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론강단-478 길과 진리와 생명(요한복음14장1-7절)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7절까지 봉독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여기에 있는 이 본문은 해석에 따라서 더러 오해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인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사역을 거의 마감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문자적으로 하면,
[요한복음 14장]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을 ‘근심 안 해도 되겠구나.’ 라든지, 또 뒤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말도 나오는데,
‘두려워 할 필요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단 말이죠.
사실은 근심할 것이 없는데, 근심하지 말라 하겠습니까?
두려워 할것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지는 않겠죠.
그래서 사실은 근심하게 될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 너무나 극명하고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리고 여기 1절과 2절 사이에는 엄청난 말씀이 사실은 함축되면서 생략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고,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여기에서 앞에 것을 빼어버리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하면 모르겠는데, 근심하지 말라. 굉장히 근심할 일이 생길 것이고, 굉장히 두려워 할 일이 생길 것이고, 그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그 근심하지 말라 하는 근거로 주셨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 어려움도 안 당할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는 너희는 발붙일 곳이 없을거야.
인자도 머리 둘 곳도 없었다.
너희를 핍박할 것이고 축출할 것이고 공회에 넘겨줄 것이고 매를 때릴 것이고 굉장한 어려움이 있을 텐데,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발붙일 곳이 없을지 모르지만,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죠. 이해가 됩니까?
그러면 이 말이 정말 굉장히 평안하게 즐겁게만 들리는 말씀이 아니라, 비장한 각오를 해야 된다는 말씀인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너무 두려워해버리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나중에사 이 뜻을 알도록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저도 전에는 이 부분을 좀 예사롭게 지나갔어요.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옛날에도 이 부분을 더러 설교하고 지나갔었는데 그 때는 저도 생각이 미치지 못한것 같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근심하지 말라’ 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핍박도 당하고 환난도 당하고 순교하게 되고 대부분 그렇게 되잖아요. 제자들이..
그렇게 되지만 그러나 내 아버지 집에는 이 세상처럼 그런 곳이 아니라, 내 아버지 집에는 이 세상에서 핍박 당하고 순교하고 매맞고 갈곳이 없고 숨을 곳이 없고 그럴지 모르나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여태까지 우리가 문자대로만 보는 것과 상당히 차이가 나는 거죠.
비장한 각오를 하라는 말씀 같아요.
..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는데,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합니다.
지금부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실 것이고, 또 너희는 핍박을 당하고 할 것인데, 그 때 까딱하면 서로 회피하고 아니면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잡아주고 이런 식으로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서로 사랑하라..
이런 말씀으로 경계하시는데,
그래서 13장 34절에서 35절에서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말이 더 좋은지 모르겠는데, 영어로 번역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러브 언아더(love another)’로 되어 있어요.
러브 언아더(love another).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특히 우리가 한국사람들이 자기와 조금만 다르면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그런 기질이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이..
그래서 교단과 교파가 끝없이 갈라지는데..
그 진리의 본질적인 면에서 다르지 아니하면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그렇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우리가 대부분은 사랑의 대상이예요.
특히 예수님 제자들이 여러 성격이 개성들이 아주 강한 그런 모습들인데, 서로 미워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특별히 예수님께 가까이 있는 것 같으니까 다른 제자가 시기 질투 비슷한 것 할 수 있는 것이고, 야고보 요한이 주의 우편 좌편에 앉겠다고 그렇게 치맛바람날리고 하니까 미워할 수 있는 것이고, 거기다가 열심당원 시몬이 있다가 하면, 세리 마태가 있으니까 반목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미워할 수 있고 서로 반목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래서,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했는데, 그 길이 무슨 길이겠어요?
십자가의 길이예요. 십자가의 길.
그리고 그 때에 나는 도마가 말할줄 알았어.
도마는 애매한 것 어정쩡한 것 이렇게 안 돼.
모르면 확실히 모르는 것이고 알면 아는 것이고 딱 부러지게 해야 되는데, 제자들이 잘 모르는데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모르잖아요.
그런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그 길을 알리라’ 하니까 바로 도마가,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모릅니다. 우리는..’
이 도마는 딱 정직하고 솔직하게 모르면 모른다고 이야기 하고 이해가 안 되면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 거야.
그 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여기 성경에는 ‘내가 곧 길이요’ 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라든지 영어에는 앞에 정관사를 붙여가지고 ‘더 웨이(The way)’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이 엠 더 웨이, 앤 더 트루스, 앤 더 라이프.(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더(The)’라는 정관사를 붙여서 ‘내가 바로 그 길이다’ 할 때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예요.
