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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山谷의 呼響
復次佛子야 譬如呼響이 因於山谷과 及音聲起라 無有形狀하야 不可覩見이며 亦無分別이로대 而能隨逐一切語言인달하야 如來音聲도 亦復如是하사 無有形狀하야 不可覩見이라 非有方所며 非無方所로대 但隨衆生의 欲解緣出이라 其性이 究竟에 無言無示하야 不可宣說이니라 佛子야 是爲如來音聲第二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메아리가 골짜기와 음성을 의지하여 생기는 것으로서 형상이 없어 볼 수도 없고 분별도 없지마는 모든 말을 능히 따르느니라.
여래의 음성도 또한 그와 같아서 형상이 없어 볼 수 없으며 처소가 있지도 않고 처소가 없지도 않지마는 다만 중생의 욕망과 이해하는 인연을 따라 나는 것이므로 그 성품이 끝까지 말함도 없고 보임도 없어 설명할 수 없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의 음성의 둘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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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곡(山谷)의 호향(呼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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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불자(復次佛子)야 :또다시 불자야
비여호향(譬如呼響)이 :비유컨대 마치 메아리가
인어산곡(因於山谷)과 : 골짜기와 산곡과
급음성기(及音聲起)라 :음성을 인하여 일어나는 것으로서
무유형상(無有形狀)하야 :형상이 없어서
불가도견(不可覩見)이며 : 볼 수도 없고
역무분별(亦無分別)이로대 : 분별할 수도 없지마는
이능수축일체어언(而能隨逐一切語言)인달하야 : 그러나 모든 말을 능히 따르는 것과 같다.
부처님 말씀도 본래 모양이 없지만 중생이 있기 때문에 그 중생에 맞춰서 한다, 이런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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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음성(如來音聲)도 :부처님의 음성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그와 같아서
무유형상(無有形狀)하야 :형상이 없어서
불가도견(不可覩見)이라 :볼 수가 없으며
비유방소(非有方所)며 :처소가 있지도 않고
비무방소(非無方所)로대 :처소가 없지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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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수중생(但隨衆生)의 : 다만 중생의
욕해연출(欲解緣出)이라 :욕망과 이해, 하고자 하는 인연을 따라서, 다만 중생의 욕해연을 따라서 출(出)하는 것이다.
우리가 치문(緇門)을 배울 때 그렇게 배웠다.
‘개중생지근욕성(盖衆生之根欲性)이 수(殊)라 약일이론지(若一以論之)인댄 공비득지야(恐非得旨也)로다’
기성(其性)이 : 그 성품이
구경(究竟)에 : 구경에 끝내는
무언무시(無言無示)하야 :무언무시라. 아무리 쳐다봐도 말도 없고 보여주는 것도 없지만, 끝까지 말함도 없고 보임도 없어서
불가선설(不可宣說)이니라 : 설명할 수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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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시위여래음성제이상(是爲如來音聲第二相)이니 : 이것이 여래음성의 두 번째 모양이니 제2상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이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다. 諸天의 大法鼓
復次佛子야 譬如諸天에 有大法鼓하니 名爲覺悟라 若諸天子가 行放逸時엔 於虛空中에 出聲告言호대 汝等은 當知하라 一切欲樂이 皆悉無常하며 虛妄顚倒하야 須臾變壞라 但誑愚夫하야 令其戀着이니 汝莫放逸하라 若放逸者는 墮諸惡趣하야 後悔無及이라하면 放逸諸天이 聞此音已에 生大憂怖하야 捨自宮中의 所有欲樂하고 詣天王所하야 求法行道하나니 佛子야 彼天鼓音이 無主無作하며 無起無滅호대 而能利益無量衆生인달하야 當知如來도 亦復如是하사 爲欲覺悟放逸衆生하야 出於無量妙法音聲하나니 所謂無着聲과 不放逸聲과 無常聲과 苦聲과 無我聲과 不淨聲과 寂滅聲과 涅槃聲과 無有量自然智聲과 不可壞菩薩行聲과 至一切處如來無功用智地聲이라 以此音聲으로 徧法界中하야 而開悟之어든 無數衆生이 聞是音已하고 皆生歡喜하야 勤修善法하야 各於自乘에 而求出離하나니 所謂或修聲聞乘하며 或修獨覺乘하며 或習菩薩無上大乘호대 而如來音은 不住方所하며 無有言說이니라 佛子야 是爲如來音聲第三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모든 하늘에 큰 법의 북[大法鼓]이 있으니 이름이 ‘깨우침’이니라. 만약 여러 천자들이 방일할 때는 허공에서 소리를 내어 경고하여 말하느니라.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모든 욕심의 즐거움은 다 무상하고 허망하고 뒤바뀐 것으로서 잠깐 동안에 무너지는 것이라. 다만 어리석은 사람을 속여서 애착하게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방일하지 말라. 만일 방일하는 자는 모든 나쁜 길에 떨어져서 후회하여도 쓸 데가 없으리라.’라고 하느니라.
