로 갈무리해 다시 숙성한 것이다. 고추장은 발효된 메주를 부셔서 찹쌀이나 보리 등 곡물을 섞어 고춧가루를 넣어 만든다.


이렇게 장은 모두 콩을 주재료로 하는데, 부족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연구한 우리 선조의 지혜가 드러난다. 그런데 앞서 우리 음식이 자극적이지 않다고 한 이유는 잘 익은 간장이나 된장을 먹으면 생각보다 짜지 않고 오히려 담백하기 때문이다.

먹어보면 은은하게 짠맛이 돌면서 묘하게 다른 맛이 함께 우러난다. 고추장 역시 맵다기보다는 칼칼하면서 깊은 맛이 난다. 이것이 바로 발효 음식의 맛이다.


발효에 술이 빠질 수 없다. 우리는 예부터 집집마다 술을 빚는 가양주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은 우리 전통 누룩과 막걸리의 효능을 연구하고 한국 누룩의 우수성을 인정했다. 누룩이 익는 과정을 보면 발효 절차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도 전통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이 있는데, 가서 보면 누룩 한 장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술과 노동력이 드는지 알 수 있다.

발효라 함은 음식이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막걸리는 병을 밀봉하지 않고 입구에 작은 홈을 내 공기가 통하게 한다. 그렇게 두면 오늘 맛과 내일 맛이 다르고 계절에 따라 익는 속도도 다르다.


김치도 같은 원리다. 특히 김치는 숙성되는 과정에서 영양 성분도 변한다.
초기에는 비타민이 풍부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유산균이 늘어나면서 맛도 새콤해진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저지방 건강식인 김치는 식초 없이 스스로 발효한다는 점에서 절임 음식의 왕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른 피클은 맛이 시거나 달거나 둘 중 하나로 그 맛 역시 식초와 설탕을 넣기에 가능해진다. 그러나 김치와 막걸리 모두 익으면서 절로 신맛을 내고 배추와 곡물이 스스로 단맛을 내며 천천히 음미하면 오미가 전부 느껴진다.

비교 불가의 발효 기술이다. 맑은 물과 바람, 적당한 온도와 햇볕이 있어야 하고,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변화에 순응하는 사람의 보살핌이 더해져야 한다. 그래서 발효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아무나 즐길 수도 없다. 즉각적인 즐거움보다는 맛을 천천히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 발효 음식의 진가를 안다.

 

매일 세 번 먹는 식사에 우주가 들어 있다

 

된장에 대해 세간에 회자되는 찬사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된장에는 다섯 가지 덕이 있으니

다른 맛과 섞여도 제맛을 잃지 않는 단심(丹心),

오래 두어도 변질되지 않는 항심(恒心),

매운맛을 부드럽게 해주는 선심(善心),

비리고 기름진 냄새를 제거하는 불심(佛心),

그리고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화심(和心)이다.’

 

실제로 된장은 한식에서 빠지는 곳이 없고 제맛을 잃지 않으면서 완전히 다른 맛과도 묘하게 어우러진다. 필자는 이 표현이 곧 한식 조리법 전체와도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 없이 모두 끌어안고 결국 요리로 승화하는 한식의 지혜와 매력은 포용과 변용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 예로 쌀을 보자. 좁은 경작지에서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곡물을 키우려면, 그것도 영양적 측면을 고려하면 쌀 이상이 없다. 그리고 쌀은 수많은 것으로 변용되며 다시 태어난다.


먼저 수확한 상태에서는 쌀이고 익히면 밥이다.

 밥의 이름만 해도 임금의 밥은 수라, 윗사람은 진지, 제사에 오를 때는 메로 구분된다. 그리고 잘게 찧어 차지게 만들면 떡이 되고 물을 넣고 오래 끓이면 죽이 된다. 특히 죽은 그 어떤 재료도 껴안는다. 고기와 해산물, 견과류까지 가능하다. 여기에 국수, 과자, 엿, 술까지 쌀을 포함한 곡물의 변신은 끝이 없다.


그런데 항간에는 이 변용력 때문에 한식의 장식적 요소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다. 장의 색도 비슷한데 거기에 이것저것 섞어 한데 모으니 음식의 비주얼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이는 우리 고명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리 선조는 백색 자기나 점잖은 유기에 음식을 담고 색색 고명을 얹어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은 분위기를 냈다. 고명은 셋 또는 다섯 색상으로 고루 갖춰 내는데, 여기에는 오행 사상의 철학이 담겨 있다.

오행은 나무, 불, 흙, 쇠, 물 기운의 흐름을 말하는데 이를 다섯 색깔로 배대한 것이 오방색이다.


