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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석암사 원문보기 글쓴이: 석암사
산스크리트어로는
샤카무니 (Sakyamuni)이며,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불교의 교조로서 석가, 석존(釋尊)등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기원전 623년 중인도 가비라국 성주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났던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부처님이다. 인생의 고뇌를 깨닫고 출가하여 6년 간 고행을 하였다. 보리수 그늘 아래에서 수행을 하실 때 양치기 소녀 수자타 여인이 거룩하게 생긴 수행자를 보고 매일 그 곁을 지나칠 때마다 양의 젖 즉 유미죽을 태자 앞에 놓고 지나 다녔다.
어느 날 그날도 역시 똑 같이 유미죽을 태자 앞에 놓는데 태자께서 그 순간에 유미죽에서 나오는 향긋한 냄새가 코로 들어오는 순간에 극심한 시장기를 느끼며 그는 이러한 고행을 통해 금욕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유미죽을 드시고 니란자 강가에 나가 목욕을 하신 뒤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7일 만에 2500년 전인 바로 오늘 새벽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시고 드디어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이 되었다.
석가모니불은 불교의 교조로 숭배되며, 대웅전의 주존불로 봉안된다. 석가모니불을 나타내는 불상은 손모양이 특이하여 금방 구별할 수 있다. 석가모니불을 나타내는 손모양은 그가 보리수 아래에서 마왕들의 항복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이 자세는 왼손 손바닥을 위로하여 단전 부근에 대고 오른손을 무릎에 얹어 아래로 내리 누르는 형상이다.
하늘나라에서 세상을 살피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세월)동안 수많은 생을 통하여 부처님이 되기 위한 수행과 공덕을 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도솔천에 계시면서 세상에 나아갈 때를 기다리며 세상을 살펴보셨습니다.
카필라국의 슛도다나왕과 마야부인이 어질고 덕행이 뛰어남을 아시고 마야부인의 꿈에 흰 코끼리를 탄 모습을 나투어 두 분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부처님 세상에 오시다.
지금부터 2500여년전, 갖가지 꽃이 만발하고 향기 가득한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처음 태어나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옮기시고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시며
"하늘과 땅 위에 나 홀로 존귀하네(天上天下 唯我獨尊)" 라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존엄, 인간존엄, 생명존엄의 선포요, 우리들 모두는 신성하고 무한 절대한 생명의 주인이라는 선서였던 것입니다.
네 문에서 만난 사람들
어린 싯다르타는 자상하게 양육되고 훌륭하게 교육되었으며, 열 아홉 살 되던해에는 야쇼다라를 아내로 맞이하여 안락하고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였지만 그는 점점 깊이 인생의 문제에 관하여 명상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봄날 싯다르타는 성의 동문으로 나아가다가 늙은 노인을 보았으며, 인간은 반드시 늙어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남문에서 병든 자를, 서문에서 주검의 행열을, 그리고 북문에서는 출가수행자의 잔잔한 미소를 발견하고는, 늙고 병들고 죽음을 생각하고 또 자기가 가야할 길을 느꼈습니다.
카필라의 성을 넘어
싯다르타가 스물 아홉살이 되었을 때 아내 야쇼다라가 아들 라훌라를 낳았습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다시한번 인생의 문제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으며,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벗어난, 그리고 슬픔과 고뇌가 없는 길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궁중에서 큰 잔치가 베풀어 지던 날 밤, 그는 아내와 아들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없는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마부 찬타카를 깨워 애마 칸다카를 타고 카필라 성벽을 넘어 어둠을 뚫고 달려 갔습니다. 그는 때 묻고 얼룩진 껍데기를 벗어나 새롭고 영원한 기쁨을 찾아 출가한 것입니다.
가야산의 숲속에서
싯다르타. 이제 그는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맨발로 걷는 구도자, 빛을 찾아가는 수행자 였습니다. 그가 찾아간 여러 선인들에게서 그는 갖가지 고행과 선정을 닦았지만, 그것이 죽음과 삶의 문제 를 해결해 주지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설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가야산의 고행림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강물도 마르게 하고 몸의 피까지 마르게 하는 가시밭길, 과거 현재 미래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행의 짐을 지고 싯다르타는 나아갔습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속박에서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를 풀어내려는 자유의 길 해방의 길을 그는 걸어갔던 것입니다.
