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중옥(仲玉)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
이글로 연암이 중옥(仲玉)에게 보내는 글은 끝이다. 보름날 만나 회포를 푸는 사이인 중옥이 누구인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훈계조 말을 다 들어주고 조언도 구하는 연암을 한껏 보듬은 양 하는 벗, 느낌 상 연암보다는 나이도 위이고 수더분한 성격이었겠다 싶다. 내 주변에도 보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 정도 되지 않나싶은 사람이 있다. 나의 바른 소리나 불만도 잘 들어주니 그만 만나면 나는 훈계조에 세상 한탄을 그를 방패삼아 늘어놓는다. 바꿔 생각하면 얼마나 지겹고 따분한 일인가.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다. 중옥이 바로 연암에게는 그런 친구가 아닌가 싶다. 바른 소리를 해대기 위해 혹여 연암은 이 말을 달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말세야! 말세!. 어디 글 첫 부분을 살펴보자.
<말세에 처하여 사람을 사귈 때는 마땅히 상대방의 말이 간략하고 기운이 차분하며 성품이 소박하고 뜻이 검약한가를 살펴보아야 하며, 절대로 마음속에 계교(計巧)를 지닌 사람은 사귀어서는 안 되고 뜻이 허황된 사람은 사귀어서는 아니 되지요.>
분명 말세라고 했다. 요즘도 말세라고 하는 말이 흔한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말세인 세상은 변함이 없다. 고전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나오는 말이 젊은 것들이 버릇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이집트 피라미드에 적혀 있는 이래 이제는 어디서고 나오는 상식어가 되고 말았다.
말세의 주원인으로 버릇없는 아이들이 큰 몫을 하니 앞으로도 버릇없는 아이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말세란 말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연암이 말하는 말세, 이는 영조대왕의 치정이 엉망이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만약 그것이라면 바로 잡혀가 역모 죄로 당장 추궁을 받을 터 여기서는 닳고 단 세상이라고 말하는 게 더 실질적일 것 같다. 자기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약아빠진 세상, 사람을 사귀는 어려움, 신중해야 함이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친구를 사귀는 데는 의협심이 필요하다고 까지 그 시대 사람들은 말했다.
공자는 같이 걷는 사람이 세 사람 이상이면 반드시 그 가운데 가르침을 받을 만한 사람이 한 명쯤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 첫째는 부모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친구'다. 부모는 선택할 수 없지만 좋은 친구는 그래서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가까이 대하니 자연 지대한 영향을 입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를 붙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조선 왕실의 교육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창 뛰어 놀아야 할 나이인 어린 원자가 45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 소학이나 대학 같은 어려운 책을 들여다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왕실은 다른 대책을 마련하였는데 원자 또래의 아이들로 '배동'을 선발하여 원자와 함께 지내면서 공부하게 했다. 여럿 모이면 합치가 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다른 의견들도 속출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모여서 논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좋은 교육환경이 될 수 있다.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립이나 갈등을 풀어가는 방법을 몸으로 깨닫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기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눔'을 아는 인격체로 성장해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율곡 이이 선생도 이점에 착안했다. 사람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 주고 일상에서 의심나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스승이라면,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며 사회관계의 질서를 도모하는 일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예를 갖추고 동서고금의 좋은 책들을 읽으며 서로 강론하고, 쌓은 실력으로 함께 가르쳐 주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隨友適江南:수우적강남)’란 말이 친구로 인해 좋은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의미로 좋게 써먹었지만 요즘은 친구를 따라 강남을 가려면 왜 그리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어떤 친구와 함께 가야 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마구잡이로 쫓아 하다가는 이도 저도 다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해서는 친구 따라 감옥에 같이 갈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연암은 성공한 사람이다. 북학파인 연암의 친구들은 모두 그를 닮아 글이라면 글, 호기라면 호기 많은 재주를 지녔다. 열하일기도 알고 보면 연암의 친구인 홍대용이 맨 처음 연행을 다녀 온 후 설파를 한 공이 크고 연암보다 먼저 연경을 다녀온 유득공이나 박제가 등이 건연집이란 글 집으로 중국에서까지 이름이 알려진 덕분에 고무되어 연암 또한 뒤질세라 매진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기 때문이다. 과연 좋은 친구들은 글로써 우정을 다지며 죽을 때까지 동거동락하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이렇게 후세에도 알아주는 명망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를 본받은 후손들이 우정을 다지며 그 뒤를 이었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와 홍대용의 손자 홍양후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 연암은 ‘절대로 마음속에 계교(計巧)를 지닌 사람은 사귀어서는 안 되고 뜻이 허황된 사람은 사귀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글을 이어갔는데 세상에서 떠드는 ‘쓸모 있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단언적으로 표현했다. 달리 말해 이 세상을 판치는 사람들은 계교가 앞서고 허황됨에 눈이 먼 사람들이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어디 그의 글을 들여다보자.
<세상에서 떠드는 ‘쓸모 있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없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떠들어 대는 ‘쓸모없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 있는 사람이지요. 천하가 안락하고 향리에 아무런 사고가 없는데, 참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 때문에 재기(才氣)를 드러내고 정신을 분발하면서까지 경솔히 남에게 보여 주려고 애쓸 까닭이 있겠소.
