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도 살인자로 규정한 '밀고자' 이승만
이 자료는 kbs가 방송한 자료도 포함해서 구성한 내용 이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축출 된 것은 논문 때문입니다.
또, 전명운 장인환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더 있습니다. 우선 교민들은 전명운 장인환의사를 구명하고자, 당시 하와이 바나나농장 에서 어렵게 일한 동포 들이 정말 목숨 같은 돈을 모으게 됩니다. 애국지사를 죽일 수 없다는 애국심'에서 동포애가 발휘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포들 중 아무도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가 없었고, 황색인종을 도와줄 백인은 없었습니다. 다행이 하버드 석사'요, 프린스턴 대 철학박사인 이승만을 찾아갔고, 이승만은 수락합니다.
그러나 1등급 호텔에서 자신이 머물게 해달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조건을 내세워 교민들은 모금한 그 피 같은 돈으로 그의 조건을 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쓸데없는 곳에 돈만 쓰고 시간만 허비하다, 마지막엔 나는 살인자를 변호하는 통역은 할 수 없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망국의 한을 품은, 교민들을 타국 땅에서 믿었던 이승만 땜에 또 한 번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 없는 절망에 땅을 치며 통곡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그가 천재적 기질을 갖고 애국을 한 사실은 1904년 이전 1898년 정부전복을 꾀한 죄목으로 투옥됐다가 "민영환에 의해 미국으로 유학 온 것 외엔 뚜렷한 것이 없다. 1908년 3,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장인환"의사가 미국인"친일파"스티븐슨"을 살해 했을 때 이승만은 이들의 법정통역을"살인재판"으로 명명하고 무참히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테러로 간주하고 살인자라 맹 비난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일까?
2.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곤란하게 하므로 통역을 거절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던 거절을 함으로써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자신과 테러를 차별화시키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이 승만 의 야심 과 비열한 욕망 그의 야심이 드러난 것은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3. 1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따르는 교민들을 규합하여"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한인대회의 발언이었다."그는"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독립은 국제연맹에"청원서"를 내고 "위임통치를"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며, 독립이 된다면, 반드시"기독교"국가를 건설하고"미국식"민주주의를 표방할 것이라고 역설을 하며 가장 양심적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처럼 2박 3일간 미국각지에서 몰린 교민들을 기만하며 치렀다. 이날 이승만은 미국의 신화 같은 초대대통령"워싱톤이 앉았다는 의자에 앉아건방을 떨며"새한국의 초대대통령이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대통령 취임식 까지 했다.
이때는 이미 임시정부의 직함인"국무총리"직을 박탈당하고 퇴출당한 아무것도 아닌 신분인데도"임정의 대통령"직함을 그냥 사용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기인 것이다. 마치 그의 행위는"그리스신화"의 기회의신 "카이로스"를 연상 시켰다.
▲ 1919년 3.1절을 기화로 미국"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회"의 이승만 과 그가 규합한 순진한 교민들. 몇 안 되는 이들을 모아놓고"대통령' 취임식을 했다.
▲ 죠지 워싱톤의 의자와 그 의자에 앉은 이승만
그는 미국본토에서"박용만'의 대의에 참여와 협조를 빙자해 하와이로 건너 와, 그곳애서 교육 사업으로 학교를 세워"역사 와 세계사를 가르치고"교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를 기억하는 교포들의 증언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그는가는 곳마다"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으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증언 했다.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이 믿고 만든 교회와"감리교중 하나만 선택하라며, 교회를 분열 시켰으며, 이것은 자신이 세운 자신의 우상화 종교를 믿고 자기를 추종하는"사제"가 되라고 강압적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는 박용만과 "대조선국민군단"의 와해를 획책키 위한 고도로 기획된 야비한 이승만 식의 전략이었다. 급기야 이승만파 와"박용만'파로 갈리어 분열 됐는데, 하와이 교민 1세대들은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의 상처로 남게 되었고 이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 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KBS에서 어렵잖게 취재한 증언을 들어보자.
▲ 이승만은 하와이교포들사이에 반목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서로 앙숙이 되게 철저히 양극화 시켰다.
밀고성 증인이 된 이승만
또, 그는 증인이 아닌 밀고자 로 전락하는데........ 그로인해"박용만은 유죄판결을 받아 몰락하고"대조선 국민군단"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눈엣가시 같은"박용만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하와이 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박용만을 추종하던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동조를 거부하자, 본격적인 테러와 폭행을 감행했으며 총기난사 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의 증언은 밀고성 고발이며 결의형제 의 결속을 배반하고, 교포사회의 애국심을 무참히 짓밟은 반역행위였다. 어떠한 변명과 구실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이었으므로, 굳이 변명을 한다면, 이는 마치"씨저"를 살해한"브루터스의 웅변과 같을 것이다. 하와이와 같은 좁은 땅에서 외교를 위한 동족을 범법자로 만든 파렴치한 짓이었고, 개인의 야심에 애국심을 뭉개버린 그의 독선적인 욕망의 극치였다. 그의 테러행각은 오늘날 잘 포장되어 애국과 한국의"국조"로, 모래위에 누각처럼 서게 됐다. 그를 옹립한"뉴라이트"의 공로다.
▲ 사진에 보이는 빽속에 야구배트가 있는걸 보아 폭행직후"기념촬영"을 한껏 같다.
동시대에"시카고"에서 악명을 높이던 이태리계"깽두목 알 카포네"와 다를 게 무엇인가? 사진에 보이는 빽속에 야구배트가 있는걸 보아 폭행직후"기념촬영"을 한껏 같다. 누굴 해한 것인지? 기념사진을 찍은걸 보면, 대단한 인물에게 폭력을 가한 것 같다. 대한민국"국부의 경력치곤 너무 소름끼치게 비열하다. ▲ 사진은 교민들에게 돈을 갈취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이다.
▲ 사진은 자랑스러운"박용만의"대 조선군단"의 훈련장면이다.
▲ 이 분이 박용만씨다. 님은 1928년"베이징에서 흉한의 습격을 받고 살해 되었다. 누가 살해했는지…? 명확치 않다. 1925년 베이징에서"이승만의 대통령직을 탄핵한 후 3년 뒤였다. 이들의"결의형제"맹세는 이렇게 끝났다.
▲ 이승만과 그를 지지했던 어리석은 동지회다. 이들은 같은 동족에게"테러와 총기난사를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은 자신의 욕망을 달성키 위해"전명운"장인환"의사, 및"안중근 의사까지"살인자로 규명하고 활동시킨 단체다.
본격적인 하와이교민들을 갈취한 수단들
▲ 이승만은 교민들에게 돈을 각출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하여 돈을 걷어 드렸다. 아래는 우표 교민들의 돈으로 귀족처럼 외교에 힘쓴다는 명목 하에"호의호식"하며"직함(대통령)에 맞게 생활하는 이승만, 그러나 교민들은 사탕수수 밭이나, 파인애플 공장에서 힘들게 벌어 기탁하고 강제로 채권과 공채를 사야만 했다. 그 돈은 몽땅 이승만의 주머니로 입금 됐으며 고생하는 교민들에 비해 아주"핸섬"한 젠틀맨이다.
