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생업을 제쳐 두고 북으로 북으로 내달린 건 아무래도 그랬다.
오늘같이 특수한 날(성탄절), 두고 온 찜찜한 마음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버스는 꾸불꾸불 한때의 영화를 뒤로한 채 폐허가 된 광산촌을 지나며 태백으로 들어간다.
함백산(咸白山 1,573m)은 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
백두대간의 중요한 길목으로 산세도 부드러워 사시사철 산꾼들로 붐빈다.
오늘 우리의 들머리인 만항(晩項)재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과 영월군 상동읍, 그리고 태백시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고개다.
남한에서 차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로 높은 고개(1,330m)로서 지리산 정령치(1,172m)와 강원도 운두령(1,089m)보다 높다.
요즘은 태백과 정선을 잇는 두문동재에 터널이 뚫리면서 길고 험한 만항재를 찾는 이가 크게 줄었다.
만항재라는 지명은 원래 우리말로 능목재(늦은목이재)라고 불리던 것을 궂이 한자로 표현하면서 ‘晩項(만항)’이라고 바꼈다.
만항재에서 두문동재까지는 약 10km 구간으로 무엇보다도 적설기엔 차량접근이 제일 중요한 문제.
그래서 우리는 만항재에서 정암사로 내려서도록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는 바람이 강해 눈이 쌓일 새가 없지만 키작은 나무들에 핀 상고대와 주변설경은 왜 함백산이 겨울산행지로서 2등가라면 섧은지 알 만하다.
눈이 녹은 계절에는 야생화가 지천에 널려있을 것이니,함백산이야말로 지상의 화원임에 틀림없다.
거기다 함백산 정상은 기암괴석으로 마치 재단을 쌓은듯한 형상으로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그 너머 지척에 KBS중계소가 있었지만 변화무쌍한 겨울날씨 때문에 사진에 담지를 못하였으니 언감생심(焉敢生心) 주변 산세의 조망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산을 내려와 들린 정암사(淨巖寺 )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갈반지(葛磻地)를 찾아 창건한 사찰이다.
정암사 뒤편 천의봉(天衣峰) 중턱에 서 있는 수마노탑(보물 제410호).
643년(선덕여왕 12)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신심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와서 이 탑을 건조하게 하여서 마노탑이라 하였다.
여기에 물길을 따라 이 돌을 운반하였으니 물 수(水)자를 넣어 수마노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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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방재(태백산 유일사 들머리)를 사이에 두고 태백산과 경계를 이루며 백두대간을 이어가고 있다.
만항재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을지 지역주민에게 탐문을 하였는 바,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입도(入道)하면서 흩날리는 눈발은 은근히 걱정을 하게 만든다.
31번 국도에서 414번 도로를 갈아타며 꾸불꾸불 구절양장(九折羊腸) 고갯길을 오르자니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제설(除雪)된 도로에 다시 하얀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거기다 급경사의 급커브에 이르러 바퀴가 헛바퀴를 도는 듯 덜덜덜덜거릴 땐 오금이 저려온다.
후유~~만항재 고갯마루(1,330m,쉼터)에 닿았다.
버스는 더 눈이 쌓여 미끄럽기 전에 바삐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간다.
진행방향으로 바로 내려가면 가깝지만 그 길은 급경사로 적설기엔 너무 위험하여 태백시를 돌아 38번 국도를 이용하여 두문동재터널을 지나 정암사로 가기 위함이다.
우선 식사부터 하기 위하여 쉼터가게 처마로 들어가서 선 채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만항재의 시설물들은 온통 눈속에 반 쯤 잠겨있다.
그리고는 정암사 방향으로 200여 미터 내려가서...
도로 우측 안내판이 있는 실질적 들머리에서 늦게 출발하는 일행들을 기다리기로 한다.
등로는 안내판 뒤의 눈길로 나있다.
안내판
그리 매섭게 춥지않은 날씨를 고마워해야 하겠지.
이곳이 만항재나 두문동재가 아니라 이쪽으로 가면 두문동재이고,저쪽으로 가면 만항재라는 뜻이다.
이렇게 앞 뒤로 적혀있는 이정목은 앞으로도 몇 개 더 나와 길안내를 하고있다.
온통 백색천국인 여기는 설국(雪國).