저와 같이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는 것은 겉보기에 용맹한 것 같지만 이는 곧 노인의 상투적인 버릇이요, 60만 군사를 굳이 청한 것은 겁쟁이 같지만 이는 곧 지혜로운 이의 깊은 꾀랍니다.>
이 세상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 했다더니 그 말의 다른 표현 같기도 하다. 사회성만으로 인간의 쓸모를 가른다는 것이 너무 상대적이고 못내 애석한 점이 있다. 노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노자가 숲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숲속에서 목수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있었다. 노자는 큰 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그 나무는 매우 커서 여러 대의 마차가 그 밑에서 휴식을 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매우 푸르고 아름다웠다. 그는 목수들이 어째서 이 나무를 아직도 자르지 않았는지 물어보기 위해 그의 제자를 시켜 목수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요. 이 나무로는 아무 것도 만들 수가 없지요. 가구도 만들 수 없고, 땔감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연기를 낼 테니까요. 이 나무는 쓰일 데가 없으므로 자를 필요가 없지요.”
노자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나무에게 배우게. 이 나무처럼 무익하게 되면 누구도 그대들을 자를 사람이 없을 것일세.” >
‘쓸모 있음‘ 과 ’쓸모 없음“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나누는 기준도 애매모호하고 극히 상대적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차피 사회적인 동물로서는 자신의 쓸모를 제대로 안다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개중에는 있고 그로 인생길을 달리 걷고 파탄에 이르는 사람도 생겨난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들어보라.
옛날에 아주 유명한 명의가 있었다. 이 사람은 의술이 아주 뛰어나서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로 신의 (神醫)라고 불렸다. 그러다 보니 누구든지 의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이 사람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막상 와보면 글은 가르치지 않고 일만 시키는 것이었다. 성질이 급한 보통사람들은 얼마간 버텨보다가 "이거 글러 먹었구먼. 자기가 의술을 통했으면 통했지 제자를 사람 취급도 않다니. 전혀 의술을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거야" 하며 모두 떠나가 버렸다.
사실 이 명의를 스승으로 섬기기란 보통 인내심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끈질기게 인내하며 버티는 제자가 한 사람 있었다 이 사람은 스승이 시키는 궂은일을 전혀 마다하지 않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묵묵히 해냈다. 제자의 성실함에 만족한 스승이 자신의 비법을 하나 둘씩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제자가 스승 곁에 머문 지도 어언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배운 것 같아 제자는 이제 스승 곁을 떠나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사무쳤다. 제자는 큰 맘 먹고 스승에게 말했다.
"스승님 이제 제 공부가 얼마나 되는지요? 하산은 언제쯤 하면 될까요?"
스승은 자미시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하였다.
" 오! 그런가,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그럼 지금 당장 산에 가서 약초를 살피되 약초가 되지 않는 풀이 있으면 한 가지만 구해오게! 산에 있는 풀 중 약초가 되지 않는 풀 하나만 구해오면 당장 하산하도록 허락하겠네!"
제자는 신바람이 나서 날듯이 온 산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산을 찾아 헤매어도 약이 되는 풀뿐이지 약이 되지 않는 풀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밤이 늦도록 찾아 헤맸지만 약이 되지 않는 풀을 찾지 못한 제자는 자신의 공부가 아직도 멀었구나 생각하고 낙심하며 스승에게 돌아왔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온종일 산을 헤매고 다녔지만 넓은 산 어디에도 약이 되지 않는 풀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아직도 저는 하산할 때가 멀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고향 생각을 버리고 부족한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스승이 껄껄 웃으면서 말하였다.
" 허 허 허 그랬느냐. 그럼 당장 하산하여라. 세상에 약이 되지 않는 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풀, 소중하지 않은 나무, 소중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 그것을 깨달은 너이니 의술을 펼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 이제 떠나거라."
이렇듯 세상에 쓸모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다시 말해 어느 누구의 사주팔자라도 장점이 있다는 말이다. 신은 공평해서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장점, 하나의 달란트(talent , 재능)를 준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약초가 없듯이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주팔자는 없다. 이 말이 단지 이야기를 하기 위한 이야기꺼리에 불과하다 할 것 같아 실제의 삶 속에서의 쓸모를 제대로 찾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1910년 프랑스 파리에서 다섯 살 난 장폴 사르트르가 엄마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살았다. 아버지는 사르트르가 한 살 때 병으로 죽었는데, 그 역시 건강이 나빴다. 한쪽 눈이 안 보였고 몸집은 또래보다 작았다. 어린 사르트르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자기가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얼굴도 못 본 아버지가 “정액 몇 방울을 흘려서” 만든 우연한 존재가 자기라고 여겼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할아버지의 서재에 틀어박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모험소설을 탐독하며 자신이 악당들을 물리치는 영웅이라고 상상했다. 어른들의 칭찬을 듣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고전들을 펼치기도 했다.‘읽기’는 곧 ‘쓰기’로 이어졌다. 인류를 불행에서 구하는 명문(名文)을 써서 후세까지 자기에게 신세 지도록 하겠다는 게 열 살 사르트르의 생각이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귓가엔 “너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는 성령의 계시가 울렸다. 물론 스스로 상상해낸 환청이었다. 자서전 ‘말’에서 사르트르는 이런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겐 충격적인 결말이다. 몸이 건강해도 행복해지기가 힘든데, 한쪽 눈이 보이지 않고 신경증까지 앓던 사르트르는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짐을 떠안고도 열 살부터 행복했다. 요즘엔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가 드물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건 꼭 할 일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무가치한 일을 강요받거나 가치관에 반하는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세상에 없는 편이 나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르트르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쓸모가 무엇인지 알아냈기에 행복할 수 있었다. 사명(使命)을 못 찾아 무력해진 사람들에게 사르트르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나기를 권한다.
<“이제야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중략)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나의 구원을 필요로 하고 그 필요가 나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장폴 사르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