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진의 한국 나들이]
제주도는 아름다웠다. 제주도를 한국속의 이국이라 한다.
5월 30일 오후 한시 좌우 제주도 서귀포 비행장에 내려보니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끊을 줄 모르고 그냥 내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전화를 쳐 려행사의 거점을 물은 후 택시를 잡아타고 “영스타 관광 여행사”로 곧장 찾아갔다. 2박 3일 코스로 관광비 9만 4천원, 려관비 12만원, 서울행 항공표 예약금 15만 6천원, 도합 37만원을 물었다. 말이 2박 3일이지 실은 1박 2일밖에 안된다. 비오는 첫 하루는 거이 다 가는데 집에서 자기절로 출발하는 시각부터 계산하여 세날이고 두밤이라는 것이다. 그런대로 수속하고 “뉴코리아 호텔” 701번 방에 들었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기와지붕 몇개 넘어로 “연길랭면”이라고 쓴 커다란 가계 간판이 비속에서도 한눈에 안겨왔다. 연길에서 먹고 놀던 놈이라고 그 간판이 눈에 띄자 신기루나 발견 한듯 안해를 부르고 손가락질 해 보였다.
랭면은 우리민족이 창조하고 우리민족이 즐겨먹는 세상에 자랑 할만한 음식이다. 더우기 연길랭면의 쫄깃쫄깃한 국수 맛과 얼근하고 새콤하고 달콤하고 구수하고 시원한 육수 맛은 세계 어디에 가나 찾아보기가 힘들다.
호계리에서 작은 외숙님과 함께 자고 아침을 먹은 후 순천 이모(어머니의 언니) 집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문배형님(큰 외숙님의 큰 아들)이 찾아왔다. 전날 안풍에 갔을 때 면에 가고 안 계셨기에 만나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문배형님도 순천고모님 뵌지가 오래다면서 우리와 함께 떠났다.
어머님과 똑 같이 생기신 86세 이모님께선 거동이 매우 불편하신데 정신만은 아주 똑똑하셨다. 이모사촌 동생 박 문규는 출근 했고 파출부가 와서 집안 청소를 하고 있었다. 백 오륙십 평방메터 돼보이는 큰 집에 전부 윤택이 번뜩이는 고급 가구들이다. 제수씬 서울에 가 대학 다니는 아들의 뒤바라질 해 준다고 한다. 작은 아들은 밤새워 컴퓨터 공부를 한 후 자고 있다면서 자기 방에서 골도 내밀지 않았다. 자체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문규가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후 문규차로 터미널에 가고 문규가 차표를 사주어 뻐스에 올랐다. 문배형님은 강진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광주 재옥형님 집으로 향하였다.
재옥형님께서도 93세이신 모친님(나의 당숙모님)을 모시고 계셨다. 그이 역시 행동이 좀 불편하실 뿐 정신은 아주 맑으셨다. 친척 방문길에서 처음으로 주인님이 손수 지어주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튿날 재옥형님과 함께 아침 식전 산책을 하면서 유서깊은 “조선대학”을 돌아보았다. 이것으로 친척 방문이 결속 된 것이다. 응당 인사 드려야 할 이상분들을 다 찾아 뵌 것이다. 누님께선 홀로 서울행 고속 뻐스를 타고 우리부부는 제주도로 가는 아시아나 려객기에 올랐다. 재옥형님께서 비행기표 끊는데 보태라고 10만원을 밀어주었고 우산도 하나씩 쥐여주었다. 잔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5월 31일 아침 9시 20분 관광뻐스가 호텔에 와서 우리를 싣고 떠났다.
제일 처음 용연 “용두암(龙头岩)”으로 갔다. 바다가에서 30메터가량 들어가 커다란 검은 바위가 우뚝 치솟아 있는데 바다물 속에 몸을 잠근 한마리 거룡이 머리를 번쩍 치켜들고 륙지의 사람들을 향해 포효(咆哮)하고 있는 듯 하다. 파도의 출렁임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듯한 거룡은 대관절 뭐라고 웨치는 것일가? 그것은 보는 사람들 저마끔의 상상에 맡겨졌다. 뭐라고 웨치던 말던 사람들은 “용두”를 마주하고 두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감고 서서 한동안씩 묵상에 잠긴다. 저마끔 무엇을 기원 하는 것인지?... 그다음 돌아서서는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나도 안해에게 사진기를 맏기고 검은“용두”와 창창한 대해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섰다. 나는“용두”와 함께 대해와 함께 마음속으로 높이 웨쳤다ㅡ조국의 통일이여, 혼조 옵시사! (혼조: 어서빨리ㅡ제주도 방언).
