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城谷의 神童
선생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기억력과 이해력이 뛰어나 가끔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동(神童)이라고 불렀으며, 선생의 집은 '신동집'으로 통했다 한다.
어느날 선생이 서당에서 《대학 大學》을 읽으면서 책의 군데군데 시커멓게 먹칠을 하고 있었다. 이상이 생각한 훈장(訓長)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자(程子)의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아홉 살 때에 《서전 書傳》을 읽고 기삼백주(朞三百註)를 자해(自解) 통달했다고 하는 천재였지만, 훈장은 또 한번 놀랐다.
▶비녀가 소용없다
선생은 1912년을 전후하여 장단(長湍)의 화장사(華藏寺)에서 〈여자단발론 女子斷髮論〉을 썼다. 당시 남자들에 대한 〈단발론〉이 사회적 물의를 크게 자아내고 있을 때 감히 여자의 단발을 부르짖은 것은 선생의 선각적인 일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원고는 지금 전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런데 그 무렵 선생은 "앞으로 20년쯤 후가 되면 비녀가 소용없게 된다."고 예측하였으며 좋은 금비녀를 꽂고 있는 부인을 보면, "앞으로 저런 것은 소용없게 될텐데......"하였다는 것이다.
▶어서 덤벼 봐라
선생이 고성(高城) 건봉사(乾鳳寺)에 계실 때였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한 그 지방의 어떤 부자를 만났다.
"이놈, 중놈이 감히 인사도 안 하고 가느냐? "
하고 지나쳐 가려는 선생을 가로막고 시비를 걸었다.
선생은 못 들은 척하고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자, 그 부자는 따라와서 덤벼들었다.
선생이 한번 세게 밀었더니 그는 뒤로 나동그라져 언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선생이 절로 돌아온 얼마 후 수십 명의 청년들이 몰려와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놈들 어서 덤벼 봐라.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하고 드디어 화가 난 선생은 장삼을 걷어붙이고 힘으로써 대결하였다. 치고 받고 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자그마한 체구였으나 어릴 때부터 남달리 힘이 세었던 선생을 당하는 사람이 없어 하나둘씩 꽁무니를 뺐다.
강석주(姜昔珠) 스님은 선학원(禪學院) 시절의 선생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선생은 기운이 참 좋으셨습니다. 소두(小斗) 말을 놓고 그 위를 가부좌(跏趺坐)를 한 채 뛰어넘을 정도였으니까요. 팔씨름을 하면 젊은 사람들도 당하지 못했지요."
선생은 심우장(尋牛莊)에서 종종 선학원을 찾아갔는데 혜화동을 거치는 평지길을 택하지 않고 삼청동 뒷산을 넘어다니셨다. 이때 선생을 따르던 저는 당시의 일이 이렇게 생각난다.
"삼청동 뒷산을 넘을 때 선생은 어찌나 기운이 좋고 걸음이 빠른지 새파란 청년이었던 제가 혼이 났었지요. 그저 기운이 펄펄 넘쳤어요. 선생은 보통 걸음으로 가시는데 저는 달음박질을 해도 따라가지를 못했어요."
또 조명기(趙明基)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만해 선생은 힘이 셀 뿐 아니라 차력(借力)을 하신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요. 왜경이 뒤쫓을 때 어느 담모퉁이까지 가서는 어느 틈에 한길도 더 되는 담을 훌쩍 뛰어넘어 뒤쫓던 왜경을 당황케 했다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커다란 황소가 뿔을 마주대고 싸울 때 맨손으로 달려들어 두 소를 떼어놓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지요."
아무튼 선생은 남다른 역사(力士)이기도 했다.
▶痲醉하지 않은 채 받은 手術
선생이 만주 땅 간도(間島)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떤 고개를 넘다가 두서너 괴한(怪漢)들이 쏜 총탄을 목에 맞고 쓰러졌다. 피가 심하게 흘러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환상으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하얀 옷을 입고 꽃을 든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인의 모습인데, 미소를 던지면서 그 꽃을 선생에게 주면서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고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 중국 사람의 마을을 찾아가서 우선 응급치료를 받고 곧 한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의사는 큰 상처여서 매우 아플테니 마취를 하고 수술하자고 했으나 선생이 굳이 마다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마취를 하지 않았다. 생뼈를 깎아내는 소리가 빠각빠각 날 뿐 아니라 몹시 아플텐데도 까딱 않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견뎌냈다. 의사는 "그는 인간이 아니고 활불(活佛)이다"고 감탄하며 치료비도 받지 않았다 한다.
▶네 郡守지, 내 군수냐
선생이 백담사(百潭寺)에서 참선(參禪)에 깊이 잠겨 있을 때 군수가 이곳을 찾아왔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영접을 하였으나 선생만은 까딱 않고 앉아 있을 뿐 내다보지도 않았다.
군수는 매우 괘씸하게 생각하여, 저기 혼자 앉아 있는 놈은 도대체 뭐기에 저렇게 거만한가!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선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왜 욕을 하느냐?" 고 대들었다. 군수는 더 화가 나서,뭐라고 이놈! 넌 도대체 누구냐?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선생은 "난 한용운이다."하고 대답했다.
군수는 더욱 핏대를 올려 "한용운은 군수를 모르는가! "하고 말하자, 선생은 더욱 노하여 큰 목소리로, "군수는 네 군수지, 내 군수는 아니다."라고 외쳤다.
위엄 있는 이 말은 군수로 하여금 찍 소리도 못하게 하였다.
▶僧侶娶妻論의 辯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발표했을 때 이중에 들어있는 승려취처론에 대한 시비가 벌어졌다. 이때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당면문제보다도 30년 이후를 예견한 주장이다. 앞으로 인류는 발전하고 세계는 변천하여 많은 종교가 혁신될텐데 우리의 불교가 구태의연(舊態依然)하면 그 서열에서 뒤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금제(禁制)를 할수록 승려의 파계(破戒)와 범죄는 속출하여 도리어 기강(紀綱)이 문란해질 것이 아닌가. 후세 사람들은 나의 말을 옳다고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나라로서 제대로 행세를 하려면 적어도 인구는 1억쯤은 되어야 한다. 인구가 많을수록 먹고 사는 방도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 인구가 일본보다 적은 것도 수모(受侮)의 하나이니 우리 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
▶月南 李商在와의 訣別
3·1운동을 준비할 때, 선생은 이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호응을 가장 널리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종교단체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측의 이상재 선생을 만나서 대사(大事)를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월남은
"독립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고 무저항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오."라고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선생은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본위(他力本位)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하고 주장했다.