이승만 의 라디오 방송 의 효과 와 이용
하와이 의 사정을 알길 없는 고국의 동포들은 이승만의"라디오"소리에, 이승만은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할 구세주 인양 대단한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그의 외교능력이 포장된 라디오 방송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우매한 국민들은 이승만을 너무 몰랐었다. 예나 지금이나"매스컴' 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도 이승만을 우상화 하며 행적을 포장하는데 열을 올리는 친일사관에 젖은 노예집단들이 우리나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때 임정에선"총리"와 대통령직을 박탈하고"주미외교위원회"위원장에 위촉했으나, 그는"떠들지 말라"며 자칭"대통령직을 고수했다. 우리헌법 전문에"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기록됐는데, 이때는"상해임시정부의 법은 절대적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떠들지 말라"고 밀어 붙였다. 무법자 의 일방적 추태인데도, 오늘날 추종자들은 한술 더 떠 "헌법전문"마저 고치려 한다. 그 첫 번째 행태가 1948년을 건국절로 명명하고 이승만을"국조로 옹립, 임시정부 역사를 대한민국과 별개의 고난의 항쟁사로 묶어,"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를"세계적인 테러리스트"오사마 빈라덴"과 동격으로 비하시킴을 당연하다고 외치고 있다. "고려대" 한승조, 육사22기 紙 萬 圓, 박효성, 안병직, 류석춘, 복거일, 이명희 등 을사5적 과 같은 맥락의 인사들이다.
전쟁영웅"맥아더"의 후광
귀국한 이승만에게"러브콜"을 한 무리들은"친일파 들이었다."하지중장"의 입장에서도 통치의경험이 있는"친일파"들을 처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승승장구 남북단일 독립국이 아닌 남한단독정부에 열을 올려 장애물을 제거해 나갔다."여운형"도 암살되고, 김구도 제거하고, 동족상잔 의 비극 6.25, 장기집권에 최대난적 신익희의 돌연사, 조병옥의 위수술중 사망,"죽산 조봉암의 빨갱이 죄목으로 사형집행, 3.15 부정선거, 4.19 혁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 시켰는가? 4.19혁명 중, 하와이로 도주, 망명, 죽은 후 시체로 귀국, 이분을"대한민국의 국조로 모신다니……. 국민이여, 지금은 눈을 부릅뜨고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 입니다. 자칫하면, 맥아더도 제2의 국조로 섬겨질까 두려워 집니다. 이승만의 등장으로 이득을 본 집단은"친일파"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대한민국"1%에 해당하는 귀족으로 그들의 권력과 재력은 국가의"명운"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역사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쳐, 마치 자신들이 애국의 선봉에 희생자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믿는"기독교"에 이런 무리들이 선발대라니…….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가룟유다"의 후예들이란 사실 앞에 어이없어 목 놓아 울분의 기도만 할뿐입니다. 과연, 이들의 행위가"성경적"일까요? 의문 입니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을 훼손하려는 사람들, 이해가 갑니다. 맥아더가 없었다면…….이승만이 쉽게, 또 빨리 귀국 할 수가 있었을까요? 또, 민족분단이 됐을까요? 친일파 의 득세가 가능 했을까요? 그리고 독재가 계속 됐을까요? 두려운 것은 맥아더를, 제 2의 국조로 섬길까 두렵습니다. 그는 한낱 전쟁"광"이었을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전쟁광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이승만도 살아생전에 자신의 많은 동상을 세워 국민들에게 우상대접을 받던 사람입니다. 이것은"기독교적"이지도 않고, 더더욱 성경적 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오는 걸 까요? 우리나라 역사에"3명의 장로"대통령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 섬기기에 실패한 대통령 같습니다."이승만 때는"민족 분열로"동족상잔"의 6.25,"김영삼"때는 I M F 의 재앙, 이번"이명박 장로는 어떻습니까?"강부자 내각"광우병 소고기, 니므롯의 창조물"대운하"경제는 I M F 보다 더 심각합니다. 국가분위기는"공안정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외교는"아부"자체 입니다. 어찌 우리의 문제를 미국에 매달립니까? 회개가 필요합니다. 내재한 개인의 욕망과"우상'을 떨어내십시오.
▲ 그리스 신화 의"제우스'의 아들"기회의신"카이로스 앞 머리털 만 있는 카이로스, 뒷머리 털은 없습니다.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데 수평을 유지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등엔 균형에 마지않는 큰 날개와 양 발 뒤꿈치엔 조그만 날개가 있습니다. 커브나"턴"을 할 때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까? 불안전한 기회는 기회가 아닙니다. 기회처럼 보이는 함정일 뿐 입니다. 오만과 독선의 독재와 종말
위 사진은 3.15"정부통령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야당참관인을 내쫓고 투표함을 교체하여 개표를 하였는데, 여당당선표가"유권자수"보다 많아 표를 줄이는"촌극"도 연출됐으며, 부정선거가 극명해 지자"마산서"부정선거"반대운동이 벌어진 후"행방불명된"김주열"군의 시신이"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발견됐다. 서울 종로에선"고려대"학생들을"정치깡패"들이 집단으로 폭행하여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주동이 된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름하여 4.19혁명이다. ▲ 사진은 경무대(청와대)에서"이화장 으로 피신하는"이승만"일행의 사진이다. 당시 이 신문엔 4.19 혁명을"데모"로 표기 했는데, 이때는 일시적"데모"로 간주하고 기사를 올렸지만, 날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성공적 혁명이 되었다. 그것도 자랑스러운, 독재를 몰아낸"민주혁명"이었다. 그러나 2008년 현재엔"뉴라이트"가"혁명이 아닌"데모라고 비하 시킨다. 꼭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다시 이시대로"회귀"하겠단 것인가?
이 날의 혁명은 처절했다. 이때 본인은 학교를"땡땡이"치고"소공동"경남극장"에서"죤 웨인, 스잔헤아워드, 주연의 "징키스칸"영화를 1회 관람을 하고 시청 앞으로 나오다 혁명대와 휩쓸려 전차를 타고 효자동 경무대 앞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경험을 했다. 6.25전쟁 때도 경험 못한 극한의 경험이었다. 총에 맞아 튀는 피 ! 비명조차 못 내며 쓰러 지는 학생들 ! 당시 고교생 이던 나와 친구는 너무 놀라"눈알이 뒤집혔다는"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현장의 참상이 여러 날 꿈속에서 나를 괴롭혔다. ▲ 사진은 부정선거로 당선된 부통령"리(이)기붕이 그의 장남"육군소위"이강석'의 총에, 일가족 모두 사살되고"강석은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어찌 보면"이승만 보다는 자신들의 만행을 일찌감치 깨닫고 선택한 용단이라 하겠다. "리기붕"의 가족은 이랬다, 父 이기붕, 妻 박 마리아,長 男 이강석, 次男 이강욱 이었다. 원래"이기붕"은"국일관 지배인 출신으로"부통령 재목이 아니었다. 항상, 허약한 체질에 용기보다는 YES MAN의 전형이었지만, 그의妻"박마리아"는"놀부妻와 같은 기질의 여인으로 한때, 정계를 시끄럽게 한 그녀는 "이승만"에게 자신의 長男인"이강석을 養子로 입적시키고 李起鵬 의 출세를 진두지휘 한 여인 이었다. ▲ 사진은"정치깡패' 두목,"이정재"다. 그는"경무대 곽영주"에게 발탁되어" 반공청년단, 화랑동지회, 등 반공이 들어가는 단체는 모두 연관됐으며, 주로"야당"탄압이 그 주목적이었다. 마치"이승만이"하와이'에서 펼쳤던 폭력테러 집단을, 그대로 계승한 것 같다.
