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26장 이삭 우물을 파다
가나안에 또 기근이 찾아옵니다. 이삭은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면을 받고 블레셋에 머물기로 합니다. 하지만 부전자전인지 이삭은 아브라함이 사래를 누이라 속인 것처럼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징벌하여 구해 줍니다. 이삭은 그해 농사를 지어 백의 소득을 얻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이 있는 곳을 찾아가 우물에 메우자 이삭은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우물을 파면서 이름을 붙이는데, 에섹, 잇사, 르호봇이라 합니다.
온유한 사람 이삭 창26:19-25
창26: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놓았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가 슴에 우유병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 들어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첫날에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는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먹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동 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습니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팔복 중 하나입니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경직된 관계도 부드러워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이 충만해지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도 다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도 다양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잘 나타납니다.
가인은 분노로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노아시대에는 사람들이 극심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이 사람지으신 것을 한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 중에도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색깔을 이삭은 온유의 색깔을 야곱은 열성적 신앙의 색깔을 요셉은 꿈꾸는 신앙의 색깔을 보여줍니다.
이삭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빙그레 웃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함은 성숙한 인격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겸손과 온유로 표현했습니다.
이삭의 온유
온유함은 성질을 내는 것과 반대의 성품입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성질을 냅니다. 특히 자기 신체에 위협을 가한다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기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순순히 내어주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어서 하나님께 바치려 합니다. 그 상황을 보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이삭이 반항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갑자기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켰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보통 청소년 같았으면 그 후에라도 자기를 죽이려한 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반항했다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이 사건에서 이삭은 아버지와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신앙을 보여 주었습니다. 온유함의 극치는 순순히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이삭은 이웃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온유함을 보여줍니다. 이삭이 그랄 지역에 있을 때 불레셋 사람들이 이삭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여 아브라함 시절에 팠던 우물들을 다 메웁니다. 그러나 이삭은 참습니다. 그리고 그랄 골짜기에서 샘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이 이 우물을 자기 것이라 하면서 싸움을 걸어옵니다.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에섹(다툼)이라하고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우물이 자기 것이라 하면서 다투었습니다. 이번에는 우물 이름을 싯나(대적함)라하고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팠는데 더 이상 싸움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을 르호봇(넓은 곳)이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한번 양보한 기록이 있는데 이삭은 세번 양보합니다.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메꾸는 일 하나만해도 얼마든지 화를 내고 싸움을 할 만합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틀림없이 싸웠을 것입니다. 이 때 이삭은 대단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힘이 없어서 안싸운 것이 아닙니다. 그랄 지역의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떠나달라고 부탁할 때 네가 우리보다 강하다는 이유를 대는 것을 보면 이삭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삭은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은 것입니다.
제가 분당 수내동에 있을 때 텃밭을 가꾼 적이 있었습니다. 밭에 무엇을 심어 놓았는데 어느 날 누군가가 그것을 파내고 다른 것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우리가 주인에게 돈을 주고 빌린 땅이었습니다. 얼마나 열이 받는지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양보하고 말았지만 양보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삭이 온유할 수 있었던 이유
온유함은 어느 정도 기질의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온유함은 신앙이 없이는 가지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온유하다해도 사람은 참는데 한도가 있는 법입니다. 이삭의 온유함은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이삭은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었습니다. 24장 63절에서는 이삭이 묵상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때 리브가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25장 21절에서는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자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좌절감을 가지거나 아니면 짜증을 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매우 급한 일이 있는데 누가 내차를 빼지 못하도록 주차를 했을 때 온유함이 시험 받습니다. 열을 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기다릴 것인가 이것은 분명 신앙의 문제입니다. 보통 사람은 안절부절 못하며 신경질을 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상황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삭의 온유함은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이삭에게 내가 너에게 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3절)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셔서 그 해에 백배의 축복을 주십니다.(12절) 이삭의 온유함은 바로 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삶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이 쪼들리고 부족하면 마음도 여유를 잃게 되고 인색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조금만 손해를 입혀도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족하면 아무래도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물론 풍족해도 인색하고 조급한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풍족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복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에 우물들을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양보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더 풍성히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누구라도 양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유한 자의 복
온유한 이삭은 큰 굴곡이 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일이 형통하고 평탄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기할 정도로 복을 받습니다.(14절)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5) 말씀대로 이삭은 거부가 됩니다.(13절) 또 온유한 사람은 먼저 자기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식구들과 화목하게 지내게 됩니다. 남을 변화 시키려하기 보다 자기가 먼저 변화하려고 애씁니다.