이같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선생은 월남과 정면 충돌하였기 때문에, 월남을 지지하는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선생의 의견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월남이 가담했더라면 3て1운동에 호응하여 서명하는 인사가 더욱 많았겠지만...... 죽음을 초월한 용맹이 극히 귀하다."고 한탄했다. 서명서에 기명 날인이 잘 되면 백명 이상은 되리라던 예측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죽기 참 힘든 게로군
선생은 3·1운동의 준비 공작을 서두르는 동안 여러 인사를 만났다. 박영효(朴泳孝)て한규설(韓圭卨)て윤용구(尹用求)들을 차례로 접촉해 보았다. 그러나 대개는 회피하고 적극적인 언질을 피하였다. 서울의 소위 양반て귀족들은 모두가 개인주의자요, 국가て민족을 도외시한다고 한탄하며
"죽기 참 힌든 게로군! "하고 말했다.
▶당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선생은 최린(崔麟)의 소개로 천도교 교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의암은 조선 갑부 민영휘(閔泳徽)て백인기(白寅基), 그리고 고종(高宗)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조선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자가용 자동차까지 가지고 있었다. 선생이 3て1운동에 천도교측이 호응해 주기를 요구했더니 먼저 이상재는 승낙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손 선생께선 이상재 선생의 뜻으로만 움직입니까? 그러면 이 선생이 반대하니 선생도 그를 따르렵니까? 그러나 이미 대사(大事)가 모의되었으니 만일 호응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하고 힘의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말을 하였다.
이 말에 적이 놀란 의암은 자기를 총대표(總代表)로 내세우는 조건으로 서명을 승낙했다. 의암의 이 승낙으로 천도교의 여러 인사들은 의암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기미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김병조(金秉祚),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정춘수(鄭春洙) 네 사람을 제외한 29인이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너무 심하여 선언서를 낭독할 겨를조차 없었다. 부득이 선언서의 낭독을 생략하여 연설로 대신하고 축배를 들게 되었다.
최린의 권고로 만해 선생이 앞에 나서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 선언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
간단하고 짧은 연설이지만 선생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한 셈이었다.
▶가짜 권총
3·1운동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당대의 거부 민영휘(閔泳徽)를 찾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하므로 선생은 권총을 끄집어내었다. 민영휘는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돕겠노라고 맹세했다. 이때 선생은 힘있게 쥐었던 그 권총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 권총은 다름아닌 장난감 권총이었다. 탐정 소설에나 나오는 듯한 흥미있는 이야기지만 선생의 이런 수단은 오직 독립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취해진 비장한 행위였다.
민영휘는 맹세한 터라 "비밀리에 모든 협조를 하겠소. 그에 필요한 비용도 주겠소. 그러나 이후부터는 다시 나를 찾지 말고 내 아들 형식(衡植)과 상의하여 일을 추진시켜 주기 바라오. 부디 성공을 비오."라는 간곡한 뜻을 말했다.
민형휘는 이 일이 있은 후 선생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조선 독립을 도왔고, 선생이 별세하였을 때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 郭鍾錫과 萬海
만해 선생은 3·1운동을 계획하면서 독립선언 서명자 가운데에 유림(儒林) 출신의 인사가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는 것을 개탄했다. 서울에는 유림 지도자들이 있으나 거의 친일에 기울어져서 경남 거창(居昌)에 사는 대유학자 면우(면宇) 곽종석 선생을 찾아갔다.
만해 선생은 면우 선생에게 먼저 세계 정세를 알리고 독립운동의 참가 여부를 물으니 즉석에서 협조할 것을 쾌락하고 곧 가사(家事)를 정리한 뒤에 서울에 올라가 서명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면우 선생은 공교롭게도 독립 선언일을 몇일 앞두고 급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자기 인장을 갖고 만해 선생을 찾아
▶獄中에서의 大喝
3·1운동으로 투옥되어 있을 때, 최린은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을 차별대우할 뿐만 아니라 압박하고 있다는 말들을 하며 총독 정치를 비판했다.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선생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니, 그럼 고우(古友)는 총독이 정치를 잘한다면 독립 운동을 안 하겠다는 말이오! "라고 하였다.
▶監房의 汚物
민족 대표들은 모두 감방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그대로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평생을 감옥 속에서 살게 되지나 않을까? "
그들이 속으로 이러한 불안을 안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극형에 처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선생은 태연자약하였으나 이런 얘기를 전해들은 몇몇 인사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 모스?? 지켜보던 선생은 격분하여 감방 안에 있는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취소해 버려라! "라고 호통을 치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日本은 敗亡한다
독립 선언 서명자들이 이 법정에서 차례로 신문(訊問)을 받을 때, 선생은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왜 말이 없는가? "라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재판관을 꾸짖었다.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 "
신문이 계속 되자, 선생은 "할 말이 많으니 차라리 서면으로 하겠다."고 지필(紙筆)을 달래서 옥중에서 장문의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의 書〉를 썼다.
여기에서 선생은 조선 독립의 이유, 독립의 자신, 독립의 동기, 민족의 자유 등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총독 정치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결심공판(結審公判)이 끝나고 절차에 따라 최후 진술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생은
"우리들은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정치란 것은 덕(德)에 있고 험(險)함에 있지 않다. 옛날 위(魏)나라의 무후(武侯)가 오기(吳起)란 명장(名將)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내려오는 중에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을 자랑하다가 좌우 산천을 돌아보면서 "아름답다 산하의 견고함이여, 위국(魏國)의 보배로다"하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오기는 이 말을 듣고 "그대의 할 일은 덕에 있지,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적이 되리다"고 한 말과 같이, 너희들도 강병만을 자랑하고 수덕(修德)을 정치의 요체(要諦)로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고립하여 마침내는 패망할 것을 알려두노라."라고 말했다.
과연 선생의 말씀대로 일본은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쫓겨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예견했던 선생은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바로 그 전해에 별세하였다.
▶ 마중받는 인간이 되라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간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출감하던 날, 많은 인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독립 선언 서명을 거부한 사람이요, 또 서명을 하고도 일제의 총칼이 무서워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었다. 선생은 이들이 내미는 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얼굴둘만을 뚫어지게 보다가 그들에게 침을 탁탁 뱉았다. 그리고는,
"그대들은 남을 마중할 줄은 아는 모양인데 왜 남에게 마중을 받을 줄은 모르는 인간들인가."라고 꾸짖었다.
▶鐵窓 哲學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약 1개월 뒤,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이때의 연제는 '철창 철학'이었는데 회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일제의 임검으로 온 경관은 미와(三輪)란 일본 형사였다. 연설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해산 명령은 물론이며, 현장에서 연사를 포박해가는 때였으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선생은 임검에 거슬리지 않게 하면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약 2시간 동안이나 연설을 하였는데 맨 마지막에는 비장한 어조로
"개성 송악산(松岳山)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滿月臺)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善竹橋)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矗石樓)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목 씻는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오래 계속되었으며, 이 일본 경찰관까지 박수를 쳤다고 한다.