▲ 사진은"경무대를 빠져나와"이화장'에서 주위동정을 살피는 이승만이다.
▲ 좌측의 검정뿔테 안경의"허정"(당시 국무총리)씨와"하와이"로 쫓겨 가는 이승만 남산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 이동상은 시골서 서울 관광을 오면 꼭 둘러 절하며 숭배케 하던 동상. 살아있는 사람을 동상을 세우고 참배하는것은 우상숭배가 아닌가? 이것은 기독교적이지도 않고, 더더욱 성경적 이지 않다.
그러나 성난 학생과 국민들은 이동상을 두들겨 부숴 버렸다. 목이 떨어져 땅바닥에 뒹군다. 그런데"뉴라이트에선 다시"세종로 복판에 이 영감탱이 동상을 또 세운단다. 경제도 어려운데 그 돈을 헐벗은 서민들한테 사용 할 것이지.
▲ 사진은 사형직전의 경무대 의 작은 왕 "곽영주"의 사진이다. 이정재, 임화수, 등 깡패는 모두 사형 시켰다.
▲ 이기붕의 집을 불태우는 학생과 국민들 그러나 국민이 쫓아낸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망친 후 그곳에서 도 교민들에게 그리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하와이를 택했다.
귀소본능 이랄까? 온갖 만행을 저질렀어도"하와이 는 그를 대통령 의 발판을 만들어 준 곳이기 때문인 것이다"그러나 교민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것은"대통령"이 된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리고 기획 없는 통치철학을 통해 동족분열과 정적 제거, 제주 4.3사건, 여순반란 사건, 6.25 동란, 44,5입사건, 3.15부정선거, 12년간 그의 정치적 행태가 말해주듯, 철권통치 의 교훈이었다. 정권연장에 급급하여 온갖 해선 안 될, 민주주의 의 역행하는 군주식"독재"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고 종당엔 하와이로 도망쳐 1962년 병속에서 자신의 왕국을 회상하며 1965년 시체가 된 뒤에야 조국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 그의 독재로 혼란에 빠졌던 우리민족과 정치적 후퇴를 생각 안할 수 없다. 더욱이 이분을 국조로 섬기기 위해 임정을 무시하고 "법"과 역사를 바꾼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다.
이승만 의 재평가
글쓴이 : 세상만화(청아사랑) 2008.11.18
장인환 의사
전명운 의사
죽임을 당한 미국인 "스티븐스"
귀소본능 이랄까? 온갖 만행을 저질렀어도 "하와이는 그를 대통령의 발판을 만들어 준 곳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교민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것은 "대통령"이 된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리고 기획없는 통치철학을 통해 동족분열과 정적 제거, 제주 4.3사건, 여순반란 사건, 6 .25 동란,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사건, 노근리, 거창사건, 부산 정치파동, 44,5입사건, 3 .15부정선거, 온갖 셀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독재자 였다.
12년간 그의 정치적 행태가 말해주듯 철권통치의 교훈이었다. 정권연장 에 급급하여 온갖 해선안될, 민주주의 의 역행하는 군주식 " 독재" 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고 종당엔 하와이로 도망쳐 1962년 병속에서 자신의 왕국을 회상하며 1965년 시체가 된뒤에야 조국땅을 다시 찾을수 있었다. 여기서 우린 기억해야 할것이 그의 독재로 혼란에 빠졌던 우리민족과 정치적 후퇴를 생각 안할수 없다. 더우기 이분을 국부로 섬기기 위해 임정을 무시하고 "법"과 역사를 바꾼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다. 각성하길 바란다.
해방후 암살된 인물들
좌측에 "古下 송진우 선생, 1945 년 12월 30일 새벽에 "한현우(한홍건,또는 한원률)에게 암살당함 우측은 "夢陽 여운형 선생, 1947년 7월19일 암살됨, 한민당 白衣社 고문 金斗漢이 이필형 에게 사주 암살 하였다.
고하 송진우는 독립운동 보다는 친일의 흔적이 너무 많은 친일파로 1890년 전남 潭陽에서 출생, 김병노 , 최남선, 장덕수 등과 사귀며 1919년 3.1운동에 동참을 완강히 거부하며 일본의 비위를 건들여서는 안된다고 불참했다 한다.(박찬승, 충남대 교수) 그런 송진우가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東亞日報가 "무기정간"을 당하자, 자신도 동아일보를 떠났다 .
그러나 1945년 8월 10일 "일본 총독부"로 부터 "정권인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것은 너무 많은 친일적 행태로 모양새가 좋아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우기 그는 "신탁통치" 결의안이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통과 되여, 온 나라가 찬반 논란으로 들썩이자 "한현우가 1945년 12월 30일 새벽,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했다 .
그러나 "장택상"은 "김구"선생이 "한현우를 사주해 암살했다고 덮어씌우려 했지만, 한현우는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를 지목하여 "암살하려 했는데 여운형은 실패했고, 송진우는 성공했다"고 진술함으로써 김구선생의 혐의가 풀릴수 있었다. 하지만, 한민당은 장덕수의 암살건이 일어나자 김구선생을 법정에 세운다. 이 건도 무혐의다 .
夢陽 여운형 암살 사건
여운형은 1886년 4월 22일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 1909년 광동학교 설립, 1919년 上海 臨時政府, 임시의정원 의원, 1920년 高麗共産黨 에 가입, 1944년 朝鮮 建國聯盟 委員長, 1945년 조선건국 準備委員會조직과 人民黨 조직, 1947년 勤勞 人民黨 조직, 여운형은 7년전인 1940년 조카인 "여경구"와 日本 天皇 "히로히또"를 만나 朝鮮의 獨立을 역설 했다고 한다. 대단한 용기이며 담력이다.
모두 엎드려 구걸하기 바쁜데, 죽을지도 모를 倭國에서 호통을 치다니, 그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달리 美國과 蘇聯의 信託通治를 주장했고, 민족 단일정부 를 원했지만, 그의 路線 은 좌파였음으로 親日派들에의해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살해 됨니다 .