방일하던 모든 하늘들이 이 소리를 듣고는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그의 궁전에 있는 욕심과 즐거움을 버리고 천왕에게 나아가 법을 구하고 도를 닦느니라.
불자여, 저 하늘의 북소리가 주체도 없고 지음도 없고 일어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지마는 능히 한량없는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느니라.
마땅히 알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방일한 중생을 깨우치려고 한량없고 미묘한 법의 음성을 내느니라.
이른바 집착 없는 음성과 방일하지 않는 음성과 무상(無常)하다는 음성과, 괴롭다는 음성과, ‘나’가 없다는 음성과, 부정하다는 음성과, 적멸한 음성과, 열반의 음성과, 한량이 없는 자연한 지혜의 음성과, 깨뜨릴 수 없는 보살행 음성과, 일체 곳에 이르는 여래의 하염없는 지혜 지위의 음성이니라.
이런 음성으로 법계에 두루 하여 깨우치거든 무수한 중생들이 이 음성을 듣고 환희한 마음을 내며, 착한 법을 부지런히 닦아서 각각 자기의 승(乘)에서 벗어남을 구하느니라.
이른바 성문승을 닦기도 하고, 독각승을 닦기도 하고, 보살의 위없는 대승을 익히기도 하지마는, 여래의 음성은 방소(方所)에 머무르지 아니하며 말이 없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의 음성의 셋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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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諸天)의 대법고(大法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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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북을 가지고 모든 사람의 깨달음을 연다, 앞에 나온 내용에 대해 비유로써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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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다시 불자야
비여제천(譬如諸天)에 : 비유컨대 마치 모든 하늘에
유대법고(有大法鼓)하니: 큰 북이 있으니
명위각오(名爲覺悟)라 : 그 이름을 각오 남을 깨운다, 그 북 이름이 각오다.
약제천자(若諸天子)가 : 여러 모든 천자가
행방일시(行放逸時)엔 : 수행하는 것이 방일할 때에, 방일과 해태 이런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수행자니까 방일이 뭔지 똑 떨어지게 알아야 한다.
방일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키는 것이 느슨해서, 방호를 느슨하게 하는 것이다. 석방(釋放)이라고 할 때의 방(放)자, 풀어져서 방탕하게 방종하게 제멋대로 한다. 자유라고 하지만 자유도 아니고 법도를 어긴 자유 있지 않은가? 방종하게 완전히 너풀대는 것을 방일이라고 한다. 일도 안 하고 게임에만 푹 빠져 있다든지 그런 것이 전부 방일이다. 쳐들어오는 적을, 수마에 밀려서 널브러졌든지 웅크러져서, 엎드려져서 추욱 처져 버리는 것, 그것을 방일이라고 한다.
해태라고 하는 것은 정진 안 하고 게으름에 빠져있는 것이다.