보리수 아래의 빛나는 새벽 별
죽음을 뛰어넘을 고행을 통해서도 싯타르타에게는 빛나는 진리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길이 아닌 다른 길, 옥심을 따르는 쾌락의 길도 아니고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의 길도 아닌 중도의 길이 바른길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기운을 회복한 싯타르타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나무아래 앉아 깊고 고요한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다섯 되던 해 12월 8일, 그는 쌓였던 어둠과 장애를 넘어섰습니다.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신 것입니다.
감로의 문이 열리다.
대 진리를 이루신 부처님은 먼저 누구에게 이 법(眞理)을 설할 것인지를 생각하셨읍니다. 그리곤 가야산에서 함께 고행하다가 그를 비난하고 떠나간 다섯 수행자를 생각해 내시고, 2백킬로나 떨어진 베나레스를 향해 떠났습니다.
베나레스의 근교 녹야원, 이곳에서 다섯명의 수행자를 향해 부처님의 최초의 가르침은 베풀어졌습니다. 그 가르침은 두 극단을 뛰어넘는 중도의 길이었고, 세상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집착) 과 이를 벗어난 평화(滅)와 그에 이르는 방법(도)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 방법은 바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8正道)을 힘써 수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쿠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아래서
부처님의 길, 그것은 만인을 위한 땀과 피와 눈물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광과 승리와 기쁨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듯이 부처님의 발길, 눈빛, 목소리는 모든 이들의 고통과 항상 함께하는 빛이었습니다.
진리의 문을 여신 지 여든해,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에서 부처님은 그 장엄한 생애를 거두셨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眞理)을 등불로 삼아라, 모든 것은 변화하나니 게으름 없이 힘써 정진하라"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시고.
참고:http://www.hallym.ac.kr(꺼지지 않는 등불)
팔상성도(八相成道)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기간으로 나누어 보는 전통적인 방식을 팔상성도(八相成道)라 한다.
또는 팔상 시현(示現), 팔상작불(作佛), 석가팔상 등으로도 말한다.
① 도솔내의상
⊙도솔천(Tusita) : 상족(上足)·묘족(妙足)·희족(喜足) 등으로 번역 .
욕계육천(欲界六 天)의 제 4천으로 보살들이 주하는 곳임 . 수명은 4천세로 그곳의 하루 밤낮은 인간의 400년에 해당한다고 함.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 여러 생을 통해 무수한 보살행 (菩繭行)을 완성하고 도솔천 에 올라가 머물면서 부처가 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의 이름은 호명보살(護明菩 薩). 마침내 때가 되어 사천왕, 제석천, 대범천 등이 찾아와 부처가 되어 줄 것을 간청.
⊙호명보살은 ①태어날 시기, ②태어날 나라, ③지방, ④가계(家系)와 어머니,
⑤수명 등 다섯 가지를 관찰하여 카필라국 정반왕의 태자로 태어날 것을 결정 .
②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카필라왕국의 슛도다나왕과 마야왕비는 늦게까지 왕위를 물려줄 태자가 없어 근심이었는데 어느 날 왕비가 어금니 6개 난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꿈. 곧이어 수태.
⊙산일이 다가오자 풍습에 따라 마야왕비는 해산을 위해 친정인 콜리성으로 향하던 도중 무수(無憂樹) 아래에서 산기를 느끼고 급히 마련된 휘장 안에서 해산.
⊙태자는 태어나자마자 주행칠보(周行七步)하며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 오당안지 (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吾當安之)'라고 설파.
⊙온갖 천인이 나타나 공양하고 용(龍)이 물을 뿜어 태자를 목욕시킴.
⊙태자에게 '싯다르타(모든 것 다 이루어진다)' 라는 이름이 붙여짐 .
