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현장에서 사운드를 녹음하는 데 쓰이는 것은 기다란 붐 마이크와 녹음기다. 하지만 대사를 위주로 한 현장의 동시녹음에서 각종 효과음은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한국영화의 사운드 중 대사를 제외한 효과음의 90% 이상은 후반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최근에는 대사도 점차 후시녹음의 비중을 높여나가는 추세다.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는 영화의 사운드를 만들고 가공하는 사람이다.
사운드디자이너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그전에는 이들을 음향효과기사 혹은 사운드엔지니어라고 불렀다. 음향효과기사나 사운드엔지니어가 사운드의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면, 사운드디자이너는 사운드를 창조해내는 사람이라는, 예술성이 가미된 이름이다. 영화뿐 아니라 TV와 라디오방송, 광고와 전자제품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사운드디자이너의 활동반경은 대단히 넓다. 그중 영화업계에 종사하면서 영화의 사운드를 만드는 이들을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라 일컫는다.
〈topclass〉가 만난 영화진흥위원회 서영준 녹음실장은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한마디로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의상디자이너가 옷감을 재단하고 다듬고 이어가면서 옷 한 벌을 완성하듯,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도 여러 종류의 소리를 만들고 수정하고 혼합해 영화 속 한 장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안에는 다채로운 작업 과정이 존재한다. 대사 파트에서는 현장에서 녹음한 대사의 잡음을 없애 대사가 명확하게 전달되도록 한다. 소음 탓에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거나 대사를 바꿀 필요가 있을 경우, 배우들의 재녹음을 담당하기도 한다.
각종 소품을 이용해 옷 스치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등 영상에 맞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폴리 파트, 웅성거리는 소리나 지하철역의 소음처럼 특정 공간의 주변음을 만드는 앰비언스 파트, 폭발음이나 총성을 다루는 스페셜사운드이펙트 파트의 사운드디자이너는 창의적인 효과음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사운드 디자인의 마지막 작업인 믹싱은 대사와 효과음, 음악을 균형 있게 섞는 작업이다. 영상을 보면서 각 사운드의 크기를 조절하고, 사운드의 성격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경력을 쌓은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는 각 파트의 사운드디자이너, 음악감독 및 영화감독과 협력해 사운드 작업의 전 과정을 총괄하는 사운드수퍼바이저의 역할을 맡게 된다.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를 따로 뽑는 시험은 없다. 현직 사운드디자이너들은 연출부 스태프로 일하다 발을 들이거나 지인을 통해 영화 사운드 업계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 관련된 전공은 음향학이다. 동아방송대, 백제예술대, 한국영상대 등에 개설되어 있다.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일이 잦고 수학적 사고가 필요한 일이 많으므로 이과 계통 전공자가 유리하다.
소리를 다루는 직업의 특성상 소리에 민감하고, 소리의 느낌을 잘 잡아내는 사람이 제격이다. 괴물이나 로봇의 소리처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만드는 일도 많으므로 창의성도 중요하다. 음악이론, 음향공학, 소리기초이론, 디지털오디오이론 등의 이론적 지식을 갖추고, 다양한 소리가 쓰이는 영화를 즐겨 보면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 훌륭한 사운드디자이너가 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뭐니뭐니 해도 다양한 경험이다. 음향장비와 프로그램을 사용해 연습을 거듭하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아두는 것이다.
이번 달 〈topclass〉가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곳은 남양주에 위치한 영화진흥위원회 녹음실 C믹싱룸이다. 커다란 스크린, 푹신한 의자가 있는 C믹싱룸은 녹음실 속 영화관이다. 관객들이 영화를 만나는 영화관과 흡사한 음향환경을 구축해놓은 이곳에는 의자 하나, 벽의 요철 하나도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다. 최상의 음향을 위해 치밀하게 디자인된 C믹싱룸의 주인은 서영준 녹음실장이다. 영화진흥위원회 녹음팀에서 사운드 믹싱 작업을 전담하며 사운드수퍼바이저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그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다. 며칠 전 급한 작업을 끝내고 이제 한숨 돌렸다며 싱긋 웃는 그. 큼지막한 콘솔 장비를 등지고 그와 마주 앉았다.
영화 사운드디자이너 서영준
사운드를 디자인하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책임진다
음.악.
부모님은 음악애호가셨다. 거실에서는 늘 팝송이 흘러나왔고,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팝송을 잘 아는 아이’로 통했다. 고1 때 기타와의 만남을 계기로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지만, 학과 공부는 제쳐두고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밴드 연습실에서 보냈다. 대학 졸업 후, 뮤지션의 꿈을 안고 상경한 나를 기다린 건 뼈아픈 좌절이었다. 서울에는 음악을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많았고, 이러다가는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1년간 두문불출하며 지내다 학교 선배를 통해 사운드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음악과 관련 있는 직업이라는 말에 이끌려 사운드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고, 광고녹음과 방송 녹음을 하다 2001년부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근무했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작업의 정석〉 〈밀양〉 〈7광구〉 등 120여 편의 영화 사운드 믹싱을 맡았다.
믹.싱.
12년간 내가 출근하는 곳은 영화진흥위원회 3층 C믹싱룸이다. 264㎡(80평)에 달하는 이 공간은 영화진흥위원회의 믹싱룸 중 가장 큰 공간이다. 국내 녹음시설 중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C믹싱룸에 들어서면 대형 스크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믹싱 작업을 할 때는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보면서 소리를 조정한다.
