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 교수의 역사칼럼 30
徒空文耳
다만 빈 문서일 뿐입니다
자치통감을 읽다보면 황제가 정치를 잘 해 보겠다고 하지만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서 헛수고만 하는 경우를 찾아 볼 수가 있다. 당왕조는 618년에 건국하여 130여년이 지난 다음에 이른 바 ‘안사(安史)의 난(亂)’이라는 전란을 겪는다. 현종은 서쪽으로 도망하였고, 그 아들 숙종도 마찬 가지였다가 겨우 안록산과 사사명이 자체적으로 분열하고 분쟁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당왕조는 망하지 않고 연명하였다. 그러니 당왕조는 자기 힘으로 버틴 것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반성도 하고 제도도 새롭게 정비하는 노력이 필요하였을 터였다. 어쨌건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는지 안사의 난이 끝나고 다시 30년이 지난 덕종(德宗)이 통치하던 시점에 오래간 만에 풍년이 들었다. 그래서 쌀값이 많이 떨어져서 쌀 한 말이 150전(錢)이고 속(粟)은 80전이었다. 풍년이 들어도 세금을 전폐(錢幣)로 내야 하는 백성들에게는 곡물 값이 너무 떨어지면 안 되었다. 이러할 때 조정에서 곡물을 높은 값에 사들이는 화적(和糴)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곡물을 사서 군량미로 보내면 되는 것이니 정부에서 사들인다면 농사짓는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도움이 되는 것이다.
덕종은 드디어 곡물이 있는 현장(現場)에서 화적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적(糴)이란 정부에서 백성들이 생산한 곡물을 사들이는 것이고, 화(和)란 곡물을 사들이되 백성들과 합의하라는 뜻이다. 이 조치가 제대로 작동해 준다면 백성들에게 곡물 값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는 효과를 거두게 되니 참으로 좋은 조치일 것이다. 오랜만에 좋은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치를 취한 덕종은 스스로 아주 좋은 정치를 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 근처에 있는 신점(新店)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그곳에 사는 백성인 조광기(趙光奇)의 집에 들어갔다. 덕종은 자기가 화적하도록 조치한 것 때문에 백성들은 즐거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조광기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즐거운가?”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즐겁지 않습니다.”이에 덕종은 다시 묻는다. “올해에는 풍년이 들었는데,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이에 조광기를 잘라서 대답하였다. “조령(詔令)을 믿지 못하겠습니다.”조령이란 법률과 명령이다. 정부에서 정책을 정하고 명령을 내리면서 모두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조령의 내용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그 조령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그 조령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방금 내린 화적하라는 조령도 믿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조광기는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우선 전에 양세법(兩稅法)을 정하면서 ‘앞으로 여름과 가을 두 번만 세금을 거두고 그 외에 요역(徭役)은 없다.’고 하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명목으로는 세(稅)가 아니면서 이런저런 이유를 가지고 관리들이 혹독하게 재물을 거두 가는데, 그것이 원래의 세를 뛰어 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하추(夏秋)로 거두는 두 번의 세금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한 조령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또 이번에 또 화적(和糴)을 하면서 ‘정부에서는 사들이 벼나 보리는 현장에서 차례대로 받아 주겠다.’고 하더니 정부에 판 이 곡물을 행영(行營)까지 운반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당나라는 서북쪽으로부터 이적(夷狄)이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군사들을 장안의 서쪽으로 이동시켜서 군영(軍營)을 세우는데, 이 행영까지 자기가 정부에 판 곡물을 운반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조광기의 말대로라면 지금이 하남성 삼문협에서 정부에 곡물을 팔았는데, 곡물을 판 사람이 그 곡물을 장안의 서쪽에 있는 행영까지 싣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곡물이 있는 현장에서 사들이겠다는 말과 전혀 다른 것이다. 삼문협에서 장안의 서쪽에 있는 군영까지는 수 백리인데 이 거리를 운반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하니 백성들은 자기가 판 곡물을 행영까지 운반하기 위하여 수레를 빌리고 말을 동원하여 운반하다보면 그 비용이 곡물 값만큼 나오니 말로는 정부에서 돈을 주고 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강제로 뺏는 것이지, 화적이 아니며 그래서 돈은 1전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화적을 한다는 조령을 믿고 곡물을 정부에 팔았다가 수레는 꺾이고 말이 쓰러져 죽어 재산을 모두 잃고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부의 조령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심과 괴로운 것이 이와 같은데 어찌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매번 조서에서는 백성들을 우대하고 구휼을 하도록 하였지만 다만 빈 문서일 뿐입니다! 아마도 성스러우신 주군께서는 아홉 겹 깊은 곳에 살고 계시니 모두 이를 아직 알지 못할 것입니다!”