⊙설산에서 수도하던 아시타 선인이 상서로운 기운을 감지하고 카필라성으로 찾아와 태자 의 관상을 보다가 흐느껴 움. 선인의 이야기로는 태자가 장차 전륜성왕이나 불타가 될 것 이라 예언
.⊙마야왕비는 태자를 낳고 이레만에 서거. 이후 태자의 양육은 이모인 마하파쟈파티에게 맡겨짐 .
③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싯다르타 태자는 온갖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고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
⊙ 왕궁에서 온갖 호사를 영위. 예를 들면 삼시전(三時殿) 등.
"비구들이여, 출가하기 전에 나는 대단히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내가 살던 집 에는 연못이 있고 거기에는 항시 아름다운 연꽃들이 피어 있었다.
방에는 언제나 전단 향( 檀香)의 향내음이 감돌았고, 입는 것은 모두 카시산의 최고급 옷감이었다. 또 나 를 위한 세 채의 별전(淨殿)이 있어 겨울과 여름, 봄을 따로 지냈다. 여름의 우기 (雨 期) 동안에는 여름 궁전에서 가무를 즐기며 밖에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외출을 할 때는 언제나 하얀 일산(日傘)을 받들고 따라다니는 궁녀들이 있었다. 또한 비구들이여, 다른 집에서는 노비나 식객들에게 쌀겨나 소금죽을 주었지만 나의 집에서는 궁 인들에게 쌀밥과 고기반찬을 주었다."
― 「중아함 유연경 」
⊙ 카필라왕국의 이웃인 콜리성의 공주 야쇼다라를 태자비로 맞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 그러나 천성이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인 싯다르타 태자는 자주 깊은 명상에 잠겨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함.
예를 들면 농경제(農耕祭)의 일화. 농부의 가래에 의해 파헤쳐 진 흙 속에서 작은 벌레가 꿈틀대자 작은 새가 그것을 낚아 채었음. 그러나 그 작은 새를 다시 큰 새가 쫓음. 이러한 약육강식 (弱肉强食)의 현실세계를 목격하고 태자는 큰 충격을 받음.
⊙ 카필라성의 동, 서, 남, 북 4대문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가 각기 노인, 병자, 장례행렬, 출가수행승을 목격하고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인간 고 (苦)를 직감한 뒤 출가수행 을 결심 .
④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야쇼다라 태자비가 라훌라를 낳음.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들은 태자가 '라훌라(장애), 라고 탄식했다는 데에서 아들의 이름이 됨. 곧 아들의 탄생은 출가 수행에 장애라는 뜻임.
⊙ 아들이 출가하려는 결심을 알아챈 아비지 슛도다나왕이 출가를 만류하자 늙음과 질병,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출가하지 않겠다고 함.
결국 출가의 결심을 더욱 굳힘.
⊙ 출가 전날 밤 잠든 궁녀들의 모습에서 썩어가는 백골을 느낌.
⊙ 마부 찬다카를 깨워 날랜 말 칸타카를 준비시킨 뒤 마부만을 데리고 아무도 몰래 성을 빠져나옴. 이윽고 아노마강가에 다다른 태자는 머리를 깎고 몸에 걸친 모든 장식물을 마부 찬다카에게 주어 돌려보냄 . 곧이어 태자는 숲 속에서 만난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고 수행자의 생활을 시작함.
이 때가 태자 나이 29세.
⑤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출가수행자가 된 싯다르타 태자는 소문에 들은 선인 (仙人) 박가바를 찾아감. 그곳에서 는 많은 사람들이 고행(苦行)을 하고 있었는데 내세의 안락을 위해 고행을 한다는 말에 실망하여 곧 물러나옴.
⊙이어서 태자는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라카 라마풋다를 차례로 찾아가 무념무상처정 (無 念無想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 (非想非非想處定)을 배웠으며 ,
그들이 가르치는 최고의 경지에까지 다다랐으나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물러 나옴.
⊙마침내 자신을 가르칠 스승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태자는 스스로 진리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고 설산(雪山)에 들어가 고행을 시작함.