이는 빨갱이가 집권하면, 모두 죽게될 運命에 처한 "친일파"들의 백색테러 조직, 白衣社의 고문 金斗漢이 한지근 (본명 :李弼炯)에게 권총을 주어 射殺케 했으며 首都 警察廳長 장택상이 개입 된걸로 27년이 지난 1974년에 밝혀짐으로써 李承晩의 "하와이" 실력이 발휘된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승만을 둘러싼 100% 친일파로 大韓民國 建國의 핵심세력 이 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나라를 팔은자들과 찾으려고 피흘린 자들이 어찌 같은 하늘을이고 살겠습니까? 우리나라 의 건국은 "단추가" 잘못 끼워진 양복과 같습니다 .
박헌영과 여운형
여운형 암살에 대한 동아방송 김두한 의 육성 증언
이박사 와 관계
▲이 박사는 가끔 만났죠. 민주의원 의장으로 있으니까……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감투는 다른 사람 다 주고 우리 같은 사람은 순사부장도 안 시켜줬으니까. 또 시켜줘도 하지도 않지만……그때 이박사가 영어 신문을 놓고 영어로 얘기하는데 동산 선생이 통역을 해주는 거예요.
의혈단장 <김원봉>
백의사 고문(전 국회의원 김두한)
그랬더니 염동진씨가‘저기 쟤다.’이래요.‘어떻게 됐습니까?‘쟤가 이북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학살당했소. 그래서 철천지 원한을 가지고 있지.‘그쪽은 나이가 몇 살입니까?’그랬더니 18살이라고 합니다. 저런 아이가 한다 이겁니다. 그럼 이름은 뭐냐고 하니까 한지근이라고 그래요.‘한지근. 좋습니다. 그러면 거행합니까?’ 못 하면 내가 하려고 생각했어요.‘총을 어떻게 구입해서 줘야겠네.’‘알았습니다’‘총, 제가 드린 것은 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했더니 가지고 38선을 넘어갔다고, 이북공작으로 들어가서 탄환하고 총이 없다는 겁니다.‘그러면 제가 그 총을 갖다 드리겠어요.’라고 말하고 총을 갖다 주었어요.
그리고 돈 백만 원 갖다 드리고. 이래 가지고서 혜화동에 있던 내시집 있잖아요. 동소문 바깥인데 지금의 삼선교 근방에서 저쪽 개천교로 올라가면 김연수 씨 별장 위에 내시집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에서 위해를 한다고 해서 목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1차, 2차, 3차로. 그날 혜화동 로타리에서인가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걸 저격했나요?
▲백의사는 순전히 좌익 거물급만 죽이는 데 주력한 거죠. ─그런데 몇 사람이나? ▲내가 봤을 때 죽인 것은…… 1급, 2급, 3급……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잘 기억이 안 나요. ─그 후에 백의사를 했던 염동진 씨, 그 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6.25때 납치당했죠.
雪山 장덕수 암살사건
雪山 장덕수, 1947년 12월 2일 암살됨.
張德秀는 1895년 (고종32년) 황해도 재령 출생, 1911년, 朝鮮總督府 판임관 시험에 합격하고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 政經學部 를 졸업, 1920년 東亞日報 초대 主筆 이 되었고, 1923년 美國 으로 건너가 李承晩, 許政과 (3.1 민보)를 발간, 1928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哲學博士 학위를 받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敎搜를 거쳐, 1935년 동아일보 副社長이 되었다 .
1939년 親日團體 인 "시국 대응전선 사상보국 연맹" 京城分會 제 4분회장. 1940년 國民總力 조선연맹 參士, 1941년 조선임전 보국단, 準 備委員, 1945년 7월애는 國民義勇隊 ,경성부 연합 幹部, 등 으로 撤低한 친일활동을 하다 宋鎭禹, 金性洙와 한국 民主黨을 이끌었으나 "친일파 정당"이란 비난을 받다 1947년 12월 2일, 서울 鍾路 警察署 경사 "박광옥, 배희범"에게 죽임을 당했다 .
희안한 일이 李承晩씨는 당시엔 호화로운 장덕수의 葬禮式에 얼굴을 비친 사진이 있다. 그러나 송진우, 여운형의 장례식 사진은 보질 못했다. 보관할 가치가 없어서 인가? 아니면..........????
어찌됐던 여기 모인 人士들은 몽땅 親日派들이요, 존재함으로 부담되는 사람들이다 .
장례사를 낭독하는분! 어디서 본듯한 분이다, 시대가 다른데.... 누굴까 ????
張德秀 암살사건으로 재판정에서 증언하는 金 九 선생, 이 재판은 군정청에 의해 진행 되었다. <1948. 3.15> 아 - 아! 白凡, 김구!
원통하고 억울한 누명과 죽음, 竹山 조봉암
竹山 조봉암 선생은 1898년 9월 21일 인천 강화에서 출생, 1915년 강화군청 급사, "쏘련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修學, 1919년 3.1운동 으로 1년간 복역, 후 渡日,
1922년 볼세비키 運動을 위해 귀국, 共産主義 그룹 가입, 1923년 ,"블라디보스톡"의 高麗 共産黨 창립 代表, 준비위원회 합류 , 1925년 朝鮮共産黨 조직 參與, 같은해, 高麗共産靑年會 대표, 1932년 "마르크스 레닌 , (ML)黨 조직, 日本 경찰에 체포돼 7년간 복역 , 1945년 "인천에서 地下運動으로 구금, 8.15 解放으로 出獄, 공산당의 理論 뿐인 虛構를 깨닫고, 1946년 공산당 脫黨으로 訣別 선언, 1948년 5월, 제헌 國會의원 1948년 8월 부터, 1949년 2월까지 初代 농림부 장관 1950년 6월 부터 1951년 7월, 2대 民議員 副議長 /2대 국회부의장 1952년 -1956년 대통령 출마, 1956년 11월 진보당 創黨, 위원장 1958년 1월, 진보당 間諜사건 연루 1959년7월31일 國家 보안법 위반 으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死刑 , 1991년 國會議員 86명 서명 조봉암 사면 복권청원
조봉암 선생의 가족 사진. 우측 서 계신분이 조봉암 선생, 옆이 부인, 그리고 딸들, 앉은 장인 장모
공산당을 청산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하여
농지 개혁법, 양곡매입법,은 일본인의 농지수탈과 富農의 행패로 혹사당한 소작인과 빈농들에겐 희망의 법이요, 광명의 빛으로 떠 올랐다. 죽산의 진보적 농정은 국민의 상당한 신뢰로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오만과 독선적인 독재를비판하게 됐고 1952년 전쟁의 와중에 치뤄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아주 근소한 차로 낙선됐다. 그러나 이때 부터 죽산은 "이승만의 킬러"로 부상 이들을 불안과 초조로 얼어붙게 했다. 그후 1956년 다시금 제3대 대통령선거에 진보당 당수로 출마 하므로써 수구와 보수 일변도의 정국에 진보의 기치를 내 걸음으로써 한국 憲政史에 새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겐, 이때의 불안한 승리가 1960년도 의 제4대 대통령 선거가 큰 부담이오 위기로 또다시 부상했다.