방일은 방어하지 못하는 것이고, 해태는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태는 내가 수행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방일이나 해태가 오게 되는 조건은 불신종자들 때문이다. 믿거나 뚜렷한 밝음이 없으면 그렇다.
믿음은 공덕을 귀하게 여기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떻게 꾀를 내도 지저분한 꾀만 낸다.
‘심예(心穢)로 위성(爲性)이다’ 라고 천친보살(天親菩薩)이 말했다. 천수경에서 ‘일체촉예처(一切觸穢處)’할 때의 더러울 예(穢)자다.
신심없는 사람들을 잘 지켜보기 바란다. 저도 해당이 되는가 모르겠는데, 무슨 꾀를 내도 꼭 지저분하게 해서 음식먹는 것도 지저분하고, 옷도 지저분하고 더이상 이야기하면 제가 속 끓을 것 같아서 이야기 안 한다. 여하튼 올바르지 못해서 신용불량자는 전부 다 정신상태가 지저분하다. 지저분한 것으로 꾀를 내도 꼭 죽을 꾀만 낸다.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 방일이고 해태로 넘어가게 되어있다.
불신에서 방일, 해태로 넘어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치밀하게 되돌아 봐서 ‘내가 왜 이러노, 왜 이리 게을러졌노?’ 다독거리고 열심히 정진하면 자연스럽게 방일을 다잡고 해태를 다잡는다. 그러다 보면 신심(信心)이 생긴다. 그래서 복을 짓고 기도도 잘하고 염불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정진을 잘한다.
어허공중(於虛空中)에 : 허공중에
출성고언(出聲告言)호대 :출성고언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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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등(汝等)은 : 그대들은
당지(當知)하라 :마땅히 알아라.
일체욕락(一切欲樂)이 :모든 욕락이
개실무상(皆悉無常)하며 :다 무상하다.
치문에 뭐라고 나오는가? ‘일기진락(一期趁樂)이요 부지락시고인(不知樂是苦因)이로다’ 한때의 즐거움을 쫓아가 봤자, 말초신경 따라서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아봤자 알지 못한다. 낙시고인(樂是苦因)이라, 그 한때 조금 즐기려고 하는 오락이 지옥고 아귀고 축생고, 고통의 원인인 줄을 알지 못한다.
‘일기진락(一期趁樂)이요 부지락시고인(不知樂是苦因)이로다’ 치문은 치문대로 그렇게 좋은 글을 배웠는데 기억에 하나도 안 남아있고 참 신기한 일이다.
남에게 떼인 돈은 잘 기억하고 욕을 들은 것도 오래오래 기억하는데 공부는 희한하게 휘발유처럼 금방 까먹는다. 모든 향락이 다 무상하고
허망전도(虛妄顚倒)하야 : 허망하고 뒤바뀐 것으로써, 굳이 구분하자면 허망은 분별망상이라서 바깥으로 나오는 안이비설신의 오감으로 남에게 구분하는 것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 볼 수 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안의 집착 때문에 안에서 눈이 뒤집어져 버린 것이다. 안에서 정신이 뒤집어져 버린 것을 전도라고 한다. 제정신이 아니다.
안에서 뒤집혀서 나왔다.
내복을 뒤집어 입으면 아무리 겉옷을 바르게 입어봤자 뒤집어 입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수유변괴(須臾變壞)라 : 잠깐 사이에 무너지는 것이다. 말초신경 때문에 수행(修行)이 유유하초난(惟有下梢難)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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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광우부(但誑愚夫)하야 : 어리석은 사람은 다만 제정신이 아니다. 제일 겁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멍청한 사람이 부지런한 것이다. 그래서 ‘조실자리도 내가 해버리겠다’고 하면 골치 아픈 것이다. 그런 자리는 천거를 하고 법거량을 해서 앉아야 되지 않는가?
