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살 엄마의 딸들
류 근 만
을사년(2025년) 정월 열이틀 일요일 새벽, 요란한 벨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비몽사몽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열었다. 낯선 번호다. ‘누구냐?’고 물을 겨를도 없었다.
“빨리 오세요, 어머니가 이상해요”
나는 더 물을 것도 없이 서둘러 출동채비를 했다. 옆에서 깊은 잠에 빠졌던 아내도 허겁지겁 따라나선다. 급히 차를 몰고 가는 중에 또 핸드폰이 울린다. 끝자리가 119번이다. “어디쯤 오세요? 어머니 그것 신청했나요?” 나는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 겁니다.” 출입문을 열고 로비에 들어섰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내가 금방 도착한다는 소릴 들었는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머니 딸 중 한 명이 기다렸다. 나를 보는 순간 달려와 내 팔을 잡는다. 면회 갔을 때 자주 보던 요양보호사다. 방문자는 근무자 도움 없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다. 그는 울먹이면서 나에게 상황 보고하듯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머니는 “식사시간 10분 전에 거실로 나오셨고, 7시에 밥 한 그릇 뚝딱 비우시고, 커피도 드셨어요. 양팔을 가지런히 탁자에 올려놓고 엎드리시더니 숨 쉬는 낌새가 하도 이상해서 급히 119에 연락했어요”라고 한다.
얘기를 듣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멈췄다. 모두 숨을 죽인 듯 조용하다. 슬픔에 잠긴 체 멍청히 서 있는 탁자 두 개가 을씨년스럽다. 종사자 두어 명이 바쁘게 움직인다. 그렇게 많던 엄마 딸들도 안 보인다. ‘왜 이리 조용하냐’고 물었더니, 오늘이 일요일이란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출근 전이다. 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넘었다. 내가 전화를 받은 시간은 7시 19분이었다. 짧은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119 출동대원과 경찰 두 명이 어머니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그 들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응급대원은 어머니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을 했다는 소릴 듣고 철수했다. 경찰은 내 동의하에 어머니 몸수색을 했다. 혹여 타살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이다. 경찰 임무 중 정해진 절차란다. 경찰이 확인한 후 의사까지 현장으로 불렀다. 사망진단서를 받기 위해서다. 응급실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누워계신 침대를 밀고 원래 계셨던 자리로 갔다. 덮인 이불을 떠들고 어머니 얼굴에 내 얼굴을 비볐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내 목을 감싸고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의사의 사망 확인까지 받았으니, 그 자리는 이제 어머니 자리가 아니다. 옆자리의 식구들과는 극과 극이다. ‘죽은 자와 산 자‘ ’이승과 저승‘ 의 길로 나누어졌다. 참으로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 아쉽지만 같은 방 식구들과 이별할 차례다. 시설 측에 대기실을 부탁했다. 5층에 임시 머물 방이 꾸며졌다. 하나둘 모여드는 가족들이 대성통곡이다. 나도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옆 사람을 의식해서 눈물을 삼켰다. 엄마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동생들을 다독였다. 조금 있다가 실컷 울 장소를 마련하겠다면서 ---
이곳은 내가 4년여 동안 수시로 드나들었던 시설이다. 친근감이 가는 곳이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많은 딸을 얻었다. 면회하러 가면 언제나 마주하는 엄마 딸들!, 볼 때마다 그렇게 이쁘고 귀여울 수 없었다. 자식들이 못하는 뒷바라지를 그들은 정성을 다했다. 간호사 요양보호사 복지사 모두가 국가가 인증하는 자격증 소지자다. 입소자를 자기 부모처럼 모실 책임과 의무가 있다. 반복적인 교육으로 몸에 밴 친절이다. 그들을 보면 언제나 감동적이고 감격스럽다. 포옹이라도 해주고 싶을 만큼 고마운 엄마의 딸들---
평소엔 6층 생활실에서 면회가 가능했지만, 나는 언제나 1층 로비를 고집했다. 휠체어를 탄체로 양손을 들고 어머니가 아들을 환호했던 장소다. 아들은 말수가 적었지만, 옆에서 봐 주는 딸들은 달랐다. 마치 어린애한테 재롱을 부리듯 어머니를 웃기기도 하고 놀리기도 했다. ‘아들 셋, 딸 넷’은 엄마의 자랑 메뉴다. 나에게는 딸들을 자랑하셨다. 네가 큰 오빠라면서 손을 맞잡아 주기도 하셨다.
나중에 그들을 통해 안 얘기지만,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이쁜 치매’라고 귀띔 해줬다. 그래서 원 내에서는 소문난 어르신이다. “사랑한다, 이쁘다, 고맙다는 말을 항상 달고 사셨다”라고 한다. 면회가 끝나면 어머니를 태운 휠체어는 뒷걸음질 쳤다. 서로 등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엘리베이터 문이 닻일 때까지 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셨다. 이는 요양원의 규칙이란다. 이젠 그런 모습도 볼 수가 없다. 서로가 감싸주고 믿어주고 사랑으로 맺어준 정은 접착제보다 더 끈끈했다.
4년여 전, 어머니가 입소하시고 나서 코로나 19가 터졌다. 그런데 어머니가 요양원을 떠나는 날 역시 그 당시의 상황이 연출됐다. 독감에 폐렴으로 사망자가 급증하여 장례식장과 화장장이 초만원이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장례식장에서 운구차를 보내 어머니를 모셨다. 우선 안치실에서 딸들을 실컷 울도록 했다. 빈소는 다음 날 차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죽는 날도 예약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빈소를 차리려는데 어머니의 장수 사진은 너무 오래되어 빛이 바랬다. 요양원에서 찍은 평화스러운 모습의 사진을 골랐다. 얼굴은 뽀글거려도 웃는 모습에 분홍색 한복을 입으신 사진으로 대체했다. 새로운 기술로 합성한 영정사진이다. 참으로 좋아진 세상이다. 100세가 넘은 고인이 웃는 얼굴로 80여 명의 자손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어머니의 가시는 길은 순탄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함께 지어놓으신 수의를 입으셨다. 지금은 고인이 생전에 즐겨 입었던 옷을 입고 간다는데 어머니는 달랐다. 발인제를 지내고 어머니 시신은 운구차에 실렸다. 운구행렬을 호위하듯 앞좌석엔 구순을 바라보는 맏사위가 영정을 들고 자리했다. 맏상제는 옆에 앉아 정수원가는 길을 인도했다. 화장로 앞 상주 대기실엔 생전에 제일 귀여워했던 증손자가 끝까지 지켰다.
이십사 년을 먼저 가신 임(夫)을 찾아가시는 어머니의 행차길! 겨울답지 않은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도 감동했나 보다. 취토와 위령제를 끝으로 “안녕히 계시라고~” “잘 가라고~” 하면서
삼우제를 지내고 오는 길에 어머니가 계시던 곳을 들렸다. 자식들 대신 어머니를 즐겁게 보듬어준 ‘101세 어머니 딸들’이 고마웠다. 언제나 간사스럽게 수다 떨던 딸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어머닐 뵙고 나올 땐 언제나 등이 보이지 않도록 뒷걸음쳤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어머니 딸들에게 등을 보이며 나오는 얼굴은 침통했다. 고마웠다는 말은 울먹임과 함께 입속에서 맴돌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