간첩 양명산 사건
바로 이때 지축을 흔드는 간첩 양명산 사건이 터 졌는데, 사건의 핵심은 죽산의 경력을 이용, 죽산이 북으로 부터 양명산을 통해 공작금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으며 북의 지령대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
그러나 양명산은 법정에서 진술을 여러번 번복하여 검찰들을 당혹케 했으며 "죽산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단은 양명산이관제(官製) 빨갱이라는 것을 밝혀 냈는데, 양명산은 양이섭으로 미정보국 (HID) 공작원 이라는 사실도 밝혀내기도 했다. 이사건은 최초의 관제빨갱이 사건이었다. 후에 이사건이 본보기가 되어 군사독재정권에선 자주사용하는 메뉴가 되기도 했다 .
살아있는 양심의 전설 故 유병진 판사
당시 사건 담당 판사는 故 유병진 판사로 1심판결을 맡았는데, 유판사는 지금도 "법조계에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유병진판사는 사건의 성격이 정치적 관제빨갱이 사건임을 간파하고 죽산과 양명산에게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박기출 (부통령 입후보자) 등은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유병진 판사는 法服을 벗고 말았다 .
이후 많은 극우세력들이 유판사 집을 침입, 난동과 협박으로 괴롭혔다.
제 2심 선고공판은 "집행유예" 족으로 가닥을 잡는듯 하다가 사형선고를 내리고 만다 .1959년 7월 30일 ,재심청구를 했으나 기각되고 죽산은 하룻만에 전격 교수형에 처해 졌다. 그날이 1959년 7월 31일 이었다.
法治의 민주국가 에서 가능한 일인가?
냉전적 사고방식의 산물
이때는 제 1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 가 유세도중 열차안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급서"하여 야당 대통령후보는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 선생으로 단일화 됐을때 의 일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조병옥, "김준연"은 이승만의 장기독재집권은 용인할 지언정, 죽산 조봉암은 지원할수 없다는 냉전적 사고방식속에 죽산 조봉암은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제거 되는 음모가 실현 되도록 방관 했다는 사실이다 .
죽산선생 의 마지막 말씀과 새
1958년 1월3일 부터 1959년 7월31일 까지 죽산선생은 약 1년 6개월을 서울형무소에서 보내셨다. 그러나 죽산선생은 재판결과에, 판결은 잘됐다. 無罪가 아닐 바에야 차라리 죽는게 낫다. 나는 萬사람을 살리는 理念이 었고, 李博士(이승만)는 自身 1인만 잘사는 理念이 었다. 理念과 理念이 대립할때는 한쪽이 없어져야 勝利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中渡派의 마음이 便安해 지는 것이다. 政治를 하자면 그만한 覺悟는 해야 한다.라는 말로 오래전 부터 죽음을 초월한 자위로 죽음을 예비하고 있어다고 한다.
더욱 슬픈일은 서울형무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며 매일 날아와 슬피우는 새에게 먹다남은 밥알을 새에게 줬는데 죽산선생이 사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날아와 아름다운 목소리로 슬피울었다고 한다 .
수형인들은 신기하여, 이 새를 "조봉암 새" 라고 불렀는데 죽산선생이 사형을 당하자 어디로 갔는지 찾아오지도 않고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다 한다. 수형인들은 그새는 억울한 "조봉암 선생의 영혼과 함께 날아갔다고 굳게 믿고 그새와 죽산선생을 회상했다. 고 전한다. 그러나 아직도 "죽산" 선생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헌정사에 깊이 관여했으며 ,이시대에 오직 한분만 생존해 계신 살아있는 "양심" 강원룡 목사님의 회고록을 보면, 6.25가 터지자 정부수뇌들은 "혼비백산" 걸음아 날 살려라 "모두 도망쳤지만, 죽산선생은 텅빈국회에 들어가 중요 기밀문서를 자기차에 싣느라 부인을 태우지 못해 결국 부인을 그곳에서 죽게 만들었답니다. 만약, 죽산선생이 빨갱이 었다면, 그 "기밀문서를 빨갱이 한테 넘겼 겠지요."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멋있게 죽었습니다. 사형집행관이 "마지막 으로 할말이 있습니까?" 묻자, 일체의 변명이나 자신의 관한 말은 않고, "술 한잔 달라!"며 마시고 사형을 당하셨답니다.
이승만은 진보적 인물을 이렇게 누명을 씌워 죽인 것입니다 .
※ 어릴적 나도 유감스럽게 이분을 빨갱이 로 알고 있었다. 그때의 모든 상황이 그랬다 . ※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죽산 조봉암 선생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하며....
(잡소리낭객님의 추가 설명)
이글은 저의글을 퍼가신 "쓴소리 단소리" 님께서 올린글을 제가 추가로 올립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에서 축출 된 것은 논문 때문입니다. 그의 논문은 "미국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에 관한 논문으로 미국이 한국을 "신탁통치" 해달라는 논문이었고, 이에 격분한 임시정부 에서는 만장일치로 그를 탄핵 했지만 이승만은 나는 대통령 이므로 "너희들의 탄핵은 인정 할수없다"며 무시하자,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 먹었다면,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격분했다고 합니다. 단재 선생은 아직 무국적자, 정부와 정치권은 '침묵 중'
그는 이 나라의 근대사가 배출한 거목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과 삶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배제당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이승만을 향해 "나라가 독립도 하기 전에 나라를 팔아먹을 사람"이라고 했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절대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며 선 채로 세수를 했던 단재 신채호. 해방된 조국에서 그는 아직 국적이 없다. 이 말에 누군가 "대한민국 사람이면서 국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말이 되는 나라"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국가에서는 그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국가유공자로 예우해주지만 그의 국적은 회복시키지 않았다. 이런 일은 비단 단재뿐이 아니다.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노은 김규식 등. 우리가 입버릇처럼 떠벌리던 독립운동가들이 다들 무국적 무호적 상태이다. 그 수가 300여 명이나 된다니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단재 신채호 선생
여천 홍범도 장군
노은 김규식
석주 이상용
또, 전명운 장인환 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더 있습니다. 우선 교민들은 전명운 장인환 의사를 구명하고자, 당시 하와이 바나나농장에서 어렵게 일한 동포 들이 정말 목숨같은 돈을 모으게 됩니다. 애국지사를 죽일수 없다는 애국심에서 동포애가 발휘된 것입니다 .
그러나 동포들중 아무도 영어를 유창하게 할수가 없었고 황색인종을 도와줄 백인은 없었습니다. 다행이 하버드 석사요 프린스턴대 철학박사인 이승만을 찾아갔고 ,이승만은 수락합니다. 그러나 1등급 호텔에서 자신이 머물게 해달라는 현실에 맞지않는 조건을 내세워 교민들은 모금한 그 피같은돈으로 그의조건을 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쓸데없는 곳에 돈만쓰고 시간만 허비하다, 마지막엔 나는 살인자를 변호하는 통역은 할수없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 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행위에 망국의 한을 품은, 교민들을 타국땅에서 믿었던 이승만땜에 또한번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엾는 절망에 땅을치며 통곡을 해야만 했습니다.