예수님이 바로..
그러니까 처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돼.’
‘자기 목숨을 얻을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는다.’
그러니까 ‘내가 그 길이다’ 할 때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할 때 그 길도 ‘십자가의 길’이예요.
그래서 제자들이 이 말씀 하실 때는 아직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성령이 임하시고 나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고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이 예수님의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구나..
영어를 쓰는 사람들 세계에 ‘노 크로스 노 크라운(No cross, No crown)’ 그런 말이 있어요.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는 안 질려고 하면서 영광만 찾을려고 한다면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십자가 후에 영광이지, ‘내가 그 길이요’ 할 때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좁은 길이고 협착한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고 죽음의 길이고, 자기를 버리는 길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그런 길이지..
그러니까 이게 처음 14장 첫머리에 ‘근심하지 말라’ 할 때부터 지금 상당히 비장한 말씀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진리되신다는 사실은 이 때로서는 거의 제자들이 인식이 안 되었는데, 상당히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은 바로 진리셨다. 그리고 생명이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생명의 길이다.
그 생명의 길은 자기를 버림으로써만 자기를 부인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이예요.
이리저리 요령껏 편한 예수 믿고 살살 요령피우고 그렇게 한 사람은 자기 생명까지도 잃을지 모른다는 거야.
여러분 지난 일제시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예수교 장로회 교단 감리교 교단 이런 데에서 총회에서 신사참배 하기로 그렇게 결의를 했단 말이죠.
땅땅땅 이렇게 쳐서 결의했다니까..
그 때 총회장이 홍택기 목사님이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친일파 명단에 우리 기독교 인사가 50여명이 올라가 있어요.
무서운 일이죠.
그런데 굉장히 똑똑한 사람도 많았어요.
거기에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위대한 저술을 남긴 사람도 있고 신학자도 있고 한데, 그 신사참배를 총회에서 결의를 한 거야.
또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잘못된 거거든요.
한국교회를 한번 시험해본 거죠.
그런데 그 시험에 총회는 한국교회 총회는 시험에 낙방을 한 거죠.
여러분 우리가 종이 펴놓고, 내일 대수능 시험인데, 종이에 문제 알아맞히는 시험은 시험도 아니야.
우리 날마다 우리앞에 전개되는 삶에서 우리가 시험을 치르는데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그렇게 결의를 한 겁니다.
물론 총회 소속된 모든 교회 모든 성도가 한게 아니라, 총회 임원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이고, 또 거기 참여했던 총대들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건데..
우리가 지금 이 편안할 때는 모릅니다.
누가 참 믿음을 갖고 있는지 몰라요.
그런 일을 당하면 알곡과 쭉정이가 나옵니다.
그래서,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아주 현실적이고 아주 어쩌면 이 빌립의 소원이라는 것은 어쩌면 모든 인류의 공통적 소원이 아니겠어요?
예수님 말고 하나님 아버지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
예수님 보니까 모습도 초라하고 능력은 있어 보이는데 외모가 좀 그렇고 하니까 아버지를 봤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나와 아버지는 똑 같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 하는 이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예고한 건데,
왜 자꾸 미리 이렇게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십자가에 예수님께 넘겨지는 끔찍한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을 때 이게 예수님께서 예기치 않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던대로 된 것이다 하는 것을 믿게 할려고.. 미리 말씀하시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 하신 말씀이 참 파격적인 말씀이,
..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런 것은 우리 동양사람들의 의식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제자는 스승보다 못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고, 심지어 어떤 목회자들은 ‘그 교회 성도들은 그 교회 목회자를 넘어서지 못한다.’ 아주 그런 말도 안 되고, 성경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발전이 없어요.
제자가 그 선생을 넘어설 수 있어야 발전이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을 능가하거나 넘어서지는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만큼 파격적으로 개방해 놓은 거예요.
여러분 엘리사 보세요.
선생님의 영감의 갑절을 원합니다.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야 발전하는 거예요.
실제로 예수님 하신 일은 사역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열두 명에다가 70인 제자 정도, 거기에서 더 확장하면 오순절 때에 120문도 정도..
그리고 예수님 승천하실 때 한 5백여명 정도가 감람산에 모였었다. 그 정도밖에 안 보이거든요.
뭐 5천명씩 온 것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고..
정말 예수님을 따르고 믿고 배우고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기독교 역사에 예수님이 한 일처럼 베드로라든지 바울이라든지 굉장한 분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했습니까?
무디같은 사람만 해도 일생동안 10만명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다는 거죠.
