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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바울의 고난과 수난(골1장24-29)
성경본문|골로새서 1:24~29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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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조준목사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아는 바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8절 이하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고린도후서 11장23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골로새 편지를 쓸 때만 해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감옥에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적이 되는 거짓교사들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라는 것을 대단한 사실로 만들어 선전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조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 말이 되느냐? 물론 그가 도둑질을 했거나 간음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나라의 법을 어겼으니까 저렇게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냐? 그것이 덕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짓교사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사실을 복음의 진리에 맞서 싸우는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역전시켜서 그의 적들을 쳐부수고, 골로새 교회와 더 친근한 관계를 갖는데, 이 무기를 사용하였습니다.
24절을 보세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했습니다.
나는 이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고난을 받으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고난받는 데는 이유 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은 충성스런 성도들에게는 특별한 축복과 상급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옛날 우리 앞에 가신 선지자들의 반열에 끼게 되는 축복이란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바울은 이방인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선택된 사도였습니다.
사실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랑 때문에 로마에 죄수로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거짓된 고소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고, 유대인들은 그가 이방인 이라는 말을 할 때까지 그의 변호를 듣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자신을 변호한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조상들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열심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다메섹에 예수믿는 사람들이 피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거기에 있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정오쯤 되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나를 비추 어 내가 땅에 엎드려서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습니다.
저는 겁이 나서 주여 뉘시니이까? 했더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셨습니다. 저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빛을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지독히 싫어하고 그래서 그를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지금은 내 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고 성전에 서 기도하는 중에 비몽사몽간에 제게 말씀하시기를 속히 예루살렘으로 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기에 제가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압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는 것을 듣다가 소리를 지르며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다고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며 야단이 났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들을 격분시키고 그를 처형시키라고 요청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심을 입었다는 말에 격분했고, 그 때문에 바울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은 바울을 사랑하고 그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봉사에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그가 핍박하던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생을 바쳤습니다. 바울은 어떤 성도처럼 내 가 교회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고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나를 얼마나 사용하실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것, 그것은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바울의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고난과는 전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죄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만이 세상 죄를 위해서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육체에 채웠습니다(1:24)
여기서 말하는 고난이란 말은 바울이 견디어 낸 핍박들을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고난을 언급하는 것으로는 신약성경에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고난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몸 된 교회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겪습니다.
하늘에 계신 교회의 머리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느끼십니다.
사도행전 9장 4절에 다메섹을 향해 가는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고난에 참여하는데 자기 차례가 되었고 다른 이들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대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만일에 유대인들과 타협을 하고 이방인들을 섬기지 않기로 했다면 그는 큰 고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안전과 안일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청지기의 직분을 받았고, 그 의 부르심에 충실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 을 부탁 받았으며 나는 나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충실해야 한다’는 각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책임과는 상호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을 사명이라 하고, 사명을 받은 사람이 대답하고 나서는 것이 책임입니다.
책임이란 말을 영어로 Responsibility 라고 하는데 대답, 반응 이란 뜻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의식이 강한 사람은 책임의식이 강합니다.
무슨 일이나 책임의식이 강해야 일을 잘 합니다.
책임의식이 빈약한 사람은 일을 바로 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일을 부탁해도 책임의식이 강한 사람은 일단 맡으면 최선을 다해 감당합니다.
그러나 책임의식이 약한 사람은 맡기만 했지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감이 없습니다.
나 하나 안한다고 해서 교회에 무슨 지장이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책임의식이 강한 사람은 내가 안나가면 내 자리가 빌터인데. 그래서 그 자리를 지킵니다.
세상에 가장 비겁한 것이 책임 회피요, 책임 전가입니다.
무책임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앞에는 의의 면류관이 남아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처럼 사명감에 불탔고, 책임감 있게 일하고, 성실하게 살았으므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승리적으로 산 것입니다.
사람은 책임 있는 존재입니다.
짐승에게는 책임감이 없습니다.
작은 기계를 하나 만들어도 책임기한이 있습니다.
2년, 3년의 기한이 있습니다.
그 기한 안에 이상이 생겼으면 책임지고 고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면이 좀 부족합니다.
물건을 팔면 그것으로 끝나고 나중에 이상이 있어서 좀 봐달라면 귀찮게 생각하고 찾아간 손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합니다.
책임질 줄 몰라서 그럽니다.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은 장사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신용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은 책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에 관한 특별한 메시지를 비밀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사이는 비밀이라고 하면 특수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바울 당시에는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비밀이란 과거에는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는 성령에 의해 드러나게 된 신성한 비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자 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축복의 땅을 주셨습니다.