경사도는 완만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콘크리트 건물을 지나...
좌로 임도를 만난다. 임도는 구불구불 선수촌 가는 길.
함백산 기원단이다.
태백산엔 천제단이 있고,함백산엔 기원단이 있다.
태백산 천제단은 왕이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제를 지내던 곳이고,함백산 기원단(祈願壇)은 백성들이 하늘에 소원을 빌며 제를 올리던 민간신앙의 성지라고 한다.
.함백산 기원단
영월과 정선을 잇는 포장도로를 건넌다.
이 지점의 안내판
도로를 가로질러 함백산 이정표와 KBS입간판이 가리키는 차단기를 건넌다.
영월(31번)과 정선(38번)을 잇는 도로표지판.
함백산 이정표엔 1.9km
차단기 입구의 이정표
갈림길에서 다시 함백산 1.2km이정표
눈 터널을 지나...
헉헉~된비알을 만난다.
능선에 올라서면서...
설경은 더욱 운치를 더하고...
매서운 겨울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백두대간 표지판이고...
함백산 안내판이고 할 것 없이 온통 상고대가 덕지덕지 붙었다....
여민 옷 깃 사이로 바람줄기가 스며 들어온다.
세찬 바람과 희뿌연 사위에 둘러진 채 영혼은 더욱 맑게 깨어난다.
김길자님은 "칼바람 맞으면서도 /함백산은 잠들지 못한다."고 노래하였다.
함백산
태백산보다 더 높으면서
태백산보다 더 넓고 웅장하면서
서럽구나.
언제나 태백의 명성에
빛도 없이 있었구나.
흙 속의 진주같이
알아주는 이 없었구나.
어찌하여
태백만 알고
그 형인 함백은 모를까.
형만 한 아우 없다는데
눈 쌓인 그 경치가
태백에 뒤지랴
시원스레 트인 산세 태백에 뒤질까.
사나이 가슴처럼 넉넉하고 광활함이
너무나 장쾌하고 가슴까지 시원한데
넓은 들처럼 평탄하여
산인 줄을 몰랐더냐.
두어라
그래도 아는 이는
다 아는 것을
<제산 김 대 식>
오늘 처음으로 참여한 여성회원.
함백산 정상엔 바람의 길이 뚫려있다.
백두대간을 넘실거리며 이름모를 계곡을 샅샅이 핥고 와서는 능선을 따라 성큼 올라선 그 겨울바람 말이다.
두루뭉실한 정상석에도,첨성대를 닮은 첨성대탑에도...
하얗게 상고대가 피어있다.
바람의 길을 돌아서 세멘트도로에 내려선다.
기지국의 시설물이 보였으나 카메라를 집어드는 사이 안개속으로 숨어버린다.
집어든 카메라를 촛점없이 들고 있다 세멘트 도로에 피어있는 상고대에 맞춘다. 아무데고 돌출된 부분에는 어김없이 갖다 붙어 마치 바위채송화처럼 엉켜있다.
"살아 천년,죽어 천년"의 주목이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사슴의 뿔처럼 생긴 주목 고사목.
등산로 안내판에도 상고대가 붙었다.
* 상고대(hard rime) 또는 수빙(樹氷)은 서리가 나무나 풀 따위 물체에 들러붙어 눈처럼 된 것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붙는다.
대수술을 받았지만 북풍한설(北風寒雪)을 견뎌가며 오랜 세월을 버텼을 주목. 주목(朱木)은 일본이 원산지로 함백산,태백산 등 고산지대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신이 내린 무채색의 그림.
등로를 따라...
힘찬 모습으로 하늘을 받치고 섰다.
뒤틀린 근육질도 모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진 못하는 듯.
여긴 온통 눈의 나라.
갈림길로는 사람의 발자국은 하나도 없다.
조물주의 조각품으로...
난해한 추상화 같기도 하고...
섬세한 붓끝으로 세밀하게 그은 듯하다.
아름다운 설경이...
산길을 따라 지루할 새가 없더니...
오만 소원들이 난무하는 너덜지대를 통과한다.
돌아보면 온통 백색 천국.
주목이 있는 너른 안부에 닿는다.
안부에 있는 주목은 훨씬 혈기왕성해 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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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례 힘을 쓰면 얼마지나지 않아 중함백에 올라선다.
