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아니라 결혼식에 대한 글이다.
결혼 자체야 각자 다 생각을 정리해 놓고 있을 텐데
내가 무슨 말을 더 보탤 것인가?
다만 결혼식이라는 의례 행위에 대하여 몇 자 써 보는 것이다.
의례(儀禮)의 종류
관혼상제(冠婚喪祭)라고 하지만,
관례(冠禮)는 사라진 지 오래다.
따라서 남은 의례는 혼례(婚禮),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제사다.
제례(祭禮)는 참 소략해 졌는데,
기독교 개신교 신자들은 그나마 하지 않는다.
개신교도 추도식을 지낸다고?
안다. 알지만 그것은 교단, 교리 차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신도들의 개인적 행사다.
아직도 옛날 식으로 제사 모시는 집들이 제법 있지만,
나는 지금 일반적 수준을 말한다.
제사의 시작은 제수(祭需) 준비부터인데
그 대부분을 기성품(?) 사서 올려 놓고
절 꾸벅 하고 끝내면서 번거롭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며,
더욱더 핵가족화 되면서 마침내 소멸해 버리지 않을까 한다.
(그 잔해 조각이 제법 오래 남을 수는 있을 것이다.)
제례(祭禮)는 이렇게 소멸(?)해 가지만
아직 굳건히 남은 것은 혼례(婚禮), 상례(喪禮)고
이 두 가지는 인류 문명이 계속 되는 한 살아 남지 않을까 한다.
모든 의례(儀禮)는 기본적으로 낭비다.
의례(儀禮)에는 (주로 혼례, 상례라고 위에서 이야기 했다)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고, 모이면 이거 낭비 아냐? 하고
한 마디 하는 사람 반드시 나오고, 그러면 다들 거든다.
그렇다. 낭비 틀림없다.
그런데 모든 의례는 기본적으로 낭비인 것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 인류는 그 낭비를 꼭 하고야 마는 것일까?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 는 둥 (윤리적 관점)
하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는 둥은 (종교적 관점)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의 관심은,
윤리와 종교가 왜 그런 식으로 규정하고 있는가?
교리가 왜 그쪽 방향으로 발전했느냐? 에 있다.
어떠한 윤리와 종교적 신념도
사회, 사람들의 이익에 반(反)하여
생겨나지는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아주 괴이하게 보이는 관습이나
시대에 한참 뒤떨어 진 듯한 윤리, 종교적 원칙, 제의(祭儀)도,
발생 당시에는 그 사회에 어떤 기여가 있었을 텐데,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따름일 것이다.
곧 나는 종교, 윤리 이전에 의례가
사회와 사람들에게 주는 이익에 흥미가 있다.
그 낭비(?)적인 혼례와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먼저 장례(葬禮),
그 옛날 부모 초상 치르다가 가산 탕진한 사람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제 상례-장례는 더 이상 간소화 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 같다.
어머니, 아버지 죽자 하루 만에 해 치운다(?).
(3일장이라지만 어떨 때는 만 하루다)
모든 절차, 용품, 서비스는 상품화(?)되어
돈 내겠다고 하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대령한다.
돈으로 떼우면 신경 쓸 일이 없다.
밤이 깊으면 빈소 닫아 걸고 상주들 모두 자니,
밤 늦게 문상하면 눈치가 보인다.
삼우제 지나자 마자 모임에 나와 낄낄 웃어 댄다.
부모 아니라도 사람을 떠나 보내는데 더 이상 심플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거 괜히 낭빈데 하는 소리하는 사람 여전히 있다.
지금 하는 정도가 낭비라면, 시신(屍身)을 쓰레기 분리 수거 할 때,
버리나? 어떻게 하나?
여기서 잠깐 옆길로 새면,
의례가 있을 때 마다 화환에 시비 거는 사람들 있다.
꽃이 낭비 정말 맞는가?
물론 화환이 너무 많이 들어와 채 늘어 놓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일을 어떻게 처리해도 표준이 있고, 편차가 있는 법이다.