예를 들어서 육조혜능 스님은 행자 때도 건당을 했다. 행자에게 사형이 건당을 한다. 그 기치는 법에 건당을 한다는 것이다.
영기연착(令其戀着)이니 : 어리석은 사람은 속에서 연착하게 하는 것이니
여막방일(汝莫放逸)하라 : 그대는 방일하지 말라.
약방일자(若放逸者)는 : 만약에 방일한다면, 자기 단속을 제대로 못한다면 어디에 떨어지느냐?
타제악취(墮諸惡趣)하야 : 모든 악도에 떨어진다.
후회무급(後悔無及)이라하면 : 후회해도 미칠 수 없다. 정신줄을 놓아버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삿된 생각만 계속 증폭되는 것이다. 정신줄을 실념해버리면 그렇다.
삿된 생각만 많이 하고 이상한 소리만 막 하고 있는 것은 안에서 사념이 증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공부에 실념한다. 공부를 잘 까먹는 사람들은 사기가 많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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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제천(放逸諸天)이 :방일하던 제천자가
문차음이(聞此音已)에 :이 음성을 듣고는
생대우포(生大憂怖)하야 : 큰 근심걱정을 하고
사자궁중(捨自宮中)의 : 자기 궁전 가운데
소유욕락(所有欲樂)하고 :모든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욕락, 등 따숩고 배부른 것을 다 던져버리고
예천왕소(詣天王所)하야 : 천왕에게 나아가서
구법행도(求法行道)하나니 : 법을 구하고 도를 닦느니라. 혼침 같이 조는 것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쨍하게 맑은 정신이 없다. 몽매하고 아득해서 눈이 게슴츠레하다.
여기도 둘째시간이 되면 눈이 처져서 “왜 그렇습니까?” 하면 “눈이 아파서 그렇습니다.” 좀 있다보면 안에 생각이 막 동해서 요동을 친다. 생각이 요동을 치면 고요하지 못하다. 같이 앉아있는데도 오리 발이 물속에서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처럼 ‘오늘 경주까지 지금 몇 시간 걸리는데 오늘 몇시에 마쳐줄랑가?’ 계속 그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정감이 없다.
그러나 정(定)이 동(動)을 잡아먹고 고요한 것이 움직이는 것을 잡아먹고 유(柔)가 강(剛)을 이긴다고 하지 않는가. 부드러운 낙숫물이 강한 바위를 뚫어버리듯이 하는 것이다.
선정 삼매는 굉장히 부드럽지 않은가?
경전에 써놓는 바를 보면 굉장히 부드럽고 선정은 무조건 그 밑 터전이, 그 기초가 자비로움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탐진치가 없다.
탐진치, 번뇌가 없으니까 자꾸 선정으로 갈 수 있는 개연성이 높다. 화엄경을 계속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것이 쭈욱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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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피천고음(彼天鼓音)이: 저 천고음이 하늘의 북소리가, 하늘 북소리는 사실 우리 양심의 북소리다.
무주무작(無主無作)하며 : 무주무작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뭘 좀 잘못하려고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데 그 때 ‘야 천고가 울리는 구나’ 해야 된다.
양심이 없는 철면피 같은 사람은 두근두근은 커녕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하늘처럼 툭 터진 사람이, 양심에 찔리는 것을 하려면 두근두근 한다.
무기무멸(無起無滅)호대: 일어남도 쓰러짐도 불생불멸이라. 천고음이 생긴 것도 없고 사라진 것도 없지만 그러나
이능이익무량중생(而能利益無量衆生)인달하야 : 무량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그래서 항상 무엇을 염두에 둔다고 했는가?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진공묘유는 한 단어다. 견성성불도 한 단어다.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올바른 견해를 자꾸 잃어버린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같이 이렇게 모여서 화엄경을 한 번 보고 잘못된 것, 착유(錯惟), 자꾸 어긋나 있는 것, 내 쪼대로 살던 것을 돌이켜서 경전쪽으로 와서 딱 땡겨서 쪽 바르게 해 놓는 것이다. 한달에 한 번씩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산란스러워져 버리면 유산한다고 하지 않는가?