미래의 영광스러운 왕국을 세우시고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들을 성취하실 한 왕을 그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실 메시야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외견상의 모순을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고 난을 받으셔야 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위해 약속하신 것을 파기하신 것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계획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으로서는 설명되지 않는 주님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을 교회 안에서 다 하나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완성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의 백성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 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대하실 것이며 약속된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메시지가 그 당시 이방사람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과 풍성한 은혜에서 제외된 자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방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축복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유대교로 개종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시 아래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0장 1 2∼13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러므로 유대교의 거짓교사들이 바울을 반대한 것은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배경이 전혀 없는 새로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이 메시지가 사람들을 얼마나 흥분시켰을지 상상해 보세요.
한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한때 그들은 영적 무지와 죽음 가운데 살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 가운데 참여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한때 그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살아계심으로 영광스러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한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자로서의 바울, 그리고 이방인을 위해 고난받는 죄수로서의 바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그들 각 개인을 위해 애써 기도하는 기도의 투사로서의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골로새서 1장 28-29절을 함께 읽으십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 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것은 운동선수들이 쓰는 말입니다.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서 경주자가 쏟는 필사의 노력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위대한 능력이 잠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능력을 깨워야 합니다.
성공과 승리의 2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 명확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의 목표를 향하여 집중적인 노력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되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가 강한 욕망과 무서운 집념이 되게 합니다.
그 마음속에 목표의식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그 목표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세상에 불타는 욕망처럼 무서운 것이 없고 강렬한 목표의식처럼 놀라운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생일념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나깨나 자기의 목표를 마음속에 생각하고, 머리속에 그리고, 이것을 이루어 놓고 말겠다는 강한 염원을 가질 때 무서운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성취를 위해서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 집중력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처마 밑에 떨어지는 낙수가 돌멩이에 구멍을 뚫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입니다.
천리길도 한 발자국에서 시작됩니다.
분산은 사람의 힘을 약화시키고, 집중은 인간의 힘을 강화시킵니다.
성공과 승리는 말이나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행동과 실천의 문제입니다.
전력투구의 생활입니다.
다른 말로 정성어린 생 활 자세입니다
정성은 인간의 가장 귀한 덕입니다.
세상에서 정성처럼 힘있는 것, 고귀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정성에 감동하는 동물입니다. 정성스런 마음으로 대할 때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성스러운 태도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보배로운 자본입니다.
정성이 무엇입니까?
짓이 없는 것입니다.
정성으로 쓴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정성을 다해 그 린 그림이라야 걸작이 됩니다.
정성에서 나오는 말씀이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것입니다.
정성은 위대한 가치창조의 원천입니다.
철학자 나이체는 ‘피로 쓴 글만이 생명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정성을 말합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요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성실의 정도가 존재의 정도를 결정한다’ 고 말했습니다.
정말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불성실한 말을 하거나 불성실한 행동을 할 때 나의 존재는 빛이 없고 힘이 없고 진실성이 없습니다.
얼마큼 성실하느냐 하는 데 따라서 나의 존재의 무게와 정도와 가치가 결정됩니다.
내가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나는 힘이 있는 존재가 됩니다.
저는 하루에도 여러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방송을 듣고 감사하는 편지도 있으나, 대개는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어떤 편지를 보면 글씨가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잘 못써서가 아니라 정성없이 되는 대로 쓴 글씨입니다.
읽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잘 못써도 정성들여 쓸수야 있지 않습니까?
글자 한 자를 써도 정성을 들여 써야 합니다.
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남보다 재간이 특출한 사람은 못되는 것을 제 자신이 압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하는 일에 정성을 들여 최선을 다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도 대충 적어서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물리치고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설교 내용을 전부 원고에 씁니다.
힘이 듭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해 오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비서에게 쓰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손이 떨려서 쓸 수 없을 때까지 제 손으로 쓰려고 합니다.
재간이 없으면 정성이라도 쏟아야지 하는 것이 제 생활철학입니다.
무슨 일이나 되는 대로 하는 무책임, 무성의의 습관 과 태도가 오랫동안 쌓여서 오늘의 한국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제라도 국민 저마다가 무슨 일을 하든지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마음과 습관을 기르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앞에 번영과 행복의 문이 열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요행으로 성공하거나 요행으로 잘 살 수 없습니다.
잘 살려면 잘 살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해 질만한 소지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행복과 번영을 바라는 것은 밥을 먹 지 않고 배불러보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맹자 선생은 ‘지성에 감동하지 않는 자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문자 그대로 지성으로 산 사람입니다.
되는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하여 힘을 다하여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세요. 29절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을 위해서 힘을 다해 수고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부끄러운 것 없는 일꾼 이 되었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삶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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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