비유하면, 서울 강남에 고급 외제차 즐비하고
백화점에서 돈 펑펑 써 대는 사람 있다고
우리나라 국민이 시방 낭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편차를 가지고 표준을 의심할 필요는 없으며,
꽃 한 송이 없이 쓸쓸한 식장도 얼마던지 있는 것이다.
의례에 꽃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이며 꽃이 또 낭비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꽃을 써 줘야 화훼 농가도 살 것 아닌가?
우리나라처럼 꽃 소비가 저조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우리는 꽃은 먹지도 못하는데, 괜히 돈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지나친 것은 그래도 막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적절하게 행동하게 할,
그런 꾀 있으면 한 번 발표해 보시라.
장례는 망인(亡人)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은 의식이 없는데,
뭘 해 준들 어떻게 알며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종교 있으면 하느님 곁으로 가시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또 하지 않을까?
그건 장례가 바로 산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례의 의미는 살아 남은 사람들이 죽은 자를 순순히(?) 보내 주는 데 있다.
송별회도 마찬가지다.
떠나가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 보내는 사람을 기억에서 지우는 절차다.
평생 같이 살아 온 근친(近親)을 적절한 의례에 따라 떠나 보내지 못한다면,
그 남은 인생은 망자(亡者)와의 기억에서 헤어나기 힘들 것이다.
장례에 몇 푼 쓰는 쪽이 오히려 싸게 먹힌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부조도 들어 오지 않는가?
혼례(婚禮)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경우가 선진국에는 아주 흔하다.
하도 많아서 이상하게 보는 것이 실례요, 인권 침해로 오인 받을 수도 있다.
영어의 걸프렌드, 보이프렌드는 여자, 남자 친구로 직역(直譯)할 것이 아니라
동거 남녀, 또는 내연의 남녀로 의역(意譯)하는 편이 더 적당할 듯 하다.
이렇게 그냥 동거해 버리면, 그야말로 낭비(?)가 없다.
그러나 그래도 낭비-결혼식 올린 남녀가
백년해로(百年偕老)할 가능성, 물론 이혼 많이 하고 있고, 점점 늘어 가지만,
끝까지 같이 살아 갈 가능성이, 야합(野合)한 경우보다 훨씬 높다.
아는 사람 모두 모아 놓고 떠들썩하게 식을 올리는 것
따라서 당연히 돈을 쓰지만, 결코 낭비만은 아닌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결혼식에도 이거 다 낭빈데 하는 이야기 나오지만
장례 때보다 그 목소리가 현저히 낮다는 점이다.
돈 낭비(?)는 아마도 장례 때보다 혼례 때에 몇 배 더 할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돈을 쓰는 것은 꼭 낭비 같지만
앞으로 창창하게 살아갈 자녀에게 쓰는 것은 투자 같이 생각되어서 일까?
‘내리사랑은 있지만 치사랑은 없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앞서도 말했지만 장례에 쓰는 돈도 결국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이상에서 의례가 얼핏 낭비같이 보이지만
꼭 낭비만은 아니며, 그 낭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이 더욱 힘들어 질 것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고 믿는다)
의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할까?
자 이제 의례를 하긴 해야겠는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할까?
어느 문화도 과거의 파편(fragment)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모든 의례의 뿌리는 과거에 있다.
새로운 의례를 만드는 노력을 여러 차례 해 보지만 어딘지 어색하고,
기실 그 새것도 결국 과거의 파편을 변형한 것이다.
이렇게 과거(過去)를 외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옛날 그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에 과거부터 전해 오는 의례 중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할까? 하는 문제에 부딪친다.
온고이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 !
우리 문화의 뿌리를 되돌아 볼 필요는 분명히 있지만,
그대로 따라 할 것까지는 없고, 또 할 수도 없고,
지금 형편에 맞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쓰다 보니 장황해 졌다.
(이게 나의 병폐다.)
다음 글 꼭지부터는 과거의 혼인 의례와, 그 파편을 돌아보며
그 중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대하여
간단 간단하게 써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