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을 비추는 그 빛들이 되자!(마5:14-16)
2024,1,7 신년주일감사예배,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오늘은 2024년 신년감사주일이다. 주님의 한없는 은총이 넘치는 강물처럼 부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원한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 1위는 “부가티 시론 수퍼 스포츠 300+”이라는 차이다. 이 차는 최고 490.5km의 속도를 낼 수 있고, 가격은 한화로 약 60억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자동차라 할지라도, 그 차의 운전 방향이 낭떠러지를 향하고 있다면, 그 속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듯이 우리의 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속도를 중시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속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방향설정과 다 함께 가는 것이다. 비록 속도가 느린 것 같아도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다 같이 손을 잡고 걸어가면, 언젠가는 목표지점에 도달한다. 각자 달리면 1등한 한 사람뿐이지만, 다 같이 손잡고 가면 다같이 1등이다. 그리고 그 올바른 방향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는다. 이것이 우리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이며, 다 함께 그 길을 향해 가는 우리의 자세이다.
금년도 우리교회의 표어는 “참 빛을 비추는 그 빛들이 되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참 빛”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고, “그 빛”이란 성도들을 뜻한다. 이것의 근거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1장 1-12절 말씀과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14-16절 말씀이다. 다 같이 믿음으로 함께 읽자.
“참 빛(the true light)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너희는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4)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빛(a light)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 빛(the true light)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 빛(the light)’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 세상의 가치관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하나의 빛(a light)이 되기를 힘쓰라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젊은 나이에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스타(별)가 되려고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단지 참 빛을 드러내고 반사는 반사체(그 빛)일 뿐이다. 우리(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나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에서 부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시작된다. 그러나 스타는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하다. 오히려 성경은 스타보다, 섬기는 자가 될 것을 강조한다(막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 속에서 “참 빛”을 비추는 “그 빛”들이 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은 오늘 본문 16절 말씀 속에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다 함께 읽어 보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우리들이 빛을 비추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성도들의 착한 행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세상 속에서(가정, 이웃, 직장, 지역, 삶의 현장 등) 착한 행실을 보여주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신(우리들이 보여주고, 빛을 비춰야할) 착한 행실이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구제나 봉사활동 등을 비롯한 일반적인 개념의 선행(善行)일까? 당연히 그런 것들이 포함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비춰야 하고, 보여줘야 할 착한 행실이란, 단순히 세상적인 선행 개념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는 산상수훈 중에 팔복의 말씀이 있다. 다시 말하면 성도와 교회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강조하신 팔복을 비롯한 수많은 착한 행실들을 실천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자 우리의 책임이다.
팔복에 나타난 성도들 비춰야할 빛들 즉 착한 행실들을 이 시간에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시간에 특히 강조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화평의 빛이다(마5:9). 이 말씀처럼 성도들은 어디에서나 내가 그곳에서 화평(평화)의 빛(행실)을 비춰야 한다.
“화평하게 하는 자(the peacemakers)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교회와 성도들은(우리들 자신을 포함해서) “그 빛”을 비추고 화평하게 하는 사명과 사회적인 책임을 충분하게 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성도들까지 사회의 분열에 동조하고 심지어 앞장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까지 종종 있다. 이틈을 이단들이 독버섯처럼 파고든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엄청난 혼란과 분열의 늪 속에 빠져있다. 분열의 영이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에서 야당 대표에 피습사건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의 발언들을 비교한 것을 읽어 보았다(동아일보, 2024,1,4). 이것은 단적인 실례에 불과하고, 각종 현안마다 모든 일들 마다 사사건건 반대와 증오 그리고 저질스러운 막말로 점철되어 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 사회가 이렇게 된 것에 어찌 교회와 성도들의 책임이 전혀 없다 하겠는가?
성도들은 극단적인 표현들로 사회 분열을 부추기는 일부정치인들이나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면 안 된다. 또한 증오와 분열을 유발하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오히려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참 빛(예수님)을 비추는 그 빛들(성도들)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하게 하는 빛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국행 구원의 생명선에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우는 일이다. 지난 주중에 1월 4일이 지나갔다. 우리 역사에서 1월 4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한국전쟁 당시의 1.4후퇴이다. 1.4후퇴란 중공군에게 서울을 다시 뺏기고 후퇴한 날을 말한다. 그런데 1.4 후퇴 며칠 전인 12월 23일에 북한의 흥남항에서는 그 유명한 흥남 철수 작전이 있었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에 이때의 장면이 생생하게 나온다.
그런데 이 때 마지막까지 피난민들을 태웠던 메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 7600t)의 선장과 선원들의 모습은 이 시대 교회가 생명을 비추고 살리는 생명선 역할을 해야 한다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흥남 철수작년은 함경도 개마고원 부근 장전호에서 고립된 유엔군 10만 5천명을 철수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흥남부두에는 이들 외에도 10만 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있었다.
그 당시에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군수화물을 싣고 철수하기 위해서 흥남항에 들어왔다. 이 배가 흥남철수의 마지막 선박이었다. 그때 “레너드 라루(Leonard P. LaRue)”선장은 군수화물 대신에 부둣가에서 울부짖는 수많은 피난민을 태우기로 결정했다. 이 배는 화물의 무게에 비춰볼 때, 태울 수 있는 최대 인원은 2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무려 14000명의 피난민을 빼곡히 태웠다. 엄청난 정원초과였다. 태우는데 만 무려 13시간30분이 걸렸다. 사람들은 눈보라 치는 흥남부두에서 영하 30도의 혹한에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밧줄을 잡고 올라갔다. 당시에 증언에 의하면 배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부두에 주저앉아서 통곡하며 발을 굴렀다고 한다. 이 배는 3일간 800km를 항해해서 12월 25일 성탄절에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교회와 성도들이 참 빛을 비추는 그 빛들이 되자는 것은 단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착한 일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교회는 메리디스 빅토리호처럼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태우는 기적의 생명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속히 이 구원선에 배에 올라타고, 이미 올라탄 사람은 다시 내리지 말자. 우리들이 이 사회, 우리 지역에서 그 언행과 행실에 있어서 참 빛(예수님)을 비추는 “그 빛(the light)”들로서의 책임을 다하자. 이것이 참 빛을 비추는 그 빛들이 되는 것이고,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며 동시에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또한 우리교회의 방향성이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