각 색깔이 오행 요소를 상징하니 음식을 오방색으로 장식함은 온 우주의 기운을 담아낸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은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여 우주와 하나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고 믿는다.

밥 먹는 일, 그것도 하루 세 번씩 누구나 하는 일에 우주를 끌어들여 가장 신성한 이로 바꿔주는 매개체가 고명에 들어가는 오방색이다. 고명이 음식 맛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음에도 수고를 감내하며 반드시 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방색의 흰색은 달걀흰자 지단으로, 노란색은 생밤채나 유자채로, 검은색은 표고버섯이나 검정깨로, 붉은색은 실고추나 대추로, 녹색은 볶은 호박이나 미나리를 이용한다. 국물이 유독 많은 한식에 이 고명은 화룡점정이 된다.


이 밖에도 한식이 가진 놀라움은 수없이 많다. 요리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우리 음식이 얼마나 자연 친화적이면서 동시에 얼마나 과학적인지 설명하고 싶은 욕구를, 지면의 한계로 애써 덮으며 마친다.

 


글 김선미(자유기고가)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선우 참고도서 <우리는 왜 비벼먹고 쌈 싸먹고 말아먹는가>(동아일보사 한식문화연구팀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 <굿모닝! 한식입니다>(전혜경 지음, 모던플러스 펴냄)

 

 

information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


<음식디미방>은 안동 장씨라는, 경상도 산간벽지의 한 여인의 손에 의해 탄생한 문헌이다.

중국의 조리서와 관계없이 예부터 전해 내려오거나 스스로 개발한 조리법을 기록한 것으로, 동아시아 최고의
조리서로 알려졌다. 70이 넘은 고령의 안동 장씨가 146개 항에 달하는 음식 조리법을 한글로 서술한 최초의 한글조리서기도 하다. 1600년대의 조리서가 현재까지 회자되는 까닭은 한식의 근본과 장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유숙 ‘대쾌도?(104.7×52.5cm, 조선 시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꽃이 만발한 봄날 구경꾼이 모여 씨름과 택견 겨루기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게 막걸리 한 사발과 구수한 인절미였다.

 

유숙의 「대쾌도(大快圖)」 detail

 

 

 

옛 그림 속 미각을 탐하다

 

음식은 단순히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 대상이 아니다. 음식에는 지나간 삶과 역사가 담겨 있고, 자연에서
태어난 우리가 자연에서 거둔 음식을 먹는 것은 삶의 섭리와도 같다.

옛 그림 속 음식과 함께 선조의 삶을 엿본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어느 순간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숯불고기, 국수, 두부 등 별 생각 없이 먹는 음식도 선조가 오랜 시간 갈고닦은 음식 문화에서 비롯한 것이 많다. 숱한 시간의 흔적인 것이다.

수많은 인스턴트식품이 우리의 바쁜 일상을 대변하듯, 과거 속 그림은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림을 통해 우리는 서민, 왕, 관리가 되어볼 수 있고, 근대적 시선으로 그린 조선 음식도 만나볼 수 있다. 시대 속 풍습과 감정이 뒤섞여 적절히 조미된 옛 그림을 맛있게 감상하자.

 

 

고단한 삶에서 꽃피운 서민의 음식

 

나라 안팎으로 숱한 격변을 겪고 수시로 자연재해에 시달리면서도 우리 선조는 꽃피는 세월의 태평성대를 노래하며 굳건히 이겨내고자 했다. 유숙의 ‘대쾌도’가 대표적이다.
꽃이 만발한 계절, 신분과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수많은 구경꾼이 성 밖에서 벌어지는 씨름과 택견 겨루기를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담았다. 유숙은 왼쪽 상단에 대쾌도라 적고 옆에는 작은 글씨로 관지를 적었다.

“병오년 가지가지 꽃피는 계절 격양세인이 태평한 세월에 그렸다(丙午萬花方暢時節 擊壤世人寫於康衢煙月)”라고 되어 있어 그린 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지금과 달리 195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도 이북에서 5월 5일 단오는 설날과 같은 큰 명절로 여겼다. 다가올 더위와 씨름하며 김매기를 해야 하는 시기다. 한 해 농사의 고단함을 달래는 한바탕 놀이가 필요한 때다. 그래서 단오가 되면 도처에서 씨름을 하고 음식을 나누었다.


그림에서 씨름과 택견을 바라보는 구경꾼의 차림새를 통해 신분을 알 수가 있는데, 상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되어 구경했다. 그 밑으로 시선을 내리면 갓을 쓴 젊은 두 양반이 각 대전별감, 꼽추 하인과 술을 마실지 의논한다. 꽃이 만발하는 5월이지만, 아직은 먹을 게 크게 부족한 보릿고개 시절이니 얼마나 마시고 싶었을까 싶다. 술 장사꾼은 이미 흰 막걸리를 잔에 부어 이들을 유혹한다.