산란스러운 것은 유산(流散) 흘러가서 훅 흩어져 버리듯이 바람결에 밀가루 날리듯이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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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지여래(當知如來)도 : 당지하라 여래께서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 또한 이와 같아서
위욕각오방일중생(爲欲覺悟放逸衆生)하야 : 방일한 중생을 깨우치려고 하시어
출어무량묘법음성(出於無量妙法音聲)하나니 :부처님께서도 한량없는 묘법음성을 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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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무착성(所謂無着聲)과: 이른바 집착이 없는 음성 그러한 말씀
불방일성(不放逸聲)과 : 방일하지 않는 말씀
무상성(無常聲)과 : 무상하다고 하는 말씀
고성(苦聲)과 : 괴롭다고 하는 말씀
무아성(無我聲)과 :무아성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부정성(不淨聲)과: 관신부정(觀身不淨) 사념처라든지 이런 것이 다 해당되는 것이다.
적멸성(寂滅聲)과 :열반적정(涅槃寂靜) 적멸성과 고요한 음성이나
열반성(涅槃聲)과 : 열반의 음성이나, 삼법인(三法印) 사법인(四法印)과 같은 완전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진리, 부처님하고도 상관없이 변함없는 절대 진리 그런 것일 것이다.
무유량자연지성(無有量自然智聲)과 :무량한 자연지성과 자연한 지혜의 성(聲) 자연지성과, 흔히 우리가 일체종지라 이야기한다.
불가괴보살행성(不可壞菩薩行聲)과 : 깨뜨릴 수 없는, 남들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용맹정진하는 보살의 행을 한다는 말씀과
지일체처여래무공용지성(至一切處如來無功用智地聲)이라 : 온갖 곳에 이르는 여래의 무공용지성이라. 무공용 어떤 공덕과 작용을 베풀었다 하더라도, 하나도 집착함이 없고 무주상으로 베풀어 주는 것을 무공용지(無功用智)라고 한다.
화엄경의 이치로 보면 8지보살 이상이 무공용지라고 하고 제7지 원행지(遠行地)까지는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라고 한다.
2지부터 6지까지는 구계지(具戒地)라고 한다.
초지보살은 오온이 개공하는 단계를 환희지(歡喜地)나 정심지(淨心地) 또는 극희지(極喜地)라고 이야기한다.
화엄경 수행차원에서의 이야기다.
무공용지의 냄새가 나는 것은, 무생법인을 얻고 8부능선을 넘어가야 무공용지지(無功用智地)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할 때 수로이행(水路易行)이라 한다. 수로이행이라. 써놓으시면 좋겠다. 물 위의 길, 물 위에 배가 떠버리면 이행이라. 가는 것이 쉽다.
그런데 배가 육로(陸路)에서는 난행(難行)이라. 배가 육지에 있으면 아무리 가고 싶어 용을 써도 갈 수가 없다.
육로에는 난행이라. 장애가 많다.
그러니까 물결치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순풍에 돛단 듯이 떠나가는 것, 수로이행을 여래의 무공용지성이라 이야기한다.
일체처에 이른다고 하는 것도 자비롭지 않고는 일체처가 안된다. 우리는 두서너 곳만 사람들을 챙겨주고 돌아봐줘도 생색을 낸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 다 돌아본다고 하는 것은 어마무시한 대자대비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가 있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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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음성(以此音聲)으로 : 이 음성으로써
변법계중(徧法界中)하야 : 법계에 두루하야
이개오지(而開悟之)어든 : 그것을 깨우치거든
무수중생(無數衆生)이 : 무수한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이
문시음이(聞是音已)하고 : 이와 같은 음성을 듣고는
개생환희(皆生歡喜)하야 : 모두 다 환희심을 내어서
근수선법(勤修善法)하야 : 부지런히 선법을 닦아서
각어자승(各於自乘)에 :각기 자기가 가자고 하는 인생길에
이구출리(而求出離)하나니 : 이구출리하나니 각기 자기속에서 자기의 깜냥껏 모난 사람은 모난대로 세모대로 네모대로 오각형 육각형 대로 이구출리 하는 것이다.