모처럼 좋은 정책을 폈다고 생각하는 덕종(德宗)에게 세상 물정을 모르고 정치를 한다고 사실대로 말한 것이다. 이 말은 들은 덕종이 어떤 조치를 했을까? 겨우 조광기의 집에 부역(賦役)을 면하게 하도록 하는 조치였다. 조령을 믿을 수 없으면 그 잘 못된 것을 고쳐야 하는데, 이러한 일을 하지 않고 겨우 조광기만을 구제하는 조치를 취하였으니, 만백성을 고루 생각해야하는 황제로서 할 일은 아니었다.
덕종의 이러한 정책과 조치는 현장을 모르는 데서 온 잘못이다. 현장을 모르면서 구중궁궐에서 잘한다고 정책을 펼친 때문이다. 이 사실을 역사가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평론하였다. ‘군주가 위에서 힘써 구휼을 하여도 백성들은 이를 마음에 품지 못하고, 백성들이 아래에서 근심에 싸여 원망하여도 군주가 알지 못하여, 떨어져 나가며 배반을 하고 위급해져서 망하는 데에 이르는 것은 모두 이러한 것 때문입니다.’ 소통이 없이 현장을 모르는 정치란 위망(危亡)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마광은 말한다. ‘덕종이 천년에 한번이나 있을까 말까 하게 직접 조광기(趙光奇)를 만나서 잘못의 실체를 파악하였는데, 그에 따른 조치가 겨우 조광기 집에만 부역을 면하게 하였으니, 무릇 사해(四海)는 넓고 백성들의 무리는 많은데 어찌 사람마다 스스로 천자에게 말을 할 것이며, 집집마다 그 노역과 부세를 면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덕종의 어리석은 조치를 지적하였다.
이 역사의 일화를 읽으면서 요즈음에는 높은 공직자,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현장을 얼마나 조사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법률을 만드는지 궁금하였다. 책상에서 현장의 조사 없이 상상력만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이를 펼치는 것 같다. 한 가지 예로 부동산 정책이라는 것을 보면 집값을 잡아 보겠다고 20 몇 번의 대책을 내놓았고 법률도 만들었다는데, 집값은 반대로 천정부지로 올랐다.
집 한 채 가지고 사는 사람이야 내가 살고 있는 집값이 올라간다고 좋을 것도 없는데, 이러한 선량한 시민들은 정책이나 법률의 잘 못으로 집값을 올려놓는 바람에 앉아서 재산세, 건강보험료가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올랐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입은 는 것이 없는데, 집값이 올라서 생돈을 더 내게 된 것이다.
부동산정책의 실패는 그것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월급 받아서는 평생 집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투기로 몰리고, 받는 월급을 평생 저축하여도 집 한 칸 살 수 없게 되었고, 결과 젊은 사람은 살 집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결혼은 아예 생각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람이 늘어간다. 결국 인구절벽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 겨우 집한 칸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재산세 내려면 집을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부동산정책의 잘 못 하나가 그 정책 하나만의 실패로 끝나지 않고, 여러 방면으로 파급하면서 백성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고, 나라의 장래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정책을 덕종의 화적(和糴)과 비교해 보면 현장을 모르고 정책을 세우기는 마찬가지 같다. 그런데 탁상 정책은 부동산 정책 하나 뿐이 아니다. 정부에서 그리 자랑하던 K 방역도, 소득주도 성장도, 교육정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새해가 밝았다. 다른 때 같으면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올해는 드러난 희망의 싹을 찾을 수가 없다. 절망적이다. 조광기가 덕종에게 한 말을 빌리자면 ‘근심과 괴로운 것이 이와 같은데’ 도저히 희망을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세월은 간다. 시간이 흘러서 정책 결정자의 운명도 한 때일 뿐이라는 불변하는 역사의 진실이 있으니, 참고 참으면서 희망의 메시아를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첫댓글 아주 좋은 역사평론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새해라는 데에 솟아날 구멍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찾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할 역사적 임무가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저는 역사의 흐름을 믿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들의 생명력은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고 돌파구를 마련하지요. 절망 속에서 희망이 싹 트는 것은 주역의 明夷卦에서 보이지요.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은 희망을 가지고 쓴 것이고, 땅 속에 불이 있는 명이의 시대에 시간이 지나면 불이 올라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고 하였지요. 이른 바 촛불 데모가 있을 때 나는 걱정을 했습니다. 우중이 선동되는 것을 걱정한 것이지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갖는다고 했나요? 한번도 제 손으로 돈을 벌어 본 일이 없는 86운동권이 휘졌는 시대가 언제 끝나려는지... 그러나 시간은 가고 새 싹은 틀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마는....