술 단지 옆에는 흰잔이 4개 있고, 옆에는 노란색 음식이 놓였다.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막걸리와 어울리는 인절미일 가능성이 높다. 콩가루에 묻혀 먹는 인절미가 구수한 향을 낸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대각선으로 바라보면 엿판을 든 사내가 보인다. 엿은 긴장감 넘치는 씨름판을 구경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간식거리였다. 구성지게 엿타령을 부르며 씨름판에 한껏 흥을 돋웠다.

 

 

최득현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151.5×66.4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다. 성대한 잔치에 걸맞은 산해진미가 상에 올랐다.

 

 

법도를 중요시한 궁중 음식 상차림

 

수많은 개혁 정책으로 조선 왕조를 부흥시킨 정조는 궁궐 나들이를 즐겼다. 재위 24년 동안 66번이나 행행(行幸)을 했다. 그중 절반을 차지한 것이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참배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지아비 잃은 슬픔을 이겨낸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행행으로 표현했다.

1795년 현륭원 참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과 아버지의 구갑을 축하하면서 자신의 재위 20년을 정리하는 뜻을 담았다. 김득신 외의 화원들이 행행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고, 여덟 폭 병풍의 형태로 전해진다.


그림 오른쪽 맨 위에는 십장생 병풍을 둘러쳤고, 왼쪽으로는 왕의 자리인 표피 방석이 깔렸다. 그리고 앞에는 원탁이 세 개 놓였는데, 음식의 종류는 알 수 없으나 괴임 음식이 상마다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이날 왕이 받은 음식의 종류와 양이 기록되어 있다. 높이 5촌 이상의 각종 떡, 연사과, 강정, 민강, 곶감, 편육, 전 등 10가지다. 이 외에도 약밥, 국수, 각종 다식 등 수많은 음식이 상에 올랐다. 개인상에는 상화를 한 송이씩 꽂는 것이 법도였다. 지위에 따라 상화의 종류와 개수도 달랐다.

 

 

 

안중식 「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


지금은 일상이 되어버린 서양 음식이 조선 시대의 식탁 위에 올랐다. 안중식의 ‘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에는 어색하지만 색다른 조선의 풍경이 담겨 있다.
고종 20년(1883) 6월 22일 조선 측 전권대신인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영목과 일본 측 전권대신인 판리공사 다케조에 신이치 사이에 조일통상장정 조인식을 끝낸 뒤의 연회를 그린 것이다.

그림의 왼쪽 주빈석에 사모관대를 갖추고 앉아 있는 사람이 조선의 대신 민영목이다. 지금 외교 관례는 나라를 대표한 협상자가 마주 보고 앉음이 원칙이지만, 조선 시대는 달랐다. 민영목보다 아랫사람의 입장으로 오른쪽에 다케조에가 앉았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을 가장 먼저 개항시킨 일본은 국제 협약에 경험이 없는 약점을 이용해 무관세 조약을 맺었다. 조선의 재교섭 요청에도 꿈쩍 않다가 일본공사관 습격 사건 등 감정이 악화되자 다시 조약을 체결하고자 한다. 어렵게 조선 정부의 재정고문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협력을 얻어 조선과 일본은 통상장정에 조인한다. 참석한 모든 사람 앞에는 서구식 식기와 커틀러리가 놓였다.
식기 가운데에는 커틀릿으로 보이는 음식이 담겨 있다. 소금·후추 등의 양념 단지인 캐스터와 각설탕을 담은 분청사기 통도 보인다. 각각 다른 술잔 다섯 개도 함께 놓여 있다. 하지만 그저 서양식 일색은 아니다.

서양 음식을 대접하면서도 반드시 꽃병과 함께 조선식의 괴임 음식 세 접시를 올렸다. 좌석 배치도 조선의 법도를 따랐다. 주빈인 민영목이 앉은 자리가 가장 높고, 좌우가 차석, 민영목에서 멀수록 앉은 사람의 위계가
낮다. 주빈을 편하게 해주면서도 우리 민족의 독자성은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신윤복 ‘주사거배? (酒肆擧盃) (28.2×35.6cm, 조선 시대, 간송미술관 소장).
금주령에도 술을 마시고 싶어 주막을 서성이는 관리들의 모습이다. 엄한 감시 아래 마시는 술 한잔은 꿀맛이었으리라.