지금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모아 놓은 사람들이 자기가 다 전도하고 가르친 것도 아니지만, 어떻든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어떤 일정선 아래로 제한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무한히 개방하셨어요.
왜냐하면 그 이유가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내가 아버지께로 감으로써 다른 보혜사를 보내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이렇게 한 거야.
사람이 그렇게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 13절에,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러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구하게 되면 그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을 보고 응답해 주시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아들도 영광을 얻게 되고, 또 너희로 인해서 내가 영광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된다.
한 개인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15절이죠.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전제조건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고,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이예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야 되는데, 예수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건데, 어느 정도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 거하면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 안에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헬라어나 영어에 보면 ‘예수님 이름 안에서 기도합니다.’ ‘인 지저스 네임(In jesus name)’이예요.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처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면서 내 이름으로 기도해야지, 내 안에 거하지도 않으면서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도둑질 하는 겁니다.
그런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14장에서 16장까지가 아주 중요한 기독교 영적 생활에 핵심이 되는 부분인데,
15절,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여러분 보세요.
우리가 예수님 사랑한다고 예수님께 양복을 한벌 해줄 수도 없고, 예수님 사랑한다고 냉면 한그릇 사줄 수도 없고, 예수님과 솜사탕 사 주면서 데이트를 할 수도 없고, 뽀뽀를 할 수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사랑할 거죠?
여기 예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겁니다.
저는 제가 만든 노우호의 계명은 별로 없어요.
제가 강조해도 순전히 성경에 있는 말씀을 하는데, 그래도 제가 성경에서 깨닫고 그것을 어떤 분들에게 설교나 강의를 통해서 전했을 때, 그 진리를 기뻐하면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기뻐요.
‘저분이 내 말을 참 달게 들은 것 맞구나..’
‘그런데 말이야 좋지만 그것 시키는 대로 다 할 수 있나.’ 그러면서..
‘이왕 버린 몸..’ 하면서..
그냥 그만 형편대로 해버리면 나를 믿는다 사랑한다.. 그것은 괜찮은데 저 사람이 정말 예수님까지 사랑하는 것 맞나?
그런 회의가 든다니까..
딴 것은 중요한게 아니예요.
우리가 정말 목사를 사랑 안 해도 괜찮은데 그래도 기왕 사랑하는게 좋아요.
아니 예수님 말씀 보세요.
‘너희 말을 듣는 것은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내 말을 듣는 것은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렇죠?
만약에 제가 하나님 말씀 예수님 말씀 성경말씀이 아니고, 노목사 개인의 사적인 말을 하면 여러분 안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거야 어때요?
내가 여러분에게 뭘 강요할 무슨 권리가 있겠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개인적인 사적인 무슨 견해를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 그것은 전혀 알 필요도 없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이 분별해 보시고 그 목회자가 사석에서나 강단에서나 각 집에서나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명백한 진리를 가지고 말씀할 때, 그것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서 순종하는 것,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다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또 지나치게 넘어가서 ‘주의 종을 사랑하면 복 받는다.’ 그래가지고 물론 주의 종을 미워하는 것 보다는 낫겠죠.
그래가지고 이상하게 만들어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저를 사랑하고 저를 신뢰하면 제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일 때 그것을 여러분이 달게 듣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그 예수님 안에서 기도할 때 기도가 응답된다는 거예요.
16절,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할 때,
여기 ‘다른’ 이라고 말할 때 엉뚱한 ‘다른’이 아닙니다.
영어로 하면 ‘디퍼런트(different)’가 아니야. ‘언아더 원(another one)’.
‘디퍼런트(different)’는 종류 자체가 ‘다른’이고, ‘언아더 원(another one)’은 같은 종류의 ‘다른’이죠.
여러분 우리 말에는 이 ‘다른’이라는 말이 공통으로 쓰이죠.
영 다른 것도 다른 것이고, 똑 같은 다른 것도 다른이라고 쓰는데, 영어에는 디퍼런트(different)는 영 다른 것이고, 언아더 원(another one)은 똑같은 다른 거예요.
그래서 여기 말하는 헬라어로 ‘알로스’라고 하는 말은 ‘똑같은 다른’ 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데 예수님 아닌 다른 보혜사. 언아더 원(another one)이라고 되어 있어요.
..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님에 대한 이해중에 첫째는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는 영이시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성령이 임하시면 진리가 진리되도록 가르치는 거예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너희 안에 거하신다.’