▶島山과 萬海
만해 선생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나라의 장래를 의논한 일이 있다.
이때 도산은 우리가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西北) 사람들이 맡아야 하며, 기호(畿湖)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만해 선생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도산 선생은 기호 사람들이 오백년 동안 정권을 잡고 일을 잘목했으니 그 죄가 크며, 서북 사람들은 오백년 동안 박대(薄待)를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다. 그후부터 만해 선생은 도산 선생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 인도에도 金允植이 있었구나
3·1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그전에 일제가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반납한 일이 있다. 이것은 독립 운동의 여운이 감도는 당시에 취해진 민족적인 반성이었다. 이 일이 있은 몇달 뒤 인도(印度)에서는 우발적인 일치랄까,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촉이라고 노래한 바 있는 시인 타고르가 영국에서 받았던 작위를 반납하였다. 이것은 간디의 무저항주의적인 반영(反英) 운동의 자극을 받은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인도에도 김윤식이 있었구나"하는 묘한 비판을 하였다.
▶神이여, 自由를 받아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저명 인사들의 강연회를 열었을 때, 선생은 마지막으로 자유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여러분, 만반진수(滿盤珍羞)를 잡수신 후에 비지찌개를 드시는 격으로 내 말을 들어 주십시오. ...... 아까 동대문 밖을 지날때 과수원을 보니 가지를 모두 가위로 잘라 넣았는데 아무리 무정물(無情物)이라도 대단히 보기 싫고 그 무엇이 그리웠습니다"하는 비유를 들어 부자유(不自由)의 뜻을 말하자, 청중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부자유를 과수원의 가지 잘린 나뭇가지에 비유한 것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자유를 빼앗긴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입회 형사는 그 뜻을 모르고 박수를 하는 청중들에게, 고작 과수원 전정(剪定) 이야기인데 박수를 하느냐고 청중의 한 사람에게 따졌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재치 있게도,
"낸들 알겠어요. 남들이 박수를 하니 나도 따라 쳤을 뿐이지요"라고 임기웅변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잠시 폭소가 터졌다고 한다. 선생은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하고 자유를 구걸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부자유할 때 신도 부자유하고 신이 부자유할 때 사람도 부자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가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고 열을 뿜었다.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 하는 이 말을 그때 참삭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自 助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의 선전 겅연회가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만원을 이룬 가운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로 유성준(兪星濬) 선생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 취지에 대하여'라는 열변에 이어 만해 선생은 '자조'라는 연제로 불은 뿜는 듯한 열변을 토했다. 말끝마다 청중의 폐부를 찌르는 선생의 독특한 웅변은 청중들을 열광케 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
선생은 웅변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말이 유창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목소리 또한 맑고 힘찼다. 그리고 선생이 강연을 하게 되면 으레 일제의 형사들이 임석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청중들을 매혹시키는지 그들조차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고 한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소련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국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슬아슬한 자문자답식 강연에, 임석했던 형사들은 차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청중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일본일까요? 남들은 모두들 일본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고 합디다" 선생의 능수능란한 강연은 이렇게 발전해 갔다. 임석 형사가 눈에 쌍심지를 켠 것은 바로 이때다.
"중지! 연설 중지! "
그러나 선생은 아랑곳없이 어느새 말끝을 다른 각도로 돌려놓고 있었다.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소련도 아니요, 미국도 아닙니다. 물론 일본도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는 말입니다."
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청중들은 박수갈채를 했다. 이쯤 되니 일제 경찰들도 더 손을 못 대고 머리만 긁을 뿐이었다.
▶昭和를 燒火하다
선생이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으로 있을 때 공문을 전국에 돌려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해 온 봉투의 뒷면에는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날이란 글자가 찍혀있었다. 이것을 본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천여장이나 되는 그 봉투들을 아궁이 속에 처넣어 태워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생은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 하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훌훌 사무실을 떠나버렸다.
▶나를 埋藏시켜라
선생은 젊은이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모든 기대를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젊은 후진들이 선생 자신보다 한걸음 앞장서 전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공부도 더 많이 하고 일도 더 많이 하여 선생 자신과 같은 존재는 오히려 빛이 나지 않을 정도로 되기를 바랐었다.
그러므로, 소심(小心)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들을 보면 심히 못마땅해했다. 더구나 술을 한잔 하여 얼근히 취하면 괄괄한 성격에 불이 붙어, 젊은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봐. 나 같은 존재는 독립 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해 봐! "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이가 있으면 선생은 오히려 축하한다고 격려하였다.
▶펜촉이 부러지다
1927년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장(社會葬) 때였다. 선생은 장의위원 명부에 선생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음을 알고 수표동(水標洞)에 있는 장의위원회를 찾아가 자기의 이름 석자를 펜으로 박박 그어 지워 버렸다. 펜에 얼마나 힘을 주어 그었는지 펜촉이 부러지고 종이가 찢어졌다.
이것은 3·1운동 당시 월남이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어디 한번 더 해봐
어느날 재동(齋洞)에 있는 이백강(李白岡) 선생 댁에서 조촐한 술좌석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는 김적음(金寂音) 스님을 비롯하여 몇몇 가까운 분이 동석하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도니 만해 선생도 모처럼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잔이 거듭 오고가던 중 김적음 스님이
"여러분 감빠이(乾盃) 합시다." 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노발하여
"적음, 그 말이 무슨 말인가? 무엇을 하자고? 어디 한번 더 해봐."
하고 언성을 높였다. 적음 스님은 무색했다.
▶ 維 新
선생은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유사지추(有事之秋:독립의 뜻)를 당하면 조선의 중부터 제도하고 불교 유신을 하여 나라를 빛내겠다."
▶北向집 尋牛莊
줄곧 빈한한 생활을 해오던 선생은 만년에 이르러 비로소 성북동 막바지에 집 한칸을 갖게 되었다.
마음놓고 기거할 집 한칸 없는 선생의 생활을 보다 못해 방응모(方應謨), 박광(朴洸), 홍순필(洪淳泌), 김병호(金柄滸), 벽산(碧山) 스님, 윤상태(尹相泰) 등을 비롯한 몇몇 유지들이 마련해 준 집이었다.
그런데 이 집을 지을 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집터를 잡자고 했으나 선생은
"그건 안 되지. 남향하면 바로 돌집(조선총독부)을 바라보는 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좀 덜 들고 여름에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어."
하며 동북향집을 짓게 했다.
보기 싫은 총독부 청사를 자나 깨나 향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선생에게는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동북향으로 주춧돌을 놓고 집을 세웠는데, 이 집이 바로 선생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몸 담으셨던 심우장이었다.
선생이 손수 지은 이 택호(宅號)는 소를 찾는다는 뜻인데 소는 마음에 비유한 것이므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다.