 

 

음식을 향한 관리의 간절한 마음

 

지금은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술 한잔의 자유가 있지만 조선 시대는 달랐다. 금주령을 내려 술 마시는 것을 법으로 금했기 때문. 그럼에도 혜원 신윤복의 ‘주사거배’에는 술을 마시러 오는 형조 관원들의 모습이 담겼다.

트레머리를 한 주모는 오른손으로 국자를 들고 술을 따른다. 붉은 장의를 입은 사람은 이미 한잔했는지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입에 넣는다. 옷차림으로 보아 관아에서 심부름하는 사령으로 보인다.

옆에는 갓과 도포를 입은 양반 두 명이 서 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대문 쪽에는 갓과 도포를 입은 사람과 남색 철릭(왕조 시절에 무관이 입던 옷의 한가지) 위에 작의(검은 바탕에 흰 실로 바둑판 모양 줄을 넣은 소매 없는 옷)를 걸치고 조건(끝이 뾰족한 검은색 두건)을 쓴 사람이 보인다.

조건과 작의를 입은 이는 형사 업무를 맡은 관서에 소속된 나장이다.

조선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양반과 중인이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하급 관리와 함께 술을 마시러 온 것은 아마 군인과 농민에게는 막걸리 마시는 것을 허락한 때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엄격한 금주령 아래 마시는 한 사발의 술은 꿀맛과도 같았으리라.

 

 

성협 ‘야연?(33.2×33.4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 행려풍속도 8폭 병풍(行旅風俗圖八幅屛風) 설후야연(雪後野宴)  모사

 

 

술과 더불어 빠질 수 없는 것이 숯불에 잘 구운 소고기 한 점일 것이다. 잔설이 내리는 음력 10월이면 소나무 아래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숯불에 구워 먹는 육적과 곁들이는 청주 한 잔이면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홍석모가 <동국세시기>에 “요사이 한양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훨훨 피워놓고 번철을 올린 다음 소고기를 기름·간장·달걀·파·마늘·고춧가루에 조리해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다. 이것을 난로회라 한다”라고 적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야연’이라는 그림처럼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밖에서 난로회를 가졌다. 조선 시대에 소고기는 유교식 제사에 으뜸으로 치는 재료고, 농사짓는 데에서 소는 무척 소중한 노동력으로 인식되었기에 국가는 소도살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권세가들은 소고기가 먹고 싶었다. 금주령과 소도살 금지령 속에서 몰래 숨어 소주 한잔에 육적을 먹는 일은 짜릿한 쾌감과 함께 그 맛을 배가시켰을 것이다. 밖에서 고기를 굽고, 술잔을 기울이는 지금 우리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김준근 <국수 누르는 모양>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잔치의 기쁨을 나눈 근대 속의 음식

 

지금은 밀가루 소비량이 쌀 소비량을 압도하는 시대에 살지만, 조선 시대에는 사뭇 달랐다. 밀가루는 귀한 재료로 취급해, 국수의 주재료로 쓰인 것은 메밀이었다.


칼국수는 밀어서 채를 썰면 된다지만, 가는 국수는 어떻게 뽑았을까? 아무래도 국수틀이란 기계를 이용해야 하는데, 김준근이 ‘국수 누르는 모양’으로 흥미로운 광경을 그려냈다.

부뚜막 위에는 널빤지 두 개로 만든 국수틀이 놓여 있다. 위 널빤지에 상투머리를 한 남자가 올라타 힘을 준다. 또 다른 상투머리를 한 남자는 오른손으로 국수틀을 잡고 왼손의 꼬챙이로 국수를 젓고 있다.

집 안에 잔치가 열릴 때 메밀가루를 반죽해 국수를 내려 먹던 우리 선조. 흥겨운 잔치 분위기에 취해 후루룩 넘기는 국수 한사발은 늘 먹을 수 없기에 간절하고 더 맛있었을 것이다.

두부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 재료 중 하나다. 하지만 예전에는 두부를 직접 만들어 잔치 때만 두부를 먹었다. 두부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서한의 회남왕 유안이 발명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건 문헌에만 등장할 뿐 중국에서 두부는 송나라에 들어와서야 일반인에게 퍼졌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두부 제조 기술도 전해졌다. 두부를 처음 맛본 고려 후기 학자 이색은 <목은고>에서 “채솟국에 입맛을 잃은 지 오래인지라 두부를 저며보니 기름진 비계처럼 새롭구나. 더욱이 다시 보니 치아가 드물어도 좋은 듯하니 참말로 노신(老身)을 보양하는 데 좋겠구나”라며 두부 예찬을 펼쳤다.