제주도를 빙 둘러 에돌아 닦아놓은 공로를 따라 달리며 많은 해안 경치들을 구경 하였고 유람선을 타고 바다 멀리에 들어가 황소머리 모양으로 생긴 우두섬을 봤으며 한국에서 아침해를 제일 먼저 본다는 성산일출봉도 보았다. 10만년전 바다 밑의 화산 폭팔로 바다 한 가운데에 홀로 넓적하게 솟아오른 성산일출봉은 꽃 접시 모양으로 생겼고 접시 변두리는 99개의 봉우리로 되였다. 마침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큰 망원경을 메고 갔기에 먼 곳의 경치도 환히 구경 할 수 있었다.
잠수함을 타고 깊이 내려가 투명한 바다속의 산과 들, 풀과 물고기들을 구경하고 바닷가에 올라와 해녀들이 방금 잡아 올린 낙지를 툭툭 짤라 초장에 꾹 찍어 한입 가득 꿍져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는 그거야말로 별맛이라 “셋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른다”는 소리가 그소리이다. 물론 거기에 참이슬 소주가 없어서는 멋이 없다.
가로 세로 도내를 질러난 길을 따라 달리며 양마장에 들리여 말도 타보고 서귀동 귤 농장에 들리여 “낑깡”도 훔쳐 먹고 “동충하초”도 귀가 벌쭉하여 십만원어치나 샀다. 작고 크고 동그랗고 납작스그름하고 누르고 푸르고 30여종 귤 중에서도 탁구공 보담도 썩 더 작은 노오란 낑깡이 특히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제일로 신비롭고 특이한건 “귀도(鬼道)”라 이름한 아스팔트 산길이였는데 관광뻐스의 발동을 끄고 세워놓으면 “올리막”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눈으로 보면 분명 올리막인 듯 한지라 관광객들은 믿기질 않아 저마다 뻐스에서 내려 길바닥에 자기가 마시던 물도 쏟아 보고 물병도 굴려 보는가하면 길바닥에 귀를 대고 이쪽 저쪽 갸늠해 보기도 한다. 중국 남방에도 그런 “귀신 길”이 몇곳 있다고하지만 가보지를 못했다.
아세아서는 제일로 큰 실내 식물원이라는 “여미지(如美地)”가 참 아름답고 볼만하였다. 2천 여종의 식물이 들어있다는 커다란 유리집에서 북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많은 희귀한 식물들을 처음 보았고 각양 각색으로 아름답게 만든 화분과 분경(盆景)들도 볼 수 있었다. 강 택민, 리 붕등 중국 상층인들이 참관 방문하던 장면을 사진 찍어 걸어놓았고 그들의 제사를 새겨 세워놓은 비석도 있었다.
민속마을 참관 역시 신비롭고 재미졌다. 민속마을은 국보라, 나라의 보물이요 보호지요 보조지라 그것이다. 약 420세대가 살고 있다는 그곳에선 일체 세금, 전기세 물값까지 모두 면제라 한다. 제주도엔 담수가 매우 부족하다. 대부분은 바다물을 분해하여 담수로 공급하는데 민속마을에서는 자고로 비물을 받아 먹고 썼다. 내리는 비는 많지만 이땅엔 물이 고이질 않는다. 하기에 물농사는 상상도 못하고 먹는 물도 극난이라 한다. 큰 나무 밑둥이 마다 비물 받이 큰 독 하나씩 놓아두고 있었다.
