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7. 주일예배설교(요한복음 강해 72)
요한복음 20장 24~29절
보았기 때문에 믿음과 보지 않아도 믿음
■ 보고 믿는 것이 정확할까요, 보지 않았는데 믿는 것이 정확할까요? 경험주의의 입장이라면, 아마 전자일 것입니다. 보고 믿는 것이 당근이니까요.☺ 하지만 후자가 더 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확실한 경우라면, 이보다 더 믿음 가는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이처럼, 본다고 다 믿어지고, 보지 않았다고 다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경험상 틀린 것입니다. 봐도 믿을 수 없고,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봐도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세상에는 속이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아주 특별합니다.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도마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가 그 근거입니다.
■ 어느 모임이든 흥을 깨트리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없던 사람 때문에 벌어지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모두가 지난번 공유한 이야기나 사건으로 대화가 무르익는데,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으로 인해 분위기가 가라앉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는 당연히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망가집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여드레 전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는데, 그때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날 얼마나 은혜로웠습니까? 주님께서 내주신 평강으로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못 자국난 손과 창 자국난 옆구리를 확인시켜 주심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강화시켜 주신 데다, 성령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그날의 분위기는 천국이었습니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은혜의 자리에 없었던 도마였으니 25절의 반응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의 반응은 ‘나도 봐야 믿겠다!’였습니다. 사실 도마의 반응은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특별하고 별난 반응이 아닙니다. 물론 ‘어떻게 생사를 같이하는 동료들의 말을 믿지 못하지?’ 하는 의심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마가 까탈스러운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확신에만 거하지는 않습니다. 의심도 하고, 의문도 갖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확신으로 가는 신앙의 단계이고 신앙을 성숙시키는 과정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의심과 의문 때문에 불신의 늪에 빠져 반기독교적으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의심과 의문의 정상적인 결과는, 신앙의 성숙을 가져옵니다. 신앙의 단계를 높여줍니다.
그러므로 의심과 의문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건강한 의심과 의문은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예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드디어 도마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첫 번 말씀은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도마의 의심과 의문을 해결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해는 정확하십니다. 도마의 의심과 의문을 풀어주는 일이 필요하고 중요함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십니다.
그렇지만 이 ‘당장’이 시급함을 다투는 중요함인지, 시급함은 아닌 중요함인지에 따라 예수님의 반응 속도는 달라지십니다. 26절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가 동료들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여드레, 8일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가 지나서 도마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물론 8일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8일이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도마의 입장에서는 당장에 뵙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음 날이라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예수님은 8일 뒤에야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여드레가 지난 뒤에 오셨을까요? 도마의 인내심 테스트를 위해? 도마의 의심병을 단단히 고치실 요량으로? 주님이 우선 처리하셔야 할 볼 일이 있으셔서? 정확한 이유는 주님만이 아십니다만, 주님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는 자가 아닌 믿고 따르는 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 8일간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주님은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도마가 보고 믿는 자가 아니라,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가 되기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 정도는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그런데 도마는 의심의 마음을 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의심하고 있으니 여드레 만에 도마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으셨던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기다려보시지만, 기다림을 먼저 포기하기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위험 수위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욥이 친구들과 대화할수록 위험 수위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급기야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살아온 모든 날을 부정하는 최고 위험 수위에 다다랐습니다. 그러자 욥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기를 기대하며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강력한 개입을 하셨습니다. 더 놔뒀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에 욥은 진정한 회개를 했고, 이를 통해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도마를 위해 여드레를 기다리셨고, 도마를 위해 기다림을 포기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기다리기도 하시고, 기다림을 포기하기도 하십니다. 두 행동 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8일 뒤 도마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못 자국난 손과 창 자국난 옆구리를 직접 내주시고는 만져 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아예 확신에 확신을 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지난번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당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혹시 남녀차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1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를 붙들지 말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번역은 참 잘한 번역입니다. 어느 성경은 ‘만지지 말라’, ‘건들지 말라’로 번역했는데, 이 번역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오독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지지 말라고 이해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거룩을 더럽히는 것을 막으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해이고, 오독입니다.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붙잡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로 가셔야 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지상에 붙잡아 두려는 의도에 대해 일침하신 것입니다. “나를 붙잡지 말라.”
■ 이렇게 부활 이후 예수님을 직접 뵙는 관계에서 성령님을 통해 뵙는 관계로 관계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보고 믿는 것에서, 보지 않고 믿는 관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리아의 오해를 수정시켜주신 것이고, 도마의 태도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제부터는 보고 믿겠다고 하지 말고,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도마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실은 그들도 도마와 다르지 않게 봐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봐야 믿겠다고 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이에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마의 신앙고백을 좀 더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의 못 자국난 손과 창 자국난 옆구리를 직접 보고 만져 본 뒤 고백한 신앙고백입니다. 보고 만져 봤으니 이 정도 신앙고백은 해야지 하고 높은 점수를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도마의 신앙고백은 진심이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후 도마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여느 제자 못지않게 믿음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더욱이 이 고백 이후 바로 복음전도여행을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AD30~72까지 복음전도여행을 했으니, 이 고백 직후 바로 시작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도마의 복음전도활동은 바울보다 먼저였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복음전도여행은 AD45~61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심의 제자에서 믿음의 제자로, 더 나아가 해외 복음전도자로 도마의 삶을 바꿔 간 것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참으로 바른 신앙고백의 힘은 어마무시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천국열쇠를 받게 된 것은 바른 신앙고백이 갖고 있는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재차 인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건성이 아닌 진심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주 사도신경을 고백하는데 건성인 경우가 많습니다. 진심이 담기기보다는 의례적인 태도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고쳐야 할 태도입니다. 고쳐야겠습니다.
■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따르고, 믿음으로 각오하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믿음의 주님은 믿음의 눈으로만 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만 함께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믿음이고, 복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The people who have faith in me without seeing me are the ones who are really blessed!) 바라기는 보지 않아도 믿는 이 믿음을 끝까지 지니시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복을 기꺼이 향유 하시기를 응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