심리학에 '거래분석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과거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은 절대로 변하지 않지만 내가 변하면 상대방이 변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부터 변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상대방이 변합니다.
이렇게 남의 단점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의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가정은 화평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평화를 만들어갑니다. 이삭은 그랄 사람들과 화평한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괴롭혔지만 이삭이 양보함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주시는 것을 깨닫고 이삭과 평화조약을 맺으러 찾아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 돌아가니 이삭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이것이 온유한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온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
온유함은 인생사에 너무나 필요한 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귀한 만큼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온유함에 실패하는 주요 이유는 의분과 개인감정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정당한 분노를 잘 다루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참된 온유는 쑥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참는 것이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참으면 병이 됩니다. 무조건 참으면 겉으로는 평화로워도 속에는 곪아 가게 됩니다. 때문에 정당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옳은 분노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옳은 분노는 내가 손해받기에 복수하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되었기에 바로 잡아서 나도 잘되고 상대방도 잘되고 사회도 잘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감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잘되기 위해 충고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쉽습니다. 옳은 일을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가 상한 마음 때문에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얼마나 속이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스스로 자기의 말에 속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유함을 얻으려면 사탄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철저히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잘못에 대해 분노하되 그대로 감정을 폭발시키면 이미 태도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온유함은 잘못을 분별하되 말을 하는 것이 유익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통제하는 힘입니다. 말을 할 때는 부드러움과 사랑을 담아서 내뱉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잘못한 사람이 진심으로 굴복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겉으로는 바보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온유함과 비굴함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비굴한 사람은 말을 해야 할 때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호박씨를 깝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마귀에게 속아서 분노를 직격탄으로 날려서 잘난체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도 약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입니다. 이삭이 이런 온유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온유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말을 할 수 있지만 유익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개인적인 손해에 대해서는 대체로 참아줍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속지 않고 온유를 잘 지켜낸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변화시키고 이 시대를 살려내기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온유함을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온유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고 모든 사람들을 화평한 관계로 이끄는 복된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남아프리카 미개 부족의 하나인 바벰바족 사회에는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다 죄 짓는 사람이 생기면 그들은 정말 기발하고 멋들어진 방법으로 그 죄를 다스린다고 한다.
부족 중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를 마을 한복판 광장에 데려다 세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일을 중단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광장에 모여들어 죄인을 중심으로 큰 원을 이루어 둘러선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한마디씩 외친다. 그 외치는 말의 내용은 죄를 지어 가운데 선 사람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들이다. 그의 장점, 선행, 미담들이 하나하나 열거된다. 어린아이까지 빠짐없이 말한다. 과장이나 농담은 일체 금지된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모두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한다. 말하자면 판사도 검사도 없고 변호사만 수백 명 모인 법정과 같다.
죄 지은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하거나 책망하는 말은 결코 한마디도 해서는 안되고 꼭 좋은 것만 말하게 되어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칭찬의 말을 바닥이 나도록 다하고 나면 그때부터 축제가 벌어진다.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 이 기발한 의식을 통해 새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실제로 이 놀라운 <칭찬 폭격>은 죄짓고 위축되었던 사람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다. 정말 새사람이 되어 모든 이웃의 사랑에 보답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눈물겨운 결심을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