제일 모난 사람은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흑백논리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삼각형 밑에 이각형이라고 하는데 좋으면 엎어졌다, 싫으면 자빠졌다 하는 사람들이다.
이각형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릴 때 되게 모난 사람을 보고 ‘저거는 삼각형도 아니고 이각형이다’라고 하였다.
자승(自乘), 승이라는 말이 앞에부터 쭈욱 나왔었는데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인천승도 있었고 성문승도 있었고 연각승도 벽지불 독각승도 있었고 대승 보살승도 있었다.
자승은 자기 깜냥껏 자기 감당할 만큼 하는 것이다. 당나귀에게 코끼리 짐을 지어서는 못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승에서 벗어남을 구하나니, 그런데 인천승도 안되는 사람이 보살승을 한다고 하면 ‘파리도 조류다 한다’고 한다. 날개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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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혹수성문승(所謂或修聲聞乘)하며 :앞에 인천승은 빼버렸다. 아예 수행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천승을 뺐다고 하는 것에서 화엄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이기적인 것은 수행으로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성문승 같으면 좀 이기심은 있지만 그래도 나중에 잘 회향하면 보살행이다.
이 성문도 성문이면서 보살심을 가지고 있다. 이기심과 보살심이라는 두 개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느 것이 강하게 나타나고 약하게 나타나고 한다.
오종승을 전에 한 번 하기는 했었다.
혹수독각승(或修獨覺乘)하며 : 독각승을 닦으며
혹습보살무상대승(或習菩薩無上大乘)호대 : 혹은 보살의 최고의 으뜸가는 대승을 수습하되
이여래음(而如來音)은 : 하지만 여래의 음성은 그 어떤 것이라도
부주방소(不住方所)하며 : 방소에 머무르지 아니하여
무유언설(無有言說)이니라 : 무유언설이다.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이 없다. ‘심행이 세간을 짓는다’ 마음이 전부 다 짓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이상 이런 것은 헷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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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음성제삼상(是爲如來音聲第三相)이니 : 이것이 여래음성의 제 세 번째 모양이다.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께서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여기 제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화엄수행자는 이와 같이 알아야 된다’하는 것이다.
라. 自在天王의 采女
復次佛子야 譬如自在天王이 有天采女하니 名曰善口라 於其口中에 出一音聲하면 其聲이 則與百千種樂으로 而共相應하야 一一樂中에 復有百千差別音聲하나니 佛子야 彼善口女가 從口一聲으로 出於如是無量音聲인달하야 當知如來도 亦復如是하사 於一音中에 出無量聲하야 隨諸衆生의 心樂差別하사 皆悉徧至하야 悉令得解니라
佛子야 是爲如來音聲第四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자재천왕에게 하늘 채녀가 있으니 이름은 ‘선구(善口)’라. 입으로 한 음성을 내면 그 음성이 백천 가지 음악과 서로 잘 맞으며, 낱낱 음악 가운데 다시 백천 가지 차별한 음성이 있느니라.
불자여, 선구 천녀가 한 음성으로부터 이와 같이 한량없는 음성을 내듯이 마땅히 알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한 음성 가운데서 한량없는 음성을 내어 중생들의 차별한 마음을 따라 골고루 이르러서 모두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의 음성의 넷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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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 불자야
비여자재천왕(譬如自在天王)이 : 타화자재천왕에게
유천채녀(有天采女)하니 : 하늘 채녀, 시녀가 있는데
명왈선구(名曰善口)라 : 그 이름이 선구(善口), 좋은 입이다. 좋은 입이니까 음성으로써 각양각색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 대목은 그대로 ‘여자재천선구천녀(如自在天善口天女)의 소출가음(所出歌音)’이라고 해서 화엄경 입법계품 엔트리 넘버 25번 사자빈신비구니 편에 나온다.