선생은 별세하는 날까지 이 집에서 사상을 심화시키고 선(扇)을 깨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함께 닦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 이 심우장의 맞은편에 궁궐 같은 일본의 대사관저가 세워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야릇한 일이다.
▶ 放 聲 大 哭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왜적에 검거되어 그후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애국지사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별세하고 말았다.
만해 선생은 자진하여 유해를 인수해서 심우장의 자기 방에다 모셔다 놓고 오일장을 지냈다. 장례 때에는 사상가를 중심으로 한 많은 명사가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왔으나 꼭 오리라고 믿었던 모모 인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선생은 "그 삶들이 사람 볼 줄 아는가! "라고 말했다.
그런데 홍제동 화장터는 일본인 경영이므로 미아리의 조그만 한국인 경영의 화장터에서 장례를 치렀다. 영결식에서 선생은 방성대곡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 민족 지도자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위인인 일송 선생의 영결은 민족의 대불행이라, 2천2백만 겨레를 잃는 것처럼 애석한 일이다. 국내 해외를 통하여 이런 인물이 없다. 유사지추(有事之秋:독립의 뜻)를 당하여 나라를 수습할 인물이 다시 없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니 비통하다."
여기서 말하는 '유사지추'란 말할 것도 없이 독립을 말하는 것이며, 선생은 독립 후 건국의 대업을 생각하고 더욱 일송의 죽음을 애통해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선생이 우는 것을 그때 꼭 한번 보았다고 한다.
▶곰과 獅子
1937년 2월 26일 총독부 회의실에서 총독부에서 주관한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렸다. 이것은 조선 불교를 친일화시키려는 목적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여기에 참석한 마곡사(麻谷寺) 주지 송만공(宋滿空) 선사는 명웅변(名雄辯)을 벌임으로써 이 회의를 주재하는 총독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과거에는 시골 승려들이 서울엔 들어서지도 못했으며, 만일 몰래 들어왔다가 들키면 볼기를 맞았다. 그때는 이같이 규율이 엄하였는데 이제는 총독실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니 나는 도리어 볼기 맞던 그 시절이 그립다. 우리들이 여기에 오게 된 것은 사내정의(寺內正毅:초대총독)가 이른바 사찰령(寺刹令)을 내어 승려의 규율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전(經典)이 가르치는 것과 같이 사내정의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갔느니라. 따라서 남(南) 총독 역시 무간지옥에 갈 것이다."
그러고는 "총독은 부디 우리 불교만은 간섭하지 말고 우리에게 맡겨 달라"고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당시 위세를 떨치던 총독을 바로 앞에 놓고, 송만공 선사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책상을 치기까지 하면서 총독은 무간지옥에 갈 것이라고 호통을 치는 장면은 참으로 얼마나 통쾌하고 장엄했을까? 물론 장내는 초긴장이 되었으며, 이제 총독으로부터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만공 선사를 미친 늙은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때 총독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만공 선사를 체포하려고 하는 헌병들을 만류하였다고 한다.
회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수선하게 끝났으나 예정했던 대로 총독은 참석자 전원을 총독 관저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만공 선사는 총독 관저로 가지 않고 선학원(禪學院)으로 만해 선생을 만나러 갔다.
총독을 호되게 꾸짖은 이 통쾌한 이야기는 금방 장안에 퍼졌다. 이미 이 사실을 들은 만해 선생은 만공 선사가 찾아온 것이 더욱 반가웠다. 이윽고 곡차(穀茶)를 놓고 마주앉아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만해 선생은 말했다.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이 가지신 주장(주杖)으로 한대 갈길 것이지."
만공 선사는 이 말을 받아넘겼다.
"곰은 막대기 싸움을 하지만 사자는 호령만 하는 법이지."
그러고 보니, 만공 선사는 사자가 되고 만해 선생은 곰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나 만해 선생은 즉각 응대하였다.
"새끼 사자는 호령을 하지만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이는 법이지."
즉 만공 선사는 새끼 사자가 되고 만해 선생은 큰 사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당대의 고승(高僧)인 이 두 분이 주고 받은 격조 높은 이 대화는 길이 남을 만한 역사적인 일화(逸話)일 것이다.
훗날 만해 선생이 돌아가신 후 만공 선사는 이제 서울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의 죽음으로 獨立이 된다면
선생은 어쩌다 술을 들어 거나하게 취하면 흥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잘 했다.
"만일 내가 단두대(斷頭臺)에 나감으로 해서 나라가 독립된다면 추호도 주저하지 않겠다.
▶親友를 아끼는 마음
선생은 친구인 화가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가 친일요녀(親日妖女) 배정자(裵貞子)의 집에 기숙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 집을 찾아갔다.
배정자가 나와 반가이 맞아들였으나 선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따라 들어가 일주가 정말 기숙하고 있는가를 살폈다. 마침 그가 있었으나 선생은 일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배정자가 술상을 차려 들고 들어와서 술을 따라서 선생에게 권하였다. 선생은 그때서야 낯빛을 고치고 일주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술상을 번쩍 들어 일주를 향하여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태연히,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집을 나왔다.
그것인 친구인 일주를 책망하는 동시에, 평소에 아끼던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그 후 선생이 별세하였을 때, 일주는 통곡하며 끝까지 호상(護喪)하여 누구보다도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强直과 排日
어느 해, 삼남(三南) 지방에 심한 수해(水害)가 났다. 학생들은 수재민을 돕기 위하여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그들이 선생을 방문하니,
"제군들, 정말 훌륭한 일을 하는군! 이런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 민족이 함께 일어나서 서로 도와야지." 하며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서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런데 모은 돈은 어떻게 쓰나? "
선생은 돈이 어떻게 유용하게 쓰이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일부는 국방비로 헌납하고 그 나머지는 수재민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선생의 태도는 바뀌었다.
"무어! 왜놈의 국방비로 헌납해 안 되지, 내가 왜놈들의 국방비를 보태 주다니......"
하며 노발대발한 선생은 그들에게 주었던 돈을 도로 빼앗고는 집 밖으로 쫓아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총독부의 어용단체인 31본산 주지회에게 선생에게 강연을 청하여 왔다. 선생은 거절했으나 얼굴만이라도 비춰 달라고 하며 하도 간청하므로 마지못해 나갔다.
단상(壇上)에 오른 선생은 묵묵히 청중을 둘러보고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 하였으나 청중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선생은
"그러면 내가 자문자답을 할 수 밖엔 없군. 제일 더러운 것을 똥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무엇일까요? " 라고 말했으나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러면 내가 또 말하지요. 나의 경험으로는 송장 썩는 것이 똥보다 더 더럽더군요. 왜 그러냐 하면 똥 옆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요. 송장 썩는 옆에서는 역하여 차마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청중을 훑어보고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하고 한번 더 물었다.