중함백 정상의 이정표
환상의 설경은 이어지고...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구름위의 다락인 운상원(雲上院)이란 말인가?
하늘과 산마저도 구분이 불가하고...
다만 가슴에 남아있는 응어리가 뻥 뚫리는 듯 상쾌한 느낌으로...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쓸고 내려서면...
적조암 갈림길을 만난다..
적조암 갈림길의 이정표. 적조암 방향의 좌측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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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눈길을 따라...
작은 안부에서...
내리막으로 조심조심 내려선다.
김길자 시인은 "얼음장 밑 혈관 따라 /숨죽은 듯 흐르는 / 계곡물 소리" 라고 노래한다.
눈덮힌 얼음장 밑으로 혈관의 혈류처럼 계곡물이 흐르고 있나보다.
장암사~만항재의 414번 도로에 내려선다.
우리 버스는 일정을 단축하기 위하여 정암사에서 여기까지 올라와서 체육공원에서 기다리고 있다.
도로에 선 함백산등산로 푯말
돌아본 하산 길.
체육공원 앞의 이정표
후미팀들을 기다리는 일행들. 이 날은 선두팀과 후미팀이 함께 내려오게 되었는데,그것은 더 걷고 싶은 선두팀이 은대봉 방향으로 한참 더 진행하다 돌아섰기 때문.
체육공원 앞의 이정표
시락국은 이미 뜨근하게 데웠다. 그리고는 1km남짓한 정암사로 차량이동을 한 뒤 정암사에서 뒷풀이를 하기로 한다.
정암사주차장.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정암사
우선 시락국밥으로 급하게 요기를 하고...
바삐 정암사로 향하는데,일주문엔 태백산정암사(太白山淨岩寺)라고 편액되어 있다. 함백산이 예전에 태백산이라고 하였다더니...
급한 걸음으로 내딛는 눈덮힌 정암사 위 산자락에 수마노탑이 보인다.
살짝 당겨보니 반듯한 기반(基盤)위에 균형잡힌 몸체의 7층탑이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무조건 카메라셔터만 눌러 사진에만 우선 담는다. 그런다음에 자료를 뒤적이며 영상으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선불도장(選佛道場)과...
범종각과...
육화정사(六和精舍)와...
육화정사 편액.
관음전(觀音殿).
관음전 현판.
그리고 적멸궁(寂滅宮).
적멸궁 주련엔 爲度衆生故 위도중생고 중생을 건지기 위해
方便現涅槃 방편현열반 방편으로 열반을 보였으나,
而實不滅度 이실불멸도 사실은 멸도가 아니며
常住此說法 상주차설법 항상 머물러 이 법을 설하네.
적멸궁의 새로 단장한 단청
자장율사는 태백산(정암사) 외에 설악산(봉정암),오대산(상원사),사자산(법흥사),취서산(통도사)에도 불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5대 적멸보궁이다.
극락교를 건너...
자장각(慈藏閣)과 삼성각(三聖閣)을 당겨 잡은 후...
헉헉거리며 수마노탑으로 향한다.
적멸보궁 뒤쪽 가파른 산비탈에 세워진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수마노탑(보물 제410호)
높이 9m 7층 모전석탑인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갖고 온 마노석으로 쌓았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수마노탑을 바라보니 마치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한 것같은 착각을 느낀다.
벽돌을 쌓아 만든 모전석탑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수마노탑의 기단.
사찰이 아니고 예배당에서 점등을 하였다면 오늘 같은 날 크리스마스트리로 착각을 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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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노탑에서 내려다 보는 눈덮힌 정암사.
전화기에서 신호음이 울린다. 빨리 귀환하라는 전화.
급하게 차에 오르자 안도와 개운함으로 작은 희열을 느낀다.
오늘 같은 날,북으로 북으로 내달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상 략--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떠돌이의 신세로.
칼날같은 바람이 부는 곳
들새가 가는 길 표범이 가는 길로
나도 가야겠다.
껄껄대는 산 사나이들의 신나는 이야기와 그리고
기나긴 눈벼랑길이 다하고 난 뒤의 깊은 잠과
달콤한 꿈만 내게 있으면 그만이다.
바람이 인다.
새해 아침 먼동이 트면서 저기 장미빛 노을이 손짓한다.
배낭을 챙기자.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김장호의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