자재천에 선구천녀가 내는 음성, 노래소리와 같다는 것이다. 선구(善口)라는 이름으로 법명을 지어줘도 좋을 것 같다. 남 악담 많이 하는 사람에게 ‘이리와 봐라. 법명 지어줄게, 오늘부터 선구해라’ 선구라는 이름이 악구보다는 안 낫겠는가?
화엄경 제 67권 입법계품 사자빈신비구니편을 한 번 찾아보기 바란다.
사자빈신비구니,비구니스님이라 하면 스스로 아주 ‘깨끗하다, 맑다’ 선지식 중에 이런 부분을 상징한다.
53선지식 중에 출가 승려로서 비구니스님은 사자빈신비구니 한 분뿐이다.
사자빈신비구니가 앉아있는 동산에는 온갖 노래들이 나온다. 모든 음악하는 나무와 보배나무가 있고 보배요령이 흔들리고 나무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마치 타화자재천의 선구채녀가 노래하는 음성이 나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이름을 선구라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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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구중(於其口中)에 : 그 입으로 구중에서
출일음성(出一音聲)하면 :한 음성을 내면
기성(其聲)이 : 그 음성이
즉여백천종악(則與百千種樂)으로 : 즉 백천 종 음악과
이공상응(而共相應)하야 : 더불어서 서로 응대해서
일일악중(一一樂中)에 :낱낱 음악 가운데
부유백천차별음성(復有百千差別音聲)하나니 : 부유백천차별음성이라. 아주 화음이 잘 맞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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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피선구녀(彼善口女)가 : 선구천녀가 선구채녀가
종구일성(從口一聲)으로 : 그 입으로부터 한 음성으로부터
출어여시무량음성(出於如是無量音聲)인달하야 :이와 같은 무량한 음성을 내는 것과 같이
당지여래(當知如來)도 : 마땅히 알아라.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여래께서도 또다시 이와 같아서
어일음중(於一音中)에 : 한 음성 가운데에
출무량성(出無量聲)하야 : 무량한 음성을 낸다.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이나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라. 그런데 저 달은 하나의 강에도 간 적이 없다. 어젯밤에도 달이 참 밝았다. 새벽에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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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중생(隨諸衆生)의 : 모든 중생들의
심락차별(心樂差別)하사 :차별한 마음을 따라서 마음에 좋아하는 차별을 따라서
개실변지(皆悉徧至)하야 :다 가서
실령득해(悉令得解)니라 : 실령득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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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음성제사상(是爲如來音聲第四相)이니 :시위여래음성 의 제4상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제보살마하살이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응여시지니라.
아는 스님 중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스님들이 더러 있다. 인연이 있고 해서 꼭 한 번씩 전화를 하는데 전화할 때마다 제가 묻는다.
“여보세요?”
“예 스님”
“내 음성이 미국에 있나, 한국에 있나?”
농담처럼 물어본다.
그래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내 음성은 미국에 있지도 않고 한국에도 있지 않지만 미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다.
오늘 강의 마치겠다.
(죽비소리)
하강례
“바른 불법을 좀 더 오래 이야기하겠습니다.”
“모두 반가운 이름들입니다. 3개월 전, 90일 전에 늘 다니는 마당에 산책을 나갔다가 낙상을 해서 그만 고관절이 깨져서 새로 갈아 넣고 그동안 재활훈련을 열심히 하고 어제 오전 10시에 퇴원해서 이렇게 화엄전에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어제 염화실 까페에 글을 올렸고, 오늘 아침에도 올렸고 그다음에 용학스님이 아침부터 일찍이 와서 유튜브 방송 점검하고 그래서 오늘 오후에 예전처럼 오후 시간에 이렇게 맞춰서 여러분들을 뵙게 되었습니다.”