⊙온갖 고행을 해나가는 동안 태자는 몸이 야윌대로 야위고 기력이 빠질대로
다빠져 마침 내 아사(餓死)직전에 이름. 결국 극단적인 고행은 자신의 몸만을 괴롭힐 뿐 수행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태자는 고행를 포기함.
이어서 수자타 소녀의 우유죽 공양을 받고 기력을 회복한 태자는 네란자라강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우루벨라 의 부다가야에 있는 한 핍팔라나무
(이 나무는 후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기념하여 보리수 라고 불린다). 아래 자리를 마련하여 앉은 뒤 깊은 명상에 잠김.
⊙이때 웃다라카 라마풋다 아래서 수행을 하다 싯다르타 태자를 따라나선 아약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태자가 고행을 포기한 타락자라고 비난하며 그의 곁을 떠남.
⑥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태자가 깨달음을 이룰 것을 두려워 한 마왕 파순(波旬)이 갖가지 방법으로
명상 중에 있는 태자를 방해함..
⊙그러나 이러한 마왕의 방해를 물리친 태자는 동쪽 하늘에 샛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는 순간 크나큰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됨. 이때 태자의 나이 35세.
여기에서 마왕파순 의 방해란 결국 성욕(性慾), 수면욕등 인간 내면의 여러 가지 욕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태자는 이러한 욕망을 이겨내고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이때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법 (緣起法).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 (生)하면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 (無明)에 의해 행(行)이 있다. 행에 의해 식(識)이 있다. (이하 명색 (名色), 육입(六入), 촉 (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으로 계속된다.) 생에 의해 노(老), 사 (死), 우(憂), 비(悲), 고(苦), 뇌(惱)가있다.
괴로움의 모임은 이렇게 헤아려진다.'
그리고 나서 세존은 게(偈)를 읊으셨다.
"진실로 열의를 기울여 사유하는 성자(聖者)에게는 저 모든 법 (法)이 밝혀져
의혹이 사라진다. 연기의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一「소부경전 자설경」
⊙이후 부처가 된 싯달타 태자는 6박 7일간 보리수 아래 앉아 자신의 깨날음을 관조하며 법열(法悅)을 즐김 (自受用法樂).
⑦ 녹원전법상(鹿苑轉伎相)
⊙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가 된 석가모니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너무 어려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혼자만 간직한 채 자족할까 망설임.
⊙ 이때 범천 (梵天)이 내려와 세상에는 때가 덜 묻은 이도 있으므로 가르침을 들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리를 설해 줄 것을 권청함.
⊙ 그러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시 한 번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
"연못에는 여러 종류의 연꽃이 있어 아직 물 속에 잠겨 있는 것도 있고 간신히 수면에 고개를 내놓고 있는 것도 있다. 또 어떤 것은 수면으로부터 훨씬 올라와 꽃을 피워 진흙 탕 속에 살면서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것도 있다."
-『중일아함 권청경』
⊙ 이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누구에게 제일 먼저 진리를 전할 것인가를 고심하였는데 과거의 스승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라카 라마풋다를 먼저 떠올렸지만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여서 녹야원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는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찾아나섬.
⊙ 부처님을 먼 발치에서 본 다섯 비구는 처음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타락한 수행자라 고 외면하려 함.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의 상호(相好)를 증거로 들어 그들을 설 득하고 설법을 시작함. "비구들이여, 출가한자가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있다.
그 하나 는 쾌락에 치우치는 입장이다. 여러 가지 욕망에만 집착하는 것은 천하고 저속한 것이다. 범부의 소행이며 성자의 것은 못되며 또한 무익하다.
다른 하나는 금욕에 치우치는 입장이다.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단지 괴로울 뿐이며 무익하다. 성자의 길이 못된다.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서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이것이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일으켜 깨달음과 해탈을 얻게 하는 길이다."
一「사분율」
⊙이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4성제 (四聖諦)와 8정도(八正道)를 차례로 설함.
⊙ 며칠간 계속된 설법을 통해 드디어 교진여를 위시하여 다섯 비구가 차례로 깨달음을 얻음.