그러면서 선생의 표정은 돌변하였다. 뇌성벽력같이 소리를 치며,
"그건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 하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庶民子來'라니
어느 날, 선생은 홍릉 청량사(淸凉寺)에서 베푸는 어떤 지기(知己)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였다. 많은 저명인사와 33인 중의 여러분들이 손님 가운데 끼어 있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오고 가다가
"부여 신궁(扶餘神宮) 낙성식이 참 굉장하더군. 과연 서민자래(庶民子來)야."
하고 누군가가 한 마디 하였다.
서민자래란, 어진 임금이 있어 집을 짓는데 아들이 아버지 일을 보러 오듯 민중이 스스로 역사(役事)를 하러 와서, 하루에 낙성하였다는 《시경 詩經》에 나오는 고사이다.
신궁 낙성식장에 사람이 모인 광경을 비유하여 일제를 찬양하는 한마디였다.
옆자리에서 듣고 있던 선생은 옆사람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중추원참의(中樞阮參議) 정병조(鄭丙朝)인데 인사 소개를 하겠다고 하니 선생은 그만두라고 하고는
"정병조야, 이리 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그도 노하여 나섰다.
"누구냐? "
"나 한용운이다. 너 이놈, 양반의 자식으로서 글깨나 배웠다는 놈이 '서민자래'라고 함부로 혀를 놀리느냐. 이놈 개만도 못한 놈! "
하고는 앞뒤를 가릴 것도 없이 자리에 있는 재떨이를 냉큼 들어 그의 면상을 향하여 냅다 던졌다. 바로 맞아 그의 면상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놈 어서 가서 너의 애비 남차랑(南次郞)에게 고발해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고는 즉시 청량사를 나와 버렸다.
당시 일제는 충남 부여를 하나의 성지(聖地)로 정하여 이른바 부여 신궁을 짓고 있었다. 일본은 백제의 문화가 저의 나라에 건너와서 여러 모로 영향을 끼쳤던 사실을 역이용하여 한민족 말살정책의 한 방편으로 삼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라는 이론을 위장(僞裝)하고 있었다. 청량사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인 울분의 표현이었다.
▶總督에게 慈悲를 베풀라
31본산 주지회의 때였다. 선생은 , 연설을 좀 해달라는 요청이 몇번이나 와서 마지못해 나가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였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해마다 새해가 되면 총독 앞에 나가 새배를 하십니다. 조선을 통치하고 있는 총독의 얼굴을 직접 우러러본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된 일이겠지요.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총독을 찾아가서 얘기를 하십니다."
선생은 잠깐 말을 쉬고 좌중을 훑어본 다음,
"그런데 총독은 매우 바쁜 사람입니다. 조선 통치에 관한 온갖 결재를 하다 보면 똥 눌 시간도 없는 게 당연지사일 겝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스님이 아닙니까. 남의 생각도 해줘야지요. 조선 총독을 좀 편안케 해주시려거든 아예 만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하였다. 이것은 친일 요소가 다분히 있었던 31본산 주지들을 나무란 얘기다.
실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六堂은 죽었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지은 것은 다 아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는 그 뒤 변절하여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라는 관직을 받고 있었다. 선생은 이것이 못 마땅하여 마음으로 이미 절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육당이 길에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그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빨리 걸어갔으나 육당이 따라와 앞을 막아서며 먼저 인사를 청했다.
"만해 선생, 오래간만입니다." 그러자 선생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 누구시오? "
"나 육당 아닙니까? "
선생은 또 한번 물었다.
“육당이 누구시오? "
"최남선입니다. 잊으셨십니까? "
그러자 선생은 외면하면서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葬送)했소." 라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난 그런 거 모르오
선생이 불교사(佛敎社)에 재직하고 있던 어느날, 식산은행(殖産銀行)에서 선생에게 도장을 갖고 오라는 공한(公翰)이 왔다.
그러나, 선생은 갈 리가 없었다. 그후 식산은행 측에서 서류뭉치를 들고 불교사까지 찾아와서 도장을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왜 도장을 찍으라는 거요? " 선생의 물음은 간단하였다.
"선생님, 성북동에 있는 산림(山林) 20여만 평을 무산으로 선생님께 드리려는 겁니다. 도장만 찍으시면 선생님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선생은 홱 돌아 앉으며
"난 그런 거 모르오!." 하고 거절하였다.
▶창자까지 陷落되겠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워낙 넓은 땅이라 점령한 지역이란 고작 선(線)과 점(點)에 지나지 않았지만 잇따라 한구 함락(漢口陷落), 남경 함락, 상해 함락 등의 보도가 빈번해졌다. 일본의 이런 전황(戰況)에 따라서 우리나라 애국지사들도 사상이 변하여 일본식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는가 하면 일제에 아부하고 일본을 위한 강연에 자진하여 나서는 사람이 자꾸 늘어났다.
이때 선생은 민족정신을 수습할 수 없음을 통탄하며,
"왜병(倭兵)의 함락 선전 바람에 창자까지도 함락당하겠군! " 하는 말을 되뇌었다.
▶ 감히 개자식이라고 하지 말라
일본이 중국 침략으로 제국주의적 식민 활동에 박차를 가할 무렵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아부하여 가짜 일본인 되기에 광분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하루는 지기(知己) 한 분이 선생을 방문하여 대단히 격분한 어조로
"이런 변이 있소! 최린(崔麟:佳山麟)て윤치호(尹致昊:伊東致昊)て이광수(李光洙:香山光郞)て주○○(松村*一)て이○○(岩村正雄) 등이 창씨개명들을 했습니다. 이 개자식들 때문에 민족에 악영향이 클 것이니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한단 말이요! "
이 말을 듣고 난 선생은 크게 실소하고는,
"당신이 그 자들을 과신(過信)하는 듯하오. 그러나 실언(失言)하였오. 만일 개가 이 자리에 있어 능히 말을 한다면 당신에게 크게 항쟁할 것이오.'나는 주인을 알고 충성하는 동물인데 어찌 주인을 모르고 저버리는 인간들에 비하느냐'고 말이요. 그러니, 개보다 못한 자식을 개자식이라고 하면 도리어 개를 모욕하는 것이 되오."
라고 말하였다. 그 지기도 선생의 말이 옳음을 긍정하였다.
▶乞食은 無能이다
어느날 선생은 집 앞에서 탁발(托鉢)하는 중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탁발은 비록 보살만행(菩薩萬行) 중의 하나이나, 만행(萬行)에서 9천 9백 9십 9행을 버리고 하필이면 왜 하나인 탁발을 택했는가? 구걸은 자기의 무능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의 천대를 받을 뿐이다."
이 말을 들은 중은 부처님의 행적을 들어, 선생에게 불만을 펴시했다.