세 번째 성령에 대한 이해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기 보면 요한복음에서 ‘내가’ 라는 말이 물론 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 ‘내가’ 라는 주체인데, 그 ‘내가’ 라는 말이 어떤 데에는 성령이 ‘내가’ 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데에는 성부가 ‘내가’ 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데에는 성자 하나님이 ‘내가’ 라고 하신 곳이 있어요.
‘내가’ 라는 말을 공통으로 쓰는 것 같이 그렇게 쓴다니까..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할 때 성령이 오실거거든요.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영적으로 이렇게 묶어져서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얘기죠.
다시 21절에, 15절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하시는데,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고, 또 그런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타나는데, 그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은 성령으로 나타나요.
성령의 능력으로 이렇게 나타나는데, 이 때 나라는 말이 거의 하나처럼 되어 있으니까, 분명히 세 위격이 있는데, 하나처럼 한분처럼 이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다대오라고 하는 유다인데,
..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성령이 어디로 흐르시며 성부 하나님이 누구에게 함께 하시느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킨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 문자대로 실천하는 사람에게 거처를 함께 하리라..
그래서 지금 기독교 역사상에 정말 산상보훈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문자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며 역사가 일어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말씀을 에누리 해가지고 부담되니까 요리 조리 해석을 해가지고 교묘하게 아전인수격으로 해가지고 요령피우고 뺀질뺀질 하게 이렇게 하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데 아무 것도 안 돼. 아무 열매가 없어.
그냥 아주 단순하다 못해 순진하고 무식할 정도로 문자대로 성경말씀을 진리를 에누리 하지 말고 실천하는 사람들 거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거야.
실천하기 싫으니까 자꾸 해석을 하는 거야.
이게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렇게 했어요.
자꾸 해석을 하고 미드라쉬 미쉬나 게메라 토셉타 탈무드 할라까 하까다 자꾸 해석에 해석을 더해가지고..
행동은 안 하고 계속 연구하고 해석하고 앉아 있는 그런 신학자 그런 바리새인들 율법학자 이런 사람들 함께 하지 않았고, 지금도 단순히 실천하면 될 것을 계속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어요.
그런 것은 신학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신학서적을 너무 뒤적거리고 거기에 매여가지고 그런 이론 속에 휘말려가지고 인생 다 허비하지 말고, 알아들었으면 실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알아들을 만큼만 해석하고 또 알았으면 행동하고 실천하게 이렇게 해야, 진리를 단순히 실천하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모르겠어요.
저도 너무 많이 해석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해석을 너무 많이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알아듣지 못했으면 한번 더 물어보고 알아들었으면 그냥 실천하면 거기에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24절,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그러니까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죠.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반대로 하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킨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여러분 제자들이 마태 정도는 상당히 필기를 했다고 봅니다. 마태 정도로..
마태는 특별히 무슨 서기로 임명이 안 되었어도 습관적으로 기록을 했을 것 같아요. 실력도 어느 정도 되고..
일반적으로 다른 제자들은 거의 다 필기하지 않았지만 성령이 임하시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것이 다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보혜사’라는 말은 우리말 일반회화체에서는 없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가 말에 없다가 신조어로 나온 거예요.
국어 사전에 보혜사라는 말은 없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딱히 우리말로 ‘보혜사’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 가지고 해보니까 정확하게 하는 말이 별로 없어요.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인데, ‘파라’하는 말은 ‘곁에 계신다.’ 그런 뜻이예요.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신다. 뭐 있어요?
우리가 보혜사라는 말 말고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 뭐라고 하면 되겠어요?
‘카운셀러(counselor)’라는 말도 상담 끝나면 떠나가잖아요.
그래서 저도 말을 찾아보니까 없더라고. 우리 말에는 이런 개념이 없어요.
변호사 하면 변호비도 내놔야 되죠. 그렇죠?
변호사와 달라요. 상당히 변호사와 비슷한데 변호사와 달라요.
카운셀러라는 뜻이 있는데, 그것으로도 안 되고..
그래서 영어로는 컴포터(comforter)라고 해요. 컴포터.
그 영어도 참 애먹었는가봐.. 헬퍼(helper) 이렇게 된 곳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말에 ‘보호 하시고 보증이 되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스승이 되시고’ 하는 말이 보혜사(保惠師)라고 했어요.
굉장히 좋은 이름이죠.
우리의 보증이 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스승이 되신다.
그러면 보혜사(保惠師)죠.
그래서 그만한 말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보혜사라는 말은 순전히 우리 신약성경 번역하는 분들이 고민하다가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도우시는 분이시다.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이 그런 뜻이예요.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가르치는 분이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예요.