물동이 이는 것은 우리 민족 여성의 특기이다. 허지만 제주도에서는 바람이 너무 세여 이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등에 지고 다녔고 처녀가 시집 갈 때 큰 례단이란 물 한동이 지고 가는 것이였다 한다. 총각이 물동이를 지면 서방 못 간다하고 이미 장가 든놈이 동이를 지고 밖에 나서면 리혼을 선고하는 뜻이라 년장자들의 결정이 떨어지면 리혼자는 물동이를 지고 마을을 여섯바퀴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해가 물동이를 지고 가정을 이끌어 가는 고초를 감수하고 마음을 고쳐 먹도록 하려는 것인지… 물론 모두가 옛이야기일터, 아무리 민속마을 민속마을 해도 지금까지는 그럴리가 없을 것이다. 큰 나무 밑둥이마다에 놓아둔 물받이 큰 독들도 관광객들이나 보라는 것일게고…
한국 온 나라의 남 청년들은 반드시 의무병역에 참가 해야함은 헌법에 씌여 있지만 이곳 민속마을 청년들은 면제이다. 반면에 이마을 큰 아들로 태여난 자는 종생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대학을 마치고도 꼭 고향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단아하고 이쁘게 생긴 가이드(导游) 미스 부(卜)는 상냥하고 우스개도 잘 피우는 스물 너덧살 돼 보이는 처녀애였다. 하루 관광을 끝내고 뻐스에서 내릴 때 “미쓰 부, 폭싹 속깠수다(부아씨, 많이 수고했습니다)!”하며 내가 머리를 끄덕이면 그애는 “아저씨, 속구멍 말구멍 했수다(괜찮아요).”하며 환하게 웃음 짓는다. 뻐스 달리는 여유시간에 자기가 가르쳐준 제주도 토박이 말을 써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로서도 재미질터이다.
그애는 관광객을 인도하여 다니면서 “피발이 좃끝에 보지보지 옵쇼!”하고 소리치곤 한다. 이것도 그가 사전에 갈르쳐 준 방언이다. 그 뜻인즉 “피발(披发)의ㅡ처녀의, 족끝(足边)에ㅡ가까이에, 보질보질ㅡ빨리빨리, 옵쇼ㅡ오세요!”라는 소리다. 바닷가의 음식점에서 생신한 해산물을 맛보는 코너에 모두들 자기 동료나 가족끼리 한상씩 차지하고 둘러 앉았는데 그애는 한켠에 서 있는 것이였다. “미쓰 부! 이리로 와요, 함께 한잔 합시다.” 나는 살아서 펄떡이는 낙지회 한그릇을 청해놓고 그애를 불렀다. 그는 김이 물물 피는 소라 한그릇을 사 들고 우리 부부가 앉은 상으로 왔다. 그애는 쌩글쌩글 웃으며 소주도 시원스럽게 마셨다.
“바람 부는 제주에는 돌도 많지만…”라고 노래 부르다싶이 제주도는 특이 하다. 주위 사면팔방이 몽땅 바다이니 바람이 불 것은 당연한 일이고 화산 대 폭팔로 생겨난 섬이라 돌이 그처럼 많은 것도 이상 할 것이 없다. 가는 곳마다 돌길이고 돌담이고 돌조각물이다. 나무 울타리나 벽돌담 철란간 대신 돌담으로 밭 지경을 내고 마당 주위를 둘렀으며 짐승을 막고 도적을 막고 바람을 막는다. 백두산 천지의 화산석처럼 구멍이 숭숭한 메주짝같은 곰보돌들인데 이상한 것은 각이 없이 둥글둥글한 돌로 담을 대수간 쌓아놓아도 무너 지지를 않는 것이다.
우리는 천지연폭포에 가 보았다. 수심이 20메터가 넘고 높이가 22메터이며 넓이가 12메터나 되는 창쾌하게 쏟아지는 폭포도 폭포겠지만 그의 좌우에 늘어선 아담하고 숙연한 절벽, 그 아래에 꼬리치마자락 같이 펼쳐진 고요하고 투명한 파아란 연못, 치마폭의 꽃무늬 같은 산딸기와 산유자, 동백과 진달래 그외에도 철죽, 송엽, 잣나무, 감나무, 밤나무등 천연(天然)림으로 우거졌고 산비둘기떼가 쭈욱ㅡ쭈욱ㅡ 오른쪽 절벽끝에서 왼쪽 못가로 자리를 옮기고 기러기 몇마리가 발밑에서 푸드득 일더니 사람들을 등지고 폭포 넘어로 지고있는 붉은해를 향해 끼르륵ㅡ끼르륵ㅡ 날아간다. 천지연은 아름다웠다. 백두산 천지폭포와 오누이인것 같으다. 백두산 천지폭포는 천지연폭포 보담 키가 크고 장엄하다. 그러니 아마 오빠일 것이다.