국민 방위군 사건
1950년 11월 까진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듯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950년 12월 15일 軍警과 공무원이 아닌 17세이상 40세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국회에 통과시켜 12월21일 첫부대로 1만여명이 창덕궁에 소집돼 죽음의 행렬에 나섰다. 아무리 예비군이지만, 당시 국민방위군 작전처장 이었던 李炳國의 증언에 따르면 쌀 한톨, 군복한벌, 안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막연히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
내무부장관 조병옥
대신 양곡권(量穀券)이 지급됐는데, 국방장관 申性模 와 내무부장관 趙炳玉이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는 바람에 내무부는 각 市長, 郡守에게 양곡지급을 중단 하라고 지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인해, 국민방위군은 양곡을 지원받지 못한체 굶으며 추위와 싸우는 죽음의 행군을 하게 됐다. 너무나 무모한 전략이며 정부의 정책상 난맥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어딜봐도 군인같지 않고 무슨 유격대 같다
그때 기온은 지금과 달리 보통 영하 15도 -18도가 보통 이었고, 칼바람이 몹씨 세찼다, 그래서 살을 에이는듯 한 날씨라는 표현을 잘 썼다.
이것은 말이좋아 <방위군>이지, 거지떼의 행렬이었다. 생각해 보라! 먹지못하니 <군기>가 바로 섰겠는가? 추위에 가마니를 뒤집어 쓴 걸레같은 옷을 걸친 무리들을 무슨 다른말로 부를수 있었으랴!
교실같은 크기에 200-300명씩 처넣으니 서로 몸을 맞대고 추위에 떨며 잠을 자야만 했다. 이속에서 살판 난것은 "이" 였다. 한마리씩 잡는게 아니라 옷을 벗어 빗자루로 쓸어내야 할 정도 였다. 이 때문에 겨울철 열병인 발진티푸스가 창궐했고 영양상태 가 열악한 그들은 발병하면, 치료한번 못받고 죽을수 밖에 없었다. 50여만명의 방위군은 "악전고투끝에 목적지 에 도착하면, 수용능력이 없다고 김해로 가라! 김해로 가면 진주로 가라! 진주에선, 마산으로 가라! 하여 뺑뺑이를 돌렸다.
각 교육대 간부들은 이들을 며칠씩 수용한걸로 꾸며 예산과 식량을 빼돌렸다.
아런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24억원, 그렇지만, 국회조사단의 내용과 주장은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 국민방위군 재정을 총괄 한 부사령관 尹益憲(윤익헌)은 옆사무실에 돈을 산처럼 쌓아놓고 기생(技生)들에게 잡히는대로 뿌리고 다녔다 한다 .
국민방위군은 소금물에 쩔은 주먹밥 한덩이가 없어 굶어 죽는데, 이승만이 육성한 테러조직 "大韓 靑年團" 간부들로 구성된 국민 방위군의 지도부는 無所不爲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아무렇지않게 당연한듯 이런 만행을 일삼았다.
이런 옷차림 으로 혹한의 추위에 굶으며 목적도 없이 행군을 강행했으니.... 그들이 신은 신발은 대부분 고무신 이 주류를 이뤘다. 상상을 해 보라! 대다수 동상으로 발가락이 잘렸을 것이다. 손엔 장갑을 꼈을까?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 넣으면, 한움큼씩 이가 잡혔을것 같다 .
居昌 양민 학살 事件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 (慶南 居昌郡 神院面) 일대에 준동하는 공비를 토벌중 이던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대대장 韓東錫(한동석)소령은 공비와 내통 한다는 이유로 양민 600여명을 집단 학살 했다.
이사건은 마침내 국회서 정치문제로 번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려고 현지로 향하던 국회 조사단(단장, 서민호) 일행에게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일명 백두산 호랑이라는 악명 높던 金宗元(김종원)이 부하들과 "공비"로 가장하여 총격을 가하며 현지답사를 방해 하였다 . 혼비백산, 간신히 살아온 국회조사단은 이문제는 국민 방위군 사건과 맞물려 軍과 政府에 대한 불신의 불똥이 이승만에게 향했다. 그러나 李承晩 정부는 개의치 않고 이사건을 압력을 가해 흐지부지 흐릿하게 끝냈다. 이사건의 주모자 김종원은 그 공로를 이순신에 필적할만한 공로로 이승만에게 인정 받았다. 후에 그는 치안국장 까지 오르는 출세를 한다 .
그러나 이사건을 조사하던 국회조사단 단장 徐珉濠는 지방선거가 실시되기 하루전날인 1952년 4월24일 순천에서 전남 병사구 사령부 소속 <서창선>대위가 서민호 의원에게 테러를 감행하려다, 오히려 徐 의원의 총에 맞아죽는 사건이 발생, <살인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 死刑 선고를 받았다. 徐의원은 <정당방위> 를 주장했고 國會는 徐의원석방결의안을 반대없이 통과 됐지만, < 서북청년단>등이 관제시위를 벌여 국회의원 성토장 으로 만들고, 군민대회, 농업증산 군민대회를 열어 서민호를 살인자로 일방매도하고 직선제 반대를 주장하는 국회의원들 에게 국민소환을 요구하겠다며 "협박"을 감행했다. 이들의 여론몰이 시위는 지방선거 승리라는 무한의 힘을 얻게 되었고, 徐珉濠은 1960년 4 .19 혁명으로 8년만에 출옥했다.
양민 600명을 죽인 김종원은 충무공 <이순신> 대접을 받고 자신을 죽이려던 상대를 죽인, 정당방위는 8년의 옥살이 끝에 4.19 혁명으로 풀려나는 <이승만 공화국>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다. 지울수 있다면 송두리째 드러내고 싶은 역사인데, 이걸 美化시키려는 變種들, 이승만의 가공할 만행은 釜山政治波動에서 계속된다.
부산 정치 파동
1952년 6월23일 예정된 대통령선거는 이승만의 당선가능성 이 희박 했음으로 살길은 간선제를 직선제로 뜯어 고치는 방법밖엔 없었다. 직선제를 하면, 해방후 지금까지 관리해온 사조직 백의사, 반공청년단 등 수많은 조직들이 상대후보에게, 테러, 유언비어, 등으로 혼란을 가중시켜 100% 승산이 있다는 음모정치의 계산이 섯던 것이다 . 1951년 12월23일 11시30분, 그시절 임시국회의사당 인 경남도청 회의실에서 360여명 이 참석한 가운데 자유당창당" 대회가 열렸다. 당 대표는 비워두고 부의장에 李甲成, 김동성이 선출됐으며, 의회중심의 정치확립, 책임정치 구현을 내세우며 "내각책임제" 를 강령으로 채택했다. 오후2시에는 부산 동아극장에서 400여명이 모여 또 하나의 자유당을 창당 했다 .