몇년전에 이 난에 올린 글의 한 부분입니다/
'나는 촛불시위가 일어날 초기에 대중(우중, 시위는 이성적이 아님)의 힘이 드러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프랑스 혁명 전야의 데마고기가 그렇고,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그렇다고 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더 큰 비극을 겪어야 이 비이성적인 행태가 그칠 것인가? 역사가는 멀찍이 이 문제를 보아야 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언필칭 정치가들의 행태가 유럽의 정치사에서 언제 나타나는 현상인지? 가까운 중국에서 언제 일어나는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후진성에 반성의 글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역사가들조차 어느 한편에 자기 이름을 올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감도 든다. 우리 사회는 언제쯤이나 이성적 판단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가늠해 보며 하루라도 이 시기를 단축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싹은 안 보인다. 슬프다!'
지금 읽어도 같은 글을 쓸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가 이성적으로 되었으면 하는데, 그것도 요원한 것 같군요.
우리 역사의 후진성이라 함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한편으로는 민주주의 역사가 아직 기간이 짧기 때문인가요, 이를 선택한 국민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보시나요. 우중이라고 하셨는데
이를 선도하기 위해서 역사가의 힘이 얼마나 작용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역사가로서 추종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역사가가 우리 역사의 방향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유럽의 정치사와
중국의 정치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너무나 큰 문제를 제기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은 건너 뛰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지난 촛불데모 때에 저는 그것이 프랑스 혁명이라 일컫는 모습과 혹은 모택동의 홍위병 모습과 오버랩 되었습니다. 또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보면서 저런 모습들이 서양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언제쯤 있었던 일일까 하는 궁금하였습니다. 서양에서 역사발전과정에서 등장한 민주주의는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처럼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민주주의는 우리 역사과정 속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고 거개가 수입품이지요. 이 수입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가가 끊임 없이 아직은 19세기적이다. 혹은 20세기 초기적이라는 말로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수입품이지만 정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역사가의 역할로 생각합니다. 아직도 데마고기, 선동정치가 난무하지요. 이는 데마고기가 먹힌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현상을 이성적으로 보지 못하는 우중(대중)이 많다는 뜻 같이 보입니다.
민주주의가 수입한 것이지만 프랑스와 중국에서의 선례를 살피는 것은 유익한 일이지만 우리 역사의 과정에서 문제를 심각하게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문제를 보아야할 것입니다. 촛불 혁명이 문제라기보다는 그 후 집권한 정치가가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사람을 중용하였는가가 더 문제가 아닐까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젊은 층의 균형된 역사이해, 시대적 소명의식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봅니다. 젊은 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민주주의의 기본에 대한 이해와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선동과 정적 파당에 휩싸이는 것이 더 중요한일이 아닐까요. 외교적 측면에서도 우리는 너무나 허우적 거리고 있지 않나요?
좋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촛불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요. 데마고기라고 보는 겁니다. 선동적이라는 뜻입니다. 이성적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비 이성적인 사회현상이 나타나면 반드시 이를 이용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런 선동에 의한 운동 뒤에 참신한 세력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은 허상이고 희방 사항일 뿐입니다. 제대로 되려면 선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실제 권력에서 빠지고 이성적인 사람이 권력을 잡게 해야하는데 그것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선동정치는 박사모, 태극기부대, 때깨문으로 불리는 무리가 있는 한 이성적인 정치가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후진적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성적인 사람들은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데, 지금 이성적인 사람을 등용하기 보다는 패거리를 등용하지요. 요즈음 추윤갈등으로 불리는 경우에 윤이 왜 인기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법치주의자이지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직업에 충실한 사람을 원하고 있지만 태극기, 박사모, 때깨문 같은 비 이성적인 사람들이 세력화하고 있기 때문에 후진성을 탈피 못하는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