천지연에서 조금 내려오면 넓은 주차장이 있다. 거기엔 휴객실도 있고 먹거리도 있고 놀거리도 있다. 광장 한모퉁이에 서서 동북쪽을 향해 고개를 들면 저녁노을을 쓰고 조용히 누워있는 아름다운 녀인의 모습이 멀리에서 한눈에 안겨온다. 풀어헤친 길다란 머리발, 그다음은 평평한 이마, 눈, 코, 입술, 턱, 목, 목 다음엔 누구나 파고들고픈 풍만한 젖가슴이다. 그모습을 좀 가까이 끄당겨 보려고 망원경을 들고 애를 썼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누웠는지라 헛수고 뿐이였다. 그 미녀의 이름은 바로 “오빠” “동생”하며 올라갔다가 “여보” “당신”하며 아기까지 업고 내려온다는 전설의 산 한라산이다. 우리민족의 성산, 어머니의 산ㅡ 한라산을 멀리 바라볼라니 자연히 우리민족의 또 하나의 성산, 아버지의 산ㅡ백두산이 생각난다. 긴긴 세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얼굴도 못 보고 사는 그이들은 언제면 한자리에 모일까?
한라산에 가는 일정이 없어 좀 아쉽긴 했지만 이틀 관광은 퍼그나 즐거웠다.
6월 1일 저녁 여섯시 55분, 우리가 앉은 비행기는 김포 공항을 향해 리륙 하였다. 비행기는 구름 위에서 천천히 날고 있었다. 기창밖의 석양에 물든 울긋불긋한 구름산 구름바다는 장관이였다. 조카들집에 이르니 저녁 아홉시 반이다. 안해는 엎드린김에 절이라고 곳구경 나선바엔 이튿날로 판문점 관광까지 갔다 오자고 우긴다. 나는 일자리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옳바른 선택이라고 여겼다. 친척방문과 관광 그리고 돈 버는것, 이 세가지를 편견 없이 골고루 돌보아야 한다.
할만한 일들은 많고도 많았다. 연이를 시켜 몇곳에 전화를 쳐봤더니 월요일에 만나서 상담하자고들 하였다. 저녁에 작은 고모님의 작은 딸 덕희네 식구와 덕희동생 재원이네 식구가 와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나는 술을 취하게 마시고 노래방에까지 애들을 데리고 나가 놀다 왔다. 중국에서 마시고 놀아대던 나쁜 버릇 그대로이다. 이튿날까지 술을 깨지 못한채 온 하루 잠만 잤다. 외국에 와서까지도 나쁜 술 버릇 고치지 못한다면 어느 때이건 큰 코 치고야 말것이다.
4일날 취업 할만한 곳들에 전화도 쳐보고 직접 가보기도 하였다. 외국인은 받지 않는다는 곳도 있고 또 로임이 우리 생각보담 퍼그나 적은 곳도 있었다. 흥현이가 친구를 통해 집짓기 현장일을 찾았는데 힘든 일이 아니라면서 할 것이냐고 묻는 것을 바깥일이라서 힘 들거라고 밀어버리고 원섭이한테 전화를 했더니 우리가 거처하고 있는 부천 중동역전 부근에 있는 직업 소개소의 전화 번호를 알려주면서 찾아가 보라 하였다. 매일 사람을 모아 여러 곳에 보내 일을 시키는데 일당 6만원씩 준다고 한다. 로임은 괜찮은 편인데 고정 직업이 아니라 일거리가 보장 될 것인가가 근심이고 나로서는 제딴엔 그래도 중국에선 공정사 이름을 단 놈인데 기술일이 아니면 적어도 기계 돌리는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은 것이다.