그러자 선생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다른 종교인의 멸시를 면치 못할 뿐이니 불교인을 위하여서라도 앞으로 구걸은 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하고 충고했다.
평범한 한 마디 말씀 속에서도 오랜 동안 도습되어 온 탁발 제도에 대한 혁신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더러운 돈
3·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이 그후 변절하여 창씨개명을 하고, 어느날 심우장으로 선생을 찾아왔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 안에서 본 선생은 슬그머니 부인을 불러 일렀다.
"나가고 없다고 그러오. 꼬락서니조차 보기 싫으니......" 하고 옆방으로 가버렸다.
최린은 마침 선생의 딸 영숙이를 보자, 당시로는 거액인 백원 지폐 한장을 이 어린이의 손에 쥐어주고는 돌아갔다.
선생은 이 사실을 알고는 몹시 회를 내며 부인과 영숙이를 꾸짖었다. 그리고 영숙이가 받았던 돈을 가지고 쏜살같이 명륜동 최린의 집을 찾아가서 그 돈을 문 틈으로 던지고 돌아왔다.
▶ 일본 말엔 따귀로
어느날 친구 홍재호(洪在浩)와 더불어 한가히 잡담을 나누던 중 그가 무심코 일본 말을 한 마디하였다. 선생은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나는 그런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오." 하고 말했다. 홍옹은
"선생, 내가 그만 실수를 했구려. 그러나 때가 때인 만큼 안 쓸 수도 없지 않습니까? "
하고 변명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그의 뺨을 한 대 철썩 때리고는 쫓아버렸다.
▶ 그건 글자가 아니다
선생은 외딸 영숙(英淑)에게 일찍부터 한문을 가르쳤다. 영숙이 역시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뛰어났다. 다섯 살 때에 이미 《소학 小學》을 읽었던 것이다.
하루는 영숙이가 신문에 간간히 섞인 일본 글자를 보고,
"아버지, 이건 무엇이어요? " 하고 물었다.
"음, 그건 몰라도 되는 거야. 그건 글자가 아니야."
비록 어린 딸인 영숙에게 하신 말씀이었지만 이 한마디 말에서도 일생을 독립 운동에 바친 선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威 武 不 能 屈
'전 조선인 중 8,9할이 창씨, 경북 안동군(安東郡)이 가장 모범! '
이것은 어느날,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실렸던 기사였다.
안동군이 가장 일본인 되기에 급급했다는 이 기사를 본 선생은
"안동은 유림(儒林)의 양반들이 사는 고장인데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학문을 닦았기에 그럴까. 유학(儒學)이 결코 의지박약한 것이 아닌데 글을 옳게 배우지 못한 까닭으로 그런 꼴이 되었으니 그만 못한 우민(愚民)이야 말해서 뭣할까? 위무불능굴(威無不能屈)이란 《맹자 孟子》의 구절을 알련마는 모르는 것과 일반이니 참으로 한심하다."
하고 탄식했다.
▶기자의 카메라를 내던지다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가 찾아와 선생에게 학병 출정을 독려(督勵)하는 글을 부탁하였다.
"그런 것 못 쓰겠네, 아니 안 쓰겠네."
"그럼 말씀만 해주십시오. 제가 받아 쓰겠습니다."
"안돼 그것도 안돼! " 선생의 음성은 다소 거칠어졌다.
"정 그러시다면 사인이라도 해주십시오. 원고는 신문사에서 적당히 쓰겠습니다."
다그친 독촉과 함께 기자는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까지 찍어다 내려는 심산이었다. 순간, 노한 선생은 기자 손에 들려 있던 카메라를 빼앗아 내던져 버렸다.
▶春園과 萬海
춘원 이광수는 불교 소설을 쓰거나 소설에 불교에 관한 것을 인용할 때에는 곧잘 선생을 찾곤했다. 그리하여 그 교리(敎理)의 옳고 그름을 물었다.
이같이 선생은 춘원과 서로 문학을 논하며 정신적인 교류를 해왔다.
춘원은 창씨개명을 한 뒤의 어느날 심우장으로 선생을 방문했다. 집 뜰에 들어서는 춘원을 본 선생은 춘원이 이미 창씨개명한 것을 알고 있던 바라, 찾아온 인사도 하기 전에 그를 내다보고 노발대발하여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춘원은 청천벽력 같은 이 말에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변명할 여지도 없어 무색한 낯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日帝는 敗亡한다
"일제의 야망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장차 중국 대륙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칠 것이다. 그러나 필경 연합군에 항복하고 말 것이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선생은 주위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설파하였다.
과연 이 예측대로 일제는 몇 년 뒤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고 중국 대륙으로 침략해 들어갔으나 결국은 연합군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다.
역사를 통찰하는 혜안(慧眼)이 아니고서는 감히 그때 이런 예측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知識人의 知는 痴다
언젠가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였다.
"불법(佛法)은 가장 존귀한 인생의 최고 목적이라, 전생(前生)에 복을 지었어야 믿게 되는 것이다. 이는 물질이 아닌 귀중한 보물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가질 수는 없다. 인류사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대성(大聖) 부처님도 불능도무연중생(不能度無緣衆生)이라고 불능을 말씀한 것과 같이 인연(因緣)이 없는 사람에게는 신앙심을 주입시키기 어려우며 지식인으로서 불법을 몰이해하고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것은 큰 불행이다. 지식인 중에서도 박사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신앙을 주입시키기가 더욱 어려우니 지(知)가 도리어 치(痴)다. 치(痴)자를 파자(破子)하면 '*' 밑에 '知'를 더한 것이 되니 아는 것이 병(病)이다."
▶고깔(法帽)를 쓰지 말라
선생은 일본 법관(法官) 밑에서 변호사 노릇을 하는 것까지도 불쾌하게 여겼다. 낭산(朗山) 김준연(金俊淵)이 변호사 자격이 있음에도 그것을 단념한 것을 보고 높이 편가했다.
"남들은 왜놈 고깔(法帽)를 쓰고 그 밑에서 돈을 벌지만 낭산은 돈이 없으면서도 그 따위 고깔은 쓰지 않으니 신통하군! "
▶쌓아둔 것을 보았겠지
선생은 웅변이면서도 좀처럼 농담을 하거나 익살을 부리지 않고 침묵을 지키었다. 그러나 그 방(棒)은 유명하며 누구보다도 무게 있었다.
어느날 장사동(長沙洞)에 사는 설태희(薛泰熙) 옹 댁에 명사들이 모였었다.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선생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보았다고 호언장담하자, 옆에 있던 선생은
"고하가 보았다는 말은 쌓아둔 것을 보았다는 말이겠지. 라고 넌지시 말했다.
이때 한자리에 있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폭소를 터뜨렸다.
▶산 송장을 죽여서 무엇 해!
