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오냐, 일찍 왔구나. 혜진인 더 예뻐졌는걸.” 서울강서구 화곡동 성지중·고등학교 김한태(金漢泰·66)교장은 매일 아침 여덟 시면 어김없이 학교 정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는다. 머리를 염색하고 힙합바지를 차려입은 학생들 사이에서 이따금씩 중년여성이나 60대 할머니가 김교장에게 공손히 절을 한다. 주부반 학생들이다. 성지중·고등학교는 평생교육법에 의거해 설치, 운영되고 있는 학력인정 사회교육시설. 78년 3월 15일 강서구 교남회관에서 강서청소년직업학교로 개교한 뒤 81년에 강서종합복지회관이 신축되면서 이곳으로 학교를 옮겼다. 86년에는 학력인정 사회교육시설로 승인 받아 이곳에서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검정고시 12과목 중 7과목을 면제받을 수 있게 됐다. 불우하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부디 뜻을 이루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때부터 교명도 ‘성지(成志)’중·고등학교로 바꿨다. 89년에는 완전 학력인정시설로 지정돼 정규학교와 다름없이 중·고교 학력을 인정받게 됐다.
2000학년도 진학·취업률 82%
현재 재학중인 학생은 주·야간을 합해 모두 6백96명. 이중 35.3%가 정규학교 중퇴자이며 소년원이나 교도소 출소자도 21.1%에 달한다. 만학의 정열을 불태우는 주부도 17.4%에 이르며 학생 중 5.3%는 소년소녀가장이다. 이처럼 전교생의 80%가 일반학교에서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중도 탈락하거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교육혜택을 누리지 못한 이들이다. 그럼에도 2000학년도 고교과정 졸업생 3백32명 중 78명이 대학에 진학했고 51명의 학생들이 자동차정비나 기계, 선박, 사무자동화 등의 분야에서 국가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했다. 학교측에 따르면 올 졸업생의 82%가 대학에 진학했거나 취업한 것으로 조사됐다. 역대 졸업생 가운데는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성공한 사업가도 있다. 교사(校舍)라고는 4차선 도로에 면해 있는 건평 64.5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 한 동과 교장실과 창고 등으로 사용되는 컨테이너 가건물이 전부인 이곳에서, 이처럼 뚜렷한 교육성과가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김한태 교장은 무엇보다도 칭찬과 격려의 힘이라고 답한다. 이곳에 들어온 학생들은 입학 후 며칠 이내에 안방 - 여기선 교장실을 안방, 교무실을 사랑방이라고 부른다. -으로 들어가 김 교장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는 학생 하나 하나의 손을 잡고 ‘잘 생겼다’, ‘손이 두꺼운 걸 보니 부자 되겠다’, ‘눈빛이 참 맑구나’하는 식으로 칭찬과 덕담을 베푼다.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정말 아이들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진단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칭찬 한번 들어본 일이 없는 아이들에게 김 교장은 ‘나의 장점을 인정해준 최초의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다른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대개의 사회교육시설이 그렇듯 이곳 아이들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강해 다루기가 몹시 힘들다. 처음 입학해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아이들은 결석이나 지각이 잦다. 그러나 교사들은 지각한 학생을 나무라기보다는 일찍 등교한 학생을 칭찬함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생활지도를 한다.
칭찬과 표창으로 맑은 심성 길러줘
이 학교 학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적어도 세네 번은 표창을 받는다. 어느 분야든 조금만 잘하면 표창장을 주는데, 표창을 받을 만큼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앞으로 타의 모범이 될 자질이 엿보이므로’ 표창한다. “우리 아이들 대부분은 지금껏 어디에서도 상을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자기 이름이 새겨진 표창장은 종이 한 장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표창을 받고 나면 행동거지도 조심하고 학교에 빠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빛이 역력합니다.” 표창장과 함께 아이들은 ‘모범학생’이라는 단어가 새겨진 펜 한 자루를 부상으로 받는다. 방학 무렵에는 부상으로 작은 화분을 준다. 화초를 키우는 마음으로 자기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꿈을 가꿔나가라는 뜻이다. 김한태 교장이 사회교육사업에 뛰어든 것은 지난 71년 공군상사로 전역한 뒤 영등포에서 삼륜차 두 대로 화물운송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일반 사회교과 교사자격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때 조수들 중에는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청소년들이 많았어요. 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일을 시키곤 했는데 대부분 글을 몰랐지요. 더군다나 세파에 시달려 성품도 거칠었고 기본적인 예의범절조차 갖추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시작한 일이 야학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조수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야학에 지원자가 불어나자 그는 화물운송업을 그만두고 아예 영등포 영중초등학교의 가건물을 빌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란 간판을 달았다. ‘사업은 아이들을 바르게 인도하고 난 뒤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중학교 과정 무료교육 학생모집’, 당시 영등포구 문래동·양평동·양남동 일대의 공단에 나붙은 이 벽보를 보고 몰려든 지원자들은 2백여 명. 그러나 초등학교 한 귀퉁이에 마련된 가건물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70명이 고작이었다. 선착순으로 학생 수를 제한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때 교육기회를 얻지 못한 지원자들은 가건물에 돌을 던지거나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을 구타하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절망과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들의 눈빛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기름때 절은 공장직공들이 학교를 드나들자 건물을 빌려준 초등학교 학부모들과 인근 주민들의 반발이 거셌고 결국 학교측은 교사신축을 이유로 건물을 비워달라고 요구했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78년 강서구 화곡동 교남회관 지하실로 자리를 옮겨 성지중·고교의 전신인 강서청소년직업학교를 개설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영등포시절과 비슷한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3년만에 건물을 비워줘야 했다. 당시 강서구청장과 강서경찰서장 등 지역유지들과의 의논 끝에 김 교장은 건축비 2천만 원을 대는 조건으로 신축중인 강서종합복지회관에 입주키로 했다. 건축비를 만들기 위해 그는 발이 부르트도록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며 독지가들을 설득해나갔고 마침내 2천만 원을 모금할 수 있었다.