스크린 뒤에 숨어 있어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는 3개의 스피커를 포함해 벽면을 따라 약 20개의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다. 스피커의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가 난다. 여러 악기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음악이 되듯, 각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가 합쳐지면서 한 장면의 사운드가 완성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 소리는 치밀한 소리의 배치를 통해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된다.
영화관의 의자와 같은 재질의 의자 뒤에는 작업에 필요한 장비가 있다. 콘솔과 컴퓨터 장비를 이용해 소리의 크기와 높낮이, 배치를 조정한다.
탄.생.
사운드 작업은 영화 제작의 마지막 공정이다. 내가 맡은 사운드 믹싱은 사운드 작업의 마지막 단계다. 내 작업의 끝은 곧 기나긴 영화 제작기간의 끝과 동시에 한 작품의 탄생을 의미한다.
한 편의 영화가 태어나기까지는 숱한 고뇌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흥행의 성패와 상관없이 내가 사운드 작업에 참여한 120여 편의 영화가 똑같이 소중한 이유다.
영화 <7광구>에는 괴물이 등장하는데, 발을 디딜 때 내는 소리, 움직일 때 뼈가 맞물리는 소리, 미끄덩한 피부가 미끄러지면서 나는 소리 등 괴물 한 마리가 내는 소리의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가 된다. 2주 동안 괴물 소리만 믹싱하다보니 작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도 괴물이 포효하는 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슬.럼.프.
2007년, 몸의 피로와 함께 극심한 슬럼프가 찾아온 적이 있다. 영화 〈밀양〉의 사운드 작업을 할 때다. 칸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하려면 토요일 아침 비행기에 필름을 실어서 프랑스로 보내야 했다. 남은 시간은 단 5일. 출품 전 3일간은 하루 단 10분도 자지 못한 채 작업에 매달렸다. 믹싱 작업을 끝내고 3일 만에 바깥공기를 마시면서 ‘조용히 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했다. 이틀 후,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 TV를 통해 칸영화제 수상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감독도, 배우도 아닌 나는 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씁쓸함이 몰려왔다.
무력감에 빠져 있던 나를 구해준 건 초심이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는 단지 좋아서였다. 일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으니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내가 맡은 일에 충실하자고 다짐했다. 그 이후로는 앤딩 크레딧 뒷줄에서 내 이름을 발견해도, 주위에서 나를 알아봐주지 않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내가 재미있게 일했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직.업.병.
“영화 자주 보세요?”
영화 사운드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으레 듣는 질문이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 대신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영화 사운드디자이너가 된 후, 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나도 모르게 영화관의 사운드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새로 생긴 영화관의 사운드 시스템은 대체로 좋은 편이지만, 생긴 지 2년이 넘은 영화관은 관리 상태에 따라 사운드의 질이 달라진다. 사운드 시스템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러닝 타임 내내 신경이 곤두선다. ‘소리가 왼쪽으로 쏠렸네.’ ‘스피커 소리가 너무 작은데?’ 하며 혼자만의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곧 영화가 끝나버린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영화를 즐길 수 없게 된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비슷한 고통을 호소한다.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이른바 ‘직업병’인 셈이다.
고.요.
하루 일과를 마치면 허리가 쑤시는 사람도 있고 머리가 저릿하게 아픈 사람도 있다. 나는 퇴근할 무렵이면 귀가 피곤하다. 하루 종일 작은 소리 하나하나까지 예민하게 다루며 작업하다보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의 상태가 그리워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라디오나 음악 CD를 절대 틀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서도 TV를 켜지 않는다. 주말에도 놀이동산이나 쇼핑몰처럼 사람이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하고, 한적한 곳에서 여유를 즐긴다. 소리가 없는 공간에 있는 것이 유일한 일탈이다.
시.간.
사운드는 시간의 예술이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소리를 듣는 데는 시각 대신 시간만이 필요하다. 영화의 사운드도 영상에 덧입혀지기 전에는 아무런 모양 없는 소리로 존재한다. 나는 시간의 예술인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이다. 나의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투자한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시간과 싸운다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영화 제작의 끄트머리에서 사운드디자이너는 정해진 제작기간을 맞추기 위해 분투한다. 작업을 하는 기간에는 늘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감독과 의견을 나누며 수정을 거듭하다보면 언제 다급한 상황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사운드디자이너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체력을 키우라는 조언을 가장 많이 한다. 시간과의 싸움을 버텨내는 체력이 없으면 열정도, 실력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아.티.스.트.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하는 일을 정확하게 설명해줄 직업의 이름이 없었다. 음향기사로도, 엔지니어로도 불렸다. 두 가지 이름 모두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돌이나 나무를 깎는 장비로 조각을 하는 사람을 두고 조각엔지니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모두 아티스트라 칭한다.
사운드 디자이너가 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음향장비를 사용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운드디자이너는 기술과 예술의 영역에 걸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사운드를 디자인한다는 뜻의 사운드디자이너라는 이름이 좋다. 기술로써 예술을 탄생시키는 나는 아티스트다.
서영준 녹음실장의 영화 관람 TIP 영화관에서는 좌우 방향으로 정중앙, 전후 방향으로 앞에서 3분의 2 지점이 되는 자리를 고르세요. 영화가 가장 잘 ‘들리는’ 황금석입니다. 영화관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모이는 지점이기 때문이지요. 사운드디자이너가 사운드 믹싱을 하는 곳도 바로 그 지점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