1940년 무렵 총독부에서는 최악의 수탈(收奪) 정책을 강행할 뿐 아니라 한글 폐지, 창씨 개명, 징병 등을 강행하여 우리 민족을 일본화시키려고 하였다.
이 무렵 공주 마곡사(麻谷寺) 주지 송만공 선사는 31본산 주지 회의의 기회를 틈타 총독을 자살(刺殺)할 계획으로 몰래 칼을 품고 다녔다.
하루는 만공이 심우장으로 선생을 찾아와 칼을 내보이며 총독을 기어코 찔러 죽이고 말겠다고 호언하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선생은 만류했다.
"죽어 가는 산 송장을 죽여서 무엇 합니까. 더러운 업보(業報)만 쌓게 되니 그만 두시오." 하고 칼을 빼앗았다. 만공이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죽어 가는 산 송장이라니? "
"이제 그놈들도 끝장이야. 얼마 안 가서 연합군에 항복하고 말 거요. 그때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형을 받을 것이니 이제 죽을 날 받아 놓은 것과 매 한가지야."
선생의 확신에 찬 충고를 듣고 만공 선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뒤 만공 선사는 서산(瑞山) 간월도(看月島)에서 조선이 독립하게 해달라는 천일기도(千日祈禱)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감동적인 기적이 일어났다. 만공이 천일기도를 마치고 나온 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이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알고 당시의 고사(高士)였던 산강재(山康齋) 변영만(卞榮晩) 선생이 만공 선사에게 달려가 스스로 제자계(弟子戒)를 받고 삼청(三淸)이라는 법호를 얻었다 한다.
▶會心의 微笑
일제 말기에 저들은 더욱 가혹하게 한국인을 들볶고 온갖 탄압과 착취를 감행하였다. 최후까지 희망을 가져보려고 하던 인사듣 사이에도 이제는 절망의 한숨 소리가 더 높아 갔으며 더러는 선생을 찾아가 탄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무리강포(無理强暴)는 자체미약(自體微弱)의 상징이니 필망(必亡)이 도래(到來)한다." 라고 갈파하고
"부족우야(不足憂也:족히 우려할 바가 못 된다)." 라고 주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萬海와 高速輪轉機
조선 총독부의 악정이 거듭되고 있던 왜정 말기인 1940년 8월 10일 총독 남차랑(南次郞)은 동아, 조선일보에 대하여 폐간 명령을 내렸다.
동아일보는 당시 국내 제일 가는 고속윤전기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이것을 다시 일본에 팔아 버린다는 말이 떠돌았다.
이 소문을 듣고 선생은 계동에 사는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을 찾아갔다.
"인촌, 윤전기를 처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팔려고 하지요. 우리 마음대로 실컷 사용할 시기가 불원간 찾아올텐데 어찌 그리 서두시오. 우리가 아주 절망의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기념품으로 창고에 두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소. 그렇게 절망을 한다면 자살을 해야 하지 않겠소! 기계를 팔아야 할 만큼 그렇게 돈이 없는가요? "
하고 강경하게 기계 파는 것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인촌 선생은, "나는 몇 해 전부터 신문사 일체를 고하(古下 宋鎭禹)에게 일임하고 간섭 않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불과 몇년 만에 8·15 해방이 되니 동아일보에서는 윤전기가 없어 난처하였다.
▶愛國自決일지라도......
일제 말기인 1941년 총독부는 우리나라 사람의 호적까지를 고치기 위한 창씨 개명을 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9할이 창씨 개명을 끝냈다는 보도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발표된 것을 보고 격분 끝에 자결을 한 사람이 있었다. 이 분이 바로 애국지사요 국문학자인 신명균(申明均)이었다. 그때 그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이 한심한 창씨의 보도를 보고 격분하여 약을 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 애국자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분의 직절(直節)은 찬양하지만 자살이란 종교상의 죄가 될 뿐 아니라 자기의 격분이나 비관이나 혹은 공포를 참지 못하는 심적 변화의 발로이니 높이 평가할 것은 못 된다. 나라를 잃고 자살한 것이 충(忠)이라 하나 이것은 비겁 자책(自責) 혹은 실망의 극치이다. 예컨대 파산했다고 부모가 자살한다면 그 유아(遺兒)들이 비참해지는 것과 같이 후인(後人)에게 불행을 주는 것이다.
▶나 혼자라도 남겠다
일제는 연합군의 서울 공습에 대처한답시고 소위 소개(疏開)라는 난동을 피웠다. 그리고 일제 당국의 책동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선생은,
"서울을 전부 소개한대도 나는 혼자 남겠다. 연합군의 공습은 우리를 돕자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피난을 가더라도 우리는 남아서 오히려 환영을 해야 돼. 또 설사 폭격이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텅 빈 서울에 남아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해."
라고 하며 끝까지 버티었다.
▶丹齋와 萬海
1936년 선생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묘비 건립을 계획하여 비문은 만해 선생이 짓기로 하고 글씨는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애국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으므로 비문은 중지하고 다만 '단재신채호지묘(丹齋申采浩之墓)라고만 새겨진 묘비를 선생의 친척들을 통하여 세우게 했다.
그리고 1942년에는 단재의 유고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와 《상고문화사 上古文化史》 등의 간행을 위하여 만해 선생은 신백우(申伯雨)て최범술(崔凡述)て박광(朴洸)들과 함께 사업에 착수했다.
만해 선생과 함께 단재 선생의 문헌을 수집 간행하려던 최범술은 경남 경찰부 유치장에서 구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선생은 최범술을 면회하기 위하여 생화(生花) 한 다발을 가지고 경찰부를 찾아 면회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자, 갖고 갔던 꽃다발을 그들 앞에 뿌려.버리고 말았다.
최범술이 출감한 뒤 선생에게 자시가 갇혀있을 때 왜 꽃다발을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입감(入監)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대답했다. 선생의 이 말은 진지하면서도 격조가 높은 사랑의 표현이었다.
▶왜놈 旗는 우리집엔 없다
1943년, 선생이 입적(入寂)하던 바로 전해였다.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인 4월 29일에 동회 서기가 심우장을 찾아왔다.
"선생님, 저, 오늘 조선 신궁에 좀 나가셔야겠습니다."
"난 못 가겠소."
"어째서 못 가십니까? "
"좌우간 못 가겠소."
"좌우간 못 가신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
"그런 법이라니, 그럼 왜놈은 법이 있어 남의 나라 먹었느냐! " 동회 서기는 찔끔했다.
"그럼 기(旗)라도 다시지요."
"그것도 못 하겠소. 왜놈 기는 우리 집에 있지도 않고......"
동회 서기는 하는 수 없이 물러갔다.
▶호적 없는 일생
일본이 통치하는 동안 그들은 처음엔 민적(民籍), 그 후엔 호적법(戶籍法)을 실시했다.