사회적 편견과 재정난에 좌절하기도
“교장선생님, 골치 아픈 학교를 옮겨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81년 10월 2일 복지회관 3층으로 학교를 이전하던 날, 개미 먹이 나르듯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 책·걸상을 옮기던 그에게 인근 주민들이 던졌던 이 말은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역주민들의 편견에 재정적 어려움까지 가중됐다. 특히 강서구청 앞으로 건물이 등기되면서부터는 무료로 이용하던 건물 임대료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는 구청으로부터 건물을 불하받기 위해 12억 원에 달하는 불하대금을 갚느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우리 학교와 같은 사회교육시설이 전국에 39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행·재정적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법인으로 등록할 만큼 시설요건 등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올해부터 서울시교육청에서 교사 1인당 월 30만원씩의 급여지원금을 받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성지중·고교의 운영재원은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가 전부다. 수업료는 일반학교의 92% 수준으로 낮게 책정됐지만 납부율은 75%에 불과해 99년 한해동안 미납된 수업료만 9천9백만 원에 달한다. 서울시교육위원과 사회교육시설학교 전국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음지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방치하면 엄청난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며 “음지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회교육시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대책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올 들어 정부가 저소득층 중·고생 자녀 40만 명에게 학자금을 지원하는 등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기회 제공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는 그는 “일종의 대안학교인 사회교육시설에도 더 많은 관심과 정책적 배려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공로 인정받아 청소년보호대상 수상
30여년을 사회교육사업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91년 서울교육상, 94년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99년 청소년보호대상 등 굵직굵직한 상들을 수상해온 김한태 교장에게도 중도하차의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정난과 완고한 사회적 편견에 직면할 때마다 그는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4천2백여 명으로 불어난 동문들과 일반학교의 70%에 불과한 보수에도 아랑곳없이 사명감을 갖고 학생 지도에 헌신하는 동료교사들을 떠올리며 번번이 그 유혹을 물리쳐왔다. 김한태 교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로 97년 2월 고교과정을 졸업한 최원용 군을 꼽는다. 중1때부터 당산동 일대의 폭력조직에 가입해 폭력, 절도, 강도 등 전과가 무려 13개나 됐고 실형도 세 차례나 살았던 최군은 친구의 권유로 성지학교에 입학했지만 폭력조직과의 관계를 끊지 못해 고교 3년간 경찰과 검찰, 법원을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그러나 최군은 전과 13범의 멍에를 벗어 던지고 모 전문대 자동차정비학과에 당당히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졸업식날 우등상과 모범상을 탄 최군은 전문대를 마치고 자동차정비 분야 자격증 3개를 취득, 경부고속전철 건설현장에서 굴삭기 기사로 일하다 지금은 군복무를 하고 있다. 최원용 군 외에도 무수히 ‘별’을 단 학생들이 성지학교를 거치며 사람이 되어나갔다. 그 이면에는 이 학교의 독특한 교육방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입학한 학생들은 졸업때까지 총 1백8시간의 봉사활동과 90시간의 예절 및 도덕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봉사활동의 내용은 우장산과 까치산 자연보호, 국립묘지 무연고자 묘역 벌초, 양로원 노인 수발 등 다양하다.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지 못하는 학생들은 졸업장을 받을 수 없으며 학교장은 봉사활동 참석자 명단을 직접 관리하는 것은 물론, 학급마다 돌아가며 예절교육을 실시한다. 이 학교의 독특한 학생 선도방법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형사모의재판이다. 97년 학원폭력 예방 형사모의재판을 시작으로 98년에는 약물남용 예방, 99년에는 집단따돌림 예방을 주제로 형사모의재판을 열었다. 학생들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바로 잡고 바람직한 생활태도를 갖도록 하자는 취지인데, 올 6월에는 ‘미성년자 매매춘 예방을 위한 형사모의재판’을 열 계획이다.
사회교육시설 지원방안 강구되길
그는 지금 '용광로'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집필중이다. 누군가 성지학교를 일컬어 '청소년 종말처리장' 이라고 한 데 대해 정서적 반감이 컸던 그는 그때부터 학교를 '용광로'에 비유해 왔다. 학생들이 사회로 부터 방치된 채 녹이 슬어버린 '쇠붙이'라면 그를 비롯한 교사들은 이들을 사회에 유용한 '강철로' 바꾸는 '제련사'인 셈이다. 예절교육이 있는 날이면 하루 온종일 강의하느라 목이 붓기 일쑤인 김한태 교장의 소원은 멀티미디어 설비를 비롯, 번듯한 시설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는것. 용광로를 펄펄 달궈 제련사들의 수고를 덜어줄 풀무질, 즉 정부와 사회 각계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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