당수에는 李承晩, 부당수엔, 이범석, 이렇다할 政剛이나 정책을 다루지 않고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정도 였다. 두 자유당은 모두 이승만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갑성의 창당 자유당은 거리를 두고 이범석이 있는 자유당은 이승만의 친위대역활을 했다. 그것은 이범석이 만든 민족청년단"이 있기 때문이고 (민족청년단은 1946년 10월9일 이범석이 조직하여 <사조직>중 120만명 이라는 국내 최대의 관변단체중, 최대였다. 이승만은 1953년 9월 17일 이단체를 숙청, 해산시킨다.(이단체를 족청계라 부른다.)
이승만은 같은날 각기 다른장소에서 같은 이름으로 창당하는 이중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경쟁시켰다.
1952년1월18일 정부개헌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국회에 상정됐으나 국회의 재적의원 175명중 3분의2인 117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결과는 143대 19라는 엄청난 차로 압도적 "부결"이었다. 이를 계기로 정부와 국회간 충돌은 극도에 달했으며, 마침내 관제민의(官製民意)가 동원되고 官邊團體, 백골단, 땃벌레 , 민족자결단 등 정체불명의 단체와 地方議會 議員들은 연일 國會議事堂을 포위, 국회해산 을 요구했다.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농성하는 지방의원과 관변단체들
3월26일, 이승만은 자신의 생일을 맞아 6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포기 성명을 발표하는 "쑈"를 벌린다. 이것은 관제시위에 휘발류를 끼얹은 빌미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관제시위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으며 시위대는 이승만의 출마포기 철회를 요구했고, 이승만은 정중히 "민의"를 거슬일수 없어, 수용한다며, 출마의 명분과 "직선제개헌에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
그러나 주미대사 "무쵸"는 : 관제시위단을 "폭력단"이라고 했으며, "한국은 갈수록 태산"이라고 우려를 하며 본격적으로 정치간섭에 시동을 건다.
1952년 5월25일, 대통령선거를 1개월 남겨두고 정부는 국회해산을 강행했다. 임시수도 부산을 중심으로 23개 市郡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26일엔 "국제공산당"과 접선, 정부혁신 지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누명"을 씌워 국회의원을 체포하고, 50여명의 국회의원이 탄 국회통근 뻐스를 헌병대로 강제 연행하는등, 국회의원 검거선풍이 부산을 휩쓸었다 .
6월3일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을경우 국회를 해산 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국회에 보낸다 . 議會 민주주의 에 이런 협박이 가능한가?
오늘날 현재(2008년) 급조된 빨갱이 논란은 이런 것이 표본이 됐으리라. 그러나 그토록 이승만을 주시하던 美國과 국제여론이 들끓자, 6월4일 이승만은 "국회해산"을 단념했고, 대책안을 모색했다 .
그것은 장택상(張澤相) 의원이 중심이된 신라회가 주동이돼,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책임제를 일부발췌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었다.
이때 自由黨 내의 세력갈등 은 내각책임제 를 고수하는 이갑성파, 정부案에 동조하는 이범석 파 가운데가 캐스팅 -보트를 이루고있는 "신라회" 였다 .
정부는 이 개헌안을 통과 시키기 위한 국회정족수, 확보에 7월초부터 경찰을 동원, 소위 案內 란 명목으로 숨어있는 국회의원을 색출해 의사당에 끌어 들였다. 그리고 軍事裁判에 계루중 이던 의원들도 "보석"으로 "구속을해제" 의사당안에서 침식케 했다 .
7월 7일밤, 의사당에 강금 당하다 시피한 국회의원 166명은 발췌개헌안을 기립"하면 찬성, 앉아있으면 반대로 가결했다. 결과는 (찬성 163 반대 0 기권 3) "개도 웃을 일이다" 이게, 의회민주주의 인가? 만약, 안일어 났다면, 어찌됐을까?
사진은 국회의원들이 탄 통근뻐스를 헌병들이 뻐스째 통째로 연행하는 사진이다.
합동통신사 편집국장 鄭龍炫옹의 記事 를 보면, 부산정치파동 은 無法天地 였다는 표현밖엔 없다. 땃벌레, 백골단, 민족자결단, 부산의 골목에 나붙은 < 국회의원 을 소환하라!> 국회를 해산 시켜라, <趙 炳 玉을 죽여라!> 등의 악랄하고 야비하기 짝이없는 벽보와 데모대의 구호, 신문사 습격사건, 계엄령선포, 국회의원 강제연행, 구금, 전무후무한 기립표결이 모든것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난무했다 .
1952년 이라면, 國運을 건 6.25전쟁이 한창벌어지고 있었을 때 인데, 후방에서 사상유래가 없는 政治波動을 벌리고 있었으니... 그 얼마나 위험한 일이 었던가? 국운보다 자신의 대통령자리를 우선으로 생각했던 이승만과 자유당! 장 인상깊게 남는일은 국회를 비난하고, 野黨의원들을 규탄하던 벽보와 데모대 이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釜山 번화가 에 나붙은 "붉은글씨들" 거리는 민주질서의 파괴, 유린하는 이러한 亂動이 합법적으로 이뤄지며 훼손하는 사람은 땃벌레,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에 의해 구타와 기타방법에 의하여 처벌 됐다 .
사진은 땃벌레,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 기타 하부조직원들의 난동시위 경찰과 군인들은 이들에게 협조적 이었다.
釜山거리 가 무법천지 였다면 國會를 중심으로한 政街는 불법, 공포, 압력의 난장판, 야당의원은 얻어맞고, 연행, 구금되는 만신창이가 됐었다. 있지도 않은 대남간첩단사건 (국제공산당사건 )이라는 알쏭달쏭한 사건과 관련시켜, 야당의원, 족청계 인사들이 金昌龍(당시 특무대장) 이 이끄는 CIC에 끌려가는가 하면, 난데없이 계엄령을 선포해 놓고 국회의원을 무더기로 끌고 가기도 했다.
국회의원 출근뻐스에 탄 국회의원 40여명을 통째로 뻐스째 수상하다며 납치하듯 끌고 가 버렸다. 의사당밖에선 연일 살판난 땃벌레, 백골단, 민족자결단들이 이끄는 하부조직원들이 국회의원 소환과 해산을 외치며 데모를 벌렸다. 이때는 牛마차. 말마차 까지 동원 됐는데 牛意, 馬意,란 말이 신종어로 탄생했다.
이때 牛意, 馬意까지 동원 됐다고 기사를 쓴 신문사는 습격을 받아 편집국장은 의자에 앉은체 폭행을 당했고 편집국내 의 전화기 등, 모든집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발췌개헌안이 법에도 없는 기립표결은 議政史에 크나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도 이와 비슷한 "의정행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의도적으로 기도하고 있다 .