선생은 처음부터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하며, 시집 《님의 침묵》에도 '나는 민적이 없어요'라는 구절이 있듯이 평생을 호적 없이 지냈다. 그래서 선생이 받는 곤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모든 배급 제도(쌀 고무신 등)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보다도 큰 문제는 선생이 귀여워하던 외딸 영숙이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점이었다. 아버지가 호적이 없으니 자식 또한 호적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본놈의 백성이 되기는 죽어도 싫다. 왜놈의 학교에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하고는 집에서 손수 어린 딸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저울추'라는 별명
선생은 언제나 냉방에서 지냈다.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산단 말인가."하는 생각에서 였다.
차디 찬 냉돌 위에서 꼼짝않고 앉아 생각에 잠길 때면 선생의 자세는 한점 흩어짐이 없었다. 어찌나 꼿꼿했던지 선생은 어느새 '저울추'라는 별명이 생겼다.
차디 찬 냉돌에 앉아서 혁명과 선(禪)의 세계를 끝없이 더듬는 저울추였다.
▶ 선생의 취미
선생은 늘 참선(參禪)을 하고 독립 운동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몇 가지 취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금붕어 기르기를 무척 좋아했다. 강석주 스님의 말에 의하면 선생이 선학원에 있을 때 금붕어를 키우며 아침 저녁으로 어항에 손수 물을 갈아주곤 했다고 한다.
또 선생은 화초 가꾸기를 매우 즐겼다. 심우장 뜰에는 선생이 가꾼 화초들로 가득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어 있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화초는 매화 난초 이외에 개나리 진달래 코스모스 백일홍 국화 등이었다고 한다.
또 선생은 서화에도 취미가 있었다. 사실 선생 자신의 붓글씨는 탈속한 일가를 이루고 있거니와 오세창 김진우 고희동 안종원 김은호 등의 서화가들과 매우 가까이 지냈으며 또 선생의 집에는 오세차으이 현판 글씨와 김은호의 몇 점의 그림 등이 걸려 있었다. 선생이 한국 서화에 관한 글을 쓴 것도 이러한 취미와 관련된 것 같다.
어느날 심우장에서 참선을 하고 있던 선생을 한 기자가 찾아 갔을 때, 선생은 이렇게 자신의 생활을 털어놓았다.
"내게는 고적(孤寂)이라든지 침울(沈鬱)이라는 것이 통 없지요. 한 달 잡고 내내 조용히 앉아 있어도 심심치가 않아요. 무애자재(無碍自在)하는 이 생활에서 무엇을 탓하며 무슨 불안을 느끼겠소......"
선생은 이런 달관(達觀)의 경지에서 금붕어를 기르고 꽃을 사랑하며 서화를 즐겼다.
▶물불, 더럽게 되었군
제2차 세계대전이 심하던 1943년 무렵, 일제는 학병(學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전문て대학생을 군대로 끌어갔다. 이때 많은 저명인사로 하여금 학생 출정 권유를 위한 강연들을 시켰다. 당시 조선어학회의 물불 이극로(李克魯)도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학병 권유 연설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회합 장소에서 선생은 물불을 만났을 때, "물불, 더럽게 되었군." 하고 말했다. 물불은 그 뜻을 알아채고 조선어학회를 살리기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라고 변명을 했다. 그러나 선생은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으오. 그것이 오래 갈 것이냐 말이요. 죽으려면 고이 죽어야 되지 않겠소! "하고 충고했다. 물불은 아무 말없이 머리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비유가 풍부한 연설
선생은 독립 운동을 하는 데는 물론이며 신앙 생활에서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실천이라고 부르짖었다.
어떤 강연회에서는 "만일 좋은 이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씨앗이 있으면서도 심지 않고 봉지에 넣어 매달아 두는 것과 같다."고 실천의 중요성을 깨우쳤다.
일반적인 이야기라도 남달리 풍부한 비유를 자유자재로 쓰기 때문에 청중들에게 감명을 주고 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선생을 스승으로서 떠받드는 것은 그의 말이 진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족의 큰 이념을 실천한 행위의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비에서도 타지 않은 치아
선생이 돌아가시자, 유해는 불교의 관례대로 화장하였다. 당시 홍제동 화장터는 일본인들이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김동삼 선생 장례를 지낸 바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아리의 조그마한 화장터에서 조촐하게 엄수되었다.
이때 모두 소골(燒骨)이 되었으나 오직 치아만이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가에서는 치아의 출현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있으므로 모두 선생의 깊은 법력(法力)에 감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을 뜻하는 무슨 길조(吉兆)가 오리라는 희망에 부푼 가슴을 떨면서 깊이깊이 합장하였다. 이 치아는 항아리에 담겨져 유골과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엄격하고도 따뜻한 마음
선생은 늘 말이 없어 주위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인상을 주었나보다. 더구나 절개가 곧고 굳어서 조그만 잘못이나 불의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반면에 따뜻한 면이 너무나도 많았다. 선생 댁에서 제자들이 밤 늦게까지 말씀을 듣다가 방 한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어 새벽에 깨어 보면, 어느 틈에 옮겨졌는지 따뜻한 구들목에 눕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불이 잘 덮여 있었으며, 선생은 윗목에서 꼼짝 않고 앉아 참선을 가고 있는 것이 일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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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인사가 말하는 만해
일찌기 선생을 알고 있던 사회인사들은 선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남겨 놓았다. 그들이 얼마만큼 선생을 흠모하고 존경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겠다. 산강재(山康齋) 변영만(卞榮晩)은 "용운일신(龍雲一身)이 도시담야(都是膽也)"라고 평했다. 《불교유신론》의 문장을 보고,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은 평하기를 "문체로 보나 사상으로 보나 근세에 짝을 찾기 어려운 글(近世 罕見其주)"이라고 했다.
'조선 불고의 대표적 인물'에 대한 투표가 월간지 《불교》에서 실시된 적이 있었다. 피투표자는 조선인 승려에 한했으며 투표자는 아무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선생이 422표로 으뜸이고, 차점이 18표로 방한암(方漢岩)스님이었다. 나머지는 10표て3표에 불과했다. 이를 보아도 당시 선생이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송만공 선사는 늘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귀한데 꼭 하나와 반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하나는 바로 선생을 가르키는 것이었지만 나머지 반은 누구를 가르키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청년들은 만해 선생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여 한때 유명한 얘기가 되었다.
홍벽초(洪碧初)는 "칠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명 아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일본의 거물급 낭인(浪人) 두산만(頭山滿)은 만해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옹에게 "조선의 큰 위인이 갔다. 다시는 이런 인물이 없을 것이고, 지금 우리 일본에도 없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첫댓글 뉴라이트정부(친일파후손정치세력집단 이명박새누리당)을 처단하는데 하늘나라에서 굽어 살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