5월 25일 부처님 오신 날을 이틀 앞두고 무비스님의 유튜브 방송 화엄경 법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전에 한 번 연습 방송을 하시고 이날은 늘 하시던 대로 오후 2시에 방송을 하셨다.
큰스님께서 전에보다 더 듣기 좋게 숙련된 음정 박자로 “아름다워라 환희로워라 대방광불화엄경”을 노래부르시며 청중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셨다.
거기에 ‘감사하여라’ 한 구절을 더 넣어야 된다고 작곡자인 ‘라마가수’도 언급하셨다.
들어오는 청중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정하게 부르셨다.
이날 다시 펼친 화엄경은 입법계품 3권으로 문수동자를 친견하러 온 오백 동자중에 선재동자가 문수사리보살을 경배하면서 ‘그 수레에 저를 타게 하소서’라고 청한 뒤 ‘문수보살이 선재동자를 찬탄하다’라는 대목이었다.
법을 청하는 선재를 ‘문수사리보살이 큰 코끼리가 몸을 돌려 돌아보듯이’ 보았다고 경전에 나온 대목을 읽으시면서 “아, 나도 그렇게 행동을 했어야 됐는데. 그랬으면 다치지도 않고, 설사 다친다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몸을 다칠 정도로 넘어지지는 않았을텐데.” 하셨다.
경전 속 문수보살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도 “얼마나 점잖고 거룩하고 품위 있는 행동거지인지를 생각하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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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은 이날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그저 자나깨나 보살행, 중생을 위한 보살행이 불교의 최종 목적이고 부처님의 화두이고 화엄경의 화두이고 불교의 화두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야기는 전부 자기 편하자고 하는 것이고요. 그런 것도 불교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기 한 사람에게 잘하는 것 그것도 좋은 불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그러나 바람직한 불교는 남을 위한 마음,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 자기는 제도를 얻지 못했지만 먼저 남을 제도한다는 마음입니다.
제가 큰 고행을 하고 다시 이렇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바른 불법을 좀 더 이야기하라고 하는 뜻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됩니다.
바른 불법, 정말 모두 불법 불법 이야기하는데 지구상에 수억이나 되는 불자들이 있죠. 그런데 과연 바른 불법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따져본다면 지금 그 바른 불법 제대로 아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바른 불법 아는 사람이 바른 불법을 한마디라도 더 전하고 사는 것, 그래서 그 바른 불법을 깨우치게 해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임무고 해야 할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불교 신자들은 다 보살행을 하지요. 그것을 얼마나 하는가 크게 따질 것이 없습니다. 하는 데까지 내 능력이 닿는 대로 내 마음이 내키는 데까지만 해도 훌륭합니다.
그게 차츰차츰 불어나는 거죠. 차츰차츰 성장하고요.
내가 넘어지던 날은 새싹이 올라올까 말까 하는 때였는데 어느새 90일이 경과한 뒤에 돌아오니 온 산천이 푸르게 푸르게 저렇게 물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처음 마음 낼 때는 미미하지만 그것이 세월이 가고 또 반복하고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살행의 정신이 그렇게 세상을 물들이게 됩니다.”
이어지는 경문은 선재의 질문이었다.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행을 닦고 보살행에 나아가고 보살행을 행합니까? 어떻게 보살의 행을 깨끗이 청정하게 훌륭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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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이후로 큰스님은 여건이 되는 대로 시간을 버리고 상설변설 어느 시 어느 때나 화엄법회를 여시는데 멀리있던 구름이 한곳으로 몰려오듯, 때맞추어 청중들이 속속 도착하여 큰스님과 같이 노래 부른다.
아름다워라 환희로워라 감사하여라 대방광불화엄경!
감응하시는 불보살의 자비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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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응하시는 불 보살님의자비 대방광불 화엄경ㆍ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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