이사진은 서민호(徐珉濠)의원이 "거창사건 조사단장으로 활약할때, 徐의원을 암살하려는 육군대위 서창선을 사살하여 복역중인 徐의원을 처단하라고 외치는 이름을 바꾼, 서북청년단원 들, 이때의 官邊단체는 헤일수 없이 많았다 .이때는 하는짓이 이런단체 만드는 일 빼면, 거의 하는일이 없었을것 같은 느낌이 든다.(하와이 에서 사용했던 방법이다)
국회를 포위한 데모대에게 해산을 종용하는 장택상(張澤相) 겉으론 해산을 종용했지만, 속으론 잘한다고 부추켰을 것이다.) kBS 에서 이분을 親日派로 표현했다고 그딸이 소송을 제기했는데, 친일명단에는 그의형 "장직상과 친일파로 기록 되어 있다.
(기립(일어남)으로 찬성을, 앉아 있음으로 "반대를, 겁에질려 모두 일어났는데, 좌측 한분은...? 키가 작으신건지? 3명이 기권을 하셨는데 그중 한 분이신가? 대단하시다, 딴분들이 "객끼" 부리지 말라고 눈총깨나 받으셨겠다.)
副統領들의 연이은 辭退
李承晩 초대 大統領 재임중에 초대 副統領 이시영 씨가 辭表를냈다. 보궐로 副統領 에 오른 김성수 씨 마져 임기를 채우지 않고 물러났다는 것은, 권력의 분산을 막고 1인독점주의를 표방한 이승만식의 統治哲學 제 1조다. 모든 권한은 대통령이 쥐고 있음으로 부통령은 권한이 몹씨 취약할수 밖에 없었다. 부통령 휘하의 각료들도 대통령만 바라봄으로 부통령의 입지는 난감 했을 것이다 .
잘못된 정책의 책임추궁만 따를뿐이다. 이분들의 연이은 사퇴는 당시의 정치풍토를 단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부통령 으로써 대통령의 독선적 독주를 막을수 있는 정치풍토가 가장 아쉬웠던 시기라고 봐야 한다. 1951년 들어서 난리중인데도 오만과 독선으로 바보같은 최측근의 아부성 정책에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의 실정(失政) 중의 실정이다.
좀더 체계있게 구체적으로 계획한 정책도 오류가 있는데 주먹구구식 즉석 정책은 "불보듯 뻔한 失 政 인 것이다. 이 두사건은 모두 "이승만 의 친위대 반공청년단"과 애완견 김종원이 야기시킨 잔혹한 사건인바, 장교2명과 쫄병3명을 총살함으로써 9만명을 대신하는 종결로 사건을 끝냈으니..... 거창양민 학살사건은, 김종원을 성웅 이순신에 버금가는 공로로 치켜세우고 얼렁뚱땅 했다........ 어찌 부통령으로써 이를 묵과할수 있으리요. 한탄스런 그분의 사퇴연설문을 일부소개 하겠다,
李始榮 副統領의 辭退文
초대 부통령 李始榮
前略, 기 3년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重 任을 맡음으로 얼마나 쇄신 됐는가? 국민이 어떤 혜택을 입었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국록만 축낸, 국가에 불충 함과, 국민께 창피함은 인재가 있다하되, 애국위선자들의 날뜀으로 "초토의 비육'으로" 탄식을 자아내는 현상이니, 자리에 앉은자로서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잘못된 일을 고치려 하지않고, 나쁜 일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으니 시비를 논하는 사람조차 탁수, 오수, 에 휩쓸려 한통이 되니 누가 "참" 으로 애국자 인가? 玉石을 가릴 도리가 없다. 과거 3년동안 업적과 공헌이 없으니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생사" 를 같이 할까 하노라! 李始榮 부통령 께선 이런 비통한 말씀을 남기시고 사퇴 하셨다.
1951년 5월 9 일 金性洙 副統領의 辭退文
2대 부통령 金性洙
前略, 나는 부통령에 취임한후 "각하" 라는 칭호를 국무회의에서 정식으로 폐지 시켰다. 그러나 口斗나 서신으로 각하라는 소린 끊이지 않는다. 극단적 例로는 "부통령 폐하" 라는 존칭을 쓴자도 있었다. 이 웃지못할 사실에 "나는 우리국민이 빨리 민주화 되기 위해서는 <한사람>이 거의 <황제>에 가까운" 권한을 쥐고있는 현행 <대통령>제를 改變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통감한다 .
이것은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구테타>가 아니고 무엇이냐? 만약, 그에게 一片의 <애국심>이 있다면, 어찌 이같은 <난맥>의 행동을 할수 있겠는가? 여기에 난, 단하루도 李承晩 정부에 머물러 있지 않기로 결심 하였다. (1952년 5월 29일)
이것이 本이 되어 우리나라 정치의 亡國病 이 되고 말았다.
1953년 4월 17일, 부통령 성재 李始榮 선생의 국민장, 설산 장덕수 선생의장례식장과 비교된다.
제주 4.3 사건 과 여순반란 사건
1945년 9월3일, 이땅을 짖밟던 일본총독은 <하지중장>앞에서 항복문서를 전달하였다.
따라서 무장해제를 당하는 일본군들, 이들은 쓰던무기들을 수레에 싣고 미군의 지시에 따라 우리나라를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비극은 새로운 파국으로 치닫는걸 아무도 몰랐다.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쏘련군이 진주 하며 암운이 깃들기 시작했고, 미국과 쏘련은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신탁통치>를 시행할것을 논의 하기위해 2차에 걸쳐 열리게 됐다 .
1947년 6월 23일 덕수궁에서 제2차 미쏘공동위원회가 "덕수궁" 안에서 열리자 군중들이 "김구 "선생을 앞세워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리고 있다.
신탁통치 반대는 金 九 선생이나 李 承晩씨나 처음에는 뜻을 같이 하는듯 했으나 돌연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신호로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현실화 하자 남쪽에서 활동을하던 <남로당원> 들과 < 남북한 단독정부> 안을 지지하는 단체들이 항의시위를 하며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북 국민학교>에서 열렸는데 학교주변엔 3만여명의 대군중이 모여 들었다.
철 모르는 아기는 마냥 즐거운것 같다, 여수와 순천의 파괴는 진압군에 의해 모두 파괴 되었다. 여수의 60%가 폐허가 됐다고 전한다.
1948년 10월20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진압에 나선 국군들이 <폭도 와 양민>을 가려내기 위해 한곳에 모았다. 당시 11월1일 발표엔 관련자 89명이 처형 됐다 하는데... 그 숫자는 믿기지가 않는다. 125명 이란 발표도 있다 .)
여수, 순천의 현장, 부모를 읽고 폐허가 된 집에서 부모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어린아이, 아마도 부모는 죽었으리라.
연행 당하는 반란 가담자들
진압을위해 준비중인 경찰진압군
학살로 쓰러져 죽은 주검들, 이 주검들을 살피며 눈물마져 마른듯 숙연히.....
죽은 시신들 속에 가족을 찾는 애를 업은 아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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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위사랑의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사랑
첫댓글 담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