윤현형님께서 놀러 오시겠다고 전화가 왔다. 일 할만한 공장들에 면접 가기로 전화 했기에 시간이 없으므로 이튿날 만나 놀기로 미루었다. 그러니 래일은 형님따라 서울 구경이나 하고 모레는 또 이나라의 “충혼절(忠魂节)”이라 전민 휴식일이라나? 글페, 6월 7일쯤엔 직업 소개소나 몇개 돌아볼 예정이다, 소개소마다 전화 닿기 바쁘게 할 일이 많다며 꼭 와 보라고 하니깐. 소개비를 벌라니 물론 그럴테지.
6월 5일 오전, 윤현형님이 차를 몰고 형수님과 함께 우리를 데리러 왔다.
놀러가는 길에 서울양천구 목동아빠트에 들려 최순자를 만나보았다. 반가웠다. 동창생인 그녀도 한국에 나온 후로 처음 고향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 한다. 살이 많이 빠지고 고와졌다.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급있는 공무원으로서 먹기를 잘 해서였는지 아니면 일이 편해서였는지 남보다 자그마한 키에 뚱뚱하기로 말이 아니였었는데 한국에 나와 돈 벌이하며 다이어트 하는 것이라 한다. 말이 그렇지 그 고생인들 오죽 했으면 사람이 반쪽이 됐을까? 리해가 안 간다. 함께 놀러 가자고 청했으나 가정부란 일자리를 한시도 비워 두어선 안 되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사진만 한장 찍고 섭섭히 헤여졌다.
서울에서 제일로 크다고하는 수산물 시장에 들려 소주에 생회를 먹고 63빌딩과 남대문 시장을 돌아본 후 남산 타워에 올라갔다. 산허리에서 구경을 먼저 끝내고 내려오는 연변 한 큰 병원의 김원장님을 만났다. 김원장님은 해마다 봄이나 가을이면 한국에 한번씩 나오셔 석달씩 체류하면서 환자들을 보아준다. 의술과 의덕이 높으신 분이라서 그는 어데에 가나 칭찬을 받았다.
75년 8월에 완공하고 81년 10월에 개방 하였다는 타워는 해발 497.7메터이고 지상236.7메터라 세계에서 세번째로 높은 탑이라나? 남산타워 정상에 차린 회전식 레스토랑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면서 서울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멀리로 올망졸망한 구서울의 어두운 600년 흔적이 보이고 누군가가 각목들을 다듬어 세워 놓고 눕혀 놓고 가로 놓고 세로 놓고 놀음 논듯한 진주같이 반짝이는 새 서울이 발 밑에 펼쳐져 있다. “토막 나무”사이사이로 흰 개미 검은 개미들이 기여 다니고 붉은 개미 파랑 개미도 뒤질세라 분주히 꼬리를 물고 쫓아 다닌다. 세계적으로 이런 “개미”가 제일 많은 성시라서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골머리를 앓는거란다.
거리를 거닐 때 하늘을 찌른듯한 마천루(摩天楼)를 쳐다 보노라면 목덜미가 뻗뻗해나고 정신이 아찔해 지더니 타워 꼭대기에서 둘러볼라니 옥황상제가 구름 타고 인간세상을 내려다 보는듯 여유감과 우월감을 자연히 가지게 된다. 아마 이멋 하나에 모두가 많은 돈을 팔아가며 정상에 오르는 것이리라. 한강이 진주를 들부어 놓은듯 해빛을 머금고 유난히도 반짝이며 누뿌리를 시게한다. 민족의 강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한강의 상류를 더듬어 아득히 멀리에 시선을 모으니 “분계선”의 철조망이 환히 보이는듯 하다. 거침 없이 “3.8선”을 꿰질러 서울을 지나 서해로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보노라니 내가슴속에 통일의 갈망을 거세차게 불러 일으키며 눈물이 치솟게 한다. 내가 정녕 옥황상제라면… 저도 몰래 긴 한숨이 나간다.