⊙ 녹야원에서의 계속된 설법을 통해 약 60명의 제자를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침내 제자들을 각 지역으로 보내 자신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로 결심.
"비구들이여, 나는 인천(人天) 세계의 온갖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또한 그대들도 마찬 가지로 인천 세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와졌다. 비구들이여, 자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세간(世間)을 가엾게 여기고 인천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 을 위하여. 한 길을 둘이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가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되 조리 있는 표현으로 진리를 설하라. 또한 참으로 원만하고 청정한 범행 (梵行)을 보여라.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자도 많은데, 그들은 진리를 들을 수 없으면 타락해 버릴 것이다. 들으면 진리를 깨닫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가겠다."
一 「잡아함 승색경」
⊙ 이후 가는 곳마다 무수한 가르침을 베푸심 .
⊙ 옷과 패물을 훔쳐간 유녀(遊女)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가르침 .
⊙ 왕사성의 상두산(象頭山) 정상에서 세간의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고 가르침.
⊙ 마가다국왕이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
⊙ 수닷타(급고독) 장자와 제바 왕자가 기원정사를 기증함.
⊙ 카필라를 침공하는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에게 친족의 그늘은 시원하다고 가르침 .
⊙ 데바닷다(제바달다)가 부처님을 시해하려 하나 번번이 뜻을 못 이룸.
⊙ 석가모니 부처님의 10대 제자. ①사리불, ②목건련, ③마하가섭, ④수보리,
⑤아나 율, ⑥부루나, ⑦우바리, ⑧마하 가전연, ⑨아난, ⑩라훌라.
⑧ 쌍림 열 반상
⊙ 평생을 진리 전파를 위해 바치고 어느덧 80세에 이른 석가모니 부처님은 라자가하(王 舍城)에서 마지막 유행(遊行)의 길에 나섬 . 도중에 베살리에서 병이 들어 몹시 앓고 난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난이 부처님의 사후를 걱정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아난아, 교단이 내게 아직도 무엇을 기대한단 말이냐? 나는 지금까지 않팎 가리지 않고 법을 설하여 왔다. 법을 가르치는 데에 힘을 아껴본 일이 없다.
만약 내가 교단을 통솔한다든가 교단이 내게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교단에 대해 지시를 내렸을 것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난아, 나는 이제 노쇠해졌다.
벌써 여든 살이다. 비유하자면, 낡아빠진 수레가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내 몸도 겨우겨우 움직이고 있다. 내가 모든 형체 있는 것을 생각함이 없이, 어떤 종류의 감각도 멈추고 형체가 없는 정신통일의 명상에 들어갈 때에 내 몸은 비로소 평안할 것이다. 아난아,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할 곳으로 삼아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할 곳으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 해서는 안 된다." ―「잡아함 유행경」
⊙베살리를 지나서 계속 북쪽으로 유행의 길을 가시던 석가모니부처님은 파바(波婆)라는 곳에서 대장장이 아들 춘다의 공양을 받고 다시 병을 얻음.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 은 아픈 몸을 이끌고 길을 계속해 쿠시나가라에 이르러 두 그루 나무(雙樹) 아래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고 그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누워 열반(涅槃)을 맞이하심 .
⊙열반에 앞서 남기신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법등명 자등명 (法燈明 自燈明) 법귀 의 자귀의 (法歸依自歸依)와 불방일정진(不放逸精進)'이었다 .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여러 나라 사람들에 의해 부처님의 유신 (遺身)은 다비(茶毘)에 붙여지고 남은 사리(舍利)는 여덟 나라에 똑같이 분배되어 각각 사리탑을 조성하고 공양함.
<불국사 홈페이지 참조>
역사상의 불타
45년간 전법행선지 인도지리와 일치 -
서구 철학자 지고한 정신세계에 감동 -
붓다의 전기를 연구할 때 부딪히는 문제는 붓다의 생애에 대한 자료도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전해 내려온 게 아니라 문학이나 전설의 형태로 알려져 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어느 개인이 자의적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원래 사실이 다소 과장되게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인도작가들의 과장법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들이 없는 것을 조작해 낸 것 같지는 않다. 불전(佛傳)에 등장하는 정황묘사를 통해 우리는 당시의 실제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싯다르타 태자가 왕궁을 버리고 출가한 것이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은 정확한 사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어떠한 상징적 복선을 깔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스승을 찾아가 배웠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단순히 찬양하기만을 위한다면 스승을 찾았다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했다고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테니 말이다.
