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껌 / 김삼진
내가 “왕년엔 껌 좀 씹고 침 좀 뱉었지.” 하고 말할 때는 허세 반, 회상 반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말은 좀 다르다. 그 속에는 ‘그런데 지금 이 꼬라지가 뭐냐….’는 묵직한 자조 같은 게 깔려 있다.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자조自照가 깊어질수록 스스로를 비웃는 자조自嘲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한때 나는 그럴듯한 자리에서 아랫사람을 여럿 거느린 적이 있었다. 조그만 회사였지만 영업을 총괄한다는 직함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분기 말이면 저조한 실적을 끌어올리느라 팀을 몰아붙였고, 한 사람 한 사람 성향에 맞춰 자리를 바꿔가며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능력 있는 관리자는 사람 다루는 법을 잘 알아야 한다. 나는 그 일을 제법 능숙하게 해냈다. 직원들은 내 뜻을 대체로 잘 따라주었고 덕분에 실적이 나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적어도 조직 안에서는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당시 함께 일하던 옛 직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밥이나 한 끼 하자는 말에 약속 장소로 나갔는데 번듯한 외제 승용차를 몰고 나타난 그가 교외 근사한 식당으로 나를 데려갔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는 나를 깍듯이 예우했다. 내가 계산하겠다고 했지만 웃으며 만류하는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계산서를 사이에 두고 한 발 물러서며 나는 그동안 작아진 나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그와의 대화를 곰곰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아침마다 이사님이 해주시던 말씀들이 지금까지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 말 속에는 분명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직원들을 ‘길들였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말처럼 ‘길들인다’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일이다. 나는 그 시절 직원들을 내 방식대로 길들였고 그들은 내 기대에 맞추어 움직였다. 그 결과 우리는 성과를 냈고 나는 능력 있는 관리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관계라기보다 위계에 기대어 이루어진 일방적인 길들이기에 가까웠다.
직원들을 길들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나는 나 자신을 길들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조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규칙이 있고 역할이 있으며, 나를 밀어주는 구조라는 게 있다. 그러나 그 밖으로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가 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다스리고, 이끌어야 한다. 아침에 알아서 일찍 일어나야 하고 누가 평가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단속해야 한다. 리더십을 위해 애쓴 시간은 길었지만 정작 자기관리에는 뒷전이었던 나를 보면서 허탈감이 밀려왔다.
문득 도연명이 떠올랐다. 그는 결코 가볍지 않은 현령의 자리를 스스로 내던졌다. “쌀 닷 말 때문에 어린것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그 말 한마디로 관직을 박차고 나왔다. 그 선택은 멋졌다. 그러나 그뿐 그 뒤의 삶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가난 속에서 술로 세월을 달래야 했고, 때로는 끼니까지 걱정해야 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가 조금만 더 현실과 타협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고단함까지도 결국 그를 완성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도연명처럼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끝까지 현실에 순응한 사람도 아니었다. 조직 속에서 남을 길들이며 살다가 막상 혼자가 되었을 때는 나 자신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흘러왔다. 그래서일까. 옛 직원의 성공을 보며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스몄다. 그는 나에게서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신을 길들였고, 나는 그저 그 시절의 기억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누구를 길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이렇듯 엇갈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서글프다.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 지금,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하는 것은 허망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비록 늦었을지라도 이제라도 나 자신을 조금은 길들여보고 싶다. 거창하진 않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는 일, 쓸데없는 후회를 줄이는 일, 그리고 스스로를 함부로 비웃지 않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길들이기’라고 본다.
‘왕년에 껌 좀 씹고 침 좀 뱉었다.’는 말은 이제 더이상 자랑이 아니다. 다만, 그 시절의 나도 지금의 나도 ‘나’인 것은 분명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말이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질문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지금의 너는 어떠냐?”
나는 아직 이 질문에 선뜻 답하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다시 시작해야 할 출발선 위에 서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입술이 움찔댄다. 뭐라고 말하려 하는데 그 말이 조금은 당당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