6월 6일,충혼절이다. 우리는 연이와 영이를 따라 재차 시내 구경에 나섰다. 그애들은 공부와 일에 바빠 날마다 새벽 두세시가 되여서야 잠자리에 들면서도 외숙 외숙모 앞에 례의를 다 하노라고 시간을 떼낸 것이다. 우리가 따라간 곳은 롯데 백화라 했던지 뭐라 했던지 오래된 후라 생각이 흐려진다. 그안에 들어가니 쑈핑으로 부터 구경거리 먹거리 놀거리 없는 것이 없었다. 입장료 또한 겁나게 비쌌는데 석장만 사고 영이는 가이드증을 휙-흔들며 들어갔다. 오늘은 국휴일이라 평일보다 볼거리 놀거리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열시나 되였을까, 입장하여 얼마 안 지났는데 실내의 넓다란 광장에 풍악 소리가 지동치더니 각양 각색의 모양을 한 사람들이 어데선가 불쑥 나와 굿을 치며 돌아간다. 무슨 이벤트가 시작 된 것이다. 탈춤과 상고무를 추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중국의 경극과 사자무 놀이를 하는 사람도 있고 입으로 불을 뿜으며 잡기나 마술 표현을 하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그림처럼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패션모델 표연을 하며 허리를 꼬기도 한다. 백인이 있는가하면 흑인도 있고 엄청난 꺽다리가 있는가하면 기가막힌 난쟁이도 있다.
백마를 탄 놈 앞에선 붉은 오토바이가 부르렁 거리고 세점만 가리운 몸에 구렁이를 칭칭 감고 높다란 차 위에서 몸을 비트는 아가씨도 있었다. 세계 문화예술의 집합이다. 따라 도는 관객들, 앞뒤로 뛰여다니며 좋아라 떠들어대는 조무래기들… 아뭏튼 뭐가 뭣이라 형용키 어려운 잡동사니다. 대개 한시간 가량이나 부산을 떨더니 가뭇 없이 사라졌다. 아마 또 다른 놀이터로 한판 치러 갔을 것이다.
우리는 빵도 먹고 우유도 먹고, 나는 소시지(火腿) 안주에 소주도 한병 마셨다. 놀러 나온판에 소주 둬잔 안 마시면 내가 아니다. 어린애들 처럼 회전 목마도 타고 공중렬차도 타고 쪽배를 타고 물보라를 맞으며 “도깨비굴”도 지나 봤다. 가는 곳마다 유람객들로 붐비고 반시간 남짓씩 줄을 서서 가다려야 차례가 돌아오군 하였다. 애들이나 하는 놀음이니 마다고해도 입장권에 이미 절반 값은 포함된거라 안 놀면 버린다고 거짓말을 하니 타지 않을 수도 없는터였다. 동굴 앞에서 손님들이 꽉 오르면 공중렬차는 산굽이를 에돌듯 실내 벽을 따라 돌기도 하고 철교를 건너듯 실내를 가로세로 꿰질러 다니기도 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광활한 옥상에 나와 달리기도 한다.
나는 일부러 앞 바곤이에 자리를 정하고 머리를 돌려 뒷 바곤이에 앉아 따르는 안해와 조카애들을 향해 샤타를 눌렀다. 나의 마음은 다섯살 동년으로 돌아간듯 모든 고민도 고통도 잊어지고 즐겁기만 하였다. 바깥 뒷마당에 나가 보니 어른들 놀이가 있었는데 고혈압병에다 나이가 원쑤라 감히 올라앉지를 못했다. 늙어지면 뭐나 생각뿐이지 하지를 못하는 것이 인생인가부다.
우리들은 한강 뚝길을 걸었다. 한강 인민공원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바로 가까이에서 한강을 보고퍼 이리로 온 것이다. 전날 남산타워 위에서 멀리 바라보니 진주처럼 반짝이던 강물은 지금 저녁노을을 머금고 피처럼 흐른다. 이같이 큰 강이“6.25”때 피의 강이였다고하니 얼마나 많은 충혼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겠는가? 충혼들을 울며 한강은 오늘도 아침과 저녁이면 피빚으로 흐른다!
영원히 진주빛으로 흐르기를, 제주도나 한강뿐만 아니라 전 반도가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모두 하나로 되여 동북아의 진주로 눈부시게 빛나는 그날이 하루 빨리 다가 오기를 갈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