붓다의 발병(發病)과 죽음에 관한 대목도 거의 사실적인 묘사에 가깝다. 붓다의 병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알려져 있는 음식도 누군가가 꾸며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실적인 기록인 것으로 보여 진다.
출가하기 전 태자로서의 싯다르타의 화려한 생활에 대한 묘사는, 출가 후 겪게 되는 고통스런 수행과 극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다소 과장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불교학자 올덴버거(Oldenberg)는 ‘숫도다나’란 이름이 ‘순수한 쌀’ 혹은 ‘순수한 음식을 가진 자’의 뜻을 가진 정반왕(淨飯王)으로 번역되는 것을 보고 그가 왕이라기 보다는 넓은 쌀 경작지를 소유한 부유한 대지주였다고 생각했다.
정각을 이루기 전 붓다의 수행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45년간의 전법여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기적에 대한 몇몇 과장된 묘사만 제외한다면 대부분 사실인 것 같다. 특히 기록된 전법 행선지와 오늘의 실제 지리(성지)는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 잠깐 붓다가 살았던 기원전 6세기는 인류사에 성인들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공자(孔子), 노자(老子), 피타고라스 그리고 헤라클리토스 등이 붓다와 동시대인들이다.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붓다의 일생과 예수의 일생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예수의 전도생활은 격정적이고도 극적인 사건으로 채워진 반면 붓다의 전도생활은 인류의 스승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신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여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는 교리는 태자가 출가하여 성도(成道)한 뒤 깨달음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보다 훨씬 강열하다. 그러나 관과할 수 없는 사실은 불교는 개인의 유일한 인격이라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같이 드라마틱한 인물상은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자체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 두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그중 세번째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붓다는 ‘너희는 자기 자신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라고 가르쳤다. 타력 신앙과 자력 신앙의 대조가 뚜렷하다.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말하기를 개인으로서 고타마의 존재는 불자의 신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덧붙이기를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붓다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이땅에 나타나는 원형(原型)이기 때문에 붓다의 개성적인 모습은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일회적(一回的)이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붓다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적인 주기 때마다 반복되며 고타마는 과거에서 미래로 끝없이 연결되는 거대한 흐름의 한 사슬의 역할을 다하였다.
출가수행의 전통은 고타마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도인에게 적용되며 오늘날에도 장년기를 넘어선 많은 인도인들은 가족과 재산을 뒤로하고 수행사문의 길을 걷는다.
에드워드 콘즈는 말한다. “서구의 역사학자의 눈에는 붓다의 인간적인 모습만 사실이고 신비로운 정신세계는 모두 픽션으로 보이겠지만 불자의 입장에서는 붓다의 지고한 정신세계가 일차적으로 가장 소중한 것이지 붓다의 개인사(個人史)는 찬란한 정신적 보석을 감싸는 누더기처럼 부차적인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의 불교사(佛敎史) 학자들이 부딪히는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처럼 인도인들도 역사를 경시한다. 연대기(年代記)적인 의식이 희박한 것이다. 11세기 초반의 아랍학자였던 알베루니(Alberuni)는 인도에서 13년을 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사람들은 역사적인 사건의 순서나 왕위 계승의 계보(系譜)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질문을 할라치면 어떤 대답을 만들어 답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사실 인도인들에겐 어느 역사적인 날짜나 장소 혹은 개인의 이름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사상이나 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붓다의 탄생지로 알려진 카필라바스투(城)는 샨캬교 창시자 카필라가 불교에 미친 커다란 영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인도철학자들은 종종 여러시대의 철학학파들을 동시대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도철학사가 확립된 것은 막스 밀러(Max miiller)나 도이센(Deussen) 같은 유럽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출처:부다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