 

 

김준근 <두부 짜는 모양>

 


김준근의 ‘두부 짜는 모양’은 특별한 날에만 먹던 두부 제조 과정을 담았다. 함지박 위에 판을 올리고 그 위에 주머니를 얹고 다시 판을 올린다. 그 위에 사람이 올라 무게를 준다. 돌도 함께 얹는다. 함지박 옆에 자배기를 두어 빠져나오는 물을 받아야 한다.

자세히 보면 판 안쪽에 두부를 썰기 좋도록 칼로 줄을 그어놓았다. 찬물이 담긴 함지박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부 주머니를 넣어 벗겨낸다. 주머니를 벗기면 하얀 속살을 한 두부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외국인에게는 ‘토푸’로 알려진 음식이지만, 옛날 회갑 잔치나 제사처럼 특별한 날 고기에 대한 갈증을 달래주던 고마운 음식이었다.

 


에디터 최윤정

자료협조 간송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학교 박물관 참고도서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주영하 지음, 사계절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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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3 februar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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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당진찬도 (奉壽堂進饌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6호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봉수당진찬도는《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8폭 중의 한 폭으로《화성능행도병》은 정조가 1795년(정조 19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에 걸쳐 화성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1735-1762)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행(行幸)했을 때의 주요 행사를 그린 병풍으로 그 중 <봉수당 진찬도>는 현륭원 행차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로 혜경궁 홍씨의 탄신 일주갑을 기념하여 베풀어진 진찬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진찬례는 화성행궁에 도착한지 사흘째인 윤2월 13일에 봉수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이 연회에는 친인척 82명이 초대되었다 한다.

 

그림은 화면 상단에 봉수당을 포치하고, 중량문을 지나 하단의 좌익문을 연결하는 행각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그 안쪽으로는 진찬광경이 그려져 있다. 봉수당 앞 계단에서 뜰에 이르기까지 임시로 덧마루를 설치하고, 대형 차일이 쳐진 백목장(白木帳)을 둘러 공간을 구분하였다.

봉수당 온돌방에 마련되어 있는 혜경궁과 내외명부의 자리는 주렴으로 가려져 있고, 보계의 왼편 앞쪽에는 병풍을 둘러쳐져 있으며, 그 안쪽에는 호피보료방석이 보이는데, 이는 정조의 자리임을 암시한다. 물론 위대한 인물을 그려 넣지 않는 조선시대 기록화방식을 따라 정조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호피방석이 2006년 보물 제1498호로 지정된 <조선후기 문인초상>의 방석과 유사하다는 점으로서, 정조 년간 상층계층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덧마루 위에는 융복(戎服)차림의 의빈(儀賓)과 척신(戚臣)들이 좌우로 나누어 쭉 앉아 있으며, 그 중앙에는 여령(女?)들이 음악에 맞추어 일종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중앙문 밖에는 어가를 호위해 온 백관(百官)들이 융복(戎服)차림으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 찬탁(饌卓)위에는 술잔과 함께 하사받은 꽃(종이꽃)이 꽃혀 있다.

 

<봉수당진찬도>는 동국대학교 소장본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과 리움삼성미술관, 고궁박물관,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전체적인 형식은 같지만 세부묘사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동국대학교본은 다른 진찬도에 비해 채색의 농도가 짙고, 묘사가 대체로 정밀하며 마치 위에서 본 듯 축약된 병풍 화면형태나 병풍 폭의 꺽이는 부분묘사, 인물들의 실감나는 동작 표현 등은 여타본 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와나 함 등에 명암이 절묘하게 구사되어 있는 점 등은 행사가 행해졌던 시기보다는 좀 더 후인 19세기 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비록 단폭(單幅)으로만 전해오지만,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가필의 흔적이 없고 19세기 기록화로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행려풍속도 8폭 병풍(行旅風俗圖八幅屛風) 복제품

 

선비가 세속을 유람하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장면을 소재로 구성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의 작품을 모사(模寫)한 그림. 지본채색(紙本彩色). 8폭 병풍(세로 142, 가로 401.6). 1폭부터 차례로 파안흥취(破顔興趣), 후원유연(後苑遊宴), 기방쟁웅(妓房爭雄), 노상풍정(路上風情), 가두매점(街頭買占), 설중행사 (雪中行事), 노상송사(路上訟事), 설후야연(雪後野宴)으로 구성됨.

채색은 주로 인물, 옷, 집, 가구 등에 국한되어 있고, 주변 배경은 먹을 연하게 우려 엷은 채색을 함. 짙은 감색 무지본견으로 병풍 전체를 감싸고, 짙은 자주본견으로 테두리를 마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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