그러니까 성령이 ‘함께 하시고, 진리의 영이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는 정도를 지금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소개하면서 약속을 하십니다.
이런 분을 보내주시겠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까 얘기 했죠?
근심할 게 없는 것이 아니고,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닌데, 근심할게 와도 근심에 지지 말라는 거예요.
두려워하는게 온다해서 두려움에 위축되어서 거기에 주저앉지 말아라.
두려워하고 숨고 피하지 말라는 거예요.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 때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할 때 우리가 ‘아 아버지가 대장이고 그 밑에 예수님은 2등 계급이고..’ 까딱하면 이렇게 생각하기 쉬워요.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한등급 아래 하나님 아버지가 제일 높고 이런 개념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때로 교회에서 질서를 볼 때는 전혀 목회자나 장로라고 해서 여러분 성도보다 큰게 아닙니다. 똑 같아요.
인격으로 동격이고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질서상으로 볼 때 질서는 있어야 되니까, 질서상에서 그런 것이지, 강대상이 높은 것은 여러분이 뒤에까지 볼려고 그런 거예요.
이게 뭐 높아서 제가 높은 데 선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개념을 없애기 위해서 강대상을 낮추고 뒷 좌석을 이렇게 높인 거예요.
절대 목회자가 여러분보다 높다든지 그런 것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보다 먼저 깨달았다든지 먼저 배웠다든지 그런 순서는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님 세분이 영광과 권능이 동격이예요. 똑같습니다.
그래서,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그러니까 뭘 알았으면 하나님이 하신 것을 다 기뻐하고 다 감사하고 그래야 돼요.
모를 때는 와도 걱정이고 가도 걱정이고 이렇게 될 수 있는데, 진심으로 알면 하나님이 하신 것은 다 우리를 위한 것이니까, 가시는 것도 우리를 위하심이요 가심으로서 성령이 오신다니까..
오시는 것도 우리를 위하심이예요.
그래서 정말로 알게 되면 오시는 것도 감사한 것이고, 가시는 것도 감사한 것이고, 범사에 감사할 일 밖에 없는 거야.
제가 가끔 이야기 하죠?
맑은 날도 좋은 날이고 비오는 날도 좋은 날이고 구름낀 날도 좋은 날이예요.
구름낀 날이 흐리다 해가지고 기분나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신 일은 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이니까 다 아름다운 것이예요.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을 미리 말해놔야 우발적으로 갑자기 무슨 불의의 재난당한 것처럼 하지 않게 할려고 미리 말한다는 거죠.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하시면서 자리는 뜨시는데, 여기까지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남기신 것이고 물론 추가로 15장 16장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서 비장한 각오를 할 수 있도록..
여러분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알리라’ 한 뜻이 십자가의 길이고, ‘내가 곧 길이요’ 할 때 그 길도 십자가의 길이고,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하는 것은 ‘이 땅에서 너희가 어려움을 당하겠지만’ 하는게 살짝 가리워져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앞으로 마지막때가 되면 성도들은 이 땅에서 발붙일 곳도 없을지 몰라요.
그러나 우리가 너무 두려워하지 말 것은 땅에서는 우리가 핍박을 당할 수 있고 순교를 당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은 줄 믿습니다.
14장에 있는 말씀이 그저 달콤하게만 들을 말씀이 아니라, 굉장히 비장하게 들어야 할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바로 이해하신 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초겨울의 문턱에서 기후변화로 인해서 또 내일은 시험이 다가왔는데, 학생들이 떨면서 대수능 시험을 치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 두려워하지 않도록 어려운 시험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 위축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지금 시험과 또는 여러 가지 질병과 유행되는 어떤 감기와 이런 것들이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많이 위축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담대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는 질병도 많고 고통도 많고 핍박도 유혹도 시험도 고난도 환난도 어려움도 많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영원히 약속된 우리 아버지 집에는 평안하게 거할 곳이 많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험에 임하는 우리 자녀들을 지켜주시고, 그 손과 마음이 떨리지 않게 하시고, 담대하게 그 동안에 갈고 닦은 모든 노력한 것들이 하나도 헛되지 않게 다 기억나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셔서 잘 쓰고 담대하게 나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청소년들이 가는 길 특히 믿음의 자녀들이 가는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제 한해가 저물어 가고 이제 참 아름다운 계절 감사의 계절 결실의 계절 모든 것이 마지막 순간이라도 아름답게 장식할려고 노력하는 단풍들의 계절을 보면서, 우리의 삶도 늙어가면